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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수업의 결과로 희망사항.

내가 만약 운이 좋아 교사가 되어 수업을 했다면,

 

그리고, 그 수업을 받은 학생이 집에 가서 어머니와 대화를 했다면,

 

 

엄마 : "얘야 학교 갔다 왔니? 그래, 오늘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니? 선생님이 무엇을 가르쳐 주던?"

 

학생 : "응? 학교에서 배운 거? 없어-. 선생님은 아무 것도 가르쳐 준 것이 없어."

 

엄마 :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수업을 안 했니?"

 

학생 : "응. 수업은 했는데, 죄다 내가!-자랑스럽게- 그리고 우리가 알아낸 거야. 선생님은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질 않고, 그냥 이것저걱 물어보기만 해. 우리 반 아이들은 선생님보다 더 똑똑한 거 같애."

 

엄마 : "저런, 원 나쁜 선생님이구나! 그래 너희들이 뭘 알아 냈는데?"

 

학생 : "응, 이거랑 저거랑. 그런데 이건 좀 어려워서 내가 책을 좀더 찾아 봐야 할 것 같애."

 

 

이런 대화였으면 좋겠다. 내가 가진 대단한 희망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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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교사에 대한 반감.

나는-대한민국 교사가 되길 바라면서도- 대한민국 교사에 대해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먼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 글이 나 자신만이 옳고 나머지는 모두 그릇되었다는 주장을 하려는 글이 아니다, 또한 우리나라에는-그래도- 좋은-나름대로 애쓰는- 선생님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교사에 나는 왜 반감을 가지는 것인가라는 것을 스스로 납득하고자 쓰는 글이다.)

 

지금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일제고사 때문에 불거진 교사들의 비겁함이 반감의 원천일까? 그들은 대한민국 공무원으로서 교사이며 제도에 대해 약간의 반발을 하지만 생계 즉 돈 때문에 적극적 목소리를 내지 못 하는 그들의 상황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당장 짤리면 뭐해서 먹고 살 것인가? 이것 때문만을 아니다.

 

그럼 지식-권력 구조를 지지하고 재생산하는 그들의 역할 때문일까?

 

국어 교사이면서 교과서와 관련된 책 이외의 다른 문학 작품을 읽지 않는 그들의 나태함 때문일까? 등등.

 

모든 것이 반감의 이유가 되겠지만, 그 근본적인 원천은 무엇일까?

 

언젠가 교사가 된 지 3, 4년이 된 동기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그녀의 말인 즉, 무능력한 교사들이 많다는 것이다. 왠고 하니 자신은 교육과정에 맞춰 학습목표를 만들고 내용을 선정하고, 학습활동을 조직하고 평가도 최대한 애를 써서 만드는데 그렇지 못한 교사들이 많다는 것이다. 학생들을 위해 -교육과정에 충실하도록- 수업연구를 열심히 하는 듯 보였다. 그/그녀는 말하자면 능력있고 애를 쓰는 교사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의 국민기본공통교육과정 그 자체에 의문이 든다. 그 교육과정 내용 하나하나를 따져서 그 부분에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문제제기가 아니다.

 

푸코에게 이런 용어가 있다. ORF, PRF. official recontextualizing field는 교육과정의 공식적인 재맥락화 단계이고, pedagogic recontextualizing field는 교수를 위한 재맥락화 단계를 말한다. 무엇인고 하니 공식적인 재맥화 단계는 각종 학문에 의해 생산된 지식을 국가 이데올로기에 맞추어 교육과정으로 만드는 단계이고, 이것을 이용하여 교육현장의 틀에 맞게 재구화하는 것이 교수를 위한 재맥락화 단계이다. 위에서 언급한 친구가 애쓰는 일은 ORF에 맞추어 PRF를 제대로 구현하는 일이다.

 

이것이 과연 옳은가하는 의문이 든다. 현재 유능한 교사는 PRF를 제대로 실행하는 교사이며, 무능한 교사는 그것을 제대로 할 능력이 모자라는 교사이다.

