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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스님과의 인터뷰

원경 스님에 대한 인터뷰의 전말을 살피자면 2000년 11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원고가 완성되는 시점으로 따지자면 무려 6개월이나 소요된 인터뷰였다. 아마도 퍼슨웹 인터뷰 중에서 가장 시간을 오래 끈 기사가 아닐까 싶다. 기획 당시는 조봉암 선생의 따님과 더불어 "실패한 혁명가의 후손"이라는 주제로 기획되었다. 기획 초기 단계에의 의도는 "유전은 실패라는 운명까지 동반한다"는 것이었다.

인터뷰에도 잠깐 나오지만 조봉암 선생의 따님께서는 "진보당 사건 재심청구" 문제가 걸려있어서 인터뷰를 조심스럽게 사양했다. 원경 스님 역시 처음에는 승낙하지 않았다. 스님께 직접 연락을 취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박헌영 전집』 작업에 참여하고 있던 분들을 통해서 연락을 부탁해야만 했다. 어렵게 어렵게 스님의 인터뷰 승낙을 얻어내고 약속을 잡기까지 석 달이 좀 더 걸렸다.

3월 20일에 첫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인터뷰 이후 녹취를 풀고, 몇가지 사항에 대해서 확인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 만기사에서 스님을 두 번 더 만났다. 보충인터뷰가 있었지만, 첫 인터뷰 내용에 대한 부연설명이기 때문에 따로 옮기지 않고 부분 부분 보완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원경스님은 퍼슨웹과의 인터뷰 이전에 몇 번 인터뷰를 하신 적이 있었다. 시사저널 창간호 및 사회평론과의 인터뷰는 1989년과 1992년에 있었다. 시사저널 창간호 인터뷰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으며, 사회평론과의 인터뷰는 박비비아나(박헌영-주세죽 사이에서 낳은 딸)씨와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스님의 이야기는 많지 않다. 『역사비평』과 가졌던 1997년 인터뷰는 스님이 본인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풀어놓은 첫 인터뷰였다.

퍼슨웹과의 인터뷰를 위해서 그 기사를 많이 참고해야 했다. 3월 20일 이루어진 첫 인터뷰는 다섯 시간 이상 계속될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찾아뵈었을때는 사찰(만기사) 공사중임에도 불구하고 흙 묻은 손을 씻지도 않은채, 자세하게 설명해주신 스님께 감사드린다. 『역사비평』 인터뷰와 중복되는 부분은 가능하면 제외했으며, 퍼슨웹의 여느 인터뷰와 마찬가지로 '노 컷', 있는 그대로의 녹취를 올린다. 부분 부분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에 관한 간략한 해설을 덧붙였으며, 편집자의 시덥쟎은 넋두리도 포함시켰다. 아주 오랜 준비, 제작기간이 걸렸지만 조금의 지루함도 느끼지 못하고 팽팽한 긴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인터뷰였다. 인터뷰를 도와주기 위해 시간을 내 주신 윤해동, 류준범 선생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겠다.

때   : 2001년 3월 20일 2시, 2001년 6월 6일 그리고 2001년 6월 18일
장소 : 강남 한 식당(진달래), 경기도 어느 국도변 사찰(만기사)

장면 1: 1956년 7월 19일 동틀 무렵, 평양 인근의 어느 야산 기슭.

방학세 : 박동무, 동무의 죄과를 이제서야 청산할 수 있게 되었소.
박헌영 : . . . . . .

방학세 :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소?
박헌영 : 오랫 동안 태양을 보지 못했어. . . .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는가?

방학세 : 시간도 시간이지만 안개 때문에 그건 포기해야할 거요. 내가 줄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소.
박헌영 : 시간이라. . . . 멈춰 있을 줄 알았더니 그 사이에도 시간은 흘렀던 모양이군 . . . .

방학세 : 물론이지. 시간이 흐른 만큼 세상도 많이 변해버렸지. 스탈린 동지도 서거했고, 전쟁도 끝났으니까. . .
박헌영 : 그렇군. 전쟁이 끝났단 말이지 . . . .

방학세 : 하지만 미제국주의자들과 이승만 괴뢰도당을 몰아내지 못한 반쪽 승리에 불과하오. 눈을 감으시오. 이젠 갈 시간이 됐어.
박헌영 : . . .진정 해는 뜨지 않는군. . . 동지들이 원하는 나머지 반쪽의 승리를 . . . 내가 줄 수 있었으면 좋겠군. (눈을 감으며) 한산! 네게 너무 무거운 짐을 맡기고 가는구나. . .

조선공산당의 당수이자 남조선 노동당 부위원장,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그의 이름 앞에 늘어놓은 긴 수식어 대신, 지난 50년간 우리는 그를 매우 간명한 수식어로 꾸며주었다. '빨갱이' 혹은 '미제의 간첩'. 북한의 前職 고위관리였던 강상호씨와 박길룡씨의 증언에 따르자면 박헌영은 1956년 7월 19일 경, 평양 근교에 있는 한 야산에서 북한의 내무상이었던 방학세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한다. 박헌영의 최후에 대한 또 다른 증언은 그가 1955년 12월 15일 재판이 종료된 직후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하기도 하고. 인터뷰는 박헌영의 죽음에 관한 것은 물론 아니다. 박헌영에 대한, 조선공산당 그리고 남조선 노동당(남로당)에 대한 평가를 의도하지도 않는다. 오늘 우리가 만날 사람은 단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애써 되살리고 싶어하는 사람의 아들일 뿐이다. 아들의 이러한 소박한 희망은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무척이나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고, 또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것으로 보인다.

'빨갱이'에 대한 선입견은 색깔 논쟁의 화신이다시피 했던 인물이 청와대에 입성해도 여전하고, 금세기이래 최악의 스파이라는 낙인 역시 아직까지 지워질 줄 모른다. 1948년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으로 삼국통일 이래 유지되어 온 단일국가의 역사는 마감되었고, 또한 조선공산당의 역사 역시 상속자임을 자처하는 세력이 나타나지 않은 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지난 50년 간 남한 공산주의 운동이 지하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일제 말기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조선공산당 재건'이라는 혹은 그와 유사한 간판을 내걸지는 않았다. 1925년 코민테른의 승인 하에 출발한 조선공산당의 역사는 북로당에 유입된 일부 세력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그 맥이 끊어진 채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수천 수만 개의 블록 조각을 끼워 맞추듯 역사가들의 작업도 일종의 조각 맞추기 놀이 셈이다. 때로는 기발한 상상력이 때로는 지나친 의욕이 기묘한 형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오늘 역사라는 조각 맞추기 놀이가 조합해 낼 수 있는 수백 억 가지의 형상 가운데 하나를 보게 될 것이다. 일관된 신념과 의지를 가진 한 스님이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이 조각그림 맞추기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는 文理가 트여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학자도 아니고 당과 정치노선에 생명을 걸고 있는 정치가도 아니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과학과 이데올로기 같은 '매뉴얼'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이성보다는 감성에 매달려야 했고, 냉철함보다는 열정에 휩싸여야 했으며, 분노보다는 동정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 조건으로 따지자면 항균처리된 실험도구를 비롯하여 완벽한 기자재들을 갖춘 실험실에의 전문적 역사학자들에 비해 그의 작업 조건은 열악하기 이를데 없다. 그의 실험실에서 나온 실험결과는 그래서 빈축을 사기도 하고, 때로 측은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쉬지 않고 지치지 않으며 또 멈춰 서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단지 짜맞추기 '놀이'가 재미있어서 오랜 동안 만지작거리는 팔자 좋은 사람들과는 다르다. 또 한 바가지의 강물을 퍼담고서는 "내가 저 거대한 강을, 역사라는 강을 이 그릇에 담았노라!"고 고함칠 만큼 배포가 크지도 않다. 때로는 쉰 목소리로, 때로는 육중한 저음으로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내가 길어 온 물은 그저 江에서 퍼 왔을 따름이예요. 돌아 보니 그 江의 이름이 아버지더군요."

스님과의 인터뷰 날짜가 잡혔다는 연락이 류준범씨로부터 왔다. 평일 낮으로 시간을 잡았던 것은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스님의 성격 탓이리라. 하지만 예상밖으로 한식당 안은 무척 시끄러웠다. 칸막이 저쪽 편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 때문에 먼저 도착했던 퍼슨웹 인터뷰어와 류준범씨는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강남 계꾼들의 모임인 듯 했다. 긴장한 탓인지 처음 다루어야 하는 녹음기기가 못마땅한 듯 연신 인상을 찌푸리며 만지작거렸다. 인터뷰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를 찬찬히 다시 확인해야 했는데도, 그러지 못했다. 머리 속에는 오로지 한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제대로 이야기를 해 주시려나. . . .'

10분 정도 기다렸을 때,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허름한 점퍼를 입은 거구가 몸을 드러냈다. 스님이었다. 승복 입은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첫 인상은 의외였다. 표정도 약간은 험상궂었기(?) 때문에 적잖이 긴장하고 있던 인터뷰어들은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스님이 자리에 앉고, 종업원이 물컵에 물을 채우는 동안에도 퍼슨웹의 인터뷰어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전화로 인사를 드릴걸'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어렵게 어렵게 첫마디를 꺼냈다.

퍼슨웹> 안녕하십니까, 스님. 류준범씨(『박헌영 전집』 편집작업 참가, 서울대 강사)한테 전해 들으셨겠지만 저희는 「퍼슨웹」이라고 하는 인터넷 잡지입니다. 인터뷰만 전문으로 하는 곳입니다. 먼저 인터뷰를 허락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전집』도 나오고 또 한번 뵙고 싶기도 해서 겸사겸사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인터뷰라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저 스님 살아오신 이야기를 저희에게 들려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 . .
원경> 허허...

스님은 그저 웃기만 하셨다. 지난번 『역사비평』에서 같이 인터뷰를 하셨던 윤해동 선생께 동석해 주십사고 하는 부탁을 드린 상태였지만 아직 도착하질 않으셨다.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였건만, 늦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인터뷰어의 난처한 표정을 읽었는지 옆에 있는 류준범 씨가 거들고 나선다.

류준범> 뭐 그렇게 학술적이거나 딱딱한 내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역비 인터뷰하고는 좀 분위기는 다를꺼 같네요.

원경> 내가 한다고 대답은 했는데. . .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할지 말이야. 허허.... 질문 내용을 조금 알아야겠다고 했는데. . .

