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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 연휴가 지났습니다.
무척 추운 연휴였습니다.
어떻게들 지내셨을까요?
지금 추위가 마지막 추위는 아니겠지만
추위 뒤에 비치는 햇살이 한결 따뜻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겨울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가 봅니다.
오늘은 따뜻한 노래로 방송을 시작합니다.
조경수가 부릅니다. ‘행복이란’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잖아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이 생명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리
이 목숨 다 바쳐서 영원히 사랑하리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사랑이 중한 것도 이제는 알았어요
당신 없는 사랑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이 생명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리
이 목숨 다 바쳐서 영원히 사랑하리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사랑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2
작년 설을 앞두고 제가 아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아픈 데도 병원 한 번 가보지 못하고 40대의 가장이 그냥 가 버린 것입니다.
해고자 생활 10년이 그렇게 끝났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났습니다.
멀리 있다는 이유를 변명 삼아 무덤에 한 번 가보지 못했습니다.
한 번 쯤 그를 생각해야 될 것 같은데...
편지라도 쓰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예전에 썼던 편지를 다시 읽어봅니다.
올 겨울은 어느 해보다 참 따뜻하게 시작하더니 중반을 넘어서면서 매서운 추위가 몰아쳤습니다. 그러나 입춘이 지나고 갑자기 봄을 기약하는 날씨로 변하더니 오늘은 비가 내립니다.
비 오는 교도소는 좀 처량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운동을 할 수 없어서 30분의 달콤한 시간을 빼앗아 버리고, 추적거리는 날씨가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어버려서 더 처량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살포시 듭니다.
유난히 겨울이 길게 느껴지고 봄이 멀어 보이는 그곳에서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으세요?”라는 질문이 사치스럽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잠시나마 마음의 사치를 즐기시라고 질문을 드립니다.
박현정 동지, 마음에 봄의 기운이 전해지십니까?
제 마음에 사치스럽게 다가온 봄의 기운을 전해드립니다.
집 컴퓨터에 ‘김해교도소 500번 박현정’이라는 메모지를 한 달이 넘게 붙여놓고 있습니다. 매일 그 메모를 보면서 “편지를 써야지”하면서도 지금까지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쁜 것도 있었지만, 쉽게 쓰기가 힘들었습니다. 2001년 7.5총파업을 철회했던 현대자동차 집행부 현장조직의 간사였던 제 마음 속에는 효성 동지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 너무 크게 있어서 아직도 효성 동지들 앞에서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리고 너무 경악스럽게 구속된 박현정 동지와 효성 동지들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마음이 더 아픕니다.
제가 갖고 있는 이 마음의 빚과 안타까움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저에게는 그게 흔들리지 않고 활동을 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출소하고 나서 병 요양으로 쉬고 난 후 1년 반 만에 복귀한 울산에서 처음 참여한 집회가 효성 동지들의 순회투쟁이었습니다. 언양공장과 울산공장으로 이어진 짧은 투쟁에 결합하면서 정말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복직과 노조민주화에 대한 희망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가운데 3년을 넘게 해고자 생활을 하면서도 굳건히 싸우고 있는 동지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효성 동지들을 보면서 “투쟁은 아무리 힘들어도 웃으면서 당당히 버티어 서 있는 것”이라는 점을 새삼스럽게 확인했습니다.
아마 제가 노동운동을 하는 한 평생 가슴에 갖고 있어야 할 마음의 빚과 효성 동지들을 보면서 느꼈던 투쟁의 힘을 다시 꺼내서 보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오늘도 투쟁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효성 동지들만큼 간절하지는 않겠지만, 박현정 동지가 출소할 때까지 제 컴퓨터 앞에 붙여놓은 메모지를 떼지 않을 것입니다. 솔직히 제 마음 속에 항상 자리 잡고 있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그 메모지를 보는 순간만큼은 박현정 동지를 생각하면서 간절히 소원을 빌겠습니다.
박현정 동지!
아프지 마세요.
