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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 그 엿새 동안의 기록

아모르, 그 엿새 동안의 기록
- 외국인이주노동자 최초의 파업 보고서

성난 노동자들 (2002년 1월 22일 화요일)

파업은 어제부터 시작되었다고 했다.
“우리 회사, 외국사람 100명 일해요. 작년 4월부터 우리 월급 잘 안 나왔어요. 우리 아직도 11월달, 12월달 월급 못 받았어요. 지난 주 토요일날 월급 다 준다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안 줬어요. 우리 사람 다 화났어요. 어제 점심시간부터 우리 일 안 했어요. 우리 일 안 하니까 사모님, 상무님 ‘기숙사 전기 끊어’ 말했어요. 전기 기사 공장에 왔어요. 저기 끊을 때 우리가 사다리 흔들었어요. ‘안 돼요. 안돼요’ 말했어요. 우리 러시아 사람 드미뜨리 있어요. 이 사람 비디오 카메라 있어요. 그거 다 찍었어요. 상무님 경찰 불렀어요, 경찰 같이 우리 기숙사 뒤졌어요. ‘비디오 어딨어? 비디오 내놔’ 하고 방 다 뒤졌어요. 나중에 경찰 그냥 갔어요.”
포천에서 부천까지 지원을 요청하려 먼 길을 달려왔던 대표 네 명은 무엇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요지는 ‘상습적인 임금체불에 분노한 외국인노동자 1000여 명이 파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면담하는 도중에도 중간 중간 전화가 왔다. 기숙사에 남아 있는 이들이 그쪽 동정을 전하는 전화였다. 회사측의 지시를 받은 가스업체에서 LPG통을 가져가겠다고 왔다가 노동자들이 막아서자 그냥 돌아갔다는 소식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임금체불 상담인 줄 알고 시작했다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권복순 선생은 얼굴이 굳어졌다. 상담소에서는 지원팀을 꾸려 일단 현장에 들어가기로 했다. 지원팀은 권복순 선생과 우종억 씨, 그리고 나가지 셋이었다. 대표들 넷에 지원팀을 합친 일곱 명은 무거운 마음으로 포천으로 향했다. 우리는 출발하면서 관할 노동사무소에 전화로 진정을 넣고 중재를 요청했다. 그리고 출입국에 연락해서 임금체불로 인한 파업이니 섣불리 개입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미등록노동자들의 파업이라 임금체불이나 파업과 무관하게 체류자격 때문에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회사에는 아홉 개 나라 출신 외국인 99명이 일하고 있다고 했다. 사무실에 왔던 대표들은 인원이 많은 네 나라의 대표였는데 우즈벡스탄의 하미드 씨, 이란의 알리 씨, 나이지리아의 케이시 씨, 러시아의 유리 씨였다. 하미드 씨는 그중에서도 대장 격으로 보였다.
“한 달에 15일에서 20일은 아치 여덟 시 반부터 다음날 밤 한 시까지 일해요, 열여섯 시간인데 거기서 점심, 간식, 저녁 시간으로 두 시간 반 빼고 열네 시간 반 동안 일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거는 괜찮아요. 많이 일하면 수당 많이 받아요. 우리는 좋아요. 토요일, 일요일요? 저녁에 여섯 시 반까지 일하죠. 한달에 한 번 쉬어요. 월급 받으면, 그 다음날 쉬어요. 돈 보내러 가야 되니까. 남자들은 100만원에서 140만원까지도 받아요. 여자들은 90만원에서 110만원까지도 받아요. 기본급은요, 남자는 75만원, 여자는 65만원이예요. 예? 힘든 거요? 힘들지요. 그래도 월급만 잘 나오면 괜찮아요. 많이 일하면 돈 많이 받으니까...”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가구공장일은 어지간한 노동자들이면 피하는 일이다. 임금이 조금 높은 편이기는 하지만 일이 너무 고되 골병든다고들 한다. 그 일을 하루 열네 시간 반 동안, 그것도 한달에 보름 이상이면 토, 일요일을 뺀 나머지 날은 거의 다 밤 한 씨까지 일했다는 이야기였다. 몸이 무쇠라도 견디지 못할 노릇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노동시간에 대해서는 절대 문제 삼지 말아 달라고 했다.
2001년 8월에도 두 달 치 임금이 밀려 이틀간 싸움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 결과 임금을 조금씩 받기는 했는데 들쭉날쭉했고 계속 두 달 치가 밀려 있었다. 그 두 달 치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한 날짜를 계속 어겼고 그것이 이번 파업의 발단이었다. 그런데도 회사는 공장을 늘리고 기숙사를 새로 짓는가 하면 억대 기계를 새로 들여오는 등 시설투자는 계속해왔다. 거의 매일 밤 한 시까지 일하고 있고, 물건은 계속 출고되는데 임금을 왜 한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 내일, 모레까지도 매일 장롱이 300개씩 출고될 예정이라고 했다.
옆에 앉았던 케이시 씨는, 관리자 중 한 사람인 박 상무 이야기를 했다. 노무관리를 담당하는 그는 주로 욕설과 손찌검으로 노동자들을 대한다고 했다. 케이시 씨는 그간 쌓인 것이 많았는지 말하면서 여러 번 부르르 떨었다.
“새끼야, 새끼야, 씨발놈아. 나쁜 말 많이 해요. 이거 손으로 우리 얼굴 때려요. 발로 차요. 맨날 맨날 욕해요. 때려요. 지난 주 토요일 날도 월급 준다고 해서 다 기다렸어요. 그런데 상무님이 ‘돈 없어, 이 새끼야’하면서 가불만 조금씩 해줬어요. 그래서 다 사람들 ‘이거 안 돼. 회사 돈 안 줄 거야’ 하고 말했어요. 어제 아침에 다 사람들 일했어요. 사무실에 한국사람 하나도 안 왔어요. 그래서 우리 생각해요. 회사 문 닫는 거 같아. 우리 걱정 많이 했어요. 우리 돈 집에 보내야 돼. 계속 이렇게 하면 우리 일할 수 없어. 내가 말했어요. 나는 일 안 해. 다른 사람들 다같이 말했어요. 일 안 해.”
어떻게 1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서 파업을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이 회사 노동자들이 특별히 조직적인 것도 아니었고, 특출난 운동가가 있어서 선동을 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래되고 상습적인 임금체불과 사람답지 못한 대접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결집한 것이었다. 처음 파업을 시작했을 때 외면하고 한족에서 일하던 이들도 점차 합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심상치 않은 상황, 우린 곧장 포천으로 향해야 했다.
추운 날씨였다. 7만원이나 주고 세 낸 낡은 봉고택시는 바깥바람을 막아내지 못하고 찬바람을 죄다 안으로 빨아드렸다. 우리는 연신 몸서리를 치며 두 시간 반을 달려갔다. 저녁 여섯 시경 도착한 포천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 있었다. 도로에서 조금 꺾어 들어간 안쪽에 회사 정문이 있었다. 잔뜩 옹송그린 채 택시에서 내린 우리는 정문 앞까지 나와 웅성대는 검은 그림자 속을 헤지고 들어갔다.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던 듯했다. 걱정이 가득한 웅성거림이 우리 발길을 무겁게 했다. 정문을 들어서자 앞을 가로막은 공장 건물이 보였다. 예상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왼편으로는 분수대가 있었고, 그 옆에는 자그마한 정자도 있었다. 날이 밝고 따뜻했더라면 푸근해 보였을 풍경이었다.
우리는 정문에서 100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벽돌 건물로 들어갔다. 사무실이었다. 바깥에 비해 밝고 따뜻한 사무실에는 몇 안 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불안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안쪽에 사장실이 있었다. 대표들 네 명은 주저 없이 성큼성큼 사장실로 들어갔다. 뜻밖에 관할 노동사무소에서 근로감독관 둘이 먼저 와 있었다. 사장실에는 최 사장과 박 상무, 근로감독관 둘이 소파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원팀과 함께 현장 대표들이 남은 자리를 채우고 앉자마자 상무가 버럭 소리질렀다.
“야! 거기가 너 앉으라고 있는 자린 줄 알아? 빨리 안 일어나?”
그는 소파에 앉은 현장 대표들을 모두 일으켜 세웠다. 상당히 고압적인 태도였다. 대표들은 쭈뼛거리며 일어나 엉거주춤 서 있었다. 기가 막힌 광경이었다.
근로감독관은 임금대장을 보여주며 2001년 11월, 12월 임금 두 달 치가 밀려 있다고 설명하듯 말했다. 우종억 씨가 임금대장을 점검했다. 임금대장은 조악하기 그지없었는데, 각 개인별로 가불금 등이 적혀 있었고 체불된 임금은 정리조차 안 되어 있었다. 우종억 씨는, 임금계산도 안 되어 있는 걸로 봐서 회사가 당분간은 체불임금을 지급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체불임금은 대충 계산해도 2억5천에서 3억쯤 되는 것 같았다.
회사측은 이리 이처럼 확대된 것에 대해 무척 놀란 듯이 보였다. 서류상 고용주와 실제 고용주는 부부 사이였다. 실제 고용주인 남편 김 사장은 조금 늦게 사무실에 나타났는데, 밀린 월급 다해 봐야 몇 푼이나 된다고 이렇게 법석을 떠느냐고 불만이 가득한 소리를 했다. 서류상 고용주이고 실제로는 ‘사모님’이라고 불리는 최 사장은 앙칼지게 욕설을 해대서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지원팀은 임금대장을 대충 훑어보고 지금까지 오면서 들은 내용을 종합해서, 임금체불 문제와 함께 장시간 노동, 연장근로수당과 야간.휴일근로수당 계산 방법 등이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고 있는 점을 지적했다. 최 사장은 ‘네년이 알기는 뭘 알아? 근로기준법이 도대체 뭐야?’ 하며 흥분을 참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바로 협상이 시작되었다. 노동자측은 두 달 임금 전액을 일시에 지불할 것을 요구했고, 회사측은 이미 꺼내놨던 내용을 그대로 주장했다. 2월 9일에 11월 임금 지급, 3월에 12월 임금 지급, 4월에 나머지 1월, 2월, 3월분을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노동자 대표들은 단호했다. 한 시간 가량 밀고 당겼지만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우리는 단시간에 해결될 수 없는 사안이라고 판단하고, 부천 상담소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완 국자에게 연락해서 보도자료를 발송해 달라고 했다. 근로감독관은 임금체불과 장시간노동이 사실로 확인되었다고 하며 최 사장과 하미드 씨, 권 선생에게 진술서를 받았다.
사무실 앞에 모여 기다리고 있던 현장 사람들이 결렬 소식을 듣고 웅성대기 시작했다. 먼저 밖으로 나갔던 박 상무는 대표들과는 말이 안 통하니 노동자들에게 직접 물어봐야 한다고 나섰다. 우종억 씨가 박 상무보다 먼저 노동자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회사가 돈 안 주는데 일할 거예요?”
“안 해요. 우리 돈 받아 일해. 돈 안 받아 일 안 해요.”
“이게... 일을 해결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엉? 니가 뭔데 선동을 해. 이 새끼야.”
우종억 씨와 박 상무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한국어를 아는 이들은 순간순간 벌어지는 일을 통역하기에 바빴다. 그 이야기를 옆으로 전하고 또 전하고, 각자 언어로 의견을 주고받느라고 몹시 시끄러웠다. 김 사장은 마음이 급했는지 사무실 밖까지 나와서 노동자들을 직접 설득하려고 했다.
“너희들, 일해야 돈 줄 거야. 내일부터 당장 일해. 이거 뭣들 하는 짓이야.”
“사장님 돈 주세요. 노 머니, 일 없어요.”
“이 새끼들, 알았어. 너희들 내일 이미그레이션(출입국관리사무소) 신고할 거야. 다 잡아가. 알아서 해.”
“사장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뭐가 어째요? 그 말에 한번 책임져 보실래요? 여러분, 걱정할 거 없어요. 우리기 이미그레이션에 먼저 말했어요. 여러분 잡아 갈 수 없어요. 이미그레이션 문제없어요.”
“사장님, 월급 줘요. 우리 일 안 해요. 돈 다 받아 집에 가. 괜찮아. 돈 줘요.”
“이미그레이션, 폴리스 다 좋아. 빨리 월급. 다 좋아.”
“월급 없어. 일 없어. 사장님.”
사장이 독을 품고 내 뱉은 말에 여기저기서 야유와 함성이 쏟아졌다. 김 사장은 주먹을 움켜쥔 채 허리를 짚고 씨근댔지만 이미 신뢰가 무너진 사이에서는 협박도 통하지 않았다.
밖에는 율리아 씨도 와 있었다. 율리아 씨는 이번 파업 소식을 듣고 우리 상담소에 도움을 요청해 보라며 소개해 준 러시아어 신문인 서울헤럴드 기자였다. 그러니까 아모르 노동자들은 율리아 씨에게서 전화번호 하나만 달랑 받아서 무작정 우리 상담소를 찾아왔던 것이다. 율리아 씨는 크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연설하듯이 말하고 있었다. 회사측의 처사를 비난하는 말인 것 같았다.

