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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두 건의 참을성에 대한 시험

최근 두 사건 때문에 나의 참을성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이라면 그냥 그저그렇게 아무 일도 아니어서 기억도 못 할 것이 마음 속에 맴돌아

스스로를 반성해 보게 한다.

하나는 뭐냐면, 택배를 받을 것이 있어서 배송 주소를 집이 아니라-집에 사람이 없고 난 도서관에

있으니 도서관으로 해 놓았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금요일에 받아야 할 것이 토요일에 받게 되었다.

그것까지는 괜찮다. 뭐 택배야 하루 늦어질 수도 빨라질 수도 있는 것이려니.

토요일은 경험에 의하면 12시와 1시 사이에 배송이 되는 터라 오전에 갑작스런 일이 생겼으나 허둥지둥 도서관에 달려갔다. 겨우 12시 반 정도에 도착해서 받을 수 있겠거니 하였는데, 웬걸. 오후가 다 지나도록 연락이 오지 않았다.

래서 배달기사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했다. 그 자가 하는 말이 '토요일에 공무원들이 노는 날이니 배송지가 도서관으로 되어 있는 걸 확인하고 아예 차에 싣지도 않았다.'는 거다. 참 어이가 없다. 만일 제가 그리 똑똑하게 일처리를 하는 기사라면 미리 전화를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쏘아 붙이려다, 좋게 나는 공무원도 아니요, 도서관은 월요일이 휴무날이오하고 말았다. 그러니 정 오늘 필요하다면 사무실로 찾으러 가란다.

래서 사무실로 갔다. 기사양반이 오늘 안 주고 다음 주에 준다고 하는 걸 찾으러 왔다 그러니 직원이 미안하단다. 미안하다늘 말을 들었으니 된 거다.

두번째는 어제의 전화다. 원래 녹색평론을 정기구독하고 있었느데, 이번에 친구에게 정기구독을 기증하고 나는 돈이 없어 정기구독 신청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녹색평론에 전화를 해 기증한다고 하고 입금을 했으니 그리로 책을 보내달라고 했다. 전화는 나한테 녹색평론을 부쳤는데 친구에게 한다는 기증은 어떻게 된는 건지 물어보려고 전화했단다. 그래서 나한테 벌서 붙였냐고 했더니 벌써 송달했단다. (늘 책이 왔다.)

아니 그럼 잘 모르겠으면 송달하기 전에 전화를 미리하고 책을 부치든지 해야할 것 아닌가? 그리고 또 미리 전화를 해 기증을 한다고 입금하고 나서 바로 전화를 했는데 이럴 거면 내가 왜 애써 전화를 했냐? 그래서 하는 수 없다고 이번 호는 내가 다시 부칠테니 다음 호부터는 제대로 보내달라고 했다. 알았단다.

화가나서 다시 전화를 해 쏘아 붙이려다 참았다. 내가 받은 것은 다시 착불로 보낼테니 제대로 그 친구에게 보내달라고 하려고 했으나 참았다. 내가 그네가 잘못해서 애궂은 등기값만 날리게 되는가? 그에 또 그는 미안하다는 말 없이 입금자 이름이 같으니 헷갈렸단다.

에휴. 그나마 녹색평론이라서 참았다. 다른 잡지같았으면 그 전화상담직원은 내 화를 고스란히 받았어야 했을 것이다.

이 두 개 사건을 다시 떠올리면 화가 나는데, 그 와중에 내 마음을 들여다 보면 어찌 이 까짓 일로 옹졸하게 심란해지는지 부끄럽다.

 

예전 같으면 이렇지는 않았을 거다. 아마 길어지는 수험생활과 앞으로 좀더 남은 수험생활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많이 없어진거라 판단된다.



忍은 칼날을 내지르지 않고 마음에 묻어서 참는다는 뜻이다. 또한 忍은 잔인하다는 뜻도 있다. 많이 참으면 사람이 그 만큼 잔인해진다는 걸게다. 왜, 영화 <휴대폰>의 박용우가 그걸 잘 보여주지 않는가? 많이 참은 사람이 정신적으로 황폐해지고 독해진다는 것을.

 

요는 참는다는 것이 만병통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 저마다 참을 만한 것은 참고, 참지 않아야 할 것은 참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무조건 참아서는 안 된다. 참아라 참아라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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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사이 띄기가 어렵다

문단나눔이 왤케 지맘대로 되는지?

내비려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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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넘지 못 한다

흔히 교육에 대한 어떤 주제를 놓고 이야기 할  때,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 넘지 못 한다.'는 문구를 인용하여-누구의 말인지는 모르지만 곧잘 사용한다.

 

확실히 이 말에 공감을 한다.

 

이 말이 인용될 때 교육에 관해서 교사의 책임 막중하다거나, 교사의 역할이 그만큼 무거워 교사를 우대하여하 한다는 의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 말도 맞다.

 

허나 다시 꼬아서 생각 해 보자.