 

교사는 근본적으로 학생을 기르는 일을 한다. 교사는 전적으로 자신의 일이 학생의 지식에 관련된 것 뿐만 아니라 학생의 삶에 총체를 신경써야 하며, 학생은 교사의 지식 영역 뿐만 아니라 전인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볼 때 교사의 수업행위는 학생의 삶-현재와 미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PRF가 그런 것일까? 일제고사가 그런 것일까?-일제고사는 입시위주, 삶의 경쟁장에서 역설적으로 도움이 된다- 국민기본공통교육과정에 짜맞춰 학생을 양산시키고, 장차 사회의 경쟁의 장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튼튼한 전사를 배출하는 것이 학생의 삶을 위한 것일까?

 

현재의 신자유주의적인 논리에 맞추자면 딴은 옳다. 그것은 학생의 삶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일제고사도 국가와 학생을 위한 것이다. 경쟁을 하려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시 된다. 일제고사를 거부하면서 대학입시교육을-지식나열과 문제풀이 수업- 하는 것은 모순적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입시제도를 거부하면서 ORF와 PRF를 긍정하는 것은 모순적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학생을 잠재력을 개발하여 전투에 능한 전사를 키우는 동시에 학생의 삶을 위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스스로가 경쟁의 장에서 피터지게 싸운 영광으로 교사가 되고 난 뒤에 학생들을 경쟁으로 모는 것을 부당하다고 볼 능력이 있을까? 없을까?

 

점점 내가 가진 반감의 원천은 오리무중으로 빠진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 혼자가 아니라 모든 것과 연결되어 그물을 이루는데 그 그물코 하나를 내가 정확히 지적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 든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 교사의 유능함, 빗나간 열정, 나태함, 비겁함, 그들이 가진 다양한 모순 등의 재료를 잘 섞은 비빔밥의 맛을 나는 '반감'이라고 느끼는 듯하다. 딴은.



사실은 나의-내 친구가 지적한 관상학적으로- 반골상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ㅋㅋ

 

그리고 나의 반국가적인-반단일체제의- 대안적 삶이 가진 세계관에 기인하는 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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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 균형, 연계= 조화

 

이렇게 그려보고 싶었다. ^-^;;;



 

이 두 개의 그림으로 세상과 삶을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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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에 대한 공포.

어느-「그리고 죽음」, 짐 크레이스- 소설을 읽다가

 

톡토기-잘은 모르지만 묘사된 바로는 바닷가 모래사장에 사는 메뚜기같이 생긴 손가락 한 마디 만한 곤충-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며 난 다수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고 깨달았다. 모래사장에 지나간 파도의 흔적을 따라 죽 늘어선, 그 조그맣고 까만, 바글바글대는 녀석들.

그게 곤충이라서 그럴까?

 

석양을 배경으로 열두 마리의 기러기가 뒤집은 V, 혹은 W나 V 자로 날아 가는 이미지는-경험에 의하면- 꽤 멋지다. 하지만 석양을 뒤덮은 천 이백 마리, 아니 만이천 마리의 기러기가 날아 가는 이미지는 꽤나 오싹하다. 왠지 지옥이 있다면, 그것의 이미지를 닮았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렇게 보면 그 수 많은 무리, 다수, 대중과 같은 집단 등에 대해 나는 공포를 느끼는 것이 분명하다. 촌스러워 비행기를 타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도시의 풍경은, 접해 본 사진이나 높은 건물에서 내려다 본 끝없이 펼쳐진 건물들의 늘어선 모습이 중첩된 것과 비슷하다고 보았을 때, 나에게는 쾌나 두려울 만한 것일 게다.

 

그 대도시의 건물들, 한 건물 속에 한 사람이 이상이 살 것인데, 그럼 그 많은 건물들 속에 들어 차 있는 사람들이 거리로 다 나온다 치면, 정말 바글바글-까만 점들이 뒤덮은 점묘화-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마치 로드킬의 희생물을 보는 것과 같이-측은함을 제외하고- 소름끼친다. 우리는 너무 많은 수의 개체가 충분히 좁은 일정한 지역에 모여 산다. 옹기종기 정도가 아닌 따닥따닥.