분위기가 가라앉은 후, 우리는 기숙사로 행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는데, 기숙사는 4층짜리 조립식 건물이었다. 아래 두 층은 사람이 살고 있는지 문 앞마다 신발이며 물건이 놓여 있었고, 위로 두 층은 아직 공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새로 짓고 있다는 그 기숙사인 것 같았다. 그 건물 앞에도 컨테이너가 몇 대 놓여 있는데 모두 기숙사로 사용하고 있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얼어붙은 길바닥은 걸을 때마다 버석버석하는 소리를 냈다. 우리는 기숙사 1층에 있는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그 곳은 주방 겸 식당이었다. 크기는 교실의 절반 크기쯤 되는데 앞뒤로 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안에는 옷장이 몇 개 띄엄띄엄 놓여 있었고, 중간 중간에 가스 시설과 개수대가 있었다. 가운데는 탁자 몇 개를 나란히 붙여 놓고 식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곳은 이름 하여 ‘우즈벡식당’이었다. 나라마다 식당을 따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중 제일 넓은 곳이라고 했다.
우즈벡식당으로 모두들 모여들었다. 모두의 의견을 확인하고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의논도 해야 했다. 우리가 모이는 것을 눈치 챈 박 상무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식당 안에는 이미 50~6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박 상무는 그 분위기에 눌리는 것 같았다. 잠시 주춤하더니 용건을 꺼내 놓았다. 그는 ‘내일 40명만 작업하자’고 달래러 왔던 것이었다. 내일 출고할 물건을 조립만 하면 되니까 잠깐 같이 하자고, 여러분 뜻은 알겠는데 회사에 손해를 너무 끼쳐도 여러분한테 도움이 안 되는 거라고, 내일 일할 사람은 빨리 나서라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박 상무는 한동안 서 있다가 문을 부서질 듯이 닫고 나가 버렸다.
박 상무 덕분에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고 우리는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그럭저럭 한국어를 알아들었다. 게다가 우즈백의 하미드 씨는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알아 의견을 나누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소수에 해당하는 나라 사람들은 전체 의견에 따르겠다고 하며 힘을 실어 주었다. 다시 한번 확인한 내용은, 회사가 밀린 임금 전액을 지불할 때까지 파업을 계속 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여러 군데서 회사가 부도날 수도 있다는 소문을 들었으므로 조용히 일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우리 지원팀은 본인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며 회사와 협상할 수 있도록 도와보겠다고 했다.
그런 중에 누군지 모를 사람 하나가 식당으로 들어오더니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한국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도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나는 그가 고려인이겠거니 혼자 생각하고 말았다. 내내 잠자코 있던 그 사람은 회의가 끝나자 끼어들었다.
“이런다고 월급을 주나, 월급을. 일을 해야지. 사장님이 그러는데 일만 하면 며칠 내로 다 준대. 그리고 거기, 거기가 뭐하는 단첸지 모르겠는데, 자꾸 이렇게 선동하면 안 돼. 살살 달래서 일하게 하고 그래서 돈 받게 해야지. 일들 하라고, 일들.”
그는 큰 목소리로 말하며 허공에 삿대질가지 했다. 그러나 이내 주변 사람들에게 밀려 밖으로 나가야 했다. 놀랍게도 그는 동네 교회 목사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서로 의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첫 회의를 마쳤다. 밤 열한 시가 가까웠다. 권 선생은 아까 사무실에서 들은 것이라며 몇 가지를 이야기했다. 우리가 사무실에서 나온 후, 박 상무는 권 선생을 붙들고 사정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을 하더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서로 좋을 거 없잖아요. 애들 설득해서 일하도록 좀 해줘요. 우리 회사 그렇게 만만한 회사 아닙니다. 우리 회사에 걸린 지역 하청업체가 몇 갠지 알아요? 그 회사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요. 여기 러시아 사람들 많아요. 이런 식으로 일 안 하고 회사에 손해 끼치면 러시아 마피아가 무슨 짓 할지 몰라요. 알아요? 러시아 마피아, 어떤 놈 배를 지게차로 찌를지 몰라. 알아서들 하세요.”
러시아 마피아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지원팀은 인력공급을 혹시 그쪽에서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우즈벡식당은 자연스럽게 파업상황실이 되었다. 날씨는 무척 추웠는데 식당에는 아무런 난방시설이 없었다. 하미드 씨가 자기 방에 있던 전기난로를 가져왔다. 덜덜 떨면서도 누구 하나 춥다 소리를 못하고 있다가 난로가 나타나자 모두를 반색하며 그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때 누군가의 전화가 울렸다. 전화 주인이 그 전화를 내게 바꿔주었다. 박 상무였다.
“우리 회사 연간 매출이 300억이요. 이런 건실한 회사가 파업으로 문을 닫게 되면 말이 되는 얘깁니까? 우리 회사에 걸린 하청, 협력업체가 몇 갠지 알아요? 이렇게 몰고 가서 우리 회사가 망하면 협력업체들 다 망해서 지역 경제가 흔들려요. 지역경제가... 그 모든 책임을 다 거기 단체가 져야 된다는 건 알고 있겠지요? 지금 불황이라 그러니 이해를 하고, 내일 당장 일을 좀 하라고 달래줘요. 내일 당장 출고를 해야 되는데 거의 다 된 물건은 조립해서 빼야 될 것 아니요. 내일도 일 안 하면 공장폐쇄 할 테니까 알아서 해요. 그리고..하...참...이거 밖으로 소문이 나가면 외교문제가 안 되겠습니까? 대사관들도 그렇고... 이건 나라망신 시킬 수도 있는 거니까 외교문제만큼은 발생 한하게 잘 해달란 말예요.”
뭘 잘 해달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사무실에서 김 사장도 말했듯이 이 회사에서는 3억쯤은 별 돈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대 왜 그 돈을 못 주고 이 난리를 자초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식당에 있던 이들에게 통화내용을 전달하니 다들 코웃음을 쳤다. 지원팀은 어쩔 수 없이 눌러 앉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장기 싸움으로 갈 수도 있으니까 기계와 전기, 수도, 가스시설을 잘 지켜야 했다. 아무리 우리 의지가 공고해도 전기 수도가 끊기고 가스통을 빼앗기면 어찌 버틸 재간이 있겠는가, 우종억 씨는 서너 명씩 한 조를 만들어 순찰조를 짰다. 모두들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각 조는 번갈아가며 공장시설을 돌아보고 이상이 있을 경우 상황실로 빨리 연락해주기로 했다.
상황실에 남은 우리는 드미뜨리 씨가 어제부터 찍었다는 비디오를 봤다. 비디오에는 최 사장과 박 상무가 주로 등장했는데 여러 가지 악역을 맡고 있었다. 특히 오늘 아침 9시경부터 10시까지는 전기를 끊어버리겠다는 박 상무와 노동자들이 계속 실랑이를 벌였다. 노동자들은 전신주에 올라가 단전작업을 하는 전기기사를 말리기 위해 ‘아저씨, 안 돼, 안 돼, 이거 안 돼, 내려와’하며 애원하기도 했고, 사다리를 흔들거나 기사의 다리를 자고 흔들기도 했다. 그 아래쪽에 서 있는 박 상무는 “너희들이 일을 안 하기 때문에 회사에는 돈이 없어, 전기 이거 다 돈 나가는 거야. 너희들이 전기세 낼 거냐”하며 노동자들과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이어서 가스회사 차량이 화면에 보였다.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나탈리아 아줌마가 가스 기사에게 호통치듯 항의했다.
“아저씨, 이거 안 돼요. 우리 사람 아니요? 내가 돈 이거, 사장님 돈 아니요. 안 돼요.”
가스요금은 내가 내는데 왜 사장 지시를 받고 가스통을 가지고 가느냐는 말이었다. 그 지당하신 말씀에 머뭇거리던 가스 기사는 그냥 차를 돌려 나갔다. 그 뒤로는 몇 시간 건너 뛴 오후였는데, ‘사모님’이 기숙사가지 직접 나와서 일 하라고 협박하는 장면이 보였다. 최 사장은 각 방마다 문을 두드리며 나와서 일하라고 소리 질렀다.
“물 끊어버려. 전기도 끊어. 야, 너 뭐야. 이거 치워. 너희가 일을 해야 회사에 돈이 나올 거 아니냐. 지금 장사 안 돼. 지금. 너 안 치워? 당장 치워! 한 기사 빨리 전화해.”
최 사장은 비디오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빨리 치우라고 소리치는가하면, 어디론가 빨리 전화하라고 한국인 직원에게 명령하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노동자들이 ‘이미그레이션, 이미그레이션’ 하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출입국사무실에 다 잡아가라고 전화 하겠다’고 협박하는 것 같았다. 화면은 들썩들썩 춤을 췄다. 누군가 카메라를 흔들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드미뜨리 씨는 줄곧 협박을 당하면서도 카메라를 내려놓지 않았다. 체구가 작아 소년처럼 보이는 그는 용케도 비디오 카메라를 품에 숨겨 다니며 중요한 장면을 모두 담았다. 그가 비디오를 찍는 데 격분한 회사는 경찰까지 불러들여 온 기숙사를 뒤지기까지 했다는데, 그는 카메라를 가슴에 품고 끝까지 지켜냈다.

