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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라디오 '내가 우스워 보이냐?' (5회)

읽는 라디오 ‘내가 우스워 보이냐?’ (5회)

 

 

 

1

 

2008년 여름, 구로공단의 한쪽 구석에서 여성노동자가 오랜 단식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단식은 한 달을 넘어 두 달을 향해가고 있었지만

회사는 ‘할 때까지 해봐라’는 식으로 강하게 나오고

뒤에서는 국정원이 ‘저러다 죽어도 괜찮아. 우리가 책임질께’라는 식으로 지원하고 있었는데

촛불집회에 모이는 사람들은 수십 명이 전부였습니다.

한여름의 더위보다 더 숨 막히는 그곳에서

촛불 하나만 들고 그 무거움을 견뎌야 한다는 현실은 잔인했습니다.

가뜩이나 광화문에서의 뜨겁고 즐거운 촛불집회에 맞닿아 있는 촛불집회였기에

그 잔인함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렇게 잔인할 정도로 무거웠던 그곳에서

죽어가는 목숨만큼 가느다랗고 질긴 촛불이 밝혀지고

또 한 번의 촛불집회가 진행됐습니다.

발언에 나서는 모든 이들의 간절함이 충분히 느껴지는 가운데

한 여성가수가 노래를 부르러 나왔습니다.

기타를 들고 의자에 앉아서는

별다른 얘기도 없이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낮고 조용한 기타 소리에

그 보다 더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그 무거움 속을 흐르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눈이 감겼고

노래가 귀에서 마음으로 흘러 들어오더니

눈물이 살며시 흐르고 말았습니다.

 

 

높이 올라가는 길

손가락 새로 스치는 흐~음~

가득 바람 안고서 날아오르는 작은 풍선

 

흙, 맨발로 걸어도 상처 하나 주지 않고

풀, 아무리 지쳐도 평화롭게 쉴 수 있게

들꽃, 피어있는 꽃 오랜 시간을 기다린 들꽃

하늘, 높다란 하늘 한없이 밝은 파란 하늘

 

흙, 맨발로 걸어도 상처 하나 주지 않고

풀, 아무리 지쳐도 평화롭게 쉴 수 있게

들꽃, 피어있는 꽃 오랜 시간을 기다린 들꽃

하늘, 높다란 하늘 한없이 밝은 파란 하늘

 

높이 올라가는 길

손가락 새로 스치는 바람

가득 바람 안고서 날아오르는 파란 하늘

 

 

울고 싶어도 그 무거움 때문에 도저히 울 수 없었던 그곳에서

눈물을 흐르게 해준 그 가수의 이름은 '시와'였습니다.

삶의 한가운데서 깊이 있는 감동과 울림을 주는 노래와 달리

지옥 한가운데서 영혼을 쓰다듬어 주는 노래였습니다.

오늘 방송은 그런 시와의 노래들로 꾸며집니다.첫 노래는 ‘하늘공원’이었습니다.

 

 

2

 

2001년 대우자동차 노동자 1700여 명이 정리해고를 당합니다. 그에 맞서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은 부평 상곡성당에 농성장을 꾸리고 격렬한 정리해고 철회투쟁을 벌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박훈 변호사는 ‘노조 활동을 방해하지 말라’는 법원의 판결문을 들고 대우자동차 노동자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습니다.

 

“경찰들이 다 싸고 있었거든요. 공장 안과 밖에 3만 명 정도의 병력이 부평을 싸고 있었거든요. 노동조합 사무실이 현장 안에 있는데 못 들어가게 했으니까.

3월 8일 노조활동 방해금지 가처분을 냈는데 한 달 동안 아무런 투쟁이 없을 때 그게 받아들여져 버린 거예요. 2월 8일부터 3월 8일까지는 열심히 싸움을 했고, 싸움이 안 되니까 내가 소송을 낸 거예요. ‘이거 갖고 들어가면 되겠다’ 싶은 거죠.

법원의 결정문도 있는데 자본이 그렇게 나올지 몰랐어요. 법원이 그렇게 판결했으니까 당연히 열어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막히는 순간 나는 선택을 해야 했어요. 다시 법원으로 쫓아갈 것이냐, 여기서 한 번 붙을 것이냐... 아무도 결정할 수 없고 내가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사람을 300명 데리고 투쟁하는 현장에서 1시간 동안 고민을 했어요. ‘오늘 여기서 결판내겠다’고 결정했어요. 그건 명확한 불법적인 공권력 집행이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마음대로 했지요.