2005년 2월 15일
부산에서 성민
박현정, 들려요?
그곳에서도 편할 리야 없겠지만, 가끔 내 생각도 해줘요.
그래야 박현정 잊어 먹지 않지.
미안한데, 길게 말하지 못하겠네...
노래 하나 들려줄게요.
잘 지내요.
언젠가 당신이 말했었지 혼자 남았다고 느껴질 땐
추억을 생각하라 그랬지 누구나 외로운 거라 하면서
그리고 이런 말도 했었지 지난날이 자꾸 떠오르면
애쓰며 잊으려 하지 말랬지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면서
단 한 번 스쳐간 얼굴이지만 내 마음 흔들리는 갈대처럼
순간을 영원으로 생각했다면 이렇게 간직하진 못했겠지
정녕 난 잊지않으리 순간에서 영원까지
언제나 간직하리라 아름다운 그대모습
단 한 번 스쳐간 얼굴이지만 내 마음 흔들리는 갈대처럼
순간을 영원으로 생각했다면 이렇게 간직하진 못했겠지
정녕 난 잊지않으리 순간에서 영원까지
언제나 간직하리라 아름다운 그대모습
당신은 내게 들려주었지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오로지 주려고만 하랬지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면서
3
제주에 있는 한 단체에서 ‘제주지역 개발정책을 둘러싼 갈등과 투쟁의 역사’에 대한 강연을 한다고 해서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제주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어떤 과정들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제가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기 때문에 강연회에는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강사는 50대로 보이는 제주대학교 교수였는데, 오랫동안 재야운동을 해왔는지 20여 년 전 투쟁에서 분신한 열사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열정적으로 그동안 제주에서 진행된 개발정책들이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음모적으로 진행됐는지를 성토하고,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도 계속됐던 문제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아주 시원하고 힘 있는 강연이었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질의응답을 하는데 제가 용기를 내서 질문을 했습니다.
“강의 중에 로컬 거버넌슨가 뭔가 하는 걸로 바꿔나가야 한다고 했는데, 그게 그동안 시민단체들이 해왔던 방식하고 뭐가 다르죠?”라는 내용이었는데, 좀 어눌하고 버벅거리는 말투에 비속어까지 섞어 가면서 질문을 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제가 놀던 물이 워낙 그런 곳이어서 그런 식의 말투가 몸에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 질문을 들은 교수가 답변을 하는데, 마치 대학 1학년 학생에게 기본 개념을 가르치듯이 개념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꼭지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서 설명해달라고 한 게 아니라 ‘로컬 거버넌스’라는 개념의 구체적인 상이 뭐냐는 질문이었는데, 엉뚱한 대답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죠. 그리고 더 화나는 건 비속어까지 써가면서 어눌하게 물어보는 저 같은 사람을 대하는 그 태도였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죠?”라고 추가 질문을 계속 했지요. 하지만 그 교수는 원론적인 답변만 하고 구체적인 상에 대한 대답을 못했습니다.
이어서 다른 사람들의 질문이 이어졌고, 거의 마지막에 어떤 분이 “개발정책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는 대안은 뭐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 분은 아주 세련되고 일목요연하게 질문을 하더라고요. 제가 했던 질문과 크게 다른 질문을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아주 진지하게 대답을 하더라고요. 비슷한 질문을 하더라도 뭔가 있어보이게 질문해야 제대로 대우를 해주지, 그렇지 않으면 함부로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었습니다. 나~참!
진보의 가치는 아래로부터의 가치이고 평등의 가치입니다. 대중들이 가난하고 무식하다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손을 맞잡고 잘못된 현실을 바꿔나가는 것이 진보의 가치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진보는 말을 어눌하게 하고 비속어까지 쓰는 무식한 놈에게는 서슴없이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 현실입니다. 대중과 눈높이를 같이 하면서 대중 속에서 배우려 하지 않는 진보는 아무리 비타협적인 투쟁 속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지식인의 사기일 뿐입니다.