노동자들은 투쟁기금을 걷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가 필요할지 모르지만 우선 한 사람 당 5,000원씩 걷는다고 했다. 우종억 씨는 아무 방이나 들어가 자겠다며 식당을 나서고 권 선생과 나는 하미드 씨 방을 얻어 쓰기로 했다. 2층 끝에 있는 그의 방은 안 쓴 지 무척 오래된 듯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한심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방에는 오래된 컴퓨터도 한 대 놓여 있었다. 486정도 되는 것 같았다. 컴퓨터를 쓸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며 전원을 넣어봤는데 부팅도 되지 않았다. 한참 씨름하다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회사는 정말 시골구석에 박혀 있어서 제일 가까운 구멍가게까지 가는 데만도 30분은 족히 걸린다고 했다. 내 전화기 밧데리는 거의 바닥나 있었다. 바깥세상과 연결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수단인 전화가 끊어지면 우리는 거의 고립 상태나 마찬가지가 된다. 열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밧데리가 허락하는 만큼 우리는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데는 모두 전화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미안했지만 우리에게는 체면치레할 여유가 없었다. 여러 언론사에도 연락해서 도움을 요청했는데 대부분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저런 변수를 따져보고 대책을 생각해보던 우리는 새벽녘에야 잠깐 눈을 붙였다.

돈 줘, 돈 줘 (2002년 1월 23일 수요일)

깜박 졸다 만 것 같은데 벌서 아침 일곱 시였다. 일곱 시에 상황실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으므로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어젯밤에 어두워 볼 수 없었던 공장이 한 눈에 다 보였다. 꽤나 규모가 컸다. 인근에 다른 건물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바로 아래쪽으로 보일러가 놓여 있었다. 공장에서 나오는 목재를 때는 보일러였다. 그 보일러로 공장 전체에 난방을 공급한다고 했다. 옆에 폐목재를 담은 자루가 몇 개 보였다. 회색하늘 밑으로 늘어선 충충한 공장 건물이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아침이라 그런지 무척 추웠다. 남자화장실에서는 추운 날시 탓에 얼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변기가 막힌 것인지 악취가 심하게 났다.
식당에서는 벌써 우즈벡 아저씨들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차를 끓이고 계란후라이를 하고 직접 구워낸 빵도 꺼내 놨다. 두툼하게 썰어 놓은 빵은 허기를 느끼게 했지만 긴장한 채 밤을 보낸 터라 별로 입에 넣고 싶지는 않았다. 아저씨들은 추워도 아랑곳하지 않고 간간이 웃음을 터트려 가며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저씨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평온해 보였다.
내가 어깨를 움츠리고 다니니 딜론자 아줌마가 컨테이너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 방은 아줌마 둘이서 쓰고 있었다. 역시 여자들이 쓰는 방이라 훨씬 아늑하고 깨끗했다. 바닥에는 전기온돌장치가 있어서 따뜻했다. 그래도 여기저기 틈새로 들어오는 찬바람이 코끝을 시리게 했다. 바람을 막으려고 신문이며 청테이프를 덧댄 것이 보였다. 화장대에는 초코파이 상자가 몇 개 쌓여 있었다. 초코파이를 무척 좋아하는가 보다. 나는 커피를 한 잔 얻어 마시고 정문 쪽으로 나갔다.

아홉 시부터 정문 앞 시위를 시작했다. 사무실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경비아저씨만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경비아저씨는 그 동네 사람이라고 했다. 아저씨는 월급 받으셨는냐고 물으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칠순 가까워 보이는 노인인데 우리에게 호의적이었다. 각기 다른 나라 출신인 사람들, 시위를 한 번도 안 해본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찌 해야 할지 몰라 삼삼오오 모여 걱정을 나누고 있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파업농성 하는 식으로 하자면 다 같이 모여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하면 재미있게 하겠지만, 이 다국적 노동자들에게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지원팀은 간단한 구호를 가르쳐 주며 함께 하자고 했지만 분위기는 영 썰렁했다. 구호를 통일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영어라도 아는 이들은 'No Money No Work', 'No Pay No Work'를 외치기도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멀뚱하니 그냥 서 있었다. 한국어로 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구호연습을 하다가 추위를 좀 녹이자며 드럼통 몇 개에 불을 지폈다. 드미뜨리 씨는 가게가 문을 열었을 거라며 자전거를 타고 가서 전화카드를 사왔다. 돌아와서는 카드만 철문 위로 넘겨주고 건너편 산기슭으로 올라가 다시 비디오 촬영을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는 다람쥐처럼 빠르게 돌아다녔다. 트럭 한 대가 철문 앞에 와서 멈춰 서 있더니 그냥 돌아서 나갔다.
플래카드나 피켓도 만들고 싶었는데, 우리에게는 바깥으로 물건을 사러 나갈 차량이 없었다. 부천에서 오는 물품은 오후에나 도착할 예정이었다. 답답한 상황이었다. 폐자재를 뒤져 MDF판을 집어오기는 했지만 쓸거리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요구사항을 쓰자면 손가락을 깨물어야 할 판이었다. 사무실에는 뭐라도 좀 있을 텐데, 하며 사무실 쪽을 넘겨다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작업장에서 쓰던 매직을 가지고 나왔다. 매직 한 자루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얼마 후 박 상무가 나타났다. 차를 밖에 세워 두고 들어온 박 상무는 다짜고짜 불붙은 깡통을 들어 경비실에 쏟아 부었다. 그냥 놔두면 경비실에 불이 날 판 이었다. 경비아저씨와 노동자들은 눈을 퍼다 불을 끄고 있는데, 박 상무는 다른 깡통을 들어 톱밥이 가득 들어있는 자루에 불덩이를 쏟아 부었다. 괴팍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경비실에 불을 내고 그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불을 끄는 모습을 비웃듯이 지켜보던 상무는 이번에는 길 중앙에 놓여 있던 깡통 두 개를 발로 차서 엎어 버렸다. 자루에서는 연기가 치올랐다. 멀리 있던 노동자들까지 모여들어 분위기는 사뭇 치열해지고 있었다. 자욱한 연기 때문에 그런지 더욱 팽팽한 긴장감이 휘돌았다. 상무는 왜 길을 막느냐고 펄펄 뛰었다. 트럭이 물건 실으러 왔다가 정문 앞이 막혀 있으니 그냥 나가지 않았느냐며 욕설을 퍼부었다.
“차가 오면 치워주면 될 거 아닙니까. 왜 싸움을 일부러 만들어요.”
노동자들이 직접 부딪히는 것을 막기 위해 우종억 시가 끼어들었다. 박 상무는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로 악감정을 품었는지, 우종억 씨라면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었다. 그는 우종억 씨에게 심한 욕설을 쏟아 놓았고 우종억 씨 또한 그냥 듣고만 있지는 않았다. 주변을 노동자들이 격앙된 얼굴로 에워싸고 있었다. 자기가 불리하다고 생각했는지 멈칫한 박 상무는 우종억 씨를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건너편에서 비디오를 찍고 있던 드미뜨리 씨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눈을 부라렸다. 금방이라도 달려가 한 대 칠 태세였다. 상당히 위협적인 태도였지만 드미뜨리 씨는 꼼짝도 하지 않고 비디오를 들고 서 있었다. 노동자들 기세에 눌렸는지 박 상무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그는 팔을 휘둘러 분풀이하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우~우~’ 야유하는 소리를 보냈다.
잠시 후에 연합뉴스 기자가 도착했다. 노동자들은 기자를 보더니 더 힘을 내 구호를 외쳤다. 몇 차례 빈 트럭이 들어와 가구를 가득 실고 나갔다. 트럭이 나갈 때마다 노동자들은 야유를 보냈다. 그래도 트럭을 막아서거나 시비를 거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단지 트럭 옆구리와 그 위에 실린 가구를 손바닥으로 텅텅 두드릴 뿐이었다. 한 트럭이 정문을 빠져나가기 전에 멈춰 섰다. 트럭 운전사는 창문을 내리고 노동자들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잘 아는 사이 같았다.
“아니, 아직도 돈 못 받았어? 허이구 참. 그럼 더 크게 소리 질려야지. 돈 달라고, 돈 줘, 돈 줘 해. 더 크게.”
트럭 기사는 싱긋 눈인사를 한 번 더 하고 정문을 빠져나갔다. 마땅한 구호가 생각나지 않아 고심하던 우리는 얼른 그 말을 받아 ‘돈 줘’를 구호로 내세웠다. 정문 앞에 모였던 모든 이들이 순식간에 ‘돈 줘, 돈 줘’ 하고 외쳤다. 그 뜻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 그 유명한 ‘돈 줘!’라는 구호가 생겨났다. 누구는 주먹을 내지르고, 그게 쑥스러워 못하겠는 사람은 나뭇가지를 주워 흔들었다.