‘씨발놈들이 법원 결정문이 있는데도 지들이 가로막아!’ ‘죽지 않을 만큼 패라’고 그랬어요. 그때는 우리가 완전히 주도권을 장악했으니까... 방패 뺏어 부셔 버리고, 헬멧 벗겨서 버리고... ‘노동조합의 업무를 방해하는 현행범 체포하라’고 그랬어요. 16명을 체포했는데, 전경뿐만 아니라 경찰서에 근무하는 경찰들도 체포해버렸어요. 사람들이 경찰들 풀어주라고 그러는데 내가 다 거부했어요.

경찰들이 들어올 거라고 예상 못한 것은 아닌데... 그게 나한테 평생의 한으로 남는데...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가 양쪽 도로가에 반으로 나눠서 웃옷 벋고 누우라고 그런 거예요. 그렇게 하면 쉽게 진압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죠. 나는 연와시위를 엄청나게 싫어하는데 처음으로 연와시위 전법을 쓰게 된 거예요.

그렇게 들어올 줄 알았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쳤는데... 97명이 다치고, 4명은 장애2급을 받아요. 상상불허의 일들이 벌어진 거예요. 나도 현장에서 그대로 맞았는데 전경 애들이 나를 방패로 찍어도 별로 세게 찍지 않았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냥 마구 찍어버리더군요. 도망가다가 떨어지고... 씨발....

내가 체포하도록 한 경찰들을 풀어줬으면 되었는데... 그게 내 두 번째 트라우마예요. 그 뒤로는 사람 많은데 가지를 못해요. 공황장애의 일종인데... 북적북적한 사람들 많은데 가지를 못하고, 출구가 없는데 가지를 못해요. 지하철을 못 타요. 아직도 피가 분수처럼 올라오는 꿈을 꿔요.”

 

2003년부터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옮겨 온다는 얘기가 들려오면서 평택주민들이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상상하기 힘든 4년간의 미군기저 반대투쟁이 벌어집니다. 정부와 지역 토호세력들의 이간질 속에 마을 사람들은 서로 원수가 되면서 갈라졌습니다. 온갖 더러운 짓거리가 다 이어지고 나서 대규모의 군인과 경찰들에 의해 대추리 주민들이 마을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투쟁을 견뎌냈던 신종원씨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이 분들이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시지만, 정신적인 피해가 치료를 받아야 되는 사람들이예요. 이분들은 그렇게 살다가 돌아가시기에는 너무 비참한 거예요. 그 안에 있을 때 의사들이 학생들도 의료봉사 같은 거 오고 그랬거든. 지금도 와달라고 많이 얘기를 하는데, 그게 안 되지. 어디가면 했던 단체들 다 아니까 그래도 얘기를 해요. 그분들에 대한 치유는 정부에서 해줄게 아니거든. ‘우리 손으로 마음의 병을 고쳐줘야 하는데,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 이런 얘기를 계속 해요. 안 되는 게 답답할 뿐이지...

지금도 주변에서 ‘저 새끼들 빨갱이 새끼들’ 이렇게 보는 시각이 대단해요. 나는 이 싸움에서 나간다면 이민 갈려고 그랬어요. 그런데 주민들하고 같이 해왔으니까 같이 있는 거지... 누구나 다 똑같을 거예요. 다른 데 가서 모르는 사람들하고 사는 거 보다 그 아픔 같이 했던 사람들이 같이 살자고 해서 사는 거예요. 여기 이주단지보다 더 좋은 데 갈 수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대추리라는 그런 거 때문에 ‘같이 살자’ 그랬어요.”

 

투쟁이 결렬하면 결렬할수록 그 한복판에서 버텨내야 했던 사람들의 상처는 크기만 합니다.

특히 마음에 생긴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습니다.

박훈과 신종원이 그랬던 것처럼

강정마을의 주민들도 그 상처들을 가슴에 안고 싸우고 있겠지요.

 

쉽게 아물지 않는 상처를 갖고 있는 분들과 함께 듣겠습니다.

‘오래된 사진’입니다.

 

 

바닥에 기대어 침대 밑을 보던 때

숨겨둔 이야기

많은 이야기

 

말할 수 없는 말이 더 많았어

찾아내지 말아야 할 사진들처럼

그렇게 묻고

그렇게 찾고

그렇게 삼키고

그렇게 살고

그렇게 웃고

그렇게 약속하고

그렇게 걷고

그렇게 달리고

 

그렇게 묻고

그렇게 찾고

그렇게 삼키고

그렇게 살고

그렇게 웃고

그렇게 약속하고

그렇게 걷고

그렇게 달리고

 

 

3

 

이번에는 40대 남자들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요?

