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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장벽은 무너졌다 : 퀘백으로부터

그리고 장벽은 무너졌다 : 퀘백으로부터
[맑스주의를 옹호하며] 4/23 앨릭스 그란트

오늘, 자본주의와 그 기구에 반대하기 위해 거대한 열정을 지닌 젊은 대중운동이 결집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아직 관련기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거리에서, 그리고 내가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들로부터 받은 느낌으로 쓴다.  
나는 지난밤에 퀘벡에 도착했는데, 그때 이미 공항은 도처에 깔린 군 헬리콥터와 경찰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내가 도시에 도착하여 방어벽(퀘벡시는 미주자유무역지대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막기 위해 도심의 4평방 마일을 시위금지구역으로 하는 "보안구역"을 설정하고 회담장 주변에는 높이가 3m의 방어벽을 세웠다-옮긴이)을 향해 걸어갔을 때, 명확히 확인한 사실은 정부가 장벽 너머를 통제하고 있었지만 경계선 밖은 완전히 우리 것이라는 점이었다. 젊은이들이 대화를 나누고, 전략을 공유하고, 여러 생각들(맑스주의, 무정부주의, '그들'을 물리칠 전략, 기타 등등)을 토론하며 거리를 누비던 그곳에는 열정적인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작년 5월 타일랜드 치앙마이에서 열린 지난번 아시아개발은행 회의에는 4천여 시위대가 모였었다. 아시아개발은행 회의는 원래 시애틀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1999년의 대규모 기업 반대 시위 이후 은행 관료들은 다른 개최지를 찾고 있었다. 하와이 관광국이 열띤 로비를 벌인 후 회의 장소는 결국 호놀룰루로 바뀌었다.
이는 결국 "독립적인" 하와이 관광국이 당국의 공식 대변인이 되어버린 이상한 상황으로 귀결되었다. 관광국은 심지어 "관광 유치"라는 이름으로 경찰의 폭동 진압 장비 구입비로 50만 달러의 사업비를 전환시켜주기도 했다.
하와이 관광국 국장인 밥 피쉬먼은 2월 7일자 [호놀룰루 위클리]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하와이를 보다 매력적인 관광지로 만들어주는 높은 수준의 서비스를 위해 경찰을 훈련, 개발시키고 있습니다... 과도한 불편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와이 독립미디어센터 웹사이트 http://hawaii.indymedia.org

오늘 아침 나는 민중정상회담이 열리는 오래된 항구를 향해 갔다. 즐비한 노조관료들, 홍보부스, 기자회견, 평균 나이가 40세 정도 등, 내가 기존에 참석했던 정치행사들과 비슷했다. 오후 한시에 우리는 더 이상 진행되는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방어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그곳에 이르렀을 때 분위기가 상당히 변화되어 있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주요 통로를 통해 모여들고 있었다. 내가 어떤 유인물을 뿌리자마자, 사람들이 나에게 왔고 그것에 대해 나에게 물었다(우리는 [뤼마니테]를 팔고 영어와 불어로 번역된 미주자유무역지대 반대에 관한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아예 앉아서 읽기도 했다. 여기에 온 젊은이들의 다수는 정치에는 새내기였고, 올바른 이상을 찾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는 아직 불확실하지만 반대할 것에 대해서는 확실히 결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 방어벽에 모인 이들의 평균연령은 약 20세 정도였다.