퍼슨웹> 장기수 분들을 인터뷰할 때도 느꼈습니다만, 저희가 전후 사정을 모두 안다거나 또 이런 저런 것을 꼬치꼬치 캐묻는 인터뷰라기 보다는, 그저 그 분들이 살아오신 이야기라든지 그런 걸 자연스럽게 이야기해주시는 게 좋았습니다. 저희들이 스님께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여러 번 부탁을 드렸던 것은 『박헌영 전집』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스님과의 인터뷰가 의미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대학생들 가운데는 박헌영이 누군지도 잘 모르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현대사를 잘 모르는 거지요.
비단 학생들 뿐 아니라, 한때 역사의 한 가운데 있었던 박헌영이란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과연 『박헌영 전집』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그런 내용을 좀 전달해주고 싶었습니다. 또 선친의 활동이, 인생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도 그렇구요. 그런 부분에 대해 담담하게 말씀을 해 주시면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그대로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원경> 『전집』은 제가 잘 몰라요. 어떤 자료를 어느 정도를 모았는지 잘 몰라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료라는 것은 한평생 가더라도 다 확보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전집』을 해야 한다는 것은 자료를 내가 찾아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예를 들어 러시아의 대통령궁이나 KGB 문서보관소 등에 있는 박헌영 선생에 대한 파일이라고나 할까요? 혹은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파일 같은 것 말이지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박선생'이 일제시대 때 투쟁을 하시면서 지하에서 계시다가, 南行(대구-광주)을 시도하시고, 해방이 되어서 서울에 나타나셨을 때, 사람들이 말하는 '8월 테제'말이지요. 이것이 (당시에) 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벌써 지하생활 하면서 구상 속에 있다가 나온거라고 생각하거든요. 해방이 되면서 정리가 되었다고 보거든요. 8월 테제보다 뭐 더 중요한 것은 그 당시 서울 부영사(샤브신)로 와 계시던 분을 통해서 스탈린 원수한테 보낸 「정책입안보고서」라는 것이 있거든요. 내가 자료를 찾고자 한다는 것은 이것을 찾기 위한 작업입니다.

샤브신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서울에 있던 러시아 영사관 부영사로서 당시까지는 가장 믿을만한 '조선통'이었다. 샤브신의 부인이었던 꿀리꼬프 샤브시나 여사는 박헌영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해서 해방 이후 남한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1945년 남한에서』(한울)라는 글을 남겼다. 스님은 선친에 대한 호칭으로 '박선생'이라는 일반명사를 사용했는데, 선친인 박헌영 선생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할지는 스님의 평생 고민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원경> 「정책입안보고서」라는 것은 해방 정국에 대한, 남북한에 대한 당신(박헌영)의 구상이랄까 설계라고 할까? 아무튼 그런 종류의 문건입니다. 이것을 정식으로 그분(샤브신)을 통해서 스탈린 원수한테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걸 현재까지 찾덜 못했어요. 대통령궁에 있는 문서보관소에는 연락이 안되고, KGB도 안되고. 또 한번은 (박헌영 선생이) 북쪽에 가셨을 때, 그 당시 스탈린 측근에서 (박헌영 선생에게) 다시 또 요구했습니다. 「정책입안보고서」를 다시 올리라고 말이지요. 남쪽에 있을 때 생각과 북쪽에 있을 때 생각이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지를. 레베데픈가 그 분을 통해서 정식으로 다시 전달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찾는 것만이, 그것으로서 박헌영이라는 선생에 대한, 그분에 대한, 그분이 공산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민족적 공산주의자이든, 사회주의자든, 그분이 생각했던 우리 조국에 대해서 구상해 놓은 것을, 이것을 찾아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어릴 때부터 그런 당부를 '누구'한테 받았어요.

원경 스님 인터뷰 녹취를 가다듬으면서 참으로 인생이란 길다고 느낀다.
특히 우리의 근현대사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이 '인생'이란 특별히 길고 또 깊은 시간이다. 원경스님에게도 그 시간은 길고도 깊었고 그만큼 많은 사람과 사건이 그 깊은 골 속에 묻혀있었다. 때로는 이름을 밝히기도 했지만, '누구' '어떤 사람' 등등으로 끝내 꺼내놓지 않은 인물들도 꽤 있었다. 스님은 여러번 '누구', '어떤 사람'들에 대해 언급했지만 기억에 남은 인물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그런 당부를 '누구'한테 받았어요"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스님의 표정에서 뭔가 심상찮음을 느꼈다. 그리고는 곧 영어 단어 하나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Deep Throat'
비록 영화(로버트 레드포드와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대통령의 음모")였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는 통로를 열어준 '익명의 제보자'를 가리키는 단어다. 스님이 인터뷰 시작 이후 처음 사용하신 비인칭 대명사 '누구'로써 지목했던 이 신비로운 인물은 원경 스님과의 인터뷰 내내 부침을 거듭한다. 어쩌면 스님과의 인터뷰를 거대한 하나의 '수수께끼'로 만들어버릴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적인 한 인물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모아놓은 『全集』이 나오기 위해서는 여러 인사들의 공동작업이 필요하다. 물론 학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때로는 관료들의 도움도 필요하고, 재원을 마련해줄 독지가도 요구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의 『전집』이 나오기 위해서는 『전집』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는 '인식의 공동체'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공동체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종친회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러한 단체는 시대적 조건이나 사회적 인식과는 무관하게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느낄 경우 언제라도 자원과 인력을 동원하여 족보를 꾸미고 또 선조를 宣揚하는 일들을 추진한다.
인터뷰에서도 언급되지만 원경 스님을 비롯해서 박헌영의 후손은 그리 많지 않다. 오랜 동안 숨겨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남아있는 후손들 사이에도 교류가 많지 않다. 그리고 시대적 조건이나 사회적인 인식도 적대적이다. 통일논의가 활발한 2001년 현재도 상황이 그리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원경 스님은 오랜 시간 동안 사회와 격리되어 혼자 살아왔다. 정식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홀로 재야에서 역사를 탐구한 재야사학자도 아니다. 외견상 스님은 그저 열심히 도를 닦는 수행자일 뿐이다. 하지만 스님이 구상하고 추진했던 그리고 이제 곧 결실을 보게될 『박헌영 전집』이 나오기까지는 많은 조력자들이 참여했한다. 이들과의 인연을 더듬기 위해  이야기는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로페셔날 역사연구자들과의 만남으로. . . .

퍼슨웹> 『전집』 출간을 위한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원경> 『전집』을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 . . 아무튼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은 이래요. 1985년도쯤인가? 박원순 씨가 변호사를 하고 있을 땝니다. 그런데 박원순 변호사가 그때 변호사를 쉬면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때였어요. 그때 우리가 일주일 동안 박원순 부부하고, 지금 국회의원 하는 이호웅 의원(민주당 국회의원)하고 몇몇이 차 두 대로 여행을 갔어요. 한 7-8명 정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박원순 부부, 천희상(출판사대표)씨, 이호웅 씨, 그리고 음식점 하시던 박모 씨 그리고 저 이렇게 7-8명이 여행을 떠나게 됐던 겁니다. 이 분(박원순)이 옛날. . . 그 '오둘둘(5.22)사건'이라고 하죠. 아무튼 그 사건에 연루되어서, 서울학교에서 제적당하고는 감옥엘 가게 됩니다. 시골 소년이 서울에 올라와서 경기중고를 거쳐 서울대학교를 들어갔는데, 그러니까 법학도로써 자기의 장래 꿈을 펼치기 위해 들어갔는데, 그 사건으로 인해서 서울대학교에서 제적을 당한 겁니다. 그러다가 이분이 그냥 쉴 수는 없고 해서 단국대학교를 다시 들어간 걸로 알고 있어요.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근데 사학과를 졸업해서는 세상에 나와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당시는 등기소 소장이 시험을 봤어야 됐는데, 사법고시는 준비가 아직 안되고 해서 등기소 소장 시험을 봤던 거예요. 그리고는 합격을 해서 영월로 부임을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영월로 부임을 해서 가니, 젊은 사람이, 20대가 시골로 가니까 젊은 나이에 시골 유지가 된 겁니다. 또 소장이다 보니까 시간이 그렇게 남아요. 그때 남는 시간을 활용한 것이 고시공부를 한 겁니다. 고시공부를 해서 사법고시에 합격을 했어요.

스님이 언급한 '오둘둘' 사건은 1975년 5월22일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김상진열사 추도식」사건에 참여했던 학생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조치를 뜻한다. 당시 발령되어 있던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이 사건에 참여했던 박원순 변호사도 제적되었다.

원경> 그러다가 연수를 하고 대구에 가서 검사 생활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여기에서 박원순씨한테 공안을 맡으라는 지시를 했답니다. 차마 그럴 수 없다고 했죠. 학생운동을 할 때 자신이 몸소 당해봤으니까. 그래서 차라리 사표를 내는 게 낫겠다고 해서 사표를 제출했는데 . . . 제가 듣기로는 사표도 아마 바로 수리된 게 아니고 8개월 정도 있다가 수리된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고는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죠. 그런데 변호사를 하다보니까, 변론 요지를 작성하는 과정에서도 역사적인 문제가 많이 대두되거든요. 자기는 단국대학교에서 역사 공부를 했지만 그때는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되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거든요. 그래서 내가 좀더 이 분야를 공부해야 하겠다고 해서 변호사를 관두고 공부를 하겠다는 사람을 앞세워서 "그러지 말고 우리가 연구소를 하나 만들자"고 했던 거예요. 그분이 구상했던 연구소라는 것은 그 동안 정부에서 했던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럿이서 같이 공부하는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겁니다. 연구소를 만들 때는 물론 대학원생도 계셨고, 학부생도 있었고, 전문가도 계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 분들이 모여서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 세미나도 하고 하는 과정에서 옆에서 참관해서 듣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공부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또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도 수정할 건 수정하고 하는 게 공부 아니냐는 거지요. 그런 상황에서 연구소를 한번 해보자고 서로가 합의가 된 것입니다.

합의가 됐을 때, 박원순 변호사 당신이 옥빌딩(세종문화회관 뒷편) 401호를 얻어주고 전화도 놔주고, 월 100만원씩 지원을 했습니다.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도움을 많이 주셨지요. 그리고 연구소를 어떻게 시작할 지에 대해서는 "(해방) 3년사를 한번 해보자!" 그렇게 된거지요. 나는 그때 연구소를 하자고 했던 것은, 연구소를 해야만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연구 성과도 내고, 그 당시만 해도 (연구소는) 대중을 상대로 했거든요. 또 대중에게 숨겨진 역사 잘못된 역사 이러한 것을 우리가 좀더 연구해서 바른 자료로 객관적인 분석을 해서 대중화를 시키자하는 것이었거든요. 또 강연회도 하고 말입니다. 초창기에는 강연회를 많이 했습니다. 대학가에서요. 또 그 당시에는 그러한 연구소가 없다 보니까, 많은 학생들이 참여를 많이 하고, 많은 관심 있는 분야 사람들이 참여를 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역사문제연구소가) 비밀단체인지 알고 안기부에서 와서 사물을 뒤지고, 사람을 종로 경찰서로 끌고 가고 치안본부에서 와서 뒤지고 했어요. 그때는 이 연구소가 과연 제대로 될 건가 안될 건가, 그리고 연구소를 하는 것이 이렇게 남들한테 욕먹을 짓인지 아닌지 뭐 그런 생각까지 들었어요.

