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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굶주리는 이유

굶주림이란 무엇인가

굶주림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뼈밖에 없는 앙상한 몸, 죽 한 그릇을 타려고 기다리는 긴 줄, 이것이 바로 누구나 떠올리는 기근이라는 심각한 형태의 굶주림이다.
하지만 굶주림은 또 다른 얼굴을 갖고 있다. 거의 8억 명의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는 일상적인 굶주림이 그것이다. 만성적인 굶주림 자체는 저녁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지만, 기근보다도 더 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굶주림, 그리고 이 굶주림에서 비롯한 예방 가능한 질병들 탓에 매일 5세 이상 어린이 3만4천명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1년으로 따지면 1천2백만 명-제2차 세계대전 때 죽은 사람 수 보다도 더 많다-이나 된다. 사흘마다 하로시마 원폭희생자의 수와 맞먹는 어린이들이 숨지는 것이다.
이러한 통계수치는 우리를 망연자실케 한다. 충격이자 경고이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우리는 그 숫자의 효용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숫자는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킬 수 있다. 또 실제로는 우리와 매우 가까운 것을 멀게만 느껴지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었다. 굶주림이란 정말로 무엇인가?
우리가 한 끼 식사를 거를 때 느끼는 위를 쥐어뜯는 듯한 고통인가? 만성 영양실조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피폐한 육신인가? 텔레비전 기아 구호 광고에 등장하는 아사 직전 어린이의 맥없이 졸린 눈빛인가? 그렇다. 하지만 그 이상이다. 육체적인 척도만 가지고는 굶주림을 그 근원부터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 차원에서 굶주림을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인생에서 한때 경험했던 그 배고픈 느낌을 말하는 것인지 자문했다. 이제 우리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 그러한 감정들 중 네 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공군 조종사이자 베트남전 참전용사였던 찰스 클레멘츠 박사는 엘쌀바도르에서 농민들과 함께 1년을 보냈다. 그는 그가 어떻게든 도우려고 했던 어느 가족-아들과 딸이 열병과 설사병으로 목숨을 잃었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까밀라와 남편이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는 데 돈을 쓰지 않고 수확의 절반에 맞먹는 소작료를 내기로 결정한 지 몇 해 만에 두 아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해마다 선택은 같았다. 이들이 소작료를 내면 아이들의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소작을 빼앗겼을 것이다.” 굶주린다는 것은 고통을 의미한다. 즉 불가능한 선택이 주는 고통이다. 하지만 그 이상이다.
몇 년 전에 우리는 니까라과에서 가난한 농촌 여성 아만다 에스삐노사를 만났다. 그는 그때까지 한번도 가족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했다. 여섯 번을 사산했고, 다섯 아이가 채 돌도 되기 전에 죽는 아픔을 겪었다고 했다. 아만다에게 굶주린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슬픔이다.
세계 어디서나 가난한 자들은 자신을 원망하도록 강요받는다. 필리핀의 어는 농가에 도착해서 우리가 처음 들은 말은 집이 누추해서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굶주린다는 것은 또한 굴욕적인 삶을 의미한다.
고통, 슬픔, 그리고 굴욕은 굶주림이 의미하는 것들의 일부이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점차 굶주림의 네 번째 차원이 드러났다.
과떼말라의 산지에서 우리는 가난한 농민 두 명을 만났다. 이들은 미국 오클라호마에 근거지를 둔 원조단체 세계이웃의 도움을 받아서, 부유한 지주들이 독점하고 있는 계곡의 평지에서 밀려나 가파른 비탈땅에서 농사짓는 이웃들에게 어떻게 하면 토양침식을 줄일 수 있는지 가르치고 있었다. 2년 뒤에 우리는 이들 중 한 명은 피신을 하고 한 명은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이들은 이웃에게 더 나은 영농기법을 가르친 죄인이었던 것이다. 빈민들이 대농장의 저임금 일자리에 덜 의존하게 만드는 어떠한 변화도 과떼말라 독재체제는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굶주림의 네 번째 차원은 공포이다. 고통, 슬픔, 굴욕, 그리고 공포. 우리가 굶주린 사람들의 수를 세는 대신 이러한 보편적인 감정의 차원에서 굶주림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어떨까?
굶주림을 이해하는 방식이 그 해결책에 대한 생각을 좌우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굶주림을 숫자로만, 즉 칼로리 섭취량이 적은 사람의 수로만 생각한다면, 그 해법 또한 숫자-식량원조량이 몇 톤인지, 아니면 경제원조 금액이 얼마인지-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굶주림을 가장 고통스러운 인간 감정에 직면한 사람들로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그 근원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이런 감정을 우리는 언제 경험했는가? 우리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못할 때 느끼는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력함 같은 감정이 아니었던가?” 하고 묻기만 하면 된다. 결국 굶주림은 무력한 상태를 상징한다.