제가 그 나이이다 보니 중년 남자들의 정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얘기들이 많기도 하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가장 활발한 역할을 하고 있는 세대이기도 하기 때문에 삶의 한 측면을 들여다 볼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60~70년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내고, 80~90년대 저항과 발전의 파도 속에 청춘을 보낸 세대들이 어른이 돼서 몸으로 배운 삶의 방식들은 어떨까요?

 

몇 년 전에 아는 분들과 함께 안동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일행 중에 안동 출신이 한 분 있어서 안동시내에서 당시에 유명했던 안동찜닭을 오리지널로 먹고, 안동 인근을 돌아봤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안동을 돌아보면서 저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주차문화였습니다. 어느 중소도시가 대부분 그렇겠지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시내에는 도로 한 편에 차들이 많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차의 한쪽 바퀴를 인도의 턱을 넘어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는 차들이 유독 많았습니다. 그런 차들은 대부분 지프차량이나 RV차량 같은 덩치가 좀 있는 차들이었고요. 안동 출신인 분에게 “여기는 왜 저렇게 차들을 세워놔요?”라고 물어봤더니, “안동에는 ‘내가 낸데...’라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다 아이가”라고 하더군요. 그 얘기를 듣고 허탈하게 웃고 말았습니다.

전통이 살아 있는 도시에서 어깨에 힘 좀 주는 중년의 남자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서울의 한 극장에서 ‘악마를 보았다’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가 개봉 할 때도 잔인한 장면 때문에 논란이 많았었는데, 그날 상영한 영화는 해외보급판이라서 국내 상영 때 삭제된 장면들도 볼 수 있다고 해서 그런지 영화관이 꽉 찼습니다.

영화관 좌석이 안락한 편이 아니라서 옆에 누군가 앉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웬걸 중년의 남녀가 제 옆자리에 앉아 버렸습니다. 제 옆에 앉은 남자는 옆 사람에 대한 배려는 애당초 없었는지 처음부터 어깨와 발을 쫙 펴고 앉더군요. 약간 눈치를 주다가 짜증나서 비어 있던 오른쪽 자리로 옮겨 앉아서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는 초반부터 생각 이상으로 잔인한 장면이 이어졌습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기는 했는데도 섬뜩하더군요. 그런 장면들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한 여성 관객이 중간에 영화관을 나가 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계속 보다보니까 이유 없이 잔인하기만 한 장면들에 익숙해지면서 섬뜩한 기분은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 있는데, 잔인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옆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허허’ 그러면서 웃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조용히 보고 있는데, 유독 혼자서 대범한 척 웃더군요. 처음에 섬뜩한 기분이 느껴질 때는 그 사람도 조용히 보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 사람과 같이 온 사람이 부인인지 애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옆에 앉은 사람이 여자가 아닌 남자였어도 그렇게 ‘허허’거리면서 영화를 봤을까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광화문 주변에서 밤새도록 돌아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수 만 명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촛불집회는 거대한 용광로였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다양한 만큼 투쟁도 정말 기발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재미있게 이뤄졌습니다.

그러다가 새벽을 넘기면서 앞쪽에서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하면서 분위기가 격렬해집니다. 무장한 경찰들과 싸우는 순간에는 긴장도 되지만, 많은 이들이 함께 하고 있어서 그 기운으로 무서움을 이겨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긴장 속에 땀을 흘리면서 싸우다보면 바로 뒤에서 자신은 싸우지도 않으면서 이래라 저래라 코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 짜증나서 뒤를 돌아서 째려보면, 중년의 그 남자는 내 눈을 피하면서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1~2시간쯤 진행되다가 경찰들이 대열을 정비하면서 본격적인 진압을 준비하게 됩니다.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는 가운데 경찰들의 진압이 시작되면 조금씩 뒤로 빠지기 시작하죠. 그때 잠시 뒤를 돌아보면, 소리를 지르면서 코치를 하던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줄행랑을 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시청 쪽으로 밀려나서 경찰이 다시 뒤로 빠지면, 그 사람이 다시 앞쪽으로 나와서 뭐라고 혼자 막 떠듭니다. 그 모습을 보면 짜증이 나면서도 우스워서 허탈한 미소를 지어버리지요.

 

며칠 전에 버스를 탄 척이 있었는데, 어느 고등학교 앞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꽃다발과 선물들을 들고 버스를 탔습니다. 졸업식이 있었던 모양인데, 제 옆에 서 있던 두 졸업생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습니다. 사람들로 꽉 찬 버스였는데 주위 눈치를 보지 않고 하는 얘기가 가관이었습니다.