1986년 창립된 역사문제연구소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대학을 벗어나서 현대사를 다룬다는 것은 약간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모험을 즐기는 사람들은 언제고 어디고 있게 마련이다. 스님은 『전집』 출간에 관한 이야기를 박원순 변호사와 역사문제연구소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만큼 박변호사와 역사문제연구소는 원경 스님에게는 인연이 깊은 사람이고, 단체였다. 역사문제연구소의 간략한 연혁은 연구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http://www.kistory.or.kr)

퍼슨웹> 연구소 출범에는 박원순 변호사의 역할이 컸군요.

원경> 박변호사는 검사 생활을 하면서, 많은 자료를 모아뒀어요. 예를 들면 좌익문서 같은 거요. 우리가 쉽게 접하지 못하는 여러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모아두셨어요. 완벽하진 않았지만, 보통 학자들 못지 않게 많은 자료들을 갖고 계셨어요. 우리가 (해방) 3年史를 다뤘던 것도 박변호사가 많은 자료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우스갯소립니다만, 나중에 우리가 그 자료를 좀 내놓라고 하니까 "마누라를 내 놓으면 놓았지, 책은 내놓을 수 없다"고 할 정도였어요. 그래도 박변호사가 끝내는 책을 모두 연구소에 희사하셨어요. 몇 천 권 정도 되는 걸로 알아요. 주시는 조건은 관리를 잘하고, 여러 사람이 골고루 필요한 사람이 언제든 볼 수 있게끔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대단한 양반이에요. 지금 현재 역사문제연구소의 많은 책들이 그분한테서 온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들이 바탕이 되어서 시작했던 것이 (해방) 3년사 였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당시 『신동아』에 계시던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현대사 전공) 선생님 같은 분도 참여를 하시게 됐습니다. 근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문제가 생기거든요? 그래서 이러다가는 안되겠다. 서로가 큰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 당시 사회만 해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휩쓸릴 가능성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정식으로 세상에 내놓자, 개소식을 하자해서 개소식을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개소식을 1986년 2월 달에 하게 되는 거지요.

원경 스님은 역사학자는 아니었지만 역사자료에 관한 나름의 觀이 뚜렷했다. 역사자료 특히 현대사 관련 자료는 누구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원순 변호사 역시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료란 비밀스럽고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에게만 유통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국정원 관리들말고도 그런 사람들이 꽤 있을 터이다. 그들은 자료가 보물이나 천하의 名藥 정도 되는 줄 아나보다. 하긴, 그걸 다려먹으면 섬유질은 넉넉히 보충될지도 모르지. . .
박원순 변호사와 서중석 교수는 인권변호사이자 진보적 역사학자로서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이외 원경스님에게 의미있는 사람이 또 한 분 초기 역사문제연구소에 결합하게 된다. 스님에게는 좀 껄끄러운 질문이었지만, 이후 인터뷰의 핵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약간의 '복선'이 필요했다.

퍼슨웹> 남로당 연구에 관한 권위자이신 김남식 선생도 이때 참가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 .

원경> 네, 그렇습니다. 초창기 김남식 선생의 자문을 받았지요. . .저는 별로 시각적으로 탐탁하게 생각허들 않았습니다.

퍼슨웹> 세미나에 오셔서 연구자들과 같이 세미나도 하고 그러셨다고 하더군요?

원경> 네. 그랬습니다. 초창기 3년사 할 때였지요. 그 분이 당시 현장에 있던 분이니까 많은 자문을 구했지요. 전혀 시각이 달랐죠. 자료 해석도 다르고.

퍼슨웹> 김남식 선생은 어떻게 이 모임과 결합이 되셨나요?

원경> 김남식 선생을 아는 분들이 있었지요. 김남식 선생의 시각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디다. 정확하게 어느 분하고 연락이 되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 . 제 생각으로는 아마 서중석 선생님하고 연락이 되지 않았을까 하네요. 또 임헌영 선생이 김남식 선생하고 인연이 좀 있는 것 같더라구요. 김남식 선생뿐 아니라 당시 송남헌(김규식의 비서) 선생도 초청해서 말씀을 듣고 했습니다.

퍼슨웹> 김남식 선생이나 송남헌 선생 같은 분들은 모두 그때 첨 뵌 겁니까?

원경> 그렇죠. 처음 봤죠.

퍼슨웹> 그때 특별히 선친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던가요?

원경> 그런 건 안 했고요. 근데 이제 선친에 대해서는 차츰 차츰 뭐 사람들한테서 한다리 건너서 알게 되고. 또 어떤 때는 슬쩍 나한테 "그렇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냐?"라고 묻기도 했는데. 난 뭐 "전혀 모르겠다"고 웃으면서 그랬죠. 확실한 대답을 안 했었지요.

스님을 처음 대하게 되는, 스님의 내력에 대해 처음 들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는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진짜냐 가짜냐! 우리는 이 실체의 과거나 미래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눈앞의 존재가 호기심을 채워주길 바랄 뿐이다. 이야기는 다시 역사문제연구소 출범으로 돌아간다.

원경> (사람들이) 연구소 개소식 날짜를 잡으라고 그래요. 사람들이 내가 스님이고 하니까 날짜도 잘 보고 그런 줄 아나봐요.(웃음) 근데 난 그런 건 못해요. 그렇지만 신채호 선생이 옥사한 날을 잡아야겠다 해서 그분이 옥사한 날을 잡았어요. 그러고 정창렬(한양대 사학과 교수) 선생님이던가. . . 아마 맞을 겁니다. 그 분을 소장으로 모실려고 했는데 이 분이 고사하셨어요. 그래서 이제는 돌아가신 이수인(전 국회의원, 이수성 전 국무총리의 동생, 2000년 6월 10일 작고) 선생께서 다시 정석종(영남대 사학과 교수) 선생님을 추천했습니다. 정석종 선생님은 그 당시 미국으로 일년 동안 교환교수로 떠날 땐데, "내 이름 정도는 언제든 줄 수 있으니까, 뭉쳐서 한번 공부 해보라"고 쾌히 승낙을 하셨어요. "공부성과를 세상에 내놓으면 얼마나 좋으냐"해서 정석종 선생께서 이름을 주셔서 했습니다. 근데 한가지 . . . . 임헌영(문학평론가) 선생님한테는 지금도 참 죄송한 게 있어요. 뭔고 하니, 처음에 정창렬 선생님이 고사하시니까 이 분(임헌영)을 소장으로 (역문연 내에서) 서로 내정을 했던 거예요. 그러고는 얼마 뒤에 박원순 변호사, 천희상 씨, 이호웅 씨, 임헌영 선생 등등이 제가 있던 안성 청룡사로 오셨어요. 임헌영 선생은 조금 늦게 왔는데 . . . 그런데 저는 그 모임(임헌영 선생을 소장으로 내정한 모임)에 저는 참석하지 못했었어요. 그래서 그날 내려오셔서 임헌영 선생을 소장으로 모시자고 하셨어요. 근데 제가 반대했습니다.  

초대소장 선임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스님은 무척 죄송스럽다는 표현을 여러 번 사용했고 또 자주 말을 끊었다. 마치 앞에 임헌영씨가 있는 것처럼.

원경> 왜 반대를 했냐면 . . . 첫째는 이 분은 문학평론가지 . . . 물론 문학하던 사람이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역사학자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이 분은, 독서량도 상당히 많으시고 또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이지만. . . . 이 분은 지난날 '남민전사건'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사람이고. . . . 그래서 서로가 피했으면 좋겠다고 그랬습니다. 전화를 해 보니까 정석종 교수가 승낙을 했다고 하고. 그래서 "그러면 정석종 교수를 소장으로 모시고 이 분을 부소장으로 모시자. 단 연구소 운영체제는 부소장 체제로 하자. 그까짓 감투가 대단한 거냐?"고 그랬었어요. 근데 이제 임헌영 선생이 (청룡사에) 늦게 도착해서 보니까, 서울에서는 당신이 소장을 맡기로 하고 내려갔는데 소장이 바뀌었거든요? 기분이 좋으실 리가 없지요. "이유가 뭐냐?"고 이러는데, 아무도 이유를 대답 않는 거예요. 한 2년 후엔가 제가 얘기를 했어요. 사실은 이러이러했는데 죄송하다고. 자기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스님이 솔직하게 얘기를 해줘서 고맙다고 했는데. . . . 사실 임헌영 선생이 하셔도 별 문제가 없는데. . . . 어쨌든 당시에는 . . . . 지금도 당신께 참 미안해요. 나하고 나이도 같고 그런데.

퍼슨웹> 말씀하시는 중에 죄송합니다만, 중간중간 사진촬영을 좀 하겠습니다.

원경> 내가 옷을 이상하게 입고 와 가지고. 허허. 아무 때나 찍으세요. 허허.

원경> 아무튼 그렇게 연구소가 탄생되었습니다. 그때도 저는 항상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였고 하니, 좋은 자료가 나오면 그 자료를 모아야겠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그런 세월을 몇 년을 보냈어요. 그렇게 세월을 보냈는데 . . . 쉽지가 않았어요, 자료를 모으는 것이요. 자료란 건 얻지 못하겠습디다. 그러던 중에 제가 1991년도일꺼예요, 기억이 왔다 갔다 하는데. . . 모스크바를 갔다온 적이 있어요. 모스크바를 갔다오면서부터 자료를 (모으기)시작해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다시 느끼게 됐어요. 모스크바에 가 보니까 박길룡 선생이니 강상호 선생이니 레베데프니, 이노겐치 김이니 이런 사람을 만나보니까 이야기가 참 엄청나요. 그래서, '아 이래선 안되겠다' 해서 그때부터 정식으로 자료를 모으자는 생각을 했지요. 자료를 모으려면 경비도 마련해야 되고 . . . 아무튼 그때부터 구체적인 생각을 가지다가 1992년부터 지금 윤해동 선생하고 연구소의 몇 분하고 해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모스크바 유학 가 있는 사람들에게 실비를 주고 자료를 구해달라는 목적으로 첫째는 그냥 실비를 주고 어떤 자료가 나왔을 때는 그 자료를 갖다가 여기서 사는 방법으로 하고. . . . 글을 썼을 때는 그분의 위치에 따라서 원고를 지불하는 방법으로. 실비를 줘 가면서 그런 식으로 해 오다가 . . . 그렇게 해도 뭐가 잘 안되요.  

10년에 걸친 작업이었으니, 그 과정에 발생했던 우여곡절이 적지 않을 것이란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움이 많았음을 짐작케 하는 스님의 표정이 잠깐 스쳐지나간다.