 

나는 왜 그런 것일까? 왜 많은 것들이 모인 이미지를 무서워 하는가?

 

그래서-마찬가지의 매락으로- 절대 정신이니 대중의 각성이니 뭐라고 이름을 붙이든, 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장면이 전율을 불러 일으키면서 무섭다. 만약 다수-민중 혹은 대중-가 뭉친 거대한 혁명이 크고 거친 파도로 일어난다면 나는 지독히도 끔직한 것을 목격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왜 그런 것일까? 왜 많은 것들이 모인 이미지를 무서워 하는가?

 

일단, 내린 답은...

 

다수의 내재적이고 필연적인 폭력. 그 힘의 방향과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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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덕이 이상무!

순덕이-시클라멘-는 잘 있어.

 

분갈이 해주고 싶은데, 꽃대가 계속 올라오네.

 

5월 이후로는 꼭대가 올라오지 않는다니까 꽃대가 사라지고 나면 해줘야겠어.

 

화분은 사 놓았지만...

 

은근히 손을 많이 가야 하는 녀석이야. 순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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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서로 닮는다.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

 

사실인 것 같다.

 

부부는 서로 닮는다.

 

연인도 서로 닮는다.

 

새를 사랑하면 새를 닮는다.

 

나무를 사랑하면 나무를 닮는다.

 

물을 사랑하면 물을 닮고, 산을 사랑하면 산을 닮는다.

 

부모를 아이들은 닮는다.

 

선생님을 학생들은 닮는다.

 

허나 요샌 학생들은 선생님을 닮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이 어쩌면 잘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돌이켜... 어쩌면 닮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분명 학생들은 온라인 게임을 닮는다.

 

돈을 사랑하면 돈을 닮는다.

 

기계를 사랑하면 기계를 닮는다.

 

권력을 사랑하면 스스로 권력이 되고자하고, 무력을 사랑하면 무력을 행사한다.

 

존레논은 평화를 사랑한 것 같다.

 

나는 고양이를 사랑하는 것 같다. 성질이 비슷하다.

 

외모도 고 멋진 고양이를 닮고 싶은데, 더 사랑해야 되지 싶다.

.

.

.

 

사람다운 사람은 사랑을 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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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복수를 부른다.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는 말 말이야.

 

사실은-너한테만 특별히 알려줄께. 누구나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 또한 누구나 알아야 하는 것이야.-

 

원래 '죄악은 복수를 부른다.'야. 놀랍지 않니?

 

이 말이 언제 어떻게-한 단어만이- 바뀌었는지는 나도 잘 몰라.

여기에 어원적 설명이나, 고문서의 주석에 참조해서 설명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는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야.

자. 이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지.

바로 내가 수모를 당해도 그것에 대한 복수는 하지 말라는 것이지. 왜냐면 그 악순환은 영원할 테니까.

 

여기에 헛점이 있어. 처음 내가 당한 수모는 그럼 누가 갚아주지?

하느님? 예수님? 부처님? 그 분들은 참으라고 하지. 왜? 그래야 천국에 갈 수 있고,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영원한 평안을 얻는다고 그 분들은 하실 거야. 한낱 내 설움은 그 분들의 위대한 말씀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것이니까. 그 자비로운 분들은 나쁜 놈을 용서할 것이고 그 나쁜 짓은 실제에서는 소멸하게 되지.

 

우리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먼 옛날 고대에서 복수는 아주 신성한 권리였어. 누구나 복수를 하려는 자에게 참견을 하지 못 했어. 중세까지도 이런 면이 조금은 있었지. 옛날 유행한 코메디 레퍼토리처럼 '아버지의 원수! 받아라! 죽어!' , '챙챙챙-' 이렇게.

