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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이 되고 보니 .....

정규직이 되고 보니 .....

강도원 (캐리어 노동조합 대의원)

현재 캐리어 노조는 민주노총 금속산업연맹에서 제명되었다. 이 땅에 노동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80년대부터 한때 강성으로 불리기까지 했던 캐리어 노조가 이처럼 힘없이 무너지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2001년 2월 18일 조용하기만 했던 현장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차별 대우와 비인간적인 멸시를 받아오며 일해 왔던 사내 하청 노동자 5백 명이 노동조합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가지 우리들이 봐 왔던 정규직 조합원의 편안하고 판에 박힌 투쟁과는 달리 우리는 구사대와 폭력 경찰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 같은 노동자인 정규직 조합원의 온갖 탄압에 맞서 파견법에 뚜렷이 적힌 ‘2년 이상자 정규직 전환’이라는 커다란 성과를 내게 되었다. 여전히 2년 미만자 고용승계 문제가 풀리지 않아 반쪽짜리 성과이지만 헌법에 뚜렷이 적힌 인간다운 권리를 거머쥐었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큰 뜻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정규직 신분이 돼서 출근한 지가 벌써 일곱 달이 되어 간다. 우리를 짓밟았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같이 얼굴을 맞대고 일한다는 것이 어쩐지 짐스러웠고 또 잘못해서 현장 관리자들에게 밉보이면 해고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머리 속에 깊게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인지 몇몇 조합원을 빼고 대부분은 다짐했던 것과 달리 스스로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거나 정규직이라는 특권과 안락함에 젖어 드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는 정규직 신분으로 다시 현장에 들어오면서 우리들이 다짐했던 것(남아 있는 사내 하청 동지들의 고용승계에 힘쓰자)과 우리들의 권리를 지키려는 모임을 만들기로 했지만, 그런 ahdlad마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장의 온갖 유언비어와 우리 스스로의 나약함이 이미 있던 조합원들과 현장 관리자들의 눈치를 보게 만들고 ‘일만 부지런히 하면 아무 일도 없겠지’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예전에 느끼지 못한 정규직만이 가질 수 있는 기득권과 그리고 어떻게 해서 얻은 자린데 잘못하다가는 예전의 삶으로 다시 되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정규직 전환자들을 어떤 의식과 행동도 못 하도록 꽁꽁 묶어버리고 있었다.
난 가끔씩 그런 조합원을 볼 때면 얄밉다는 생각보다는 애처롭고 답답하다고 느낀다. 이것은 아마도 모두 앞서 겪어 왔던 비정규직의 버릇을 버리지 모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심지어 우리끼리 현장에서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것조차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피하려고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가 있었다. ‘내가 하청노조 문제를 풀고자 투쟁 기금을 낸다든지 아니면 현장 족의 한 사람으로 몸담게 되면 회사에서 나를 벌줄 것’이라는 생각이 그들을 짓누르게 되어 버렸다.
언젠가 함께 정규직으로 바뀐 한 조합원이 술에 취해 나를 찾아와서 “나도 사람인데 우리 하청 조합원들 모두 고용이 승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애쓰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은데 두려움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고 눈물로 부르짖었다. 비단 이런 생각이 그 조합원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정규직 전환자 가운데 사내 하청 노조 활동을 부지런히 한 사람도 있지만, 아예 사해 하청 노조에 들지 않았던 비조합원들도 있고, 가입은 했어도 활동은 하지 않은 조합원들이 많다. 그렇지만 2년 넘게 하청 노동자로 일했다는 파견법 내용이 있긴 했지만 우리가 정규직으로 바뀔 수 있었던 데에는 하청 노조의 끈질긴 파업투쟁이 가장 중요한 노릇을 했다. 불법파견 문제를 내놓고 노동부에서 불법파견 판정을 받아 이사 한 명이 구속되도록 한 것이 캐리어 자본에게 손을 들게 만든 것이다.
난 모든 조합원이 이런 사실들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 현장에서 더 이상 눈칫밥 먹는 신세로 스스로를 깍아내리지 않는다면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될 때 현재 남아 있는 하청 노동자 고용승계 문제까지 해서 캐리어 정규직 노조가 그 동안 잘못을 바로잡고 다시 민주노조로 거듭나지 않겠는가.
처음 내가 정규직 신분으로 출근했을 때 기존 정규직 조합원들의 눈길은 겉으로는 따뜻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언제 우리가 너희들을 탄압했냐’는 투로, 밖에서 고생 많이 했지, 이젠 같은 조합원이 되었으니까 부지런히 일해 보자고 격려를 이끼지 않았다.