원경> 아무튼 처음 시작한 후 작업이 잘 안되다가, 다시 1993년부터 몇 사람이 책임을 지고 누가 자료를 가져오면 이걸 번역하고, 또 컴퓨터에 넣고 이런 과정을 진행했어요. 그러다가 『역사비평』 장두환 사장이 "자료를 해서 주면 우리들이 다 정리를 하고, 나중에 『전집』이 나왔을 때 200질이나 300질을 사시오. 그렇게 하면 다 하겠습니다"고 합디다.
뭐 그렇게 하자고 했지요. 그건 어려운 게 아니니까. 그런데 그것도 하다보니 원고료도 나가고 하니까, 그 분들이 계산해 보니까 계산이 안 맞았던 것 같아요. 또 자료가 그냥 한꺼번에 다 왔다면 아마 출판사에서도 했을 거예요. 근데 이게 끝이 없어.(웃음) 언제 끝날지도 모르겠는거야. 근데 무슨 일이든지 서로가 아는 사람일수록 내 욕심 취하지 않고 상대 입장을 취해줘야지. 그 분은 사업하는 사람이고 거기다가 계속 투자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컴퓨터에 넣어두고 그러다 나중에 자료가 어느 정도 모아지면은 다시 (전집을) 해보자 그렇게 할려고 했었죠. 그러다가 지금까지 오게됐는데. . . . .
작년에 선친이 탄신 100주년이었거든요. 그래서 100주년에는 그냥 어느 정도는 묶어야 되겠다 그래서, 작년 1월, 2000년 1월경에 편집하는 분한테 맡겼어요. 맡겨 가지고 4월 경쯤이면 (편집을) 마치고, 5월쯤 출간하자 이렇게 생각했어요. 왜냐면 5월 1일이 박선생의 탄신일이예요. 음력으로요. 양력으로는 5월 28일이 됩니다. 그래서 나는 5월 달에는 그렇게 맞추려다가 . . . 어떤 사정 때문에 이루지 못했어요. 또 12월에 가서 마쳐야되겠구나 했는데 12월에도 이게 또 안됐어요. 그래서 현재까지도 사정으로 인해서 이렇게 오게된 겁니다. (웃음)

퍼슨웹> 작업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쉬운 점은 없으셨나요?

원경> 뭐, 근데 제가 생각이 좀 엉뚱해요. 엉뚱하다는 것은 뭐냐면 . . . 쉽게 양보하구요. 본래부터 그 욕심을 져버리는 경향이 좀 많고. 누가 상처를 줬어도 금방 잊어버리는 . . . 불교식으로 말하면 생각을 놔버리는 거지요 . . . 빨리 과거를 잊어버리는 아둔한 것이 좀 있어요. 허허.

퍼슨웹> 관련 연구자들도 잘 알지 못하는 비화를 말씀해 주셨네요.

원경> 이 이야기는 (역사문제연구소) 10주년인가 그 뭐 회고집에 잠깐 이야기했지.

그런 말이 있다. 사람이 없어도 두렵고, 사람이 있어도 두렵긴 마찬가지라고. 첫 인터뷰 이후 두 번 스님이 주지로 있는 만기사를 찾았을 때, 스님을 항상 따라 다니는 개가 세 마리 있었다. 스님 말로는 그 세 마리 모두가 사람으로 치자면 백살을 훨씬 넘었다고 한다. 그중 덩치가 작은 놈은 스님이 기거하던 방안까지 따라와 보충 인터뷰를 하는 내내 쌕쌕거리며 스님의 무릎 위를 차지했다. 짧지만 스님이 보여준 가장 한가로운 그리고 평온한 모습이었다. 여전히 사람들과 속인들과의 거리가 '여전히' 가까울 수 없는 것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스님은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가지게 된다. 역사문제연구소 창립과 전집출간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 스님은 고마운 분들 그리고 미안한 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퍼슨웹> 박원순 변호사하고는 일찍 알게 되셨네요?

원경> 그러니까 이호웅 의원으로부터 통해서 내가 알게됐습니다. 아마 처음에 이호웅씨가 소개를 한 걸로 알고 있어요 그(박원순) 부부를.

퍼슨웹> 이호웅 의원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으셨습니까?

원경> 이호웅 의원은 . . . 1981년돈가? 그 분한테도 죄송한 생각을 했는데.  81년도에 (이호응 의원이) 어디서 저의 얘기를 듣고 찾아온 적이 있어요. 찾아왔는데 . . . 그때 이의원을 경계한 것이 아니라 당시 따라온 기자가 있었습니다. 동아일보 기자였는데. 그 기자한테도 사실은 내가 그 당시 생각을 잘못 했지만은 . . . 얘기가 좀 이상하게 돌아가네. 허허.

기자를 경계한다는 스님의 말에 인터뷰어, 귀가 번쩍(!) 트인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공감대가 이렇게 초반부터 형성되는 것이 '냉정한' 인터뷰를 위해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닌데도 반기는 표정을 피할 수 없다.

원경> 아무튼 그 이야기를 하려면 더 옛날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제가 옛날에 1960년대 중반 쯤에 알았던 시인이 하나 있어요. 승려 시인이. 이분이 세상에 나와서 결혼해서 살아요. 잘 살고 있는데. . . 그 집안에 문제가 좀 생겼어요. 집안싸움이 폭력으로 번지고 해서 결국 그 시인이 입원을 하게 됐어요. 병상에 누워서 나더러 '억울한 나를 좀 도와달라'고 합디다. 근데 경찰은 이 폭행한 사람을 잡아가지도 않아요. 형이 검사랍디다. 그래서 당시 제가 알던 사람 중에 청와대에 있던 분이 있었는데, 그 양반한테 이야길 했더니 바로 잡아갑디다. 근데 법조계에 있으면 머리가 좋지 않습니까? 합의를 해라고 그래서 본인이 합의서를 써 줬어요. 그러던 사건의 와중에서 . . . 그 부인되는 사람이 동아일보 기자를 데리고 나한테 온 겁니다. 나한테 무언의 협박을 한 거지요. 나의 신상을 가지고 말입니다. 근데 이 사건은 벌써 1970년대 사건이거든요. 사고를 당했던게. 근데 당시 기자하고 왔는데, 이 부인은 내가 아무개 아들이란 걸 알고 있었어요 . . . . 이걸 가지고 자기 부부간을 원상태로 해달라고. . . . 그래도 난 모른다고 했지만. 근데 나는 지금도 여자를 무서워 해요. 괜히 눈길 한번 잘못 줬다가 평생 살자고 하면 어떻해요? 허허.
아무튼 그랬는데,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때 그 기자한테는 좋은 절이 있다고 해서 그냥 따라온 거더라구요. 근데 본디 나는 죄인이다보니까 그렇게 거꾸로 생각한거예요. 근데 그 오해가 풀리지도 않고 2년인가. . . . 3년인가 돼서 바로 그 기자하고 이호웅 의원이 온겁니다. 우연히 왔다가 찾아온 거지요.

스님이 사람을 피했던 것은 본능이었다. 어릴 때부터 俗人을 멀리하라는 '누군가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어찌보면 이는 박헌영의 모습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해방 직후 남북한에서 활동한 소위 '유명인사' 가운데 박헌영만큼 공개적인 자리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인물도 없다. 그에 대한 인상을 알려주는 증언에서도 그는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고 한다.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지만 스님 역시 쉽게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원경> 그런데 내가 아주 냉정하게 경계를 했죠. 옛날 같으면 밥도 차려 드리고 차나 드리고 했는데. . . . . 이호웅이는 투사기질이 있으면서도 어떻게 보믄 형사랄까 안기부 요원이랄까 그런 인상이 좀 있어요. 그래서 내가 경계를 했지요. 근데 나중에 지나면서 가니까 '정말로 스님 무안할 정도로 절 경계할 때, 아, 저게 어린 시절부터 자기 속에 내면에서부터 외부사람을 거부하다 보니까 저렇게 나오는구나' 하고 자기는 이해를 했다고 하더라구요. 다음에 곡차 한 잔 하면서 얘기를 할 때 그 기자에 대해서 얘기를 했죠. 그래서 아이구 그러냐고. 기자를 불러서 얘기를 했더니, 자기는 그저 정말 농사지으면서 소도 키우면서 마을에 가서 품앗이도 하면서 살던 친군데. 어쨌든 오해가 풀려서 내가 "아이구, 죄송하다"고 말이지. 내가 그때 그 사건 때문에 그랬다고.(당신을 그렇게 냉대했다) 그 사람은 자기는 그 전엔 (내 신원에 대해)전혀 몰랐다고, 그 사건 때문에 기자를 데려와서 나를 갖다가 노출시키려 하는 구나 해서 내가 경계를 했다고 그랬었어요.

정보의 權力化란 이런게 아니겠는가? 진정한 펜파워(pen power)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모두 공개(혹은 보도)하지 않을 때에만 작동한다. 공개(보도)한 정보와 수첩 안에 감추고 있는 정보 사이의 비율에 따라 권력의 강도가 결정된다. 비례관계가 어떻게 되냐고? 상식이다. 안기부를 보라. 감추고 있는 정보(혹은 첩보)가 많을 수록 배기량은 올라간다.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100% 감추고만 있으면? 글쎄, 뭐 바보하고 구분되지 않아서 뭐라 말하기가 그렇다.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정보를 권력화 하고자 한다면 정보를 항상 '어느 정도' 공개하는 행위(가판 혹은 배달)를 유지해야만 한다. 마이크 혹은 수첩에 적어간 모든 사실이 그대로 보도된다면 그게 무슨 기자고 언론권력이겠는가? 누구 말마따나 나팔수지 나팔수! 이 '공개', '비공개'의 관계를 가장 잘 활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극대화하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하나님이다. 어쩌다 한번씩 백년에 한번, 천년에 한번 자신이 가진 정보(전문가들은 이를 '의지' 혹은 '뜻'으로 칭한다)를 알릴 뿐이니까. 그것도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선지자나 뭐 예언자 같은 분들을 활용하여 아주 '은유적'으로  자신만의 정보를 공개하시니 이 얼마나 기막힌 전략인가! 아무튼 하나님의 이 전략을 어설프게 활용하는 집단에 대해서 스님은 본능적인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이야기는 다시 스님의 과거로 돌아간다.

퍼슨웹> 그 당시는 선친에 대해서 잘 모르실 때였습니까?

원경> 아니지. 그건 어려서부터 알고 있죠. 단 그 어른이 그리고 관계가 세상에 노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만 알고 있고. 그 분이 어떤 분이고 정확히 안 것은 23세부터 정확하게 알았을 거예요. 제 머릿속에 있는 그 분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도 그 당시에 알았던 지식이고. 그래서 요즘 와서 간혹 혼란이 오는 것은 학자들이 어떤 방향에서 글을 쓰면은 일단 자료는 못보고, 나는 이러이러한 얘기를 들었는데 얘기가 이러하구나. . . . 참 이야기가 조금 그거 하구나 그러는 거죠.