 

하지만 어느 순간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는 말이 나타나면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는 아이에게 스승이 나타나선 '그래서는 안 된다. 얘야.'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어.

 

처음으로 돌아가서 원래 '죄악은 복수를 부른다.'는 말이 있었어.

그때 의미는 '네가 남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짓을 하면 너도 똑같이 받을 거야. 그러니 너는 나쁜 짓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단다.' 이런 것이었어. 아버지가 철 없는 아들에게 성년이 되기 전에 꼭 해줘야 하는 말이었을 거야. 그래서 성년이 된 아들은 남에게 나쁜 짓하기를 두려워하게 되었지.

 

하지만 어느 순간에 나쁜 짓하는 놈들이 나타났어. 남의 것을 빼앗고 죽이고 노예로 만들면 몸이 편하다는 사악한 생각을 가진 자들이었어. 실제로 해보니 그렇게 어렵지가 않고, 자기들 생각대로 되는 거야. 하지만 그 놈들은 한 가지 께름칙한 것이 있었어. 바로 '복수'야. 자기는 남에게 나쁜 짓을 해서 잘 먹고 잘 살는데, 그 당한 놈들이 자기들에게 복수를 하지 않기를 바랬어. 수모를 당한 놈이 바보이고, 약한 놈이고 착한 놈이게 만들어야 했지. 그 착한 놈들이 길길이 날뛰어 자신들에게 복수를 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꾀를 냈어. 그들은 잔머리가 좋아. 예나 지금이나.

 

말을 교묘히 바꾸어 퍼뜨린거야.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고

 

이게 바로 '죄악은 복수를 부른다.'가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가 된 비밀이야.

 

그리고 그 나쁜 놈들은 종교 지도자들과 결탁을 했어. 종교 지도자들도 그들과 입장이 비슷했기 때문에 흥쾌히 수락을 했지. 왜냐면 그 종교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선구자 혹은 스승은 있을 수 있으나, 지도자 혹은 대장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을 속여 지도자가 되어 존경과 부를 가지게 되었는데, 누구 하나가 그것을 간파하여 언젠가 그들을 끌어내릴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죄악은 복수를 부른다.'는 말을 쓰는 놈을 죽이고, 그 말이 적힌 책은 태워버리거나 말을 고쳐 다시 기록했지. 그래서 지금은 우리는 '복수'라는 말은 부정적인 것으로, 해서는 안 되는 바보같은 행동, 그것을 하는 사람은 잔인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지. 누구도 의심없이.

 

그 나쁜 놈들은 아직도 나쁜 짓을 스스럼없이 하면서 복수를 하지 말라고 하고 있어. 참으라고 말이지.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결국 당하는 놈들이 이기는 것이라고. 당한 수모를 참아서 이긴 것이라고 스스로 자위하면서 그 고통을 감내하고 있지. 옆구리에서 피가 질질 흘러내리는데 말야.

 

그래서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이 더 잘 살게 되고, 더 많아지고, 누구나 먼저 나쁜 짓을 해서 성공하려고 하는거야. 당한 놈은 참아야 하니까.

 

그런데 참다 참다 못 참는 미친, 복수는 나쁜 것이라고 말을 해도 알아 듣지 못 하는 바보같은 놈이 나타날 때도 있단 말야. 오랜 세월에 간혹 하나씩. 그래서 또 잔머리를 굴릴 수 밖에 없었어. 그들은 '법'이란 걸 만들어 내었어. 원래에도 법은 있었지만 이전 법과 그들이 만든 법은 성격이 다른 것이었지.

 

이전의 법은 간단하고 명료했지. 그것의 목적은 함께 살기 위한 것이었어. 우리 마을에서 이 짓을 하면 쫓겨나거나 벌을 받는다. 복수를 받을 것이다. 이런 개념이었어. 말하자면 무엇이 나쁜 짓인지 적어놓은 것이었지.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런데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은 법을 새로 만들면서 착한 놈들의 행동과 사고 하나하나를 조종하려는 법을 만든거야. 그리고 복수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것이었지.