“오늘 10만원씩 모아서 룸살롱 가기로 했는데, 너도 갈래?”

“아가씨 괜찮데?”

“응.”

살며시 얼굴을 봤더니 여드름이 난 앳된 얼굴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기념으로 룸살롱 가서 자기들보다 나이가 많을 아가씨를 주물럭거릴 그들이 20년쯤 지나서 중년의 나이가 됐을 때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요?

 

오늘도 가오 잡고 다니실 아저씨들에게

젊은 아가씨가 노래를 불러드립니다.

‘화양연화’

 

 

그 때가 그렇게 반짝였는지

그 시절 햇살이 눈부셨는지

강 한 가운데 부서지던 빛

도시의 머리에 걸린 해

달리는 자전거

시원한 바람

이제 알아요

그렇게 눈부신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 때가 사라집니다

 

달리는 자전거

시원한 바람

이제 알아요

그렇게 눈부신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 때가 사라집니다

 

뚜~루루~

뚜~루루~

 

달리는 자전거

시원한 바람

이제 알아요

그렇게 눈부신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 때가

사라집니다

 

 

4

 

제가 사는 동네가 촌이기는 하지만 제주시에서 가까워서 동네에서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가끔 보게 됩니다. 4살과 6살인 조카들과 어울려서 놀기도 하고요.

어린 아이들과 어울려 있는 시간이 얼마나 즐거운지는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어린이집이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너무나 귀여운 어린 아이들을 행복하게 바라보다가

예전에 케이블TV에서 본 중국 무협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병사들이 뒤엉켜 서로를 죽이는 장면에서 한 장수가 웃으면서 한마디 합니다.

“하하하, 지금 저렇게 미쳐 날뛰는 저들도 어렸을 때는 귀여웠겠지?”

 

한참 귀엽게 조잘거리는 어린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됐을 때

누군가는 술에 의지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마음 약한 사람에게 사기를 치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나이 든 철거민의 뺨을 때리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길 없는 삶에 허덕이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돈과 권력을 믿고 아무렇지 않게 비열한 짓거리를 하고 있겠지요?

 

‘작은 씨’ 듣겠습니다.

 

 

어느 날 찾아온 작은 씨

가슴에 가만히 내려놓았지

혹시나 먼지가 아닐까

의심하던 나의 마음 무색하게

싹이 돋아 올랐네

한 번도 본 적 없는

 

햇빛만 닿아도

얼마나 예쁜지

 

어느 날 찾아온 작은 씨

가슴에 가만히 내려놓았지

혹시나 먼지가 아닐까

의심하던 생각 무색하게

싹이 돋아 올랐네

한 번도 본 적 없는

 

햇빛만 닿아도

얼마나 예쁜지

 

두루루루루

다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

다라라라라라라

 

햇빛만 닿아도

얼마나 예쁜지

아무 것 없어도

얼마나 많은지

햇빛만 닿아도

얼마나 예쁜지

아무 것 없어도

아주 튼튼하게

 

 

5

 

저희 밭은 마을 외곽에 있습니다. 아주 뛰어난 경관은 아니지만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 있어서 밭에서 일을 하다가 지치면 허리를 펴서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지요.

밭의 오른쪽에는 마당 넓은 집이 두 채가 있습니다. 육지에 살고 있는 돈 많은 사람이 별장 비슷한 형태로 갖고 있는 집인 것 같습니다.

밭의 왼쪽으로는 5층짜리 낡고 작은 아파트가 있습니다. 무슨 이유로 이런 촌 동네 외곽 아파트에 사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을에 쉽게 섞이지 못하는 외지인들이 싼 가격에 만족해서 살아가는 곳인가 봅니다.

 

밭에서 일을 하다 보면 가끔 별장 마당의 나무를 손질하기 위해 사람이 나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유롭게 나무를 다듬던 사람이 혼자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저에게 밭에서 재배하는 작물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옵니다. 울산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시절, 제주도로 골프 치러 다니던 사장님들이 얼마나 야비하게 노동자를 대하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저는 입을 꼭 다물고 일만 합니다. 저한테서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한 그 사람은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들어가 버립니다.

또 어떤 날은 아파트에 사는 주민이 밭으로 들어와서 일하는 것을 보면서 이것저것 물어봅니다. 평소에 밭 한쪽 구석에 쓰레기를 갖다 버리기도 하고, 무단으로 우리 밭에 채소를 키우려고 시도하기도 하는 등 일부 아파트 주민 때문에 감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뒷짐 지고 일하는 사람을 쳐다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놓고 한마디 하면 나가 버립니다.