퍼슨웹> 그러면 스님과 선친과의 관계가 공개적으로 알려진 것은 언제쯤인가요?

원경> 그것은 잘은 모르겠어요. 잘은 모르겠는데 일반적으로라면 . . . 그 이야기는 창피한 얘긴데 그건 하지 말지. 허허 . .

첫 인터뷰 때는 그냥 넘어갔지만, 세 번째 만났을 때는 이야기 해 주셨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스님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누구'가 과연 누구인지 우리 중생들은 알 길이 없다. 스님의 '실존'이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되돌아온 최초의 사례를 이야기하면서 조금은 어렵게 들리는 한국의 조계종 법맥과 禪師들의 이름이 열거되었다. 원경 스님이 말씀하시는 임제법맥과 교구 등에 관한 이야기는 대한불교조계종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http://www.buddhism.or.kr)

원경> 제가 여주 흥왕사에 있을 때였습니다. 흥왕사 있을 때. . .그 때가 1977년인가 그랬는데. 제가 참 놀랬어요. 당시 어떤 일이 좀 있었는데 그 뒤로 . . .뭐랄까 . . .저에 대해서 자꾸 캐는. . . 정보기관을 통해서 . . . 뭐 이 분은 지금도 대한불교 조계종 최고의 자리에 있는 분인데. 하여튼 나에 대해서는 모든 걸 오랜 동안 알아보고 했어요. 아마 세상에 알려진 것도 그분들을 통해서일 거예요. 세상에 정식으로 알려진 것은 정확하게는 . . . 1982년도쯤. . . 이 문제는 사실 감투하고 관련되어 있습니다. . . (조계종) 제2교구 주지문제죠. 한국에 25개 교구1)가 있는데, 2교구가 경기도 한수 이남을 관리하는 겁니다. 그걸 우리 門中에서 관리하고 있어요.

퍼슨웹> 門中이라고 하시면. . .?

원경> 그러니까. . . 부처님에서부터 이어지는 臨濟脈이 고려말에 태고 보우로 해서 한반도로 넘어오게 됩니다. 이 法脈이, 임제법맥이 아직 살아있는데 전강 큰스님이 77대입니다. 만공스님이 76대고, 쓰러져 가는 우리 禪佛敎 중흥을 하신 경허스님이 75대고. 제 스승이신 인천에 계신 松潭 스님이 78대입니다. 그 문중이 인천 용화사를 거점으로 했는데 이것이 바로 전강스님 문중입니다. 송담스님이 전강스님의 법통을 이으신거지요. 그 다음은 아직 법통을 이어간 사람이 없습니다. 법통을 잇는다는 건 불교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저런 (벽에 걸린 송담스님 사진을 가리키면서) 어른들은 수만 수천 제자들 중에 단 한 명 부처님 법통을 이어갈 제자를 찾아 당신 법통을 이어줘야 한시름을 놓는 거지요.
아무튼 그런데, 송담 큰스님께서 (저한테) 2교구를 맡으라고 하셨어요. 근데, 저는 항상 남들이 선망하는 것은 싫어하는 마음이 있어요. 경계를 하는 거지요. (왜냐하면) 항상 나를 음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분명히 내 사생활을 가지고 세상을 시끄럽게 할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아닌게 아니라 어른 (송담스님)의 말씀이라면 불 속에 뛰어들라면 뛰어들 각오도 있지만, 그것만은 못한다고 그랬어요. 그 말씀만은 승낙을 못한다고. 그랬더니 큰스님이 왜 못하냐고 그러시면서 그럼 좀 두고보자고 있었어요. 그러고 있는데, 서울 돌산장 여관이라는 곳에서 정유스님, 도명스님 등 몇몇 스님이 모였는데. 도명스님은 제 친구였어요. 지금은 열반하셨지만. 근데 그 스님이 저한테 대놓고 욕을 하시는 거예요. "이 나쁜 놈아. 몇 십 년을 같이 지내왔는데, 이 놈이 알고 봤더니 근본적으로 빨갱이야. 너 이 녀석아 왜 나를 속였냐"고 하는거야. 내가 아무개 아들이라면서 말이예요. 몇 십 년을 사귀어 왔지만 나에 대해서 아는 게 없거든요? 말을 전혀 안하니까. "이 새끼가 근본적으로 빨갱이 기질을 갖고 있는 놈"이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너 그 소리 어디서 들었냐?"고. 그랬더니 자기도 말 못 하겠대요. 대신에 "문제가 뭐냐면 핵심으로 들어가자. 너 이 상황에서는 (제2교구)본사주지 못한다. 엄청난 음해세력이 있으니까 포기해라"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나는 본사주지 한다고 했던 적도 없고, 큰스님이 명령을 해도 받아들인 적이 없다. 그러니, 너한테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본사주지를 원하고 있을 거다. 근데 그 사람이 아마 원하는 건 추천서일거다. 그러니 내일 오라고 해라"
이 이야기만 해도 소설 한 권이 넘어요. 허허. 다들 놀래지요. 놀래는 것이. . . 너 자식 아무개 아들이라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와요.

퍼슨웹>그게 흥왕사에 계시던 1977년도고 그 다음에 인천 용화사로 가신 겁니까?

원경> 네. 아무튼 1977년에 그런 안 좋은 일이 있었지만, 그때 지혜롭게 잘 대처를 했죠. 용화사는 사찰 건물을 새로 지어야 하는데 아무도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한 5년 동안 지금 있는 용화선원을 짓는 일을 했지요. 5년 정도 일하다가 그때 또 교통사고가 나서 갈비뼈가 아홉 대나 부러진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치료차 거기를 나왔는데, 흥왕사로 안가고 안성에 있는 청룡사로 간겁니다. 흥왕사로 다시 돌아가지 않은 것은, 벌써 여주바닥은 나한테 대해서 알만한 것은 다 알게 되었거든요. 참 희한한 것이, 거기 있는 할머니들이 가끔 와서 나한테 그래요. 어디서 소식 듣고 왔는지 자기 남편생각, 자기 자식생각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가족 중에) 산에서 쓰러져간 사람들(=빨치산)이 많거든요. 내게 와서는 스님이 그런 사람인줄 전혀 몰랐다면서 울고 하는걸 보니까. . .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너무 한 곳에 오래 있었구나' 그래서 자리를 바꾼거죠.

퍼슨웹> 그때가 1983년입니까?

원경>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이란 것이 그렇게 빠릅디다. 세상 사람들이 자꾸 알게 되요. 그러니까 월간지 기자들이 자꾸 접근해오고, 아는 사람 통해서 만나자고 하고 . . . 월간지 같은 데는 뭐 여성지 겠지요, 여러 번 (내 이야기가) 나왔다고 하는데, 난 만난 적이 없어요. 멀리서 자기들이 사진 찍고 마음대로 썼겠지요.

스님의 신상(박헌영의 아들이라는 점)이 일반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어떤 사건과 시점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대해서, 스님의 이야기를 토대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스님의 이야기는 시간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선 가장 먼저 있었던 사건은 1977년경 흥왕사에서 동료 스님이 2교구 주지임명 문제로 스님을 '협박'한 사건이다. 이때가 스님이 당시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님의 신상을 동료 스님이 되묻고 또 '협박'한 시점이다. 이때 스님은 자신의 신원이 어딘가에서부터 새나갔다고 생각했겠지만, 자신은 아니므로 정보부 쪽으로 추측한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이 폭행사건(1970년대 후반경)이고 그 다음이 이호웅 의원과 기자의 방문(1982년)이다. 따라서 1977년경 동료스님 사이에서부터 알려진 스님의 신상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폭행사건이 있을 무렵에는 스님의 신상을 지상에 공개하겠다고 협박한 한 부인에게 이용되기까지 한다. 이후 흥왕사 주변(여주) 일대에서 스님의 이야기가 알려져 신도들이 그 때문에 찾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퍼슨웹> 그럼 스님께서 공개적으로 언론과 인터뷰를 최초로 하신 것은 1990년대 이후인가요?

원경> 가만있자. . . 인터뷰 한 것은 잘 모르겠네. . . . .

류준범> 『사회평론』 인터뷰2)가 처음 아닙니까?

원경> 『시사저널』 창간호(1989.10)가 처음일겁니다. 왜 인터뷰를 했냐면 . . . 그 최원영 씬가요? 시사저널 만든 사람이? 아마 최원석 씨 동생일 겁니다. 그 당시에 박권상 씨가 주간인가 대표인가 하셨을 거고. 그렇지만 그때도 제가 『시사저널』하고 인터뷰할 생각은 없었어요. 돌아가신 김기팔(방송작가. MBC 드라마 "제1공화국", "땅" 집필)씨가 몇 번 왔습니다. 와서 뭐라고 하냐하면은 . . . 이건 공개적으로 얘기하기는 뭐하지만. 『시사저널』 사장이 서울텔레콤을 만들었는데. . . 당시는 잡지 이름도 아직 안정해졌을 때입니다. 아무튼 주간지와 영화사를 하나 만드는데, 영화사 이름은 서울텔레콤이라고 하는데, 영화를 만들어서 방송국에 파는 것이다 그래요. 그런데 여기 첫 작품으로 박헌영 선생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지금 구상하고 있다고 해요. 5부작으로 하는데 도움을 달라고 그랬어요. 첫째 안은 90년댄가 80년대 말인가. . . 정확하지는 않은데. 내가 박 선생 발자취를 찾아다니면서 자료도 보고 현장도 가고 그렇게 하면서, 그걸 인제 역사를 밑바닥에 깔면서 말이죠. 모스크바까지 갔다올 계획도 세우고 있었으니까. 그걸 하시겠냐고 첫째는 왔던거죠. 그때 그것은 못하겠다고 했어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나는 "한평생 공개적으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어렵지 않겠냐"고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그렇다면 다큐멘터리를 하는 과정에서 스님이 알고 있는 이야기, 스님이 갖고 있는 사진, 스님의 친척 이러한 관계를 증언해 달라고 해서 같이 다닌 적이 있어요. 그 때 그. . . 아이구 그 분 성함이 뭐더라? 아무튼 기자가 같이 다녔습니다. 『시사저널』 창간호 하는 이분이 같이 다니면서 대강 뭐 했는데. 특집으로 만들었다가 내용이 너무 많아서 나중에 뭐 두서너 장 정도로 줄인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인터뷰를 하고 사진도 찍자고 해서 머 했는데. 잡지도 나온다고. 그래서 인터뷰한 내용을 한 번 보시고 그냥 내면 좋지 않겠냐고 해서 . . . 그 뭐 거절할 수 없는 상황 아닙니까? 그리고는 또 거기에 관한 글을 박호성 교수가 하나 쓴 걸로 알고 있어요.

퍼슨웹> 스님이 직접 인터뷰에 응하신 것은 세 번 정도 되는 거군요.