 

그래서 간혹 가다 나타나는 복수의 화신은 더욱 복수가 어렵게 되었어. 새로 만든 법이 있기 이전에는 복수 이후 어리석음의 표본이 되게 되어 버릴 자신의 평판만 신경쓰면 되었는데, 새로운 법 이후에는 법을 지키려는 선량한 다른 착한 이웃들까지 그를 막아 세우는 상황이 된 거야. 복수를 하려면 이웃까지 베어야 했는데 차마 그정도까지 미친 놈은 없었어. 그래서 복수의 화신조차 참아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어. 단어 하나가 바뀐 후부터 지금까지 쭉-.

 

여기까지가 네가 알아서는 안 되는, 그러나 알아야 되는 비밀이야.

 

너는 복수라는 말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니?

어리석음? 무지몽매? 잔인함? 허무? 감방?

 

복수를 허용하면 정말 세상은 흉폭하고 차마 인간이 살지 못하는 세상이 될 것 같지?

 

하지만 말야. 복수를 허용하면 우리 할아버지의 할어버지에다 더 위의 할아버지들이 사셨던, 나라가 있기 전의 평화로운 세상이 될 거야. 모두가 남의 눈에 눈물이 나게 하는 짓은 두려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말야. 그러면 우리는 그런 곳에 살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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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색깔을 입혀 봤다.

눈의 편하고자 흰 색 대신 다른 색을 입혔는데,

 

이미지가 섞여 짬뽕이 되어 버린...느낌(?).

 

허긴, 나 보기 좋으면 된 거지. 뭘 더 바래?



 

2f4f4f        darkslategray
708090        slategray
778899        lightslategray
696969        dimgray
808080        gray
a9a9a9        darkg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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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d3d3        lightgrey
dcdcdc        gainsboro
ffffff        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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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afa        s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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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df5e6        old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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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efd5        papayaw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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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b76b        darkkhaki
daa520        goldenr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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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과 FTA> 2006. 8. 6.

몇 년이 지난 지금 이-학과지 '거름'에 싣는다하여 거의 강제로(?) 제출해야 했던- 글은 다시 읽어보니 생명력을 잃은 것 같다. 별로 글 솜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어색한 논리 전개가 눈에 띠어 혼자 부끄럽다.

 

하지만 나중에 저 때, 그 때, 이 때 더러더러한 생각을 나중에 잃어 버리지 않기 위해 Ctrl+V의 필요성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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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과 FTA

 

 

괴물은 따로 있다

평소 영화 보는 것을 즐겨하는 나는 <괴물>이 개봉한 첫 날 보러갔다. 친구들과 오전에 표를 예매하고 저녁에 보러갔는데 예상대로 영화관 안은 <괴물>을 보러온 이로 가득 차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걸 잘 아는 나는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저 괴물을 깨부수는 액션 블록버스터거니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영화는 내가 기대한 그런 눈요기 영화는 아니었다. 한 친구가 평한 대로 영화 <괴물>은 부조리극이었다. 마냥 용가리가 업그레이드된 괴수영화로 생각했던 내 생각은 착각이 되었고 나는 영화가 속삭이는 말을 들으려고 보는 내내 집중해서 영화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있겠거니 하면서.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내 마음 속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었지만 씁쓸하다는 느낌이 가장 많았다. 쓴 커피의 맛이 나는 블랙코메디를 보고 난 느낌과 같았다. 영화 속 부조리는 우스꽝스러움을 가진다. 그 우스꽝스러움이 클수록 더욱 씁쓸한 느낌을 주는 것이 이 영화 <괴물>이다. 그 장면들을 몇 가지 살펴보자면,

처음 괴물은 미군기지의 불법 독극물방류로 인해 태어났다. 국가에서는 괴물을 퇴치할 방법으로 에이전트 옐로우라는 베트남전에 살포했었던 독성화학물질을 사용한다. 그 결과 괴물의 등에서 툭 튀어나오는 새로운 괴물이 생긴다. 독극물로 인해 괴물이 생겨나고 독극물으로 괴물을 물리치고 또 다시 괴물이 태어나는 대책 없는 연쇄를 일으키는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꼴이 아닌가.