상황은 바쁘게 돌아갔다. 사무실로 들어간 박 상무가 신고를 했는지 경찰서에서 나왔다. 경찰은 ‘무슨 문제냐?’고 물었다. 우리는 임금 체불 때문이라고 말하고 ‘이 회사는 생산직 전원을 외국인노동자로 고용하고 있는데, 그 수가 무려 100여 명이다. 그 동안 회사는 기숙사를 새로 짓고, 기계를 들여놓는 등 시설투자를 하면서도 임금은 지급하지 않아 지금만 해도 두 달 치가 밀려 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노동자들이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며 새로 지은 기숙사를 가리켰다. 그러자 경찰은 ‘기숙사를 새로 지은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마라. 외국인들 기숙사를 죄다 컨테이너로 쓰고 있길래 내가 바꾸라고 말한 것이다. 아무리 외국인들이라도 컨테이너에 살라고 하는 것은 너무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이 회사에 대해 뭔가 아는 듯 했다. 그는 이미 전에도 이 회사를 출입했으며, 여기서 많은 미등록외국인들이 일하고 있다는 것과 생활실태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경찰은 회사측 의견을 들어보겠다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뒤이어 <외궁인노동자 샬롬의 집> 최준기 신부와 <외국인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석원정 선생이 관할경찰서에 집회신고를 하고 도착했다. 두 분도 반가웠지만 그 손에 들려 있는 락카는 더욱 반가웠다. 우리는 나무판자에 락카로 구호를 써서 정문 앞에 붙이고 바닥에도 구호를 썼다. 그때 비디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김이찬 씨도 택시를 타고 들어왔다.
사무실에서 나온 경찰은 난처한 얼굴이었다. 사장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연락도 안 되고, 파업노동자들이 모두 미등록 상태라는 것 때문에도 마음이 편치 않은 표정이었다. 경찰은 중립을 지켜달라는 우리 요구에 고래를 끄덕이고 떠났다. 여러 언론사에서 나온 기자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뭔가 정리된 자료를 주고 싶었지만 우리는 자료를 정리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개별 취재를 하도록 해야 했다.

사무실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듣고 최 신부와 김이찬 씨, 오마이뉴스 기자와 내가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에 여권을 맡겼던 몇 사람이 박 상무에게 여권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박 상무는 무슨 여권 타령이냐는 듯이 딱 잡아뗐다. 많은 회사에서 노동자들을 구속하기 위해 여권을 압류하는데, 이 회사 또한 마찬가지였나 보다. 어제 오자마자 여권 압류 여부를 챙겼어야 했는데, 깜박했던 것이 좀 미안했다. 처음에는 드미뜨리 씨에게 ‘네 여권이 왜 여기 있느냐’고 욕을 해대던 박 상무는 오마이뉴스 기자가 무슨 욕을 그렇게 하느냐고 지적하자, ‘내가 언제 욕을 했나요?’ 하고 뻔뻔하게 반문했다. 그러다 또 비디오로 그 상황을 촬영하는 김이찬 씨에게 격분해서 욕설을 퍼부었다. 비디오테이프를 내놓으라는 박 상무와 가당치도 않다는 김이찬 씨가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박 상무는 여권을 찾아 볼 테니 나가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우리는 여권 압류가 엄연한 불법행위라며 줄 때까지 안 나가겠다고 버텼다. 박 상무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씨근거리며 여권 다섯 개를 내줬다. 이게 회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 전부라며 더는 없으니 빨리 사무실에서 나가라고 재촉했다.
바로 뒤이어 박 상무와 한국인 노동자들이 사무실에서 서류를 빼내다가 노동자들에게 발각되었다. 노동자들은 사장이 회사에 안 나타나자, 공장문을 닫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서류를 빼돌리는 현장을 잡았으니 눈에 불이 켜지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는 격렬했다. 노동자들은 서류를 실고 나가는 차를 몸으로 막아섰고, 누군가는 근처에 서 있던 지게차를 몰고 왔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위기를 느낀 박 상무는 서류는 차에 그냥 둔 채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사무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이번에는 보일러 쪽에서 마찰이 일어났다. 한국인 노동자들이 서류뭉치를 실은 차를 소각로로 운전해 가서 소각로에 서류를 쏟아 넣었다. 그걸 본 노동자들이 ‘우~우~’ 몰려들었다. 노동자들은 그 서류가 임금관련 자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므로 극도로 흥분했다. 소각로를 둘러 싼 노동자들은 한국인 노동자들을 금방이라도 칠 듯한 기세였다. 다른 이들은 사무실로 달려가 문을 발로 찼고, 한국인 노동자가 운전해 나가던 차를 몸으로 막아섰다. 외국인이주노동자들의 격한 태도에 한국인 노동자들은 겁을 먹은 채 몸을 움츠렸다. 소란을 보고 달려간 지원팀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무력충돌만은 막아야 했다. 거의 몸을 날려 막아야만 하는 일촉즉발의 순간들이었다. 그럼에도 험악한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소각로에서 타고 있던 서류를 꺼내 불붙어 있는 종이를 일일이 발로 밟아 끄고 박스에 도로 담았다. 서류는 대부분이 세금이나 거래대금과 관련된 자료였다. 회사측은 그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두 시 반경에 다시 한 번 전체 회의를 가졌다. 외국인노동자협의회(이하 외노협)와 의료공제회, 서울외국인노동자센타 등이 합류했으므로 상황을 공유하고 다시 한 번 대응책을 논의할 필요가 있었다. 사장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경찰이나 노동부에서도 여러 차례 전화를 해봤지만 연락 두절 상태라고 했다. 정말 그대로 잠적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회의에서는 다시 한 번 전체 의지를 확인했다. 의지는 변함없었다. 두 달 치 전액을 다 받아야 일에 복귀하겠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지난 8월 파업 당시 했던 약속을 회사가 일방적으로 지키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다. 회사가 어떤 약속을 해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두 달 치 월급을 직접 받지 않는 한 전혀 신뢰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크리스마스며 새해 연휴까지 한번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해 왔는데 회시가 계속 기만하려 드는 것에 분개했다. 불신의 골이 깊었다. 그리고 이들은 ‘사장이 자신들을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까지 이야기했다. 회의 도중 간간이 회사측의 폭행, 폭언, 산재 등에 대한 불만도 터져 나왔다. 지원팀은 그 의견을 받아들이고 노동조건 전반에 대한 실태를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사업장내 노동시간.휴일과 임금에 대해서는 우종억 씨가, 폭행.폭언.질병과 산재에 대해서는 권 선생이 조사를 맡았다.
우리는 또 이주노동자와 한국인노동자 사이에 일어날 수도 있는 충돌에 대해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회사측이 일부러 자극할 만큼 용의주도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낮에 있었던 일로 보아 사소한 일도 자칫하면 큰 사고로 불거질 우려가 컸다. 우리는 자체 규찰대를 조직해서 공장시설 보호와 마찰방지 임무를 맡겼다. 최 신부는 공장시설, 기계와 함께 신나, 석유와 같은 위험물을 점검했다. 노동자들은 아무리 화나는 일이 있어도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위험물에 손대지 않겠다고 서로 약속했다.
회의가 끝나자 리오 씨가 또 자기 말을 늘어놓았다. 키가 작고 등이 구부정한 그는 축 늘어진 후드 달린 검은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검은 후드 때문인지 나는 그를 볼 때마다 백설공주에게 독사과를 주러 갔던 계모가 생각나곤 했다. 전직 변호사라는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뭔가 할 말이 굉장히 많았다. 그가 의도하고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그 때문에 슬프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틈만 나면 그는 우리 지원팀에게 한국 사람들이 가진 인종편견.민족차별.피부색차별 등에 대해 토로했다. 한참 이야기하다가 꼭 마지막에는 ‘한국은 전혀 선진국이 아니라 3세계에 속하는 저급한 나라’임이 분명하다고 마무리를 지었다. 다 맞는 말이지만, 그 말을 듣는 우리는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밖에서는 박 상무의 지시를 받은 경비아저씨가, 우리가 만들어 놓은 피켓을 불에 태우고 있었다. 우리는 경비아저씨와 싸우기도 뭐해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권 선생은 산재를 당했다는 세 명을 면담했다. 셋 중에는 아직도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있는 이도 있었다. 김이찬 씨는 드미뜨리 씨가 찍은 필름을 오마이뉴스로 보내 동영상으로 띄우도록 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밤에도 김이찬 씨와 김현철 씨가 함께 해줘서 더욱 든든했다.

피 말리는 협상 (2002년 1월 24일 목요일 새벽)

자정이 넘었다. 2층에 있는 알리씨 방에서 전체 체불임금 내역을 조사하던 우종억 씨와 김현철 씨가 식당으로 내려왔다. 인원이 워낙 많은 데다 모두 기본급과 연장근로시간이 달랐으므로 한 명 한 명 상담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댄다. 둘은 출근카드와 자료를 한 보따리 풀어놓고 임금계산을 시작했다.
먼저 근로감독관과 우리는 회사 임금규정이 근로기준법에 미달하는 데서 발생하는 차액을 어떻게 할지 의논했다. 근로기준법을 그대로 적용하자면 임금총액에서 몇 천만 원 정도 차이가 날 것이다. 우리는 이번까지는 종래 규정대로 하고 이후부터는 근로기준법 적용을 요구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박 상무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 사장이 협성을 원하니 대표들과 함께 공장 밖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회사 사무실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들어가요. 뭐 우리가 돈 준다고 협상하면서 목숨 내놓을 일 있어요?”
“사무실로 들어오세요. 안전은 절대 보장할 테니까. 사람들을 자극하는 행동이나 좀 하지 말라구요.”
박 상무는 낮에 있었던 일로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노상 욕설과 주먹질로 군림하더니 그것이 부메랑이 될 줄은 몰랐던가 보다. 박 상무는 ‘사장님과 다른 분들을 모시고 한 시 반까지 사무실에 도착하겠다’고 했다. 난데없이 ‘다른 분들’이 등장했다. 하미드 씨도 ‘다른 분들’이 누구일지 모르겠다고 했다. 우리는 이 협상요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의논했다. 일단 이 늦은 시간에 협상을 하자는 것을 보면, 회사는 나름대로 해결하려는 의자가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우리가 계속 들어야 했던 ‘부도, 회사정리’ 등은 일단 협박용에 불과했던 것 같았다. 사장이 회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가능했으므로 우리는 이번 협상에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급하게 대표들을 불러 모으고 회사측의 협상 제안을 전달했다. 그리고 협상테이블에 백 명이 다 들어갈 수는 없으니, 현장 대표들과 지원팀에 모든 협상 권한을 위임하고 그 결정을 따를 것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했다. 현장 대표들은 기숙사를 돌며 자는 이들을 깨워 우즈벡식당으로 모이게 했다. 순식간에 다 모여들었다. 사람들 중에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들도 끼어 있었다. 이번 협상에서 모든 것이 결정될 수도 있으니까 의견을 모으는 데 신중을 기해야 했다. 정말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전액지불을 요구하며 끝까지 갈 것인지, 한 달 치라도 먼저 받고 업무에 복귀할 것인지, 또 다른 의견은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했다. 한창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한겨레신문의 박주희 기자가 도착했다.
우리는 회사측에 요구할 사항을 한 가지씩 정리했다.
“우리가 회사에 요구할 내용이에요. 이 거 말고 다른 거 또 있으면 말하세요.”
“첫째, 두 달 월급 다 줄 때까지 우리 일 안 해요.”
“둘째, 우리 중에 다친 사람 있어요. 보험으로 해주세요.”
“셋째, 우리 스트라이크 한 것 때문에 짜르면 안 돼요.”
“넷째, 때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
“다섯째, 이 약속 종이에 서서 사인해 주세요.”
“이렇게 다섯 가지예요. 한국말 잘 하는 사람, 친구들에게 말해 주시요.”
하미드 씨는 신중한 얼굴로 그 내용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이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 자신은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그가 있었기 때문에 파업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앞장서지는 않았지만 책임을 회피하지도 않았다. 각기 언어가 다른 아홉 나라 사람들은 제각각 토론하고 의견을 모으는 데 열중했다.
“자, 다음엔 만약 한 달 월급만 준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지 서로 얘기하세요.”
다시 한 번 각자 언어로 전달하고 의견을 정리했다. 하미드 씨가 최종 정리한 의견을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두 달 것 주세요. 아니면 일 안 해요. 다음에 다음에 약속, 이제 안 믿어요! 여기 다 사람 마음 똑같아요. 월급 다 받으면 일해요. 한 달만 받아 안 돼요. 다른 거 생각 없어요.”
“다른 의견은 없나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모두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사장 일행이 사무실에 도착했다는 연락이었다. 우리는 깊은 호흡을 하고 서로 힘주어 악수했다.