하지만 난 가끔 서글픈 생각이 든다. 내가 정규직 노조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조합원들을 만날 수 있는 기화가 있었는데 몇 다이 지난 지금까지도 2년 넘은 정규직 전환자들을 자기들과 같은 조합원으로 보지 않고 예전의 하청 노조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데에는 그들만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더 큰 까닭은 2년 넘은 정규직 전환자들 스스로 버리지 못하는 예전의 ‘해묵은 때’가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싶다. 이런 문제는 일반 조합원들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노동조합을 대표하는 집행 간부들마저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얼마 앞서 정규직 전환자 가운데 다섯 명이 하청 노도 투쟁 때 받은 실형으로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는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현장이 어수선할 텐데 그렇지도 않을뿐더러 원청 노조 위원장마저도 정당한 해고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어찌 공식 회의 자리에서, 더군다나 위원장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
심지어는 하청 노조 투쟁 때 점거 농성을 했던 조립 룸(F1 공장)에서 일하는 조합원들은 우리가 자기들 생계 수단을 위협했고 생명까지 위태롭게 했다는 식으로 아직도 우리를 적대시하고 있다. 이런 불만이 일반 조합원만이 아니라 그들을 대표하고 있는 대의원 입에서도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때 우리들의 조립 룸 점거투쟁은 회사와 자본을 상대로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받아 내고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마지막 수단이었지, 같은 노동자를 상대로 한 것이 아니었다. 회사와 현장 관리자들이 퍼뜨린 유언비어를 없애지 못하고 속 좁은 사고로 거짓을 진실인 양 인정해 버리는 그들의 생각이 지금까지 기득권을 지켜 왔던 대공장 단위 사업장의 커다란 병폐를 보여 주는 하나의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현장은 여러 가지 빨리 풀어야 할 문제들이 쌓여 있다. 이런 문제들을 풀려면 모든 조합원이 한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도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어 힘들기만 하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현재 캐리어 노동조합은 연맹에서 제명된 상태다. 이것은 노동조합에 뼈아픈 무덤이나 마찬가지다. 캐리어 노조의 제명 위기는 지난해 사내 하청 문제가 터지면서 시작되었다. 결성 처음 두 노조가 끝가지 연대하기로 했지만 원청 노조가 일방적인 연대 중단을 선언하면서 반목의 틈이 커지기 시작했다. 캐리어 노조는 사내 하청 노조가 무리하게 투쟁을 펴 나가는 데는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금속연맹에도 책임이 있다면서 상급단체 의무금 납부를 그치는 등 모든 연대활동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그 뒤 캐리어 노조는 사내 하청 투쟁 과정에 대해 구사대를 조직하여 하청 노동자들을 짓밟고 같은 노동자로서 도무지 할 수 없는 반노동자적인 행위를 하게 되었다.
올해 2월 초에 연맹 중앙 대의원대회에 ‘제명 건’이 올라가기 전까지 캐리어 노조에는 분명히 이를 막을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넉넉히 있었다. 노조 집행부가 직접 나서서 조합원 교육과 토론회를 거쳐 그들을 이해시키고 설득을 했어야 함은 물론이고 하청 노조와의 연대 방안에 대한 장기 계획을 가고 당사자인 사내하청 노조를 찾아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였더라면 이와 같은 최악의 상태까지 가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몇 년 동안 강성 노조를 이끌어 왔던 현장 활동가들조차 이 문제를 풀 뚜렷한 계획이 없었다는 것도 아쉬운 사실이다.
제명이 된 뒤 조합원들의 반응은 차갑다. 오히려 그렇게 된 것이 잘 되었고 민주노총보다 한국노총이 더 낫다고 이야기하는 조합원이 뜻밖에 꽤 많다. 이것은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인데, 꽤 많은 조합원들이 민주노총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감을 갖는 사람들은 지난해 사내 하청 투쟁 때 민주노총 금속연맹에서 너무 개입을 했고, 원청 노조와 사내 하청 노조가 긴 시간을 두고 원만하게 연대하도록 하지 않고 짧은 시간에 너무 무리하게 많은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두 노조가 갈라서게 되고 마침내 오늘과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모든 원인은 오로지 사내 하청에 있는 것 아니냐고 규정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지금 캐리어 노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안팎으로 연맹 제명과 사내 하청 문제, 다섯 명 해고 그리고 현장 조직력 붕괴와 각 공장별 조합원 문제, 새 외국인 사장 취임으로 인한 구조조정, 조직 개편 따위, 이를 별탈 없이 해결하고 타개하려면 원청이든 하청이든 모든 조합원이 한데 어울려 한목소리를 내야하고 나아가서는 상급 단체인 민주노총과도 연대의 고리를 이어야 할 것이다. 당장 캐리어 노조가 움직일 폭은 아주 좁혀져 있는 상태이다. 지난날 거셌던 노동조합으로 우뚝 서려면 ‘노동자는 하나다’는 말처럼 정규직, 비정규직, 2년차 조합원이건 기존의 조합원이건 모두 같은 노동형제라는 것을 깨닫고 함께 노동자를 옥죄는 자본에 맞서서 싸워야 한다. 그래야만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가는 살맛 나는 현장이 되지 않겠는가! 나는 앞으로 반드시 그런 날이 오리라는 걸 믿는다.

*강도원님은 사내 하청 노동자로 일을 하다가 지난해 7월 18일 (주)캐리어와 ‘2년 이상 근무한 하청 노동자 정규직 전환’ 방침에 따라 7월 31일부터 정규직으로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로, 하청 노동자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정규직 노조 대의원으로 선출돼 노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캐리어 노조는 현재 금속산업연맹에서 제명 처분을 받은 뒤 재심을 청구해 놓은 상태라고 합니다.

- 월간 ‘작은 책’ 200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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