원경> 인터뷰한 것은 아까 말한 이미숙 씨하고 한 거. 월간지 주간지는 사실은 안 했어요. 자기들이 멀리서 사진 찍어서 자신들이 만든 얘기지 제가 하기는 월간지에 나온 것은 인터뷰한 것은 한 번도 없습니다.

퍼슨웹> 가장 자세한 것은 『역사비평』과의 인터뷰였지요?

원경> 『역사비평』은 우리 윤해동 선생이, 『역사비평』에 싣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니고 전집이 마무리 되가고 있으니까, 스님얘기도 참고를 좀 해야 한다고. 그래서 그거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그래서 했는데. 『역사비평』에서 한번 써먹자고 하니 아는 사람인데 않된다고 할 수도 없고. 하하하

이 때 윤해동 선생님께서 오셨다. 역사문제연구소에서도 오래 활동하셨고 무엇보다 『박헌영 전집』 출간을 위해 스님을 제외하고는 가장 애를 많이 쓰신 분이기 때문에 이제 본격적으로 전집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퍼슨웹> 『전집』에 관해서 몇 가지 더 여쭤보겠습니다. 전집에 포함된 자료들이 많이 있을 텐데요, 기존에 발굴되지 않았다든가 아니면 새로운 자료라고 할만한 것이 있습니까?

원경> 글쎄요 . . .  그런 건 전 잘 몰라요. 그건 또 우리 예를 들어서 윤해동 선생이나 류준범 선생 이러한 분들이 했는데. 어떤 것이 새로운 것이고 . . . 저는 다 새롭죠. 못 본거니까요. 누가 쓴 논문도 나는 안보니까. (전부) 새롭지만 저는 그렇게 얘기해요. 새롭다는 기준은 어디다 둘 것인지. 또 예를 들어서 여기에 내가 찾아내지 못한 것이 어떤 학자들이 이미 봐버렸으면 그건 또 새로운 거 아니고.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이 『전집』 안에 새로운 것이 어떠한 것이 있다고는 말씀드리기가 어렵고요. 그렇지만 그래도 새로운 것이 몇몇 가지는 있지 않겠습니까?(웃음)

퍼슨웹> 준비하시면서 어려웠던 점도 많으셨죠?

원경> 어려운 건 뭐. . . . 그건 그냥 한 평생 할 작업으로 생각했는데. . . 작년에 욕심을 냈던 것은 (탄신) 100주년에 맞춰서 여기서 일부 마무리하고 나머지는. . . 또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나머지 새로 발굴하면 증보판으로 묶어야 되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도 스님이기 이전에 . . . (아들로서) 아버지라는 분이 세상에 와서 남쪽에서도 버림을 받았고, 북쪽에서도 버림을 받았고. . . . 물론 당신이 . . . 당신의 투쟁방법이 잘못됐을지는 모르겠지만. . . 그 깊이는 내가 말못하지만. . . . 그래도 모든 사람들이 환갑도 하고 뭣도 하고 한다는 데, 그래도 세상에 왔다 가신 지가 100년이 되는데. 이런 분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것을 알리고 싶고. . . 누가 욕을 하던 간에 말이에요 . . . 이 나라를 망쳤다는 사람이라고 비판을 하던 간에. 또 북쪽에서 말하는 미제의 스파이라고 하던 간에. 나는 자식된 도리로써 내가 자료를 모아서 훗날에 학자들이 이 분야에 공부할 수 있는 분들이, 좀 쉽게 할 수 있으면 좋은 것이지 . . . 여기서 무슨 평가를 바라고 한 것은 없어요. 단, 내 평생에 찾아야 할 것은 아까 말씀드린 「정책입안보고서」, 이거예요. 이것이 박헌영 선생이 해방정국에서 이상적인 자기 조국에 대한 미래를 설계해 놓은 거예요. 농민문제는 어떻게 할 것이며, 근로자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이며, 또한 이 조국 남북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하는 . . .

이 부분에서 스님은 마치 한 명의 선동가와 같았다. 선전선동의 기본원칙인 운율과 고저장단을 맞춰가며 눈앞에 '정책입안보고서'를 보고 읽는 듯 했다.

원경> 물론 (박 선생은) 통일문제에 관해서도 남과 북을 가르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은 분명한 것이고. 하여튼 (「정책입안보고서」에 담겨 있는 내용은) 정치고 뭐이고 이러한 등등이 당신의 이상이라고 해야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이것(「정책입안보고서」)은 일생에 찾아내야 한다고, 그런 인연이 오면은 찾으라고 교육을 시켰던 어른들이 옛날에 계셨어요. 거기서 더 욕심 낸다면 박헌영 선생의 파일입니다. 이거 가지고 모든 것을. . . 문책(문서, 서책)을 보더라도 계기(근거)가 있어야 찾아보지 않겠습니까? 어떤 분야를 어떻게 찾아봐야겠다고 참고할 수 있는 . . . 이런 사람의 투쟁방법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는지 이러한 등등이죠.

퍼슨웹> 전집 나오는 것만으로는 작업이 다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원경> 그렇습니다. 죽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해야죠. 그렇다고 이걸 내가 어떤 명예로 삼는다든가 어떠한 보람으로 삼는다든가 그런 건 없어요. 이거 제가 아니면 누가 할 사람이 없어요. 내가 죽기 전에 나만이라도 해 놔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거 사장되고 말아.

이 말을 하면서도 스님은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인터뷰어에게는 환청이 들렸다. 긴 한숨소리인 듯 했다. . . . .

퍼슨웹> 비극적이라면 비극적인 상황이네요. 김남식 선생 같은 분이 이전에 조금 하긴 했지만, 어쨌건 연구자들이 해야 될 일인데 말입니다.

원경> . . . .글쎄요. . . 그분이 성공한 혁명가였다면 . . . 안 그렇겠죠. 그분이 영광된 어떠한 것을 갖고 계신다면 학자가 아니라 별사람들이 다 덤벼서 소설도 쓰고 다 했겠지. 내가 이것을 특별히 조명하기 위해서 하는 건 아니예요. 단 이제는 더 이상, 더 이상 왜곡되어서는 안되겠다는 겁니다. 일단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 뒷모습을 얘기하든 앞모습을 얘기하든. . . . 사람을 얘기할 때도 여러 가지 얘기하거든요. 앞모습 본 사람은 뒷모습 얘기 못합니다. 비판을 해도 거기(자료) 바탕 위에서 하고 새로운 자료에 의해서 바라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닙니다.

고생은 함께 해도 영화는 함께 누릴 수 없다던가? 박헌영은 정말 실패한 혁명가인가? 그렇다면 원인은 무엇일까? 섣불리 짐작할 수 없는 것은 아마 스님이 '아직은' 말을 아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건 많은 사람들은 낙오한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총총히 사라지거나, 가끔 측은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침을 뱉으면서 그의 나약함을 비웃으며 지나쳐갔다. 이 과정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다 보면 "실패한 자는 문제있는 인간이거나 심지어는 罪人"으로까지 비약하게 된다. 이 과정에는 그렇게 어려운 논법이 필요하지 않다. 어떤 경우 역사의 단죄는 사법적 단죄보다 훨씬 잔인한 결과를 낳기 때문에 우리는 더 자세한 사건 심리와 더 많은 증거 제출이 필요하다. 많은 사실들과 정황들을 꼼꼼히 검토하고 또 되새김질 해보아야 한다. 결론을 내리기 이전에 신중에 신중을 더해야 함은 물론이고, 그렇게 내린 결론에 대해서도 또 언제든 뒤집어 질 수 있다는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한 사람의 전문가에 의해서 가능한 것은 물론 아니다. 오랜 시간과 거쳐야 할 많은 작업 공정 그리고 조력이 필요한 수많은 전문가들이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스님 말대로 '실패했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 텅빈 자리를 원경 스님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변호사 자격 없이 법정 변론(?)에 나선 아마추어처럼 말이다. 스님 자신은 『전집』 작업이 '변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심리를 위한 증거의 확보"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자신은 변호하거나 재조명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 .

퍼슨웹> 자료를 모으는 과정은 순탄했습니까?

원경> 자료를 구하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게 있었는데, 입수하지 못한 것이 있어요. 책 두 권이에요. 박선생이 직접 쓴 책입니다. 출판은 1947년도에 됐는데, 남쪽에서 출판을 했는데 북쪽에서는 모두 압류되어 없어졌답니다. 불을 질렀답니다. 이것을 박길룡 씨가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건 중앙일보의 김국후 기자가 . . . . 거 기자라는게 참 대단합디다. 저는 시켜줘도 못할거 같아요. 기자들은 먼저 가면, 서재를 싹 뒤져요. 책을 전부 꺼내요. 그래서 그 책들을 보면서 이야기를 해 나가요. 그러다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 책을 달라고 해. 안준다고 하면 빌려달라고 또 그래요. 허허. . . 그래서 난 그것이 나한테 올 줄 알았는데. . . 그냥 그 분이 갖고 계세요. 지금도 안 내놔요. 그래서 내가 "그럼 책 제목하고 표지만 복사해 주십시요" 그랬어요. 근데 이 분은 자기도 학위를 받아야겠다 이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책 몇 권 갖고 있는 걸로 학위받는 거 아니다. 책 설명 해서 학위 받는 거 아니다. 그러니까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달라고 했는데. 그래도 안주시더라구요. 언젠가는 준다고 하는데.  그 양반이 돈을 원하는 것도 아닐테고. 그 양반 말로는 일본 사람이 그 책을 보고 아파트 한 채를 사준다고 했는데도 안줬데요. 뭐 나는 아파트 사줄 돈은 없으니까. . . . . 언젠가는 책이 나오겠지요. (박전집) 증보판이 나올때요. . . . 책(전집)을 준비하면서 그런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있는데. . .  지금은 기자를 관두고 국회의장 사무실에서 일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의장 공관이죠? 아마. 몇 번 만났는데도 이 분이 영 책을 내놓을 생각을 않하세요. 한번만 보자고 해서 언뜻 보긴 봤는데. . . 그 양반 했던 것처럼 하고픈 생각이 들기까지 했지만 그럴 수 있나요.(웃음)

퍼슨웹> 다른 분들을 통해서 한번 부탁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원경> 전혀 안돼요. 네. 신문사 쪽에서도 안돼요. 그래서 내가 편집위원으로 들어오시고 그걸 사용하자고 했는데도, 못하겠다고 하세요. 세상에 한 권밖에 없는 책인데 . . . 허허. 그래서 어떡합니까? 일부는 누가 인용한 적이 있더라구요. '좋은날이여 오라'라고 하는 책은 누가 한번 인용한 적이 있어요.

퍼슨웹> 고준석 말입니까?

원경> 네. 그런거 같네요. 그 분이 인용한 걸 본적이 있어요.

