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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 들어 가장 추웠던 날
광화문에서 칼바람을 맞으면서
예술영화전용관 중에서 시설이 후진
스폰지하우스를 찾아
잘 알지 못하는 아흔 살 노인이 만든
‘당신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를 봤다.
난방이 잘 된 작은 영화관에
많지도 적지도 않은 10여 명의 사람이 듬성듬성 않아 있는
편안한 분위기 속에 영화가 시작됐다.
유럽영화 특유의 약간 건조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와
노인 특유의 안정적이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어우러지면서 시작한 영화는
한 연출가의 독특한 장례식을 위해 모인 나이든 동료들이
어느 아마추어 극단의 연극 리허설 장면을 보게 하면서
조금씩 묘한 분위기로 이끌어 가기 시작했다.
“무슨 얘기를 하려나..”하면서 팔짱을 끼고 영화를 보고 있는 나에게
쭈굴쭈굴한 노인이 영화 속에서 나와 “같이 춤 한 번 춰볼까요?”라면서 손을 내미는데
당황스러운 나는 “저는 춤을 잘 못추는데요”라면서 쭈삣거리니까
노인이 “괜찮아요. 그냥 나만 따라 하면 되요”라면서 미소를 짓는데
거부하기 어려운 분위기라서 쑥스럽게 노인의 손을 잡는다.
아마추어 극단의 어설픈 리허설 장면을 보던
왕년의 명배우들은 점점 연극에 빠져들면서
아마추어 연기자들의 대사를
자신의 대사처럼 따라 하기 시작했고
서로의 대사가 넘나드는데
전위적인 예술영화가 아닐까 하는 긴장이 살짝 들었다.
우아하고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하면서 능숙한 스텝을 밟기 시작한 노인을 따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과 발을 따라가 보지만
꼬이기만 하는 스텝에 점점 긴장만 되는 나를 향해
노인이 살며시 웃어주면서 안정되면서도 불규칙적인 스텝을 계속 이어갔다.
아마추어 배우들과 명배우들의 연기가 점점 어우러지면서
노년의 배우들은 대사만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동작도 따라 하기 시작했고
점점 감정이 실리면서 두 개의 연극이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
노인을 따라 힘들게 스텝을 밟다보니
불규칙해 보이던 스텝이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노인과 나의 호흡이 맞아가기 시작했다.
두 개의 연극이 하나가 되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점점 노배우들의 연기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인생과 사랑에 대한 그들의 연기는 관객들을 빨아들이는데
중간 중간 아마추어 배우들의 리허설 장면을 보여주면서
완전히 빠져들지는 못하게 했다.
노인과 내가 리듬을 타면서 스텝을 밟고 있으려니
내가 능숙한 댄서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노인이 살짝 변형된 스텝을 밟는 순간
내 중심이 흐트러지자
노인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중심을 잡아준다.
영화 속 연극이 점점 절정을 향해가면서
노배우들이 연기를 벌이는 상상 속의 무대와
아마추어 배우들의 허술한 리허설 무대와
애초에 모여 있던 연출가의 장례식장이 완전히 하나로 어우러졌는데
3막에서 끝날 듯 하던 연극은 4막으로 이어지면서 종착점을 찾기 힘들었다.
규칙적인 스텝에서는 노인과 나의 호흡이 완전히 일치하고
불규칙적인 스텝에서는 노인에게 의지에서 따라가다 보니
흥겹기는 해지는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춤을 계속 추면서 약간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4막을 끝으로 하나로 어우러진 두 개의 연극이 끝나자
모두가 흐뭇해하는 순간
그렇게 놀랍지 않은 반전이 이뤄지면서
영화가 끝나는가 했더니
마지막에 살며시 또 하나의 위트 있는 반전을 주면서 영화를 끝냈다.
살며시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땀이 나는 속에
멋있는 마무리로 춤이 끝나자
상쾌한 한숨을 쉬면서 노인에게 인사를 하려는 순간
손을 놓지 않고 있던 노인이 다시 내 손을 끌면서
한 박자 반의 센스 있는 마무리 스텝을 보여주고는
뒷모습을 보이면서 유유히 극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분명한 메시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현란한 영화기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깊은 울림을 주는 것도 아닌데
영화를 보고 나니 괜히 유쾌해졌다.
다시 중무장을 하고 영화관을 나와서
칼바람을 맞으면서 걷고 있는데
노인이 지나가고 있었다.
“박근혜님에게 몰표를 줬던 어르신들,
이런 모습으로 늙었다면 좋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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