사무실로 가는 길을 박 상무가 지키고 있었다. 그는 대표단 이외에 다른 이들은 사무실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다.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협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대표단만 협상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사무실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으나 상무는 막무가내였다.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사람들이라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돈줄이 될 거래처 어른을 어렵게 모셔왔는데 이번 협상이 어그러지면 회사는 끝장이라며 우는 소리를 했다. 그러나 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박 상무 혼자 감당하기는 무리였다. 협상하기 싫으면 그만 두라는 배짱에 박 상무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다 함께 사무실 앞가지 가서 사장실에는 다섯 대표와 우종억 씨, 김현철 씨, 김이찬 씨와 나, 그리고 상담소 식구인 척 가장한 박주희 기자가 함께 들어갔다. 김이찬 씨가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는데 박 상무가 촬영하지 말라고 막아섰다. 둘은 낮에도 여권 때문에 실랑이를 벌였던 터라 만만치 않은 대거리를 주고받았다. 김이찬 씨는 자꾸 시간이 지체되는데 부참을 느꼈던지 카메라를 끄고 들어가는 것으로 합의했다.
사장실에는 세 사람이 소파에 눕다시피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김 사장은 정말 여유로운 것인지 아니면 초조함을 감추려는 것인지 담배 파이프를 물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신분을 극구 감추려는 ‘회장’이라는 사람과 합판을 납품한다는 협력업체 사장도 있었다. 느긋하게 기대 앉아 있는 그들에 비해, 대표들은 사장님 앞이라고 어려웠는지 앉지도 못한 채 긴장하고 있었다. 대표들이 주눅들까봐 걱정스러워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앞에 와서 앉으세요.”
사장도 노동자들과 우리를 번갈아 보며 너스레를 늘어놓았다.
“야, 괜찮아. 앉어. 내가 뭐 니네들 때리기라도 하냐? 여기 회장님도 와 계시니까 와서 너네가 원하는 게 뭔지 얘기해! 회장님은 나한테 물건을 사가는 사람이예요. 유통업자라구. 내가 돈이 없으니까 이 분이 해결해 주실거요.”
다음은 그 회장이라는 사람의 차례였다.
“내 간략하게 얘기할게요. 어찌됐든 간에 월급을 못 준 건 미안해요. 우리도 어려웠을 때 사우디도 가고 중동도 갔단 말이야. 두말한 이유가 없어. 월급을 못 준 것에 대해서는 잘못한 거야. 경제가 어려우니까 또 가구가 비수기예요. 지금, 그러다 보니까 어려움에 봉착한겁니다. 거, 내가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봉급을 못 받는 심정은 잘 알 것 같아요, 그러니까 긴 얘기하지 말고... 저 한국말, 내 말 알아들어요? 지금 문제되는 게 뭡니까? 뭐? 월급이라구? 그래 월급이 어는 정돈데?”
마치 금세 해결이라도 해줄 것처럼 나서는 사장과 회장이라는 이의 표정에서 다름을 느꼈는지 현장 대표들은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자 사장이 또 나섰다.
“야, 얘기해 봐봐. 니네들이 회장님한테 직접. 어, 그래. 하미드, 니가 한국말 잘 해갖구 총대맸냐? 앞으로 나왔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망설이고 있던 하미드 씨의 말문이 터졌다.
“우리는 11월, 12월 월급 안 받았어요.”
“두 달 치? 야, 사장. 너한테 한 가지 물어볼게. 너는 아까 나한테 뭐 월급이 150%도 가고 180%도 된다고 했는데 외국인근로자들이 왜 그렇게 노임이 비싸냐?”
“그렇죠. 새벽 한 시까지 일하면 이틀 치 주고 그러니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고 느낀 회장이라는 사람이 이번에 우리에게 딴지를 걸어왔다. 마치 잘 계획된 말놀음에 낀 느낌이었다. 하지만 꼬투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대한의 성심성의를 보여 가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 그런데 귀하들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우리는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이라는 외국인 상담소에서 왔습니다.”
“그래? 물론 이 사람들이 타국에 와서 고생하고 월급도 못 받고 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지만, 그런데 이렇게 문제를 과격하게 끈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 않소? 우리 사업장이 다른데 비해서 크게 나쁜 게 뭡니까?”
“우리가 과격하게 한 것은 아무것도 없구요. 우선 임금은 다 지급하셔야지요. 그리고 매일 새벽 한 시까지, 하루 열네 다섯 시간 일 시키는 건 정말 잘못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사업장내 폭행 폭언도 심각한 상태예요. 회장님이 아는 것보다 이 사업장에는 기가 막힌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임금지급이 안 돼서 임금을 달라고 하면 돈을 주는 대신 뺨을 때린다거나, 발로 차거나 삽으로 때린다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월급도 그렇지만 이런 문제도 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당근은 회장이 쥐고, 채찍은 사장이 쥐기로 했는가 보았다.
“야근? 그건 얘네들이 하는 거야. 우리가 일부러 시킨 거 아냐. 얘네들은 야간근무 하는 거 더 좋아해.”
김 사장이 기회를 놓칠세라 급하게 말을 쏟아놓고 바로 이어 회장이 느긋하게 말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시정해야지. 그런데 이런 점도 있어요. 가끔 내가 현장을 둘러보면 일하는 시간에 담배 피고, 잡담을 한다거나 하면 말이요, 그런 경우에는 외국인이 아니라도 다반사로 있는 일이요. 그건 그렇고 이렇게 합시다. 두 달 치 봉급 지급하면 근무 여건에 불만이 있어요 없어요. 직접 한 번 말해 보시오.”
하미드 씨가 특유의 찬찬함을 찾아 나갔다. 그는 거의 무표정하게 보였다. 그간의 신고가 그의 얼굴에 배어 있었다.
“아까 사람들 나한테 적어줬어요. 우리 두 달 꺼 월급 다 줘요. 그리고 우리 회사 그만두고 집에 갈 때 돈 다 줘야 돼요. 우리 스트라이크 했어요. 폴리스 이미그레이션 부르지 마세요. 그리고 세 명 손가락 다친 사람 있어요.”
“야, 너 양심 있으면 제대로 말해. 저 사람은 조립부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손을 다쳤어요. 우리가 6시 반에 일 끝냈는데 7시 반에 다쳐갖고 왔어요. 제 집에 보낼 물건 만들다가 다친 거라구. 그걸 치료해줬더니 뭐가 어째?”
이제껏 꽁무니를 내리고 있던 박 상무가 옳지 잘 걸렸다 싶은 양으로 급제동을 걸 듯 말을 끊었다. 하지만 한 두 사람의 작은 사실의 차이로 덮어질 문제가 아니었다.
“그 사람 말고도 산재자가 두 명이 더 있지 않습니까? 사실과 다르다면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고 산재자들 치료도 치료지만 일을 쉬게 해줘야 발리 회복할 거 아닙니까?”
이미 박 상무가 끼어들어서 될 자리가 아니었다. 김 사장은 내 말까지를 끊고 하미드 씨를 재촉했다.
“왜? 너 또 할말 있어? 어디 해봐.”
“그리고 욕하지 마세요. 때리지 마세요. 다 약속해서 써 주세요.”
김 사장이 비웃는 듯한 얼굴로 하미드 씨를 바라봤다.
“끝이야 그게? 겨우 그거야?”
하지만 그런 김 사장을 하미드 씨는 표정도 없이 마주 볼 뿐이었다. 회장이 나섰지만 어떤 구체적인 답변도 없었다.
“그런 월급 외 문제는 여기서 다 시시비비를 가릴 수도 없고 하니까... 우리가 선진국도 아니고 자선단체도 아니고 그런 점은 십분 이해하고 대화로 풀어가야지. 우리가 돈을 쌓아놓고 안 주는 것도 아니고, 막말로 고름이 살 되나? 자아, 잘 생각해 보시우. 우리는 공장 부도내면 그만이야. 내가 뭐, 이렇게 골머리 썩어가면서 이 공장 안 해도 먹고 살아. 이 김 사장 이놈이 제대로 못하고, 내가 밑에 데리고 있는 사장이 일고여덟 되는데 딴 사람은 다 잘하는데 이 놈만 이렇게 제몫을 못해. 내가 어쩌다 한 번씩 와보면 뭐 맨 어렵다 소리나 해. 어이, 자네들 나 본 적 있지? 그렇지? 애들, 다 불법체류자 아니우? 그래 애들도 불쌍하고, 이 회사 부도나면 내 밑에 있는 거래업자들도 어렵게 될까봐, 내가 이렇게 밤잠 설치고 온 거 아니겠어? 이 늙은이가 말야. 저기 밖에 있는 벤츠, 저게 내 차야. 내가 이 밤중에 기사 깨우기가 너무 미안해서 내가 직접 몰고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다니까.”
갑자기 나타난 회장이라는 사람은 무슨 조직 두목 같은 소리를 하고 있고, 김 사장은 단 한마디도 책임 있는 말을 내놓지 않았다. 사장이니 회장이니 하며 앉아 있는 사람들은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이 뭔지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저 말장난하듯이 요리조리 돌려가며 자기들 하고 싶은 말만 떠들고 있었다. 이런 협상을 계속 해야 하나, 그만 중단해야 하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고민을 읽었는지 회장은 대안 한 가지를 제시했다. 아주 파격적인 것이라고 토를 먼저 달았다. 제안은 11월 임금은 내일 지급하고, 12월 임금은 보름 후에 지급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포천군청에서 지급보증을 서 줄 것이라는 것이었다. 군청 지역경제과에서 중소기업 육성자금을 지원하는데 신청서를 내면 보름쯤 후에는 돈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큰 자선이라도 베푸는 듯 회장이 거드름을 피웠다. 졸음이 몰려올 시간이 훨씬 지나고 있었다.
“에, 이걸 받아들이라고. 이게 마지막이야. 만약에 이것도 싫다고 하면 우리는 회사 부도내면 그만이야. 월급을 받던지 뭐. 그건 자네들이 알아서 하는 거지. 우리도 귀찮아. 우리는 공장 폐쇄하면 그만이니까. 아, 돈도 없겠다. 일도 안 하겠다. 끝난 거지 뭐. 싫으면 다 관두자구. 야, 김 시장, 내일부터 그냥 문 닫아라. 애들 다 내보내구. 기숙사에서 알아서 살다가 다 나가겠지. 받아들일 거요, 말 거요. 가서 사람들한테 물어보라구. 이건 파격적인 조건이야. 괜히 자네들끼리만 생각해서 안 받아들인다고 했다가 사람들한테 원망 듣는다구. 야, 거기 그 서류 좀 가지고 와 봐라.”
박 상무가 웬 서류를 꺼내 보였다. 중소기업육성자금 어쩌고 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신청서였다. 노회한 회장은 노동자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점을 콕 찍어 협박한 것이다. 왠지 진짜 모든 결정권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회장은 핏대를 세웠다. 혼란스러웠다. 회사 자금사정이나 지역 경제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섣불리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자칫 잘못 결정하면 그나마 받을 수 있는 것까지 다 날리게 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나는 대표들의 눈치를 살폈다. 다들 무척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위기를 느낀 우종억 씨가 내게 다가와 ‘협상을 더 이상 진행시키면 안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눈치 빠른 회장은 우종억 씨를 저지하고 나섰다. 당신들이 선동해서 일을 망치려는 거냐고 눈을 부라렸다. 대표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이국만리를 건너와 누구를, 어떤 것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나 또한 어느 쪽이 더 이익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결정 내리기에 부담을 느낀 우리는 전체 의견을 들어보고 한 시간 후에 다시 협상하자고 제안했다. 그들도 기대감 반 불안감 반의 표정으로 우리의 의견을 받아 들여야 했다.