퍼슨웹> 언젠가는 증보판에 꼭 포함시켜야겠군요. 스님이 처음 모스크바 직접 방문하셨을때 누님도 만나 뵙고 하셨는데, 그때 누구한테 도움을 받으시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

원경> 그런 거 없지.

퍼슨웹> 전집 출간을 위해 경제적으로 도와주시거나 한 분은 안계신가요?

원경> 글쎄요. 없는 거 같아요. 힘들지요. 한데 누가 도와준다고 해도 제가 거부를 했어요. 어떤 돈인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요. (작년에) 동아일보에 (재정문제로 『전집』 출간이 늦어진다는) 기사가 났을 때 그걸 보고 찾아오신 분이 있어요. 경기高도 작년에 백주년 사업을 했는데, 박선생이 경기 15회거든요? 심훈선생도 15회고, 박열선생도 15회고. 그래서 경기고 출신에 박선생 같은 인물도 있다. 유진오 같은 사람만 인물이 아니다고 해서 그분들이 구상한 것이 있더라구요. 연극이나 뭐 그런 사업들요. 그래서 제가 자료가 좀 있으니까 필요하면 드리겠다고 했더니, 그 쪽에서 그럼 우리가 경제적으로 좀 도와드리겠다고 하십디다. 근데 제가 거절했어요. 그 분들은 자료가 박갑동(전 남로당원이자 「해방일보」 기자)씨가 쓴 책밖에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그건 너무 빈약하니까 제가 자료를 드리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미국 들어가시기 전에, (박선생) 연보를 드렸어요. 연보만으로도 대충의 구상은 할 수 있으니까요. . . 그리고 또 인천에 제 동생뻘 되는 분이 한 분 계시는데, 사업을 하셨어요. 그러다 정신병도 생기고 해서 망했는데. 이 사람은 작은 아버님이 정... 뭔가 하는 분인데, 좌익활동을 하신 분이에요. 그래서 작은 아버님 때문에 자기 아버지가 보도연맹에 편입되어서 6·25 전에 돌아가셨어요. 자기도 겨우 살아 남은건데. 그렇게 세상 살다가 어떻게 사업을 하게 되어서 돈을 크게 벌었는데, 또 정신병도 겪고 어쩌고 해서 아무튼 복잡한 일을 많이 당했어요. 5년만에 정신병원을 나왔어요. 겨우. 인천에서도 제일 큰 서점을 하기도 하고 하여튼 그랬어요. 근데 이 사람이 아파트를 저한테 한채 줬어요. 그래서 제가 난 이런 거 팔 줄도 모른다고 하면서 거절을 했었어요. 그분이 짓던 아파트였죠. 거절했던 이유는 나중에 또 그 사람들이 사회에 활동하는 사람들인데 괜히 누가 될 수 없고. . .

아무튼 제 힘으로만 하려고 했어요. 근데 뭐 경제적인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 어떻게 지금까지 해 왔는데 아직도 원고가 지연되고 있는 점이 . . . 금년 7월 19일에는 출판을 할려고 했는데, 못할꺼 같아요. 금년부터는 7월 19일부터 제사를 모시려고 하거든요. 그 동안 7월 19일로 바꿀까 하다가, 전집 나온 다음에 바꿔야겠다고 맘먹게 됐어요. 작년 100주년이니까, 여지까지 지내온 거니까 12월 15일로 하고, 금년에는. . . . 근데 7월 19일은 못 맞추겠어요. 허허허.  

앞서의 설명대로 7월 19일은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했던 소련파(박길룡, 강상호)들이 증언한 박헌영의 처형날짜이다. 이들과 만나기 전까지 스님은 부친의 사망날짜를 12월 15일(재판이 끝난 날)로 정하고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스님이 기대했던 것처럼 7월 19일까지 『전집』이 출간되기는 힘들어 보이지만, 그래도 10년 가까이 끌어온 작업은 이제 거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 탄생 100주년과 기일에 맞추지는 못했지만 곧 출간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스님은 출간되어 나온 『전집』을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퍼슨웹> 힘들게 나오는만큼 의미있는 자료집이 될 거라 믿습니다. 그런데 모스크바에 누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그 전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원경> 누님인지 형님인지 누군가는 있다고 나는 믿어왔어요. 그것이 그러니까. . . . 아버지가 1939년 대전감옥에서 나오셨을 때 고향에 오셔서 (스님의) 육촌누님을 만나셔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육촌 누님이 지금도 아주 연로하신데. . . . 첫마디가 그랬다고 해요. "너희 남편 아직도 면에 있냐?" 있다고 하니까, "아직도 마을에 다니면서 공출 같은 거 하고 그러냐"면서, "그런 짓거리 하지 마라. 머지 않아 해방이 온다. 해방이 오는데, 그런 식으로 살면서 동족끼리 인심잃으면 되겠느냐. 차라리 면서기를 관두던가 해라. 될 수 있는 한 인심 잃지 마라"고 하셨다고 해요. 저한테는 육촌누님이 되시는데 현재도 대전에 살고 계세요. 그 분 아들이 숭전대학교 교수로 계세요. 이수민이라고 하는데. 대전에 있는 충남대학굔가, 숭전대학굔가. . . 확실치 않네요. . . .  아무튼 (아버님은) 그 뒤로 사라지셨는데, 저희 할머니, 전 어머니를 자꾸 할머니라고 해요. 아무튼 그때 만나셨을 때가 겨울이라고 해요. 추울 때라고. 머리는 밤송이 같았고. 청주에서 만나신 것이 추울 때니까. . . 11월 그 정도 되었겠네요. 1939년 11월. 그래가지고 청주에서 좀 머무시다가 서울로 오셔 가지고, 거기서부터 콤그룹 활동을 하신거지요. 인천에도 가시고. 그러던 중에 저를 갖게 되셔서, 할머니한테는 애를 놓으라고 했지만, 당신께서는 지하로 들어 가야할 형편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헤어지고는 어머니는 청주에 가셨는데, 할머니하고 아주머니라고 하시는 분이 왔다고 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큰어머니겠지요. 뭘 한참 싸오셔서 어머니 뒷바라지하신 거 같아요. 아버지께서는 잠적하시고. 그 뒤로는 어머니와는 헤어지신거죠. 잠적하셨으니까. 서울생활에서는 어머니께서 필요하셨겠지만, 잠적한 뒤에는 혹이 되는거겠지요. 어머님이. 만삭이 되고 했으니까. (웃음) 샤브시나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 뒤로 아버지는) 제일 먼저 대구로 내려갔다고 하세요.

콤그룹은 1939년 박헌영이 6년 간의 복역을 마치고 출감한 뒤, 당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김삼룡, 이주하 등과 결합하여 조직한 좌파의 조공 재건활동 멤버들을 말한다. 김삼룡, 이주하 등은 박헌영을 리더로 영입한 다음 대부분의 활동 좌파들을 조직하여 단일 대오를 형성하였는데, 해방 직전까지는 가장 광범하고 활발한 활동을 벌인 좌파조직이었다. 1941년 이래 여러차례의 검거선풍으로 와해되었는데, 콤그룹이 해체된 이후에 조선에서는 조직적인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더 이상 표면화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한다. 따라서 콤그룹 활동은 해방 후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유력한 前歷으로 작용하게 된다.

퍼슨웹> 누님에 관한 이야기도 그럼 그때 하셨습니까?

원경> 참, 그 이야기하던 중이었지.(웃음) 아무튼 그때 고향에 와 계실 때, "주세죽(박헌영의 첫 번째 아내) 여사가 어떻게 됐냐"고 물으니까 "아이 낳다가 산후가 잘못돼서 죽었다"고 하는 데 그 아이는 누가 키우고 있다고 하셨답니다. 그 얘기를 저는 들었어요. 그리고 또 언젠가 그 . . . .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쓴 박갑동 선생한테 전화가 온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있었어요.

"선생님, 선생님이 쓴 글은 옛날에 읽어봤는데, 거기에 어린 남매가 나오는 데 큰아이가 나이가 몇 살입니까?"하니까 아주 어리다고 그래. "나이가 그 당시 20여세 안됐냐"고 하니까 아니라고 한 서너 살이라고 그래. 그러면 다른 사람이구나, 이거는 작은 어머니(박헌영이 북한에 있을 때 결혼한 여자, 윤레나)한테서 난 아이들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믿어오다가 결정적인 계기는 그 중앙일보죠. 중앙일보에서 갑자기 찾는 거예요. 근데 제가 아까도 얘기했지만 신문사 기자들을 꺼려해요. 권혁룡이라고 중앙일보 기자가 있어요. 강원도 담당하는 지방 기잔데, 형님 동생 하면서 지내는 사람인데 지금은 간암으로 죽었습니다. 아무튼 그 사람이 달려왔어요. 달려와서 지금 특보가 나온다 이거예요. 형제를 찾았다고 하는데. 중앙일보사는 이걸 (나와) 같이 엮어서 할려고 하는데, 일단 나는 못하겠다. 신문이 나와야 알겠다. 신문을 봤으면 좋겠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당시 시사저널에 인터뷰는 했지만은 일간지에 내가 인터뷰할 그런 것은 아니고, 그런 사람도 아니고. 내 생활이 아직도 세상에 알려지는 게 싫고. 그런데 그 이튿날 신문에 나오고, 그런 다음에 혁룡이가 왔어요. 자기가 하나 해야겠다. 같이 모스크바에 가자 했는데, 혁룡이가 갑자기 시무룩하더니 벌써 본사에서 갔습디다. 그래서 난 급히 갈 의사가 있냐고 하길래 간다고 했어요. 당신들이 안하더라도 나는 간다고. 그런데 주소를 가르쳐주지를 않아요. 그래서 일단 그 김국후라는 중앙일보기자 누님을 만났던 이 분하고 이제 모스크바를 갔습니다. 내가 경비를 다 대가지고 모스크바를 갔어요. 가보니까 누님이 여행가고 안계시더라구요. 여행가고 안계신데 일부사람들이 자꾸 빼돌리는 줄 알고. 그래가지고 사실 그 사람한테 싫은 소리를 했어요. "너 만일에 내 문제를 가지고 장사하는 식으로 했다가는 너 그냥 평생 병신을 만들어 논다" 그렇게 까지 기자한테 얘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박길룡(前 북한 외무성 副相) 선생의 집에서 머무르다가 누님이 오셨다고 해서 누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래서 뭐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참 드라마 형식으로 했는데. . . . 사실은 눈물도 안나와요. 안나오고,  누님도 그냥 눈만 말똥말똥하고. 단, 양손을 서로가 잡고 앉았는데, 간혹 생각이 지나갈 때마다 서로가. . . 내가 누님의 손에 힘을 주는 경우도 있고, 누님이 내 손을 . . . .갑자기 뭔 생각을 했는지 말 한마디도 안 통하니까. 그냥 갑자기 내 손에 힘을 꼭 주고 잡는 이런 것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인제 샤브시나 여사를 만나고 레베데프(소련 제25군 정치사령관, 북한점령 소련군의 2인자)씨를 만나고, 박병률(前 강동정치학원 소장)씨를 만나고, 강상호(前 북한 내무성 副相)씨를 만나는 과정에서 . . . 누님하고 같이 큰어머니 묘소를 찾았어요. 거기에는 대부분 화장을 합디다. 그러고는 좀 유명하던가 그래도 힘있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화장해서 비석을 세우고, 그냥 서민들은 화장을 해서 그 위에 계속 뿌리는 거예요. 그래서 몇 년부터 몇 년까지 죽은 사람을 거기다 딱 써놨어요. 그래서 내가 법복을 입고 승복을 입고 큰어머니를 위해서 독경을 하면서 명복을 빌어드렸죠.

