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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

20년쯤 전에 대한극장에서 ‘남부군’을 본 적이 있었다.

단관상영관이던 시절 꽤 큰 대한극장이 가득 찼고, 영화가 끝나자 사람들이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지금까지 무수한 영화를 봤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그렇게 사람들이 박수를 친 경우는 ‘남부군’이 유일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 또 대한극장에서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봤다.

조금 어둡고 무거운 영화여서 별로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뭔가를 빨아들이는 영화의 힘은 아직도 느껴진다. 20년 가까이 지난 영화의 줄거리와 장면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몇 년 전에 대학교수가 판사를 향해 석궁을 쏴서 난리가 난 사건이 tv에 보도됐을 때는 “또라이 하나가 난리를 쳤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열기가 사그라지고 나서 어느 인터넷언론에서 석궁사건의 진실에 대한 기사를 읽고 나서 “이 아저씨 정말 꼴통이네...”라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재작년에 구속된 양심수들에게 책을 보내기 위해서 양심수 현황을 봤더니 석궁사건의 김명호라는 사람이 만기를 앞둔 채 수감돼 있었다. 그 분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책을 보내드리면서 “고생 많으셨습니다”라고 혼자서 중얼거려봤다.

 

몇 년 전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던 중에 아는 사람의 소개로 박훈 변호사를 만난 적이 있었다.

깔끔한 양복 차림의 변호사와 횟집에 가서 술을 한 잔 하면서 그의 얘기를 들었다.

나도 성질이 더러운 편이고 다혈질인 사람들을 많이 만나봐서 웬만한 사람들은 적응이 되는데, 박훈의 다혈질은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마초 스타일의 인간이었다.

그런데도 “이 사람 괜찮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사십을 넘긴 변호사로 살아온 그의 얘기는 숨소리 하나까지 진짜였기 때문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정말 드물 뿐 아니라, 서로 배짱만 맞으면 끝까지 신뢰할 수 있는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정지영 감독이 석궁사건의 김명호 교수와 박훈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소식만으로도 관심이 가는 영화였다.

“이런 영화가 제주도에서 개봉할까?”라면서 반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씨네 아일랜드’라는 영화단체를 통해 시사회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야호!” 환호성을 치면서 신청을 했고, 오래간만에 영화관을 찾았다.

그리 크지 않은 상영관이기는 했지만, 주최 측에서도 놀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계단에 앉아서 보는 사람도 있었고,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판사를 향해 석궁을 쏘는 장면부터 시작한 영화는 이런저런 군더더기 없이 초스피드로 재판과정을 향해 달려갔고, 초점을 2심 재판에 맞춰서 물고 늘어졌다.

영상미를 비롯한 예술적 완성도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작위적인 설정이 없지는 않았지만 상업적 고려를 별로 하지도 않았다. 왜곡된 석궁사건과 말도 안 되는 억지로 일관한 재판과정만을 얘기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법정을 무대로 한 영화를 많이 봤었지만, ‘부러진 화살’처럼 법정에서의 촬영 비율이 높은 영화는 보지 못했다. 법정을 둘러싼 권력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법정 그 자체의 권력관계를 까발리고 있는 것이었다. 진실이 가려지고 정의가 심판받는 법정이 아니라 법이 개무시되면서 판사의 오만과 독단만이 힘을 발휘하는 법정의 현실을 알몸 그대로 보여줬다.

보수주의자인 김명호 교수는 “법이 법대로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진보주의자인 박훈 변호사는 “사람들이 한참 피 흘리고 싸운 뒤에 그 결과로 정리되는 법은 쓰레기다”라면서 티격태격 하면서 현실의 권력에 도전한다. 하지만 현실의 권력인 판사는 근엄한 표정으로 그의 힘을 발휘하다가 살며시 웃음을 보이면서 “이게 법치국가야!”라고 얘기하듯이 판결을 내린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영화가 무거울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웬걸! 웃고 박수치면서 정말 재미있게 영화를 봤다.

억지스러운 상황이나 가벼운 말장난으로 웃음을 만들려고 하는 코미디 영화들과 달리 상황 자체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역시, 현실이 최고의 코미디라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하지만 유쾌하게 얘기를 풀어가면서도 현실을 가볍게 다루지는 않았다. ‘숨 막히는 현실일수록 인간의 강인한 의지와 서로간의 신뢰로 현실에 맞설 수 있다’는 다소 고전적인 저항영화의 메시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유쾌함과 비장함을 잘 버무려서 멋있게 만들어낼 수 있는 감독의 내공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영화였다.

 

정지영 감독이 ‘도가니’를 의식하면서 ‘부러진 화살’을 만들지는 않았겠지만, 두 영화가 비교될 수밖에 없는 점이 많았다.

끔찍한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처벌하기 위해 정의의 심판을 바라며 법에 호소해보지만, 법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악의 현실만을 확인해줄 뿐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두 영화 모두 바로 몇 년 전에서 일어난 실화에 충실한 영화라는 점이다.

‘도가니’는 끔찍하고 비열한 짓거리가 당당하게 벌어지는 사건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춰서 다뤘다면, ‘부러진 화살’은 말도 안 되는 권력의 횡포에 당당하게 맞서는 주인공의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도가니’에서는 주인공인 공유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부러진 화살’에서는 주인공인 안성기가 크게 부각된다.

현실의 악마성을 보여주려고 했던 ‘도가니’에서는 주연보다 조연인 학교 선생들이 더 강하게 돋보였지만, 저항의 진정성을 보여주려고 했던 ‘부러진 화살’에서는 선한 주연과 대비되는 악한 판사들이 조롱거리로만 보여졌다.

영화보다 더 끔찍한 현실 앞에서 ‘도가니’는 매우 조심스럽고 낮은 자세로 현실의 얘기를 전하려 했다면, 현실 그 자체를 고발하면서 인간의 의지를 보여주려고 했던 ‘부러진 화살’에서 리얼하게 재연되는 영화 속 현실은 유쾌하게 각색돼 있었다.

‘도가니’를 보고 나서는 빌어먹을 세상에 대한 분노를 느꼈지만, ‘부러진 화살’을 보고 나서는 김명호 교수와 박훈 변호사에 대한 애정을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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