식당에 다시 모인 우리는 회사측의 안을 놓고 다시 의논했다. 회사의 자금능력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이 표를 던져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리는 거의 도박을 하는 심정이었다. 하미드 씨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만약에 우리가 두 달 꺼 다 달라고 하고, 회사가 부도나면 돈 받을 수 있어요? 없어요?”
그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가 끝까지 밀고 나가고 회사가 돈을 주지 못하면 부도날 수도 있겠죠. 만약 부도나면 우리는 경매 절차를 통해 임금을 받을 수 있어요. 그런데 시간이 많이 걸리죠.”
내 말에 이어 우종억 씨가 아끼던 말을 꺼내놨다.
“여러분들은 어차피 회사가 나중에 준다는 말을 못 믿겠다는 거잖아요. 사장은 이 회사를 그렇게 단숨에 내버릴 만큼 가치 없게 여기진 않는 것 같아요. 한 번 밀고 나가 보죠.”
어려운 말을 꺼내며 언뜻 우종억 씨가 조심스레 우리 지원팀의 눈빛을 찾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갖은 상담과 일처리를 해왔지만 백여 명의 험난한 생존이 결린 처음 겪어보는 상황이었다. 한국노동자들의 파업도 승리가 쉽지 않은 세상이었다. 그런데 침묵을 깨고 나온 하미드 씨의 물음은 뜻밖이었다.
“만약에 우리가 끝가지 하면 당신들 우리랑 같이 해줄 거예요?”
갑자기 눈물이 복받치는 것을 느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했다.
“그거야 물론이죠.”
그 별것 아닌 대답에 갑자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우리는 이미 한 배를 탄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마음들이 통하고 나자 필요한 것은 오히려 냉정이었다. 좀더 솔직해지자. 이들은 이미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짊어지고자 한다.
“아니 잠깐만요. 우리가 함께 한다고 해서 돈을 바로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에요. 한 달 치만 받고 일을 시작하든, 두 달 치 다 달라고 요구하든 둘 다 위험한 점이 있어요.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한 덩어리가 된 노동자들은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빠르게 입장을 정리했다. 어수선하던 실내가 정돈되고 결론이 나왔다. 어떤 쪽으로 결정해도 전액 다 못 받게 될 위험이 있다면 처음 주장을 고수하겠다는 것이었다. 차분하게 서거나 앉아 대표들의 숙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회장과 사장이라는 사람은 번갈아 가며 핏발을 세우며 분개했다.
“너희들 이번에 이 거 안 되면 너희들 월급 못 받아. 공장 없어져.”
“내가 얘기할게. 한 달 치도 못 줘서 이 사태가 벌어졌는데 두 달 치 다 달라고 하면 어쩌라는 거야. 우리는 최선을 다 했다고 생각해. 지금까지 나는 내 밑에 있는 김 사장이 잘못한 거니까 나부터도 낯부끄럽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만약에 귀하들이 자꾸 두 달 치 다 달라고 하면 이젠 나도 양심에 부끄럽지도 않아.”
“니들 돈 못 받어. 영원히 못 받어.”
“내일 오전에 군청에서 올 거야. 골치 아프게 굴면 한 번 털고 가자구. 우리가 쓰러지면 포천 바닥이 아수라장 된다. 알아서들 해. 최악의 경우 우리는 털고 가면 끝나는 거니까.”
한참 협박을 늘어놓던 회장은 대표들을 통해 설득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던지 이번엔 우리에게 전원을 다 모아달라고 요구했다. 자기가 직접 모든 이들에게 회사 사정을 설명하겠다고 했다. 또 무슨 수작일까. 우리는 의도를 파악할 시간을 벌기 위해 대꾸하지 않았다. 회장은 선뜻 대답하지 않는 우리를 힐난했다. 회장인 자지가 고용인을 직접 만나겠다는데 당신들이 무슨 권리로 그걸 막느냐고 정색을 하고 달려들었다. 분열시키려는 의도였다. 그 동안 여러 차례 전체 의견을 묻고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지만, 만에 하나 분열이 생기면 전체에 미칠 영향은 엄청날 것이다. 그간 일궜던 신뢰와 단결이 깨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회장의 요구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다시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거운 눈빛이 교차했다. 누구도 말이 없었다. 그러나 몇 번 있었던 위기 때마다 놀라운 단결을 보였던 ‘동지’들이 아닌가. 우리는 서로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의지를 다시 확인했다.

사무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은 물론이고 기숙사에서 자고 있던 이들까지 모조리 부려 나왔다. 박 상무는 열을 내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위기가 될지 힘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모든 이들과 쉽게 의견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안타까웠다.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끌려나온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한 사람, 한 사람 굳게 악수하고 등을 다독이며 격려했다. 악수와 격려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분열을 막아보자는 서로의 약속이고 다짐이었다.
사무실은 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쫙 찼다. 김 사장은 남의 일을 구경하듯이 팔짱을 끼고 서서 보고만 있었다.
회장은 아까 대표들에게 제시했던 안을 다시 한 번 장황하게 이야기 했다. 훈시라도 하듯. 어쨌든 그는 고용주였다. 수많은 난쟁이들이 자신만을 주목하게 만들 수 있는 거인, 누가 그에게 그런 권능을 주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회사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주길 바란다. 그렇게 어려운데도 한 달 치 월급을 마련하려고 백방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 줘야 해. 나머지 한 달 월급도 군청이 지급보증을 서면 확실하게 받을 수 있어.”
그러나 새벽 형광등 아래 선 초췌한 이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미 단잠 같은 것들도 물러난 지 오래였다. 침묵이 껄끄러웠는지 회장은 즉석에서 또 다른 안을 한 가지 급히 내놨다.
“11월 임금을 즉시 지급하고, 퇴직하겠다는 사람에게는 12월 임금도 즉시 지급하겠다. 계속 일할 사람들은 15일 후에 지급할 테니 기다리면 돼. 어차피 계속 같이 일할 사람들이 보름쯤은 참아 줘야 하는 것 아니야.”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 싶은 듯 회장은 대표들을 앞에 세워놓고 자기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빼놓지 않고 통역하도록 시켰다. 회장은, ‘여러분이 도외주기만 하면 이제 회사는 내가 책임지고 운영하겠다’는 공약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제안에 대해서도 다들 반응이 없었다. 그는 그처럼 획기적이 제안에 왜 대꾸가 없는지 답답해했다. 말할 때마다 울대가 들썩일 만큼 목에 힘을 주었다. 옆에서 답답하다는 듯이 지켜보던 박 상무가 나섰다. 그는 회장에게 언질하듯 했지만 실제로는 회장의 말만 끝나면 바람 스치는 소리마저도 들을 수 있을 듯 엷어져 있는 노동자들의 귀에 호소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똑같은 의견이 아니라구요. 30%가 전액지급을 요구하며 다른 사람들 선동하는 거예요. 나머지는 한 달 치만 받아도 일한다구요. 지금 선동하는 놈들 분위기가 험악하니까 다른 의견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거라구요. 우리는 떼 낼 사람 다 떼 내고 일할 사람만 데리고 일하면 된다니까요.”
급기야는, ‘다 모아놓고 말하면 눈치 보느라고 대답을 못 하니까 한 사람씩 불러서 의사를 물어보자’며 목을 꼿꼿이 세웠다.
이건 떠 무슨 말인가. 더 노골적이고 치졸한 분열책을 쓰겠다는 것이었다. 약간의 술렁임을 감지한 탓인지 박 상무는 기고만장한 얼굴로 분위기를 훑어보았다. 뭔가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긴장했다.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그때 드미뜨리 씨가 소리쳤다.
“돈 있어 일 있어. 돈 없어 일 없어!”
천정이 쩌렁쩌렁 우리게 큰 목소리였다. 그때까지 싸늘하게 지켜보고 있던 노동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참았던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No!”
“우리 다 똑같애.”
“같이 여기서 말해. 따로 따로 아니야.”
“No Money! No Work!”
“돈 줘! 돈 줘! 돈 줘!”
어느 한 구석에서 시작된 구호가 사무실을 흔들고 있었다. 감동이었다. 먼 이국에서 온 각기 다른 피부색과 눈빛의 노동자들이 간절한 목소리로 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뜻밖의 상황을 맞은 회장과 사장, 상무는 당황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나마 ‘동지’들을 믿지 못했던 나는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구호를 외치던 이들은 더 이상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이 하나 둘 무리지어 썰물처럼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들이었다. 어느새 사무실은 텅 비고 찬바람이 돌았다. 이렇게 재빠른 단체행동은 우리도 예상치 못했기에 의아스럽기까지 했다.
회장은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며 협상을 잠시 쉬자고 했다. 우리는 모두 나와 식당으로 향하고 박주희 기자는 회사측과 이야기해 보겠다고 사장실로 다시 들어갔다. 네 시간 반 동안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였으나 다시 원점이었다. 어느 새 날이 밝고 있었다.

