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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지키기 위하여 - 서준식

아득한 옛날부터 나는 ‘슬픔의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언제나 이루지 못할 꿈이 있었고, 그 꿈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를 가진 사회 속에서 그 사회에 먹히지 않기 위해 (즉 ‘체제내화’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으로 저항해야 하는 슬픔을 가지고 나는 살아왔다. 이 슬픔은 옥중서한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라이트 모티프’이다.
10년 전에 절판된 <옥중서간집>을 다시 세상에 내놓기 위한 작업을 하면서 나는 무한한 감개 속에 옛날 감속에서 썼던 편지들은 하나하나 읽어 나갔다. 거기에는 봉함엽서 위에 한 치 한 치 고통스럽게 정신적 지평을 열며 전진하는 나의 ‘젊은 날의 자화상’이 담겨 있었다. 늘 가슴에 안은 이루지 못할 꿈과 그 꿈의 실현을 가로막는 현실의 구조와의 갈등 속에서 그 현실에 먹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으로 저항하는 ‘젊은 날의 자화상’, 그것은 또한 바로 지금의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사실 출옥 후 나의 사상과 활동과 행동양식, 아니 나의 모든 것은 이미 그 ‘젊은 날의 자화상’ 속에 있었다. 조국을 향한 애틋한 사랑 이외에는 가진 재주란 아무 것도 없었고 소년 시절 그리도 글쓰기와 거리가 멀었던 나를, 독재의 감옥은 마치 범용한 자식을 엄하게 훈육하듯 키워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아마도 이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옥중의 정신 경험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17년 동안, 나는 음산한 독방에서 사랑하는 동생들에게 열정적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 세상에 위조지폐처럼 유통하는 통념에 말려들지 말아 달라고, 유행을 따르지 말고 소박하게 살아 달라고, 고난을 정면으로 돌파해 달라고, 그 고난을 피해가기 위해 실리주의를 택하지 말아 달라고, 부도덕한 세상에서 자신의 몸을 수혜자가 아닌 피해자의 위치에 두어 달라고, 지겹도록, 정말 신물나게 되풀이 당부했다. 일상에 갇히지 말고 꿈을 품어 달라고, 겉으로 드러난 표피에 속지말고 깊은 곳에 놓인 허위를 꿰뚫어 봐 달라고, 역사를 공부해 달라고, 그 도도히 흐르는 역사 앞에서 겸허해 달라고...... 그것은 요컨대 사악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너희는 언제나 아웃사이더로 남아 달라는 메시지였다.
사랑하는 동생들에게 끈질기게 발신되었던 그 모든 신호는 실은 발가벗은 국가폭력에 저항하면서 감옥에서 힘겹게 꿈을 지켜 내야 했던 나 자신에게 애타게 발신되는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꿈을 지키기 위하여, ‘체제내화’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당연히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즉 우리의 삶은 ‘금욕의 아픔’으로 점철이 되어 있어야 한다. ‘금욕의 아픔’이 없는 진보주의는 없다. 금욕의 아픔이 없는 혁명도 결단코 없다.

1971년, 24살 나이에 육군 보안사령부로 연행된 뒤 재판과정에 이르기까지 내가 부렸던 나약하고 비겁한 작태에 대해서 지금은 기억하기조차 싫다. 나는 마치 거센 파도 속을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우왕좌왕해야 하는 가랑잎과 같은 존재였다. 1972년에 징역 7년형 확정 판결을 받았을 때 나는 비장한 각오로 사상전향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 주체성과 존엄을 가진 한 인간으로 거듭나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했기 때문이다. 나는 악명 높은 대전 교도소로 넘어갔고 이른바 ‘비전향 장기수’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후 청주 보안감호소 시절의 10년을 포함해서 16년 간을 나는 공인된 ‘빨갱이’를 수용하는 특별사동에서 감옥살이를 익혔고 진보운동을 사색했다.
‘비전향 장기수’ 선배들과 함께 반공국가 감옥의 온갖 폭력에 시달리면서 나는 틈틈이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50년대의 참담했던 감옥, 너무도 인간적인 빨치산들, 이승엽에 관한 수많은 의혹들, 해방공간의 학생운동, 일제치하의 감옥,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해방의 기쁨 속에서 사회주의자의 길을 걷게 된 농부로부터, 혹은 해방 직후 국대안 반대투쟁을 벌이다 북으로 넘어갔던 학생운동가로부터, 혹은 박헌영 밑에서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가했던 활동가로부터, 혹은 일제하 브나로드운동 속에서 사회주의를 알게 된 야학 교사로부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들의 선배에 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에게 아버지 어머니가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듯이 진보운동에도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다는 발견은 나의 인생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거의 200년에 육박하는 진보운동의 중후한 전통은 마치 커다란 강물과도 같은 것이어서 나 자신이 그 강물 속의 한 포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뚜렷이 자각하는 순간부터 나의 인생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제멋대로 진보운동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일시적인 착상으로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자유인’임을 내세워 반공국가가 강요하는 전향서에 서명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요컨대 체제의 달콤한 유혹에 손을 뻗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고고하게 지조를 지켜야 한다는 따위 명분에 사로잡힌 메마른 인간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나에게 사상전향의 문제는 내가 어떤 위치에 있어야 이 시대를 사는 하나의 실존으로서 최대한의 기여를 할 수 있느냐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였고, 동시에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진보운동의 역사에서 박해받고 죽어 간 수많은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지’들 앞에서 겸허할 수 있느냐라는 지극히 정서적인 문제였다. 지금도 절망하고 주저앉고 싶어질 때 나에게는 언제나 나를 질타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힘을 내라, 너의 몸은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일어나라, 너의 등뒤에는 너의 군대가 있다”.
나를 위해 산다는 것, 그것은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해 산다는 것과 일치되어야 하고 나아가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산다는 것과도 일치되어야 한다. 진보주의자에게 구속은 곧 자유이다. 구속을 자유로 만들기 위해 진보주의자는 기꺼이 ‘금욕의 아픔’ 속에서 살아간다.

초조해 하지 말 것, 참을성 있게 진보의 길을 갈 것, 희망은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상황이 어려워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 우리의 나약한 정신은 불안한 나머지 뭔가 구체적이고 ‘확실한’ 것을 붙잡으려고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성가를 올리기에 급급할 때 사람은 이상과 희망을 읽고 현실 속에 매몰된 실용주의의 길을 가기가 십상이다. 때로 우리는 최소한의 이상을 잃지 않기 위해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엎드리고만 있어야 할 때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반드시 뭔가 가시적인 성과가 있어야 하고 역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오만에 다름이 아니며 결국은 우리를 사악한 사회의 ‘제도’라는 늪으로 끌고 들어갈 것이다.
감옥에서 나는 당연히 권력 및 기득권 세력과 완벽하게 단절된 상태에서 나를 지켜 나갔다. 몸은 고달팠지만 영혼은 맑았다 나의 옥중서한은 수없이 이 문제를 화제로 삼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나의 운동의 일차적 과제는 권력 및 기득권 세력과의 완벽한 단절이다. 현실의 구조를 넘어서려는 깊은 소망과 확고한 의지를 궁극적으로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이 비인간적인 구조의 희생자 자리에 둠으로써만 배양될 수 있다. 운동의 이상은 운동의 일상과 일치하기 마련인 것이다.

- ‘서준식 옥중서항’ 머리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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