 

현재의 교육의 상황은 줄세우기식 엘리트 선발에 봉사하도록 강요받고,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교 할 것없이 신자유주의식 경쟁 속에 놓인 듯 보인다. 왜 이렇게 교육이 흘러가는가? 아니 흐른다기 보다는 교육이 왜 이런 지경에까지 변질되어 버렸는가? (교육이 원래 이런거야 선발이야 선발! 이러면 할 말 없다.)

 

여기서 위의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 넘지 못한다.'는 말을 인용 해 보자.

지금 교육의 요따구 인 것은 교사가 이따구이기 때문이야라는 생각이 자연스럽다. 너무 꼬아 버린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왜냐면 일부분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 말도 맞다.

 

 

 

그럼 교사들이 왜 이따구인가? 일필휘지 써 내려가기 어려운 질문이다.

한 번에 한 가지씩.

 

얼마전 뉴스에서

일제 고사 반대(?)를 해서 파면 혹은 해임을 당한 교사들이 몇몇이 등교를 했다고 하는 보도를 들었다. 짤렸는데 왜 나오느냐는 것이다. 거기서 교사는 투쟁이란다. 저는 승복할 수 없다고 했다. 아마 소추심사 중인가 보다.

 

그녀 혹은 그-뉴스에서 본 사람은 그녀는 홀로 국가를 대한 싸움을 시작했다. 그 뿐이다.

 

이것은 그녀의 싸움이다.

대다수의 교사들의 싸움이 아니다.

강압적인 일제고사에 대한 싸움은 국가 대 교사들의 싸움이 아니라,

국가 대 그녀 혹은 그, 거대 집단과 개인의 싸움으로 보인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이 보이지 않는가?

교사들 이따구의 단 한 가지이다.

 

나는 일제고사 부활로 인해 파면 혹은 해임되었던 선생님들 때문에,

어떤 대전환을 위한 시발점, 혹은 비등점이 될거라는 희망을 가졌었다.

 

나의 기대는 여지 없이 무너졌고, 그들은 짤려 홀로 진흙 속에서 싸움을 하다 목구멍까지 흙맛을 볼 것이다. 그리고 잊혀질 것이다.

일련의 사건들에서 대다수의 나머지 교사들은 자기일이 아니고, 또한 앞으로도 자기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잠잠하다.

 

그들은 아마 앞으로 곧 시행될 교원평가제 역시 안 되었으면 싶지만, 그로인해 자기는 짤리거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아니면 경력이 낮아서 불이익당해도 별 수 없는 일이라고 나라에서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 그도 아니면 제가 열심히하면 더 좋은 봉급과 대우, 승진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도 잠잠할 수 있다.

 

 있으면 진단고사라는 둥의 일제고사가 또 치뤄질 것이다. 교육청에서는 각급학교에 이번 시험에서 지난 번 같은 일이 벌어지면 알아서 하라는 으름장을 공문형식으로 송달해 놓았다. 교사들은 잠잠할 것이다. 기대된다. 어떤 자기변명을 늘어 놓을지, 분명 논리적 모순의 코미디를 선사하거나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을 찬양하거나 잠잠할 것이다.

 

교사들이 이따구다. 혹시 전교조라는 둥 투철한 교육 철학 속에 가르치고 생활하는 이 나는 참 선생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이 글을 읽으면 무척 열불을 낼 것 같다.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둥. 니 주위를 한 번 찬찬히 보라.

 

내가 쓰레기 백수 임용준비생이라도 그건 안다. 주위를 둘러봐라. 그렇다 교사가 이따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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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앞 의자에서

여기 바닷물을 싫어하는 사내가 있다.

 

희번덕이는 저 고기를 잡고 싶지만 그는 그럴 수 없다.

 그 짜고 시큼한 더런 물에 몸을 적시기 싫어. 그의 말이다.

 

샛강에 가 보지?

거기도 더러웁다. 짜고 시큼하지.

 

들에 산에는 고기가 없다.

그래서 고민 중.

 

그 더러운 델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원하고 산뜻하대. 헤엄치지만 고기엔 관심이 없다. 그들도 짜고 시큼해져 버렸지.

 

그래. 어쩌려고?

눈 감고 뛰어들어 볼까.

 

그는 여전히 서성이고 있지.

그럼 낚시를 해 봐. 나의 말이다.

 

여기,

바닷물을 싫어하는 사내는 여전히 서성인다.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밖이 환히 보이는 창 밖으로

낯이 익은 사람이 지나간다.

고등학교 때 가르치던 선생님이다. 무슨 과목이었지? 기억이 안 난다.

얼굴을 알아차린 순간,

엮겨운 신물이 올라오는 느낌을 받는다.

앞에 놓인 밥을 내려다 보았다. 밖에 나가 인사는 생각지도 않았다.

빵집에서 빵을 사 들고 -아마- 집으로 걸어가는 그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서

나는 너무 추한 광경을 목격한듯 잠시 얼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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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8

진보넷 블로그를 만들다.

허름해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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