괴물이 한강에 출몰하자 방송에서는 괴물과 접촉한 도날드 하사의 몸에서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검출되었다고 보도한다. 하지만 그 바이러스는 없는 것이고 누군가가 국민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생각하건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공포를 느끼고 분노하는 뉴스는 단연 건강, 먹거리, 교육에 관한 부정적인 보도이다. 언론을 이용해서 공포에 떠는 국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2004년 만두파동이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강두가 괴물에 납치된 딸 현서가 살아있다고 해도 믿지 않고, 원효대교 밑 하수구에 갇혀 있다고 해도 가족 외에는 아무도 귀 기울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합동분향소에 모여 있던 유가족들에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정부는 그들을 강제로 병원에 수용한다. 현실의 막힌 언로(言路)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리고 허울 뿐 인 병원 전염병관리하며 비상시에 사용하지도 못하는 휴대폰의 위치추적기능, 그리고 한강 통제 공무원의 부패, 신고보상금에 후배를 팔아넘기는 양심 등 영화는 쉴 새 없이 풍자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것이 추악하더라도 현실이라는 것이 더더욱 쓴웃음 짓게 만든다.

하지만 부조리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은 강두의 뇌 검사 장면을 꼽겠다. 있지도 않은 바이러스를 찾아낸다고 한국의 연구진은 강두의 뇌를 파보려 한다. 수술대에 묶인 강두는 딸의 찾으러 가야한다는 절규를 외치지만 의사, 간호사들은 강두의 머리를 각도기로 이리재고 저리재고 할 뿐이다. 그 장면은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가슴 아팠지만 머릿속에는 또 다른 장면이 겹쳐보였다. 민중의 고통어린 외침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정부의 경제개발정책, 민중들의 삶은 황폐해지고 삶터가 사라져가지만 책상 위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며 계산하는 경제 관료들의 모습이 그것이다.

어쨌거나 결국 괴물은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괴물을 추적한 강두 가족과 이름 없는 노숙자에 의해서 퇴치된다. 그러한 괴물에 대항해서 강두의 가족이 혈투를 벌이는데 국가는 무엇을 하였나는 의문이 든다. 국민의 안전을 보장해야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어찌하여 괴물에 그 가족은 괴물에 홀로 맞설 수밖에 없었나. 그것이 실제 현실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괴물이 쓰러지고 난 후 연기 속에 비춰지는 에이전트 옐로우 분사기의 모습이 꼭 한강 철교에 매달린 괴물과 꼭 같아 보이는 것의 이유는 무엇인가. 괴물이 쓰러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진정한 괴물은 여전히 우리 곁에 매달려 우리의 목숨을, 우리의 삶을 호심탐탐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건대 괴물은 여전히 남아있다. 집채 같은 몸집에 끔찍한 모습을 한 괴수는 분명 아니다. 그것은 숨어서 보이지 않는 ‘괴물’이다. 독극물을 뿌려 괴물을 만들어내고, 매스컴을 조종하고, 언로를 차단하고, 부정부패를 만들고, 돈 때문에 양심을 팔아넘기게 만드는 것,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은 사람을 억압하는 모든 것이 그 괴물이다. 그 괴물의 이름을 ‘시스템’이라 부를 수 있겠다.

시스템이라는 괴물의 다른 이름은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이다. 자본주의 이전에 사람을 억압하는 가령 봉건신분제 같은 구조가 있었지 않은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부조리를 만들고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폭력 구조는 근대와 함께 시작한 자본주의라는 이름과 함께 시작되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한 자본주의는 지금의 괴물, 시스템을 만든 토대인 것이다. 이 시스템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 그것은 영화 <모노폴리>에서 존이 말한 ‘1%클럽’에서 만드는 것이다. 서민층을 무릎 꿇고 쓰러지지 않게 하는 ‘희망’이라는 장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 1%클럽이다. 그 장치로 인해 계속되는 민중들의 착취가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지만 자본주의가 인류의 삶을 편안하게 해주고 발전하게 한 것이 아닌가. 나쁜 것은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천민자본주의가 아닌가.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물질 중심의 천민자본주의 자체가 자본주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이름이다.