무력함의 원인

굶주림이란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힘을 빼앗기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다. 잘못된 이해를 걷어낸 다음 던져야 할 질문은 굶주림의 밑바탕에 무력함이 있다면 굶주림의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분명 먹을 것이 모자라서는 아니다. 1장에서 보겠지만 지금 세계는 먹을 것으로 가득하다. 자연재해 탓도 아니다. 가장 단순하게 말하자면, 굶주림의 근본 원인은 식량과 토지의 부족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부족에 있다.
민주주의가 굶주림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시각에서는 모든 것이 다 상관있다. 민주주의에는 책임의 원칙이 있다. 민주적 구조란 자신들의 복지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에 대해 할말을 할 수 있게 하는 구조이다. 또 지도자의 역할이란 다수의 필요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반면에 반민주적 구조는 권력이 집중되어 있어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혀 할말을 못하는 구조이다. 지도자도 권력을 지닌 소수만을 책임진다.
미국에서는 민주주의를 엄격하게 정치적인 개념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토지.식량.일자리.소득 같은 경제문제에 이를 적용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시민으로서 원하는 곳에서 살 권리, 투표할 권리. 시민적 자유를 유지할 권리 같은 특정 권리들을 보장해준다. 다른 많은 사회들과 달리 미국사회는 보편적인 정치적 시민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다른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시민권이라는 개념은 확립되어 있지 않다. 보편적인 정치적 권리는 누리면서도 생명유지를 위한 자원에 대한 권리나 경제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 같은 보편적인 경제적 권리는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 책에서 우리가 보여주려는 것은 이러한 민주주의의 기본개념-어떤 결정을 내리면 그에 따라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자들에 대한 책임-이 경제생활에 결여되어 있는 한, 사람들은 무력한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가정이나 마을, 그리고 국가 수준에서, 나아가 국제적 상업.금융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경제생활의 모든 측면에서-생명체들이 먹고살기 위해 재배하고 분배해야 할 것, 즉 식량에 관해서도-의사결정이 계속 집중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빈곤과 굶주림은 해마다 수백만 명의 삶을 파괴할 것이며, 그보다 더 많은 수억 명의 삶에 상처를 입힐 것이다.
이러한 단계마다 반민주적인 의사결정 때문에 민중들이 삶에 대한 권리를 어떻게 빼앗기는지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가족 내에서 누가 식량자원을 통제하는가? 여성들은 전세계 식량의 적어도 절반을 생산한다. 여성들이 식량작물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자원이 가족의 영양상태를 좌우한다. 그러나 식민지시대부터 시작된 토지 사유화와 수출작물 중시정책으로 많은 여성들은 토지이용에 대한 권한을 잃어가고 있다. 환금작물 재배를 위한 신용대출은 거의 남성들이 차지하고, 식량작물 재배는 정체되었다. 가족 내의 이러한 변화는 굶주림의 증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둘째, 마을 차원에서 누가 토지를 통제하는가. 그리고 토지가 전혀 없는 가구는 얼마나 되는가? 이 문제에 관해서는 대다수 국가가 비슷한 현상을 보인다. 즉 소수의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농토와 목초지를 통제하게 되고, 그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토지를 전혀 가질 수 없게 된다. 1993년의 한 연구자료에서는 토지가 없거나 생계유지에 충분치 않은 토지를 가진 농촌가구의 비율이 놀랄 만한 정도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빼루는 75%, 에꽈도르 75%, 꼴롬비아 66%, 케냐 32%, 그리고 이집트는 95%에 달한다.
셋째, 국가 차원에서 공공자원이 어떻게 배분되는가? 사람들이 굶주리는 곳에서는 어디나 굶주림을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이 권력을 쥐고 있다. 이러한 반민주정부는 엘리뜨들에게만 신용대출, 보조금, 기타 지원을 제공한다. 그런 정부들은 공평하게 식량생산자원을 통제하려는 어떠한 개혁에도 폭력적으로 대처한다. 브라질의 무토지농민운동(MST)은 놀고 있는 거대한 당을 토지 없는 가구들에 돌려주기 위해 투쟁을 벌이고 있다. 1995년과 96년에 적어도 86명의 무토지농민, 그 가족, 그리고 MST 활동가들이 부유한 지주들의 사주를 받은 전투경찰에게 살해당했다.
민주주의를 찾기 힘든 네 번째 영역은 국제적인 상업과 금융 부분이다. 몇 안 되는 기업들이 제3세계에서 피땀 흘려 생산한 상품들의 세계무역을 지배하고 있다. 상품가격을 잘 받으려는 제3세계 정부들의 노력은 거대 무역회사의 무소불위의 권력과 산업국가의 무역정책에 막혀 계속 실패해왔다. 산업국가들은 연간 600억 달러어치의 식량을 제3세계에서 수입한다. 하지만 이윤은 대부분 무역.가공.판매업자들의 몫이다. 미국 소비자들이 엘쌀바도르에서 생산되는 멜론을 사는 데 지출하는 1달러 중 1센트도 안되는 돈만 농민들에게 흘러간다. 반면, 무역.선적.소매업자들은 88센트를 거둬간다.
국제원조기구와 민간은행에 엄청난 부채를 지고 있는 제3세계 국가들은 또한 산업국가의 자본가들이 결정하는 정책-이들의 빈곤심화를 가져오는-에 휘둘리고 있다.
굶주림의 반민주적 근원을 밝혀내기 위해 우리는 가족 단위에서 국제적 상업과 금융 수준에 이르기까지 살펴보았다. 이제 다시 가족 단위로 돌아옴으로써 순환을 마무리해보자.
대중들을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이 경제적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더욱 불안정해진다. 남자는 일거리를 찾아 집을 떠나고 실업은 가정폭력을 일으키고 가족을 해체한다. 경제적 압박이 가정의 유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것이다. 가정의 책임을 홀로 떠안아야 하는 여성들이 점점 더 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전체 가구의 1/3은 이제 여성이 이끌고 있다. 이들은 빈곤의 짐을 짊어진 채로 여성에 대한 차별의 장벽에 직면해 있다. 전통적인 가족제도의 붕괴는 이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한 역경을 뜻할 뿐이다. 전세계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들이 돌보고 있는 또 다른 여성과 아이들이다. 해마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건 대부분 아이들이다.
이제 우리는 문제점을 확인했다. 식량과 토지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 부족 때문에 굶주림이 생긴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삶과 죽음에 관한 경제적 문제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이 파해쳐야 한다. 왜 우리는 해마다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이러한 과정을 방치해왔는가?

- '굶주리는 세계‘중에서, 프랜씨스 라페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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