우즈벡식당으로 돌아온 우리는 진이 쭉 빠져 있었다. 물론 분위기는 좋았지만 회사가 정말 능력이 안 되는데 끝까지 강하게 요구하다가 하나도 못 받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그때 회장이 식당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왔다. 우리 마음을 떠보러 온 것 같았다.
“난 서울에서 가구매장을 합니다. 우리는 올 봄 결혼할 신부들한테서 예약을 많이 받아놨어요. 혼수용품이 제때 계약대로 안 들어오면 나는 큰일난다구요. 저기 합판 납품하는 박 사장, 그 사람 내가 간신히 설득해서 이 자리에 왔어요. 그 사람도 지금 이 회사에 몇 억이 몰려 있는데 안 올려고 하더라구, 그 사람은 지금 손떼면 그나마 자기네 회사는 살릴 수 있는데 더 물리게 되면 자기네 회사도 위험해진다구요. 주변에서 이렇게 나서서 애쓰고 있으니 잘 매듭지울 수 있게 좀 해봅시다.”
앞뒤 사정으로 보아 진심인 것 같기도 했다. 아까처럼 거들먹거리는 태도는 전혀 없었다. 김이찬 씨가 말을 받았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그렇게 애쓰는데 정작 문제는 김 시장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이 두 달 치를 고수하는 것은 그동안 회사가 책임 있는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은데요. 설득하는 방향이 잘못되지 않았나 싶어요.”
계속 같은 이야기가 줄근줄근 이어졌다. 나는 한동안 듣고 있다가 슬그머니 식당을 나왔다. 박 기자가 사무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박 기자는 그 때까지도 사무실에 있었던 모양이다. 본인이 우리 상담소 활동가가 아니라 기자라고 밝히니까 사장이 반색을 하더라고 했다. 자기들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으니 현실을 잘 살펴달라고 하더란다. ‘월급도 많이 받는 놈들이 이제 벌만큼 벌어서 아쉬울 게 없으니까 문제 일으켜서 벌금 안 내고 가려고 수작부리는 거다. 월요일 오전까지 일 잘 하던 애들이 왜 그러겠느냐. 저기 같이 온 단체에서 사주해서 파업까지 하는 것 아니냐. 나는 정말 동생들이라고 생각해서 뭐든 원하는 거 있으면 다 해줬는데 정말 야속하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사업 좀 키워보려고 이것저것 투자하다 보니까 임금 좀 못줬다. 뭐 그게 그렇게 욕먹을 일이냐. 애들한테 욕도 좀 했다. 우리끼리도 욕 잘하지 않느냐. 그게 뭐 그렇게 잘못한 거냐. 그리고 애들이 일 잘 안 하고 그러면 엉덩이 좀 걷어 찰 수도 있는거지 그게 뭐 대수냐. 다른 회사에서도 노무관리 다 그렇게 한다. 괜히 나라에서 외국인들 고용 못하게 하니까 한 오십만 원만 줘도 일 잘 할 애들에게 우리는 백만 원씩이나 주고 있다. 그러니 우리 사업이 어려운 거 아니냐. 우리도 이 사업 정말 하기 힘들다.’
박 기자가 들은 이야기를 대충 추려 들어도 그 정도였다. 도대체 기대할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단결, 희망의 근거 (2002년 1월 24일 목요일 아침)

날이 훤해져 잠을 자기도 뭐했지만 박 기자와 나는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기로 했다. 우리는 하미드 씨 방에 올라가 삼십 분 정도 누워 있다가 다시 우즈벡 식당으로 내려갔다. 더 누워있고 싶었지만 너무 추워서 등이 꼿꼿해지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런 추위가 그들의 얼굴을 그토록 무표정하게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회장이나 김이찬 씨는 어디로 갔는지 없고, 우즈벡 아저씨들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제는 없던 소세지도 등장했다. 우리는 염치 좋게 아침을 얻어먹었다. 따뜻한 차를 마시니 얼었던 몸이 좀 풀렸다.
해가 오르니 날이 따듯해졌다. 기숙사 앞마당에서는 러시아 사람들이 부천에서 가져온 북을 두드리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북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다들 잠을 설쳐 피곤할 텐데 어느 때보다도 활기가 넘쳤다. 한 쪽에서는 배구를 하고 있고, 한쪽에서는 플래카드를 쓰고 있었다. 플래카드 한 장에 대여섯 나라 글자가 들어가니 무슨 광고전단처럼 보이기도 했다. 플래카드 하나가 완성될 때마다 사람들이 흥을 내며 2층, 3층으로 가지고 오라가 난간에 내걸었다. 이국땅에 와서 처음 맛봐 보는 해방감들이었다. 기숙사 전면에는 ‘돈 줘’라는 구호가 각 나라말로 번역되어 쭉 걸렸다. 노동자들은 밑에서 그 플래카드를 올려다보며 사뭇 즐거워했다. 사무실 쪽은 조용했다.

기다리는 시간은 초조했다. 그러나 기다리기로 했다. 날카로워진 신경을 견디기 위해 상황실을 청소했다. 나흘째 거의 대부분이 잠을 못 잔 상태였다. 밖에서는 계속 북소리가 둥둥 울리고 있었다. 오늘 새벽을 고비로 희망을 확인했다는 저들의 의사 표현이었다. 언어는 제각각이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이 스며 있는 것이 바로 희망의 근거였다.
사무실 앞을 지키고 있던 이들이 한국인 몇 명이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다고 소식을 전해 왔다. 외부에서 온 전화를 통해 여러 신문에 이 파업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근에 신문을 파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직접 신문을 보지는 못했다.
11시 반쯤, 노동부의 박 감독관이 기숙사 쪽으로 다가오자 다들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노동부에서 그나마 중재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었다. 박 감독관은 잠시 후에 회사 측과 군청 관계자와 함께 회의를 갖게 되는데, 잘 하면 내일쯤 임금을 지급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군청에서 보증을 서고 융자를 얻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힐 것 같다고 했다. ‘불법체류노동자 최초 파업’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언론보도 때문에 군청은 물론이요 포청 지역이 발칵 뒤집혔다고 했다. 덕분에 서둘러 대책을 마련한 것 같았다. 밤새 힘겹게 넘긴 고비가 낭보를 실어왔다. 박 감독관은 사장실로 들어가고 우리는 그 소식을 모두에게 전달하기 위해 전체 회의를 소집했다.
한 시가 좀 넘어서 협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사장실에는 군청과 경찰서 사람들도 나와 있었다. 그렇게 해결할 방법이 있는데도 사장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 더욱 괘씸했다. 이미 회사 자산을 담보로 해서 은행 융자를 받아 임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시작된 협상이었으므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조업 재개 시기 때문에 가벼운 실랑이를 벌였다. 회사측은 합의서에 사인하자마자 일을 시작하라고 요구했고, 노동자측은 임금을 수령한 이후에 하겠다고 했다. 김 사장은 군청과 경찰서 관계자들 눈치를 살피며 한발 물러섰다.
박 감독관이 노사 양쪽의 의견을 수렴해 합의서를 작성했다. ‘회사는 내일까지, 금융기관 사정으로 늦어지면 모레까지 체불임금 전액을 지급한다. 임금이 지급되는 즉시 노동자들은 업무에 복귀한다. 파업으로 인해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서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합의서 내용을 회람하면서 케이시 씨가 ‘향후 지급되는 월급은 꼭 날짜를 지켜야 한다’는 내용을 넣어달라고 해서 그 내용도 포함시켰다. 작년에 퇴사한 사람들의 임금에 대해서도 의견이 오갔다. 김 사장은 ‘지금 그것까지 주기는 어렵고 4월에나 여력이 생길 것이다’고 했다. 대표들과 나 또한 그것까지 한몫에 달라고 하기는 무리라고 여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 사장과 대표들 여섯 명이 합의서에 서명하고 모두 사본을 한 장씩 나눠 가졌다.
경찰은 임금만 지급되고 조용해지면 다른 점은 문제 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동안 피 말리는 줄다리기를 했던 것을 생각하면 마지막 합의는 너무 싱거웠다. 벌써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밖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내내 굳은 얼굴이었던 하미드 씨는 그제서야 빙긋 웃었다. 나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종억 씨와 김현철 씨는 대표들과 악수를 나누며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경찰은 이제 임금을 받게 되었으니 회사 앞으로 내놓은 집회신고를 취하해 달라고 했다. 우리는 임금이 지급될 때까지 취하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다뒀다. 밖에서는 하미드 씨와 우종억 씨가 헹가레를 타고 있었다. 여러 차례 고비를 넘기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노동자들이 승리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우리는 합의서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겨울 낯빛이 조금은 따뜻해 보였다.