 

FTA라는 괴물

자본주의가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이 신자유주의이다.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세련된 탈을 썼다고 해도 괴물은 괴물이다. 그 괴물의 졸개, 아니 행동대장격인 괴물이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FTA이다. 이 FTA 역시 괴물이면서 막 출몰하려는 무시무시하고 흉폭한 성질을 가진 놈이다.

FTA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무서운 괴물이라는 것인가. 영어약자로 이름을 삼아서 자신의 모습을 어름하게 감춘 FTA의 본래이름은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이다. 쉽게 말하면 두 나라 사이의 모든 무역장벽을 제거시키는 협정인 것이다. 보호무역을 없애고 두 나라사이에 자유무역을 하자는 목적이다. WTO(World Trade Organization, 세계 무역 기구)가 다자간 무역 협상장인 관계로 협상체결이 쉽지 않은 문제 때문에 태어난 것이 FTA이다. 여러 나라가 함께 무역 협상할 것이 아니라 두 나라가 자유롭게 무역협정을 맺을 수 있는 통로로 만들어 졌다. 이것은 단순한 무역협정이 아니라 경제활동의 모든 영역을 이윤 추구의 대상으로 여기는 포괄적인 경제통합 협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논의 중인 한미FTA는 공산품, 농산물 뿐 아니라 의료, 교육을 포함한 모든 공공서비스를 개방할 방침이라고 한다.

한미FTA는 노무현 정부가 미국에 먼저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 측에서는 한국경제에서 크게 이득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미지근한 태도였던 터라 몸이 달은 정부는 4대 선결조건이라는 카드를 내밀었다. 4대 선결조건이란 소고기 수입재개, 스크린쿼터 철폐,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완화, 의약품 가격인하 조치완화를 말한다. 정부는 언뜻 봐도 우리나라에 불리한 이 4대 선결조건을 빌미로 미국을 유혹했고 미국은 걸려들었다.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이 한미FTA로 인해 완성에 다다르게 되었다. 노무현 정부가 원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동북아에서 경제․군사면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것을 얻기 위해 미국에 속박될 수밖에 없는 이 협정을 진행한 것이다. 이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따져보기 이전에 이 한미FTA가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과 FTA를 체결하지 않은 다른 나라를 보자.

우리나라와 경제규모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스위스는 먹거리에 관한 원산지 표시,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유전자변형농산물)표시 등 먹거리에 대한 안정성이 문제가 되어 국민투표로 인해 FTA체결이 거부되었다. 일본의 경우는 농업부문에 관해서 포기를 못해 아직 FTA를 검토 중이다. 한 일본의 여류 경제학자는 PD수첩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미FTA는 불가피하게 일본이 미국과 FTA를 체결해야 할 경우 어떻게 협상해야 하는 지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FTA가 나라의 경제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 온다면 이들 나라가 왜 진작 FTA를 체결하지 않았을 것인가.