생활 속에서 무수히 경험하는 무시와 외면과 소외에 대해서는 “맷집을 키운다고 생각하자”면서 가슴 속에 꾹꾹 묻어둡니다. 그게 저처럼 허접한 것들이 살아가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모인 사람들마저 그런 태도로 저를 대한다면 그곳에서도 참아야 합니까? 아니면 대놓고 막 싸워야 합니까?
4
대가리를 치면 꼬리로 일어서고
꼬리를 치면 대가리로 일어서고
가운데를 한가운데를 치면
대가리와 꼬리가 한꺼번에 일어서고
뭐 이따위 것이 있어
그래 나는 이따위 것이다
만만해야 죽는 시늉을 하고 살아야
밥술이라도 뜨고 사는 세상에서
나는 그래 이따위 것이다
김남주 시인의 솔연(率然)이라는 시입니다.
제목이 무슨 뜻일까 해서 인터넷에서 찾아봤더니, 중국의 고전에 나오는 어떤 뱀이라고 합니다. 어떤 큰 산에 사는 전설 속의 큰 뱀인데, 시에 나오는 것처럼 용맹스럽게 싸우기 때문에 절대지지 않는 불사의 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중국 고사에 나오는 전설의 뱀보다는 김남주 시인의 시에 나오는 ‘이따위 것’이 더 좋습니다. 저 같은 놈들에게 “기죽지 말고 살아!”라고 얘기해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이면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에게 김남주 시인의 시를 전해드립니다.
5
김현진씨, 안녕하세요.
한 번 만나본 적도 없는데 이렇게 아는 척 하려니까 약간 쑥스럽습니다. 히히히
현진씨가 쓴 ‘뜨겁게 안녕’이라는 책을 읽고 얘기를 하고 싶어서 혼자 주절거려봅니다.
일종의 팬레터이기는 한데, 본인이 이 글을 읽을지는 모르겠군요.
책을 보다가 중간에 기륭전자 농성장 얘기가 나오기에 귀가 쫑긋 해졌는데, 그때 현진씨를 봤던 것 같기도 합니다.
매일 같이 촛불을 들기 위해서 무거운 발걸음을 했던 그곳에서 동조단식단의 한 사람으로 인사를 하는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프레시안인가 어딘가 기고를 하는 프리랜서 작가라는 소개와 함께 짧은 연대의 뜻을 얘기했던 것 같은데... 그때 인상은,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하면, 까도녀(까칠한 도시 여자)라고나 할까요. 약간은 도도하고 약간은 세련된 모습으로 뭔가 연대의 뜻을 얘기했던 것 같은데,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없습니다. 그 숨 막히는 농성장의 분위기와는 약간 어울리는 않는 대도시 인텔리의 분위기라고나 할까요? 솔직히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왠지 제목이 끌렸고, 책 소개가 마음에 들어서, 책을 사고는 단숨에 읽어버렸습니다.
역시 제 선입관처럼 까도녀의 얘기이기는 했는데, 어쩌면 그렇게 제 삶과 비슷했는지...
현진씨가 살았던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 어디쯤인가 하는 동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후암동과 청파동에서 살았던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현진씨가 발버둥 치면서 살았던 왕십리는 1994년 총선에 출마한 노동자후보 선대본에서 동책이 돼서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던 곳입니다. 그 가팔랐던 약수동 산동네는, 대학 시절 가끔 술 먹고 잠을 자기 위해 찾아갔던, 베니어판으로 나뉘어진 누군가의 자취방이 있던 동네였고요. 그 넓은 서울에서도 현진씨나 저처럼 별 볼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는 공간은 거기서 거기였군요.