퍼슨웹> 박비비안나씨가 한국에 오셨을때, 모친(주세죽)과 박헌영 선생의 위패를 스님이 모시고 있는걸 보고 고마워 하셨다는 걸 들었습니다.

원경> 아까 말했던 용화사라는 사찰이 인천에 있어요. 그곳에 가면 윤이상씨의 위패도 모셔져 있는데, 수만명이 모셔져 있어요. 그 번호가 지금은 벌써 3만 몇 단위로 넘어가 있는데, 2828번에 보면 박헌영 선생하고 주세죽 여사 두 분을 모셔 논 것이 있어요. 옛날에. 그건 종교 관계라기 보다도, 내가 절에 있고 또 나한테는 큰어머니이고 하니까. 해마다 음력으로 3월 11일날 자손들이 참석을 하던 아니던 그분들을 천도 해줍니다. 그리고 내가 가는 절마다 영단이 있으면 그 영단에 항상 그분들을 모시지요. 신륵사 같은 곳에서도 내가 위패를 모셔놨고. 또 만기사도 그렇고. 그 다음부터는 그분들만 모셔 논 것이 아니라 신도들도 있고 스님들도 있고, 여러 사람들을 모셔서 계속 이어나가는 겁니다. 누가 없앨 수는 없는 거지요.

공사가 한창 중인 만기사의 "명부전"에도 숫자는 용화사보다 적었지만, 역시 박헌영과 주세죽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박헌영은 1921년 상해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던 주세죽과 결혼했다. 1928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스님께서 91년도에 만났다고 하는 첫딸(박비비안나)을 출산했는데, 그들이 언제 헤어지게 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공식 결혼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이혼절차라는 것도 있을 수 없었는데, 1930년대 초반 상해에서 활동할 무렵 주세죽과의 사이는 매우 악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3년 박헌영이 상해주재 일본공사관에 검거된 이후 죽을때까지 박헌영은 주세죽을 다시 보지 못한다. 주세죽은 박헌영과 헤어진 후 박의 절친한 친구였던 김단야와 다시 재혼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김단야 역시 1937년경 당시 위세를 떨치던 대숙청에 휘말려 '일본 밀정' 혐의로 처형되고 주세죽 자신도 모스크바에 있는 딸과 떨어져 중앙아시아 먼 곳으로 유배 가게 된다. 실타래처럼 얽혔던 이 세 명의 젊은 공산주의자들은 꼬여버린 서로의 운명의 매듭을 풀어볼 겨를도 없이 제각기 타향에서 생을 마감한다.

스님이 현재 주지로 계시는 '만기사'에 갔을 때 보통의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재미있는 문구가 적힌 현판(?)을 볼 수 있었다.
"원수 갚지 말고, 은혜는 갚아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부처님께서도 하셨을 법은 하지만, 아무래도 절간에서 마주치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든 문구였다. 게다가 한글로 적어놓고 있으니, 기독교 신도가 걸어놓은 액자처럼 보여서 아무래도 낯선 느낌이었다.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는 인터뷰어에게도 "절간 붙어있는 글귀로는 좀 이상하지요?"라며 스님은 또 웃으신다. 이 문구는 스님이 만기사에 오시면서 직접 만드신 거라고 했다. 누구를 향해 하고 싶은 이야기일지 궁금했는데 어쩌면 스님 자신일거 같은 생각이 든다. 이야기는 계속해서 『전집』으로 이어진다.

퍼슨웹> 작년 (박헌영 탄생) 100주년이었을때 공식적으로나 아니면 스님 개인적으로 행사를 하지는 않으셨나요?

원경> 그런 행사는 없었고. . . 해마다 12월 15일날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를 지내는데 딱 한 분이 100주년 기념행사를 하는 줄 알고 찾아 왔습디다. 박승옥씨라고. 옛날에 사계절인가. . .  아니 돌베게에서 남로당 연구도 내고 그런 걸로 알고 있어요.

퍼슨웹> 스님을 직접 찾아오셨나요?

원경> 예. 그래도 100주년인데. . . 그래도 제사를 지낸다는데 당신이 다른 건 몰라도 . . . 싫어하든 좋아하든 참석하고 싶어서,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김천에서 찾아왔습디다. 저는 해마다 그 12월 15일날 지내는 데 금년부터는 바꾸려고 해요. 왜냐면 돌아가신 날짜가 다르기 때문에. 12월 15일은 내 16살부터 지내온 제사예요. 돌아다니면서도 지내던 제사였어요. 절에서는 행사라는 것이 주로 낮 11시 보통 10시부터 그 시간에 합니다.

퍼슨웹> 꼭 12월 15일날로 정한 것은 스님께서 정하신 건가요?

원경> 아니지. 한산스님이 그분이 돌아간걸 확인을 하시고. . . . 그. .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동천리라는 곳에 대련사라는 절이 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거기서 선친이 태어나신 곳하고 얼마 안돼요. 바로 앞이에요. 거기서 제사를 지내고. . . . 그 뒷산에, 봉수산에 올라가면 백제의 흑치상지가 있던 성이 있어요 임존성이라고. 그 곳에서 얘기를 들었지요. 그래서, 그때 나도 사춘기고 또 . . . 참 많은 번민이 있고 해서 그냥 나와버렸죠. 밑에는 바지 중 옷 그냥 입고, 위에는 군인들이 입던 옷 물들인 검정옷을 입고. 요즘말로 하면 야전잠바에 모자 하나 쓰고 절에도 안가고 한 1년 간 세상을 돌아다녔죠. 남의 집에 가서 밥도 얻어먹고 하면서, 하여튼 그때가 처음 제사를 지냈던 거예요.

이때가 스님 나이 열 여덟이던 1958년의 이야기이다. 원경 스님의 출가 시점을 전후한 이야기는 『역사비평』과의 인터뷰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서 생략한다. 퍼슨웹과의 인터뷰에서는 처음 나왔지만, '한산 스님'과 관련한 이야기도 『역사비평』에 수록되어 있다. 지금 현재 원경스님이 찾고자 하는 「정책입안보고서」를 비롯하여, 스님과 부친에 관련한 많은 이야기를 스님께 직접 해주었던 '신비로운' 인물이다. 한산 스님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들을 수 있었다.

퍼슨웹> 이후로는 매년 어디에 있든지 제사를 지내시는군요?

원경> 그러니까 또 생각이 나네요. 옛날 일인데. . . 우스개 소리로 하지요. 옛날에 김지하 선생, 이문구(소설가) 선생, 황석영, 또 . . . 송기원(시인), 장선우(영화감독), 임진택(국악인) 등등 사람이 많았어요. 김지하 사단이라고 해가지고. . . . 한 1985년도 쯤 됐나? 1983년인가 . . 겨울에 . . . 실천문학에 책(『사상기행』 1999년 출간)도 아마 나왔을거에요. 아무튼 다니다 보니까 기일이 닥쳤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랑 중간에 헤어졌어요. 근데 미국에서 오신 박성배 교수가 제사자리를 마련했어요. 근데 나는 참석을 못하고 떨어져서 저 무등산에 있는 원효사에 가서 그냥 몇 가지 과일하고 해서 부처님전에 과일 올리고 영단에 올리고 해서 시식을 마치고 내려와서 보니까, 여관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아무도 안 왔어요. (내가) 늦었거든요. 그런데 전화가 여관으로 마침 왔어요. 그래서 무등산 입구에 있는 무슨 가든인가 식당에 계시더라구요. 만나 가지고 같이 들어왔는데 . . . 대체 어디 갔다 왔냐고 따지는 거예요. 사람들이 뭐 여자를 만나고 왔다고 자꾸 억지 소리를 해서 . . . . 그래 가지고 사실을 얘기했죠. 사실은 오늘이 기일이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전부 노발대발하면서 "그러면 같이 가던가 해야지 그럴 수가 있냐"고. 그래서 오징어도, 사과도, 배도 사오고 해서 여관방에서 제사를 다시 지냈어요.(웃음) 사람들이 평생 원경스님 외로우니까 이 날을 잊지 말고, 꼭 멀리 있던 가까이 있던 간에 제사에 꼭 참석하자고. 그러면서 또 뭔 생각을 했는지 울고 그래요. 뭔 생각을 했는가 말이야. 난 그렇게 생각했어요. '착각하지 말자. 박선생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다. 다 지(자기) 과거사 때문이다.' 우는 사람이 있고 그랬어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 . . 하하. 제사 참석한 사람은 한 분밖에 없어요. 송기원 선생님은 그 날을 잊지 않고 참석합니다. 그 외는 한 번도 제사를 지내자는 소리는 안하고(웃음) . . . 처음에는 장선우 감독은 몇 번을 참석을 했는데, 그 때마다 일하고 엉키니까, 촬영하느라고. 고런 경우가 있었어요.(웃음)

퍼슨웹> 지인으로 알고 있는 많은 분들하고는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원경> 어려서부터 전 한가지 희한한 것이 있어요. 내가 어려서부텀도 마을에 내려가면 애들하고 싸우거든요. 괜히 기죽은 아이가 있거나 또 뭐해서 그런 아이 하고 친하다보면 게 집안사정이 꼭 문제가 있습디다. 하여튼 어렸을 때 그런거 모르니까, 애들이 때리고 하면, 내가 앞장서서 그 아이들 때리고 하면 그 아이들이 또 형을 앞장세워 나 때리고 그래가지고 뭐 하는 거죠. 또 스님들하고 관계도요, 그러한 분들 한에서만 자연히 이렇게 정감이 간다고 할까요. 이러저러 하다보면 서로가 서로를 숨기지요. 근데 말해보면, 또 어느 날 곡차라도 한잔 하다보면 지나다가 보면은 저는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는데, 그래서 흥왕사에서도 욕 많이 먹었어요. 아주 징그러운 놈이라고. 저는 지 과거를 부모에 관해서도 얘기했는데 한번도 얘기를 않했다고. 그렇게 험난한 얘기도 들어보고 했어요. 또 본래 한산스님, 이 어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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