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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이라는 영화가 스웨덴과 미국에서 만들어져서 동시에 개봉한다고 해서 호기심이 가기는 했다. 그렇다고 보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고...
그런데 도서관에 갔더니 밀레니엄 3부작이 있네. 호기심에 영화로 나온 1부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빌렸다. 4백 쪽이 넘는 꽤 두꺼운 책을 두 권이나 읽어야 하는 부담스러운 분량이었지만, ‘읽다가 재미없으면 덮어버리지...’하는 생각에 편하게 책을 읽기 시작했다.
와~ 그 두꺼운 책 두 권을 사흘 만에 읽어버렸다.
읽는 사람이 쉽게 빠져들 수 있도록 써나가는 글쓰기 능력은 정말 대단했다. 잘난 척 막 멋을 부리지도 않으면서도 적당히 멋을 부리고, 지적유희로 치닫지도 않으면서도 지적이고, 가볍게 상황을 그리면서도 진지하고, 너무 무겁다 싶으면 가볍게 빠져나와 버리고...
스릴러라는 장르는 단서를 찾아가면서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나가는 재미에 있다. 하지만 퍼즐 맞추기가 너무 쉬우면 애들 장난 같아서 심심하고, 너무 복잡하면 읽다가 포기해버린다. 또 하나씩 퍼즐을 맞춰나가는 재미에 빠져들다가 막판에 남은 1~2개를 어거지로 짜 맞추면서 끝나는 허무한 소설도 많았다. 그런데 ‘밀레니엄’은 복잡한 문제를 아주 쉽게 얘기해 나가는 능력에 환호성이 저절로 나오고, 전혀 억지스럽지 않은 결론에 박수를 보내고, 끝났다 싶은데도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에 혼이 빠져버렸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무질서하게 범죄가 저질러지는 세상에서 단서를 하나씩 맞춰가면서 범인을 찾아내고 질서를 회복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코난 도일의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불편한 백인우월주의나 계급적 편견들을 보라! 아니며 반대로 사회나 역사에 대한 것들을 빼버리고 완전히 지적게임으로만 가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밀레니엄’은 그런 경향들과 완전히 반대에 서있다. 스웨덴이라는 사회와 역사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것도 복지국가와 이국적인 겨울나라의 이미지를 과감히 버리고, 파시즘과 거대 재벌과 가부장적 폭력이라는 문제를 과감하게 꺼내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맞서 싸운다.
작가로서의 글쓰기 능력과 기자 출신으로서의 전문적 역량과 양심적 지식인으로서의 철학까지 골고루 갖추 ‘밀레니엄’은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스릴러 소설 중에 최고였다.
원작이 너무 좋으면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별로 보고 싶지 않다. 원작의 감동을 갉아 먹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 ‘밀레니엄’을 읽고 나서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소설 자체가 아주 영화적인 내용인데다가 영화적 요소들이 의식적으로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을 때 어떤 느낌일까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솔직히 스웨덴판을 보고 싶었다. 스웨덴이라는 나라의 독특한 분위기를 영상으로 느끼고 싶었던 점도 있었고, 몇 년 전 봤던 ‘렛미인’처럼 철학도 없이 폼만 잡는 할리우드판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스웨덴판을 보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고, 할리우드판이라도 흥행이 별로 안 되는 이 영화를 볼 수 있으면 다행이다. 다행히 영화가 막을 내리기 전날 할리우드판 ‘밀레니엄’을 볼 수 있었다.
시작하자마자 혼을 빼놓은 오프닝은 정말 좋았다. 007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오프닝 형식과 비슷했는데, 마치 ‘블랙스완’의 첫 장면처럼 강렬했다. 그리고 영화는 소설에 충실하면서도 속도감 있게 진행됐다. 마치 소설을 스틸사진처럼 보는 것 같았다.
신선한 출발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의감에 불타는 기자정신으로 충만했던 ‘미카엘’은 근육질의 007이 무게 잡고 나오면서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더니, 특이한 외모 속에 상처받은 영혼의 소유자인 ‘리스베트’는 영혼 없는 특이함만을 내뿜었다. 분명히 소설 속에서 나온 캐릭터들인데 영화 속에 들어와서는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복잡한 얘기 구조도 과감하게 생략해 버리고, 파시즘이나 재벌이나 가부장적 폭력이니 하는 것도 무거움을 벋어버리고, 얘기의 연과성이나 인물들의 심리변화 같은 신경 쓰이는 것들도 훌훌 털어버리고, 관객들을 향해서 “따라 올 테면 따라 와봐!”라는 식으로 스피디하게만 달려갔다. 물론 폼 잡는 건 잊지 않고!
원작은 읽지 않은 사람은 스틸사진처럼만 이어지는 얘기를 따라가기가 정말 어려웠다. 스릴러를 표방하면서도 지적 게임을 포기한 스릴러는 더 이상 스릴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007이나 본시리즈처럼 추격과 액션이 막 벌어지는 액션영화로 장르를 바꾼 것도 아니었다. 아니면 좀 지루하더라도 사회적 문제를 다루면서 씨름하는 리얼리즘 영화는 더더욱 아니었다. 영화 ‘300’처럼 캐릭터와 스타일로만 승부했다기에는 캐릭터들이 너무 허무하다. 두 시간 반 정도 되는 꽤 긴 영화였지만 아주 심하게 지루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장점이라면 장점이랄까.
역시 뛰어난 원작을 영화로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감독이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런 고민의 결과로서 이런 작품이 나온 것이라면 조금 이해는 된다. 거의 모든 요소가 아주 뛰어나게 어우러져 있는 소설을, 감독의 이름을 걸고 새롭게 포장하다보니,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 싶었겠지...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철학의 빈곤이었다.
그들이 파해치려고 했던 사건의 핵심인 사회와 역사의 문제를 애써 버려버린다면, 주인공들의 상처받은 영혼은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모호하게 행동하게 되고, 현실감을 잃어버린 캐릭터들은 공중에서 붕붕 떠다니기만 할 뿐 스타일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차라리 “간디 작살”이라고 주장하는 안명미가 훨씬 재미있다.
이런 식으로 작가주의적 냄새만을 풍기다가 원작을 망친 경우는 많다. 박광수가 ‘이재수의 난’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그랬고, 임상수가 ‘오래된 정원’에서 그랬고, 헐리우드판 ‘렛미인’도 그랬다.
원작을 각색한 것은 아니지만 마틴 스콜세지의 ‘셔터 아일랜드’는 ‘밀레니엄’과 정반대에 서 있는 영화다. 어떤 섬에서 발생한 실종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그 섬으로 간 이들이 사건을 파해쳐가면서 그를 둘러싼 거대한 사회 역사적 진실과 싸우게 된다는 방식이 비슷한 영화였다. ‘밀레니엄’보다 더 작위적인 조건을 만들어놓고 영화를 풀어간 ‘셔터 아일랜드’는 갇힌 섬 속에서 매카시즘과 당당하게 맞서 싸웠다. 물론 음향효과를 비롯한 예술적 완성도도 훨씬 돋보였고, 스릴러적 요소도 ‘밀레니엄’보다 더 강했다. 결국 철학의 문제였다.
‘밀레니엄’을 보고 나서 두 가지 결심을 했다.
첫째, 앞으로는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 같은 걸 하면 웬만하면 보지 말자.
둘째, 영화도 시작하기 전에 광고로 진을 빼놓은 CGV나 롯데시네마는 웬만해서는 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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