현진씨의 애정이 듬뿍 담긴 왕십리 얘기를 들으면서 아주 잠시 살았던 길음동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대학에 떨어져서 처음으로 집을 나와 서울 생활을 할 때 잠시 길음동에서 자취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늦은 시간 버스를 타고 점집들이 잔득 늘어선 미아리고개를 넘어 길음동에서 내리면 밤 11시가 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자취방으로 가려면 길음시장을 지나야 하는데, 그 시간까지 장사를 하고 있는 가게들에서는 먹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애써 그쪽을 보지 않고 땅만 보면서 자취방 근처로 와서는 5백 원짜리 컵라면 하나를 삽니다. 재래식 화장실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 한 평도 되지 않는 좁은 방에 들어가 커피보드에 물을 끓여서 컵라면을 먹습니다. 가끔 술 생각이 나면 과감하게 천 원짜리 캡틴큐 한 병을 사다가 먹기도 하고요.
그때가 1988년이었습니다. 아마 현진씨가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을 때겠죠? 그렇게 시작한 제 20대의 삶은 10여 년 후에 현진씨가 살았던 20대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없이 살아야하는 구질구질한 것들의 삶은 이렇게 세월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꼭 같습니다.
술로 청춘을 지탱해야 했던 그 삶도 꼭 같고, 나름대로 순수함과 따뜻함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그 마음도 꼭 같고, 빌어먹을 세상을 향해 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던 객기도 똑 같고, 뭔가를 바꿔보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열정도 똑 같았습니다.
그 후 울산으로 내려가서 혁명을 꿈꾸는 30대를 살았지만, 하수구가 막혀 구정물이 넘친 방을 청소해야 하는 삶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술 때문에 몸은 조금씩 망가져 가고 있었지만, 제 삶에서 술을 멀리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물론, 혼자 사는 가난한 노총각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다정하거나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저는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혁명을 꿈꾸고 있었거든요.
이제 저는 나이 사십을 넘겨 몸과 마음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채 아름다운 섬 제주에 내려와 있습니다. 역시 구질구질한 삶은 계속되고 있지요. 현진씨가 술을 먹고 불렀던 “한다면 한다 죽었다 깨도 약속은 지킨다”라는 노래를 이제 더는 부르지 않습니다. 이곳저곳 상처만 남은 패잔병이 돼서 버려진 가난한 중년의 아저씨일 뿐이지요.
까도녀 현진씨도 촌놈 성민이랑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안쓰러우면서도 왠지 모를 동지애를 느끼게 됩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책의 제목을 왜 ‘뜨겁게 안녕’이라고 했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뜨거웠던 만큼 힘들었던 20대의 삶에 안녕을 얘기하는 마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진씨가 맞이하는 30대의 삶은, 20대의 구질구질함에서는 조금 벋어나고 뜨거움에서는 좀 더 가까운 삶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진심으로 그러길 바랍니다.
삶의 구질구질함이 끈질기게 따라 붙더라도 지켜서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고
너무도 차가운 세상 속에서 가슴 속의 뜨거움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고
정말 힘들어서 일어나기 어려울 때 옆에 누군가의 손이 있기를 바랍니다.
현진씨에게 인생 선배랍시고 뭔가 훈수 두려고 하는 게 아니라 “얘기 들려주어서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 고마움의 표시로 ‘뜨거운 안녕’이라는 노래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원곡도 좋은데, 원곡보다는 ‘나는 가수다’에서 자우림이 불렀던 세련된 버전이 더 마음에 들지 않을까 해서 자우림 버전으로 들려드리겠습니다.
또 다시 말해주오 사랑하고 있다고
별들이 다정히 손을 잡는 밤
기어이 가신다면 보내드리리
아프게 마음 새긴 그 말 한마디
보내고 밤마다 울음이 나도
웃으면서 말하리라 안녕이라고
뜨겁게 뜨겁게 안녕이라고
또 다시 말해주오 사랑하고 있다고
기어이 떠난다면 보내 드리리
아프게 마음 새긴 그 말 한마디
보내고 밤마다 울음이 나도
웃으면서 말하리라 안녕이라고
뜨겁게 뜨겁게 안녕이라고
뜨겁게 뜨겁게
안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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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방송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하는 방송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메일을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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