경찰이 방어벽의 다른 쪽에서 묘지를 지키는 동안(망자에게도 치안이 필요한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생장(Saint-Jean)문 앞에 있었을 때 우리는 기상천외한 시위를 펼쳐졌는데, 예를 들면 여성들은 방어벽을 향해 수십 개의 브래지어를 던졌고, 젊은이들은 춤을 췄으며 땅에 분필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때 갑자기 예고도 없이 군중들이 행진을 시작했다. 행진은 내가 전에 참여했던 어떤 행진보다 가장 젊고, 빠르고, 힘찬 것이었다. 약 천명 가까운 사람들이 시작한 행진은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을 대열속으로 이끌었으며 거의 그 자체가 넓은 광장처럼 되었다. 이 운동의 기본적인 본질을 모두 젊은이들의 강고함(과 유약함)으로 바로 묘사하기는 어렵다. 노조활동가들이 많이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이미 젊은 운동에 연결되어 있었다(예를들어 캐나다 자동차노조(CAW), 서비스부문, 캐나다공공노조(CUPE), 요크대학지부).
르네 레베스크 대로에서 열리는 정상회담장의 주요 통로로 가기 위해 우리는 언덕을 올랐다. 우리는 멈춰서서 영어, 불어, 스페인어로 진행되는 열정적인 연설을 듣기도 했다. 군중(오천 명으로 늘어난)은 연단이나 방송시설도 없이 연설하는 연설자들의 발언을 들을 때면 즉시 조용해졌다. 그 후에 우리는 정상회담장소에서 빠져나와 르네 레베스크 대로를 따라 내려왔다. 여전히 군중들은 늘어나고 있었고, 우리는 라발 대학으로부터 그 길을 향해 오고 있는 행진대오와 정면으로 만났다. 이제 우리는 거의 만 오 천명 정도가 되었다. 우리는 그 방어벽으로 가기 위해 돌아섰다.    
이 시점에서 퀘벡에서 가장 프랑스적인 도시 중의 하나가 퀘벡시라는 점을 짚고 가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곳은 퀘벡 민족주의와 분리주의의 고장이며 여기에서는 영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러한 간극에도 불구하고 시위에서는 프랑스계 캐나다인, 영국계 캐나다인, 미국인,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인 젊은이건 모든 언어로 소통했으며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결집했다.
방어벽을 향해 행진하여 어떤 지점에 이르렀을 때 어떤 그룹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서 행진할 것을 결정했다. 이른바 세 갈래란 안전을 의미하는 '녹색'지대, 좀 더 격렬한 황색지대 그리고 참가자들이 체포될 위험이 있는 적색지대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단결이라는 기본적인 요구를 외치는 시위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대부분의 사람들은 곧장 앞으로 향해서 행진해 갔다(내 생각에 이것은 황색지대이며, 그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핵심은 대중행동이다). 또한 녹색지대의 '안전함'도 경찰에 의해 결코 지켜지지 못했고, 나중에 내가 신민주당(NDP) 의원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그곳에 있던 칠천 명의 사람이 특별한 도발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경찰은 경고도 없이 최루가스를 뿌렸다고 한다.
방어벽으로 돌아갔을 무렵에 우리는 약 칠천 명의 대오로 단단히 뭉쳐있었다. 우리가 방어벽에 정면으로 전진하자 긴장상태는 더욱 고조되었고, 약 30명의 폭력경찰이 반대쪽에 정렬해 있었다. 사람들이 장벽을 거머쥐고 그것을 앞뒤로 당기기 시작했다. 한 청년은 꼭대기로 올라갔고 늘어난 시위 군중이 힘을 보탰다. 최루가스가 처음 터지자 순간적으로 혼란 상태가 되어 시위대는 반격을 위한 일보후퇴를 했다. 그러나 경찰은 쫓아오지 않았고 시위대는 10미터정도 뒤로 물러났다가 되돌아 왔다. 몇 사람이 병과 깡통, 그리고 약간의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주병력을 밀어부티고 우리의 힘을 시험해보고, 그럼으로서 우리의 두려움을 헤치고 나아가는 전진과 후퇴의 과정이었다. 우리는 최루가스가 고통스럽지만 참을만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장벽의 일부를 무너뜨렸고, 그것은 우리의 거리에서 기업권력이 당한 모욕의 상징이었다.    
전진과 후퇴의 과정이 45분 동안 진행되었고, 우리는(최루가스와 매운 가루의 분사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움직일 준비가 되진 않았지만 후퇴하지는 않았다. "누구의 거리인가?-우리의 거리다!"라는 구호의 외침은 시위대의 결의를 드높힌 것은 물론 그들의 의기충천함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헬리콥터가 우리 바로 위에 날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경찰의 다음 계획이 무엇이던 간에 그것의 의도는 명백하게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돌격대원들이 갑작스럽게 왼편에서 나타나 방패를 두드리면서 한발한발 다가섰다. 최루가스를 군중들의 머리 위나 가슴을 향해 직격으로 쏘아대자 모든 사람들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후 우리 뒤에서 두 대의 거대한 탱크와 물탱크가 르네 레베스크로 이동해 왔다. 당시 우리는 그것들이 군중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막아버릴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탱크를 공격했다. 탱크는 약간 물러났다가 물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시위대가 옆길로 도망치고 있었고, 이 때에는 신중한 판단이 더 큰 용기였다(어떤 사람은 안전한 후퇴를 확보하기 위해 "뛰지 말자"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후 몇몇 충돌이 있었지만 상황은 종료됐다. 다음의 질문에 답을 찾는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다음은 무엇인가? 앞으로 나갈 방향은 무엇인가?
그 벽이 무너졌고, 우리는 믿을 수 없는 젊은 힘이 이룩한 상징적인 승리를 경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오직 상징적인 승리일 뿐이라는 것을 반드시 짚어야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했고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미주자유무역지대는 여전히 체결될 가능성이 높다(보호무역주의가 자유무역주


퀘벡 -- "당신 어디 있어요?" 내가 핸드폰을 향해 소리를 지르자, 잠시 후 "녹색지대, 생장 과 생클레르"라고 그가 대답했다.

녹색지대는 최루가스나 경찰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운 안전한 지역이라고 확언되고 있는 곳이다. 거기에는 공격을 위한 방어벽이 없으며, 오직 허가받은 행진만이 있다. 녹색지대는 안전한 곳이고 따라서 아이를 데리고 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좋아요. 15분안에 만나요"라고 나는 말했다.
내가 겨우 코트를 입었을 무렵 나는 전화를 받았다. "재기가 체포되었어요. 음, 엄밀하게 말해 체포는 아니구요, 납치에 더 가깝지요." 처음 든 생각은 나의 실수였다는 것이다. 내가 싱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소재를 물었던 것이다. 그때 우리의 대화가 도청된 것이며, 그들이 그를 찾게된 것이다.
만일 그것이 편집증적으로 느껴진다면, 정상회담이 열리는 도시로 직접 와보라.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코미테 포퓔레르 생장 밥티스트 시민회관에 눈이 부어오른 6명의 목격자들이 나에게 어제 있었던 미주자유무역지대에 대항하는 직접행동시위에서 가장 눈에 띈 활동가가 그들의 코앞에서 어떻게 잡혀갔는지를 쓴 자술서를 읽어주었다.
의를 이길 경우에는 협의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마킬라도라 노동자들은 여전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억압에 직면해 있을 것이며, 맥도날드 햄버거는 계속 튀겨나올 것이다. 이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갖는 유일한 힘은 노동자 운동의 힘을 점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거리를 떠들썩하게 할 수는 있지만 자본주의와 진정으로 대결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들의 투쟁, 파업, 그리고 공장점거이다.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광산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고 경찰병력이 그들의 힘에 밀려나자, 비로소 권좌로부터 축출되었다. 향후에는 조직된 노동자가 이 행진에 참여할 것이다. 사회주의와 국제연대를 위해, 젊은이와 노동자의 단결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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