나는 그간 다녀갔던 기자들에게 합의소식을 전하느라 전화기에 매달렸다. 오마이 뉴스에 띄웠던 파업 동영상과 아침 신문에 보도된 내용 때문에 언론에서 엄청난 취재경쟁을 벌였다. 기자들은 타결 소식을 듣고 자신들이 너무 늦게 온 것을 안타까워했다. 언론에서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이것이 ‘불법체류노동자들의 첫 파업’이라고 보기 때문이었다. 이미 작년에도 한 차례 파업이 있었으니 첫 번째가 아니라고 알려줘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하여튼 내용이 뭐든지 선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언론은 말릴 수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는 언론이 ‘이런 파업이 앞으로는 일반화될 것이다’라고 섣부른 전망을 내놓는 통에 영 거북스러웠다.
임금을 받기로 했으니 지원팀은 이만 철수하자고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하미드 씨가 다가와, 임금이 완전히 지급될 때까지 함께 있어 주면 좋겠다고 했다. 듣고 보니 그 말이 맞았다. 군청까지 끌어들여 한 약속이니 지키겠지 싶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는 묶었던 짐을 다시 풀었다.
권 선생은 우리가 사장실에서 합의서를 쓰고 있는 동안 밖에서 큰 사건이 있었다고 했다. 권 선생에게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회장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접촉하고 있었다. 그러는 것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임의대로 막을 수도 없었다. 그 때 리오가 회장에게 조용히 다가가 ‘나는 다른 친구들과 생각이 다르다. 나는 한 달 분만 월급을 주면 일을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은 회장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면서 ‘이거 얼마 안 되지만 나중에 술 한 잔 사 먹어라’고 리오에게 돈을 줬다. 다들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데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주변 친구들이 그를 죽일 듯이 둘러쌌다. 그는 번득이는 눈으로 동료들을 둘러보며 단 한마디만 소리쳐 말했다 한다. ‘노 프러블럼.’
범상치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눈치 챈 권 선생이 달려가 얼른 리오를 나이지리아 방으로 밀어 넣었다. 마지막 협상만 만났는데 불상사가 일어나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권 선생은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리오를 우선 격리시키고 다시 밖으로 나가 흥분한 노동자들을 달랬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리오가 십만 원 받은 것 보았다. 리오는 방에 숨어 있지 말고 빨리 나오라’고 요구했으며,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평소에도 리오가 곱잖은 행동을 자주 했으므로 누구도 그의 실수를 덮어주려 들지 않았다. 권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여러분이 서로 싸우면 이미그레이션이 올 수밖에 없어요! 제발 자제하세요!’하며 약간의 협박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분위기가 누그러진 후 권 선생은 리오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보았다. 리오는 자기가 돈을 받은 것은 맞는데 십만 원이 아니라 오만 원이라고 했다. ‘오만 원 때문에 모든 친구들과 함께 한 약속을 깰 거냐. 어떻게 할 거냐’라고 설득했다. 리오는 그 돈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권 선생은 리오와 함께 사무실로 가서 회장에게 돈을 직접 주려고 했으나 회장은 받지 않았다. 리오는 그 돈을 데스크에 올려놓고 나왔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돌아서서 또 이렇게 말했다 한다.
“노 프러블럼!”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주변을 왔다 갔다 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랬을까. 아이 셋이 딸린 가장, 외국인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차별받고 멸시당하는 흑인, 한국에서 노동을 하기에는 오히려 짐이 되었던 긴 가방끈. 나는 그가 했다는 말 그대로 제발 그의 앞길이 ‘노 프러블럼’으로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녁때는 석원정 선생과 김미선 선생이 그동안 언론에 보도되었던 내용을 스크랩해서 가져왔다. 노동자 식구들은 신문을 들여다보며 마냥 흐뭇하고 신기해했다.
그러던 밤 여덟 시쯤, 임금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란인 퇴사자들이 와서 자기들 임금도 받게 해 달라고 매달렸다. 지원팀은 처음부터 협상 내용에 들어 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와서 다시 요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설명하고, 사장이 말했던 대로 4월쯤 받으면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그때는 우리도 적극적으로 함께 해주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별로 수긍하는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본인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우종억 씨는 퇴사자들을 따로 상담해서 체불임금내역을 정리했다.

참을 수 없이 지루한 오후 (2002년 1월 25일 금요일)

또 하룻밤을 냉방에서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다 얼어 있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다른 날보다 더 힘들었다.
오전에는 신문보도 내용을 점검했다. 많은 언론에서 기사를 실었는데 엉뚱한 방향으로 튄 기사가 많았다. 예컨데, ‘앞으로 고용허가제나 노동허가제가 실시되어 외국인노동자가 합법적으로 일하게 되면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한 파업이 일반화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합법적인 외국인 고용제도를 만들라는 지당한 요구에 ‘합법화해 주면 외국인들이 다 노조를 만들어서 기업 운영이 힘들게 될 것’이라는 엉뚱한 상상을 하는 것이 우리나라 정치인들이고 기업인들이다. 노동조합의 파업을 당연한 권리행사로 보지 않고 ‘회사를 말아먹으려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인 일반에게 이런 기사는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이번 파업은 임금을 받아내는 것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과장되거나 거짓된 언론보도는 외국인노동자 제도개선 운동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게 될 것이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또 한 가지 특기할 기사가 실렸는데 ‘불법체류외국인 자진신고 땐 최장 1년 출국 준비기간을 부여한다’는 내용이었다. 사건이 사회화되면서 국무조정실에서 ‘외국인 불법체류 종합대책’을 논의했는데, 25만여 명에 이르는 불법체류 외국인의 자진출국을 유도하기 위해, 자진신고자에게 6개월~1년간의 출국 준비기간을 주고 이 기간 동안 체류를 승인하고, 최고 1천만 원인 벌금을 면제해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그 다음 주에 확정된다고 했다. 자세산 내용을 알 수 없어 속단하기는 힘들었지만 정부가 미등록 불법체류 노동자의 실체를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반증으로 보였다.
언론의 보도 방향을 제대로 잡아주기 위해 이 회사의 노동조건과 인권침해 사례, 파업 진행 결과를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발표하기로 했다. 그 자료를 준비하기 위해 석원정 선생과 김미선 선생은 급히 설문지를 만들었다. 한국인들이 퇴근한 후, 밤 시간에 설문조사를 하기로 했다. 조사에는 회사에 불리한 내용이 많이 포함될 것이므로, 회사와 마찰을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권 선생은 산재건을 취합해서 근로복지공단에 요양신청서를 접수했다.

오후로 접어들었는데도 임금을 지급하려는 낌새가 전혀 안 보였다. 될 수 있으면 사장이나 한국인 직원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사무실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들어가서 물어봤다. 박 대리가 난처한 얼굴을 하고 아무래도 내일로 넘어갈 것 같다고 말했다. 합의서에 ‘금융기관의 사정으로 인하여 1일 정도 지연될 수 있음’이라는 내용이 있으므로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왔다.
오후부터는 박 상무와 진자 싸움이 시작되었다. 박 상무는 난폭하면서도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끊임없이 시비를 걸어 왔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먼저 시비를 걸고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은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노동자들은 이제 그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그가 욕설과 함께 폭력적인 행동을 할 때마다 노동자들은 그를 둘러싸고 함께 대거리했다. 간혹 육탄전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이곳 사람들은 노예들이 아니었다. 그를 빼고 모두가 한마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우리는 열세에 몰린 그를 위해 ‘이제 그만 하라’며 등을 떠밀어야 했다. 성공적인 평화 파업을 그 사람 하나 때문에 망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조금 있다 또 나타나 똑같은 짓을 되풀이했다. 어쩌면 소요를 일으킬 목적으로 일부러 자극하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한참 면담중인데 또 박 상무가 식당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우리는 탁상 위에 널려있는 서류를 감추느라고 손을 바쁘게 놀렸다. 그러나 박 상무는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보였다. 얼굴이 벌겋게 단 그는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이거 뭡니까. 이거 어디서 거짓말만 잔뜩 늘어놓고, 이거 뭐 우리가 산재당한 사람을 바로 일 시켰다구? 이거 왜 이래, 이 사람, 이거 다치고 나서 며칠 쉬었는지 알어? 출근카드에 다 나와 있어. 이거 왜 이래? 못 믿겠으면 와서 출근카드 확인하라구. 나는 더 쉬라고 하는데, 이 사람이 자기가 일하고 싶다고 한 거야. 놀면 뭐하냐구, 돈 벌어야 된다구 자기가 그랬다니까. 그런데 이거 뭐야, 엉?”
대체 뭘 가지고 그러는지 보고 싶었지만 그는 읽을 겨를도 주지 않고 종이뭉치를 흔들어댔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신문기사 스크랩이었다. 그가 떠드는 내용으로 보아 기사에는 이 회사의 산재자들이 충분한 치료를 받지 못한 점에 대해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이것 보세요. 산재보험법에는 3일 이상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보험으로 하도록 정해져 있어요. 회사가 보험으로 처리해 줬으면 이 사람은 치료기간 동안 일하지 않아도 임금을 받을 수가 있다구요. 그런데 보험으로 안 해주니까 이 사람이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거 아네요! 그래, 상무님이 이 사람 일 못하는 동안 월급 챙겨 줬어요? 뭘 잘했다구 와서 난리예요. 난리가.”
그는 몇 마디 더 떠들어대다가 이번에는 식당에 놓여 있는 옷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거는 또 뭐야. 이거 여기 놓지 말라고 내가 몇 번 말했어. 엉? 당장 밖으로 옮기지 못해. 왜 회사 물건을 니네들이 아무데나 옮겨 놓고 그래? 이 도둑놈의 새끼들.”
이번에 노동자들이 울컥했다.
“상무님, 우리 도둑 아니야. 이거 불량이야. 불량. 저기 버린 거 우리가 여기 놨어. 상무님 불량 몰라?”
도둑 소리를 들은 한 아저씨 얼굴에 핏기가 몰렸다. 시끄러운 소리가 계속되자 밖에 있던 한국인 직원들도 들어와 눈살에 힘을 주고 있었다.
“뭐가 불량이야. 멀쩡한 걸 가지고 빨리 갖다 놔!”
같은 민족들이지만 참 별났다. 무슨 말을 얼마나 들어야 사람을 사람으로들 볼까.
“아이구, 이제 별 걸 다 갖고 그러시네. 이 때 묻은 걸 갖다 팔려고 그래요? 왜 장작거리 모자라요? 이제 그만 하세요. 별것도 아닌 것 갖고.”
그 장롱은 그 자리에 놓인 지 오래 된 것 같았다. 손잡이에 손때가 반들거렸고, 바로 옆에 있는 가스렌지에서 튀었을 듯한 기름도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그 뿐인가. 그 주변에 뭉쳐 있는 먼지로 보아 몇 달은 족히 돼 보였다. 뻘쯤해진 상무는 한 마디 더 보태고 뒤도 안 보고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빨리 갖다 놔! 이 도둑놈들아.”
도대체 누가 도둑놈이란 말인가. 박 상무가 더 시끄럽게 굴지 않도록 장롱을 내놓자고 하자 하미드 씨가 웃으며 말했다.
“상무 다 알아요. 괜히 그러는 거예요. 괜찮아요.”
박 상무가 나간 후에 우리는 기사 내용을 확인해 보고 사실과 다르게 보도된 부분, 산재가 아닌데 산재로 소개되거나 요양기간이 틀린 부분을 확인해서 언론사에 연락해 줬다. 오늘 새벽 협상하는 자리에서도 그렇고 회사측은 산재건에 대해서만큼은 아주 민감하게 굴었다. 사실이 아닌 점은 밝혀주는 것이 마땅했다. 기자들이 불충분한 통력을 통해 취재하다가 오류가 생긴 것 같았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박 사무가 이번엔 열쇠 뭉치를 쩔렁거리며 기숙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또 씨근거리고 있었다. 발은 재개 놀리면서도 우리더러 들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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