 

나이가 칠십은 훨씬 넘어 보이는 한 할머니가 저의 싸늘한 한마디에 쫓겨난 적이 있었습니다.

늙고 남루한 그 할머니의 뒷모습에는 쓸쓸함이 무겁게 따라붙어 있었습니다.

제주 출신이 아닌 그 할머니는 무슨 사연으로 그 나이에 이런 외지고 낡은 아파트에 살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매정하게 할머니를 쫓아버리는 제 뒤에도 숨 쉬기 힘들 정도로 무거운 외로움이 버티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좁은 공간에도 서로 섞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적당한 거리를 두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노래 하나 듣겠습니다.

‘사실, 난 아직’

 

 

사실, 난 아직

너를 만날 때조차

겁이 났어 두려웠어

어지러운 내 마음 속에선

 

사실, 난 아직

잡은 걸 놓지 못해

가만히 내버려두기

가지려 애쓰지 않기

 

사람들 그 속에 울고 있는 나

함께 가자고 우겨 보는 나

아직 부족하다고 느낀 나

어쩜 비어있는 걸 들킬까봐

 

사람들 그 속에 울고 있는 나

함께 가자고 우겨 보는 나

아직 부족하다고 느낀 나

어쩜 비어있는 걸 들킬까봐

 

그런 나였지만

그런 나였지만

흔들림 없는 눈빛과 목소리에

당신의 따뜻한 그 말 한마디에

 

위로를

위안을

선물을

용기를

 

 

6

 

어느 선배의 아파트에 놀러 갔더니 베란다에 병아리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앙증맞게 뒤뚱거리면서 삐약삐약 거리는 노란 병아리가 귀여워서 살며시 들여다봤습니다.

그렇게 병아리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얼마나 편안해지는지...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에도 병아리는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이면서 삐약거리길 멈추질 않더군요.

추워서 그런가 하고 병아리가 들어 있는 상자를 햇볕이 잘 드는 쪽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래도 병아리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삐약거렸습니다.

배가 고파서 그런가 하고 모이통을 병아리 가까이 가져가봤습니다.

그래도 병아리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삐약거렸습니다.

상자 안이 답답해서 그런가 하고 병아리를 살며시 들어서 밖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래도 병아리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삐약거렸습니다.

커다란 인간이 무서워서 그런가 하고 바닥에 누워서 병아리를 살펴봤습니다.

그래도 병아리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삐약거렸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납작 엎드려서 있으니까 병아리가 내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왔습니다.

살며시 병아리를 감싸줬더니 삑약거리길 멈췄습니다.

병아리는 엄마가 보고 싶어서 그렇게 울고 있었던 거였습니다.

 

병아리와 함께 잠시 눈을 감고 노래를 흥얼거려봅니다.

‘Dream'

 

 

출렁이는 물소리와 반짝이는 빛의 조각

흘러가는 저기 빈 배 따라가는 나의 눈길

 

쉬어가도 좋아요

누워 봐도 좋아요

잠들어도 좋아요

꿈꿀 수도 있어

 

머리위에 밝은 빛이 여기로 들어오게 해줘요

눈 가득 밝은 빛이 이 안을 따뜻하게 안아요

 

쉬어가도 좋아요

누워 봐도 좋아요

잠들어도 좋아요

꿈꿀 수도 있어요

꿈꿀 수도 있어요

꿈꿀 수도 있어요

 

 

7

 

사람들 넘치는 그런 곳은 가기 싫어

아무 일 없다는 듯 가면을 쓴 것처럼

사람들 넘치는 그런 곳은 가기 싫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그런 인파에

 

거기 말고 따뜻한 우리 집에서

그냥 나와 못 다한 얘기나 할까

 

사람들 넘치는 그런 곳은 가기 싫어

어두운 밤하늘을 환하게 밝혀두고

사람들 넘치는 그런 곳엔 가기 싫어

흐르고 흘러도 멈춰 있는 것 같은 시간 속

 

 

‘크리스마스엔 거기 말고’라는 노래였습니다.

시와의 노래와 함께 한 오늘 방송은 이 노래와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해하실 수 있을까요?

노처녀가 멜로영화를 보면서 훌쩍거려보는 것처럼

대인기피증이 있는 40대 노총각도 혼자 방송을 진행하면서 상상을 해봅니다.

 

“작년에 담근 술이 있는데

우리 집에 와서 한 잔 하지 않을래요?

술 한 잔 하면서 내 얘기 들어주시면 고맙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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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방송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하는 방송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메일을 공개합니다.

성민이 mk10293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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