우리나라가 미국과 체결하고자하는 FTA의 기본 협정안을 보면 이 협정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 알 수 있다. 1. FTA의 협의 사항은 각국의 국내법보다 상위법으로 인정한다. 2. FTA의 협의 결과는 최소 20년 동안 재협상할 수 없다. 3. FTA의 협의 사항이 아닌 품목은 무조건 개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4. FTA의 협상과정의 세부내용은 어느 한 나라가 원하면 3년간 공개하지 않는다. 5. FTA의 최종합의문은 협상 즉시 공개한다. 이 다섯 가지가 한미FTA 기본 조항이다. FTA가 한 번 체결되고 나면 1번 조항에 의해서 자국민을 보호하는 국내법은 무시되게 되고 그것의 폐해에 대해 뒤늦게 알게 되더라고 2번 조항으로 인해 고칠 수조차 없어진다. 20년이면 나라가 망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 밖에 독소조항도 있다. 내국민대우 원칙, 의무이행강제의 금지 등이 그것이다. 내국민대우 원칙은 계약을 체결한 상대국 국가의 투자자에게 자국 투자자와 동일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부가 사회․경제적 필요에 따라 국내 산업에만 차별적으로 적용하는 보호정책들을 철폐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의무이행강제의 금지는 상대국 투자자가 사업체를 창설․취득․확장․경영․관리 운용할 때 어떤 의무나 약속을 강제로 이행하게 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국내 기업을 인수한 외국 투자자는 고용승계 의무, 내국인 일정 비율 의무, 노동기본권 보장, 환경기준의 준수 의무 등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또한 경로우대제도 등 사회복지 차원에서 규정한 의무사항들도 지킬 필요가 없게 된다. 한마디로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이다. 이 둘은 대 정부 제소권이 인정된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의 투자자는 우리나라 정부의 보호정책으로 인해 어떠한 피해가 있을 경우에 대한민국 정부에 대해 국제재판에 제소할 수 있게 된다. 이의 한 예로 캐나다의 사례가 있다. 캐나다의 우체국은 지금 미국의 다국적기업인 UPS(United Parcel Service, 운송회사)에 의해 제소당한 상태이다. 미국의 다국적기업을 상대로 재판을 이긴 정부는 거의 없어 캐나다는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어야 하고 캐나다 우체국은 사라지게 될 것 분명하다. 우리나라 우체국도 마찬가지 과정을 밟을 것이라는 것은 안 봐도 DVD이다.

이러한 실체를 가지고 있는 한미FTA가 체결되고 나면 사회․경제․환경 전반에서 큰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멕시코처럼 농민은 땅을 떠날 것이고, 생태계는 철저히 파괴될 것이다. 공기업은 사기업화 되고, 노동권의 유연화로 비정규직은 더욱 늘어날 것이고, 취업은 꿈같은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양극화는 최대치가 될 것이다. 미국과 NAFTA(North American FTA)를 체결한 멕시코의 현재 상황이 대한민국의 미래의 모습이 될 지도 모르는 것이다. 멕시코 사회보험청이 집계한 2004년 최상위 5분위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4만908페소(약 350만원)로, 최하 1분위 가구의 1912페소(16만원)와 20배 이상 차이가 난다. 이러한 양극화로 어린이 노숙자만 10만 명이 이른다고 한다. 멕시코는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나라의 상황을 살펴보자. 미국과 의료부문까지 통합한 칠레는 양극화가 심해짐에 따라 부유한 사람은 개인보험에 가입하고 개인 주치의를 고용해 효과적인 의료서비스를 받지만 가난한 사람은 팔이 부러져 병원에 가도 3일을 기다려서야 깁스를 할 수 있다고 한다. 미국기업에 상수도를 매각한 볼리비아의 상황은 어떤가. 물 값이 보통 노동자 임금의 20%까지 올라서 집에서 아이가 혹시 물을 사용할까 걱정되어서 수도꼭지에 자물쇠를 잠그고 다닌다고 한다. 거짓말 같지만 엄연한 사실이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한미FTA 역시 공공서비스부문에 상․하수도, 전기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 몇 년 뒤에 우리는 빗물을 받아쓰고 촛불을 켜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공공서비스 조항의 아래에 있는 교육은 어떻게 될까. 노무현 정부는 한미FTA를 추진하기 전부터도 교육 개방이 세계적 대세라고 주장해 왔던 터이다. 2003년 WTO에 교육 개방 양허안을 제출한 나라 8개국 중 당당히 대한민국이 끼어있다.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다. 나머지 교육 개방에 적극적인 나라는 호주나 뉴질랜드 같은 영어 수출국 일부이다. 노무현 정부가 내세우는 교육 개방의 논리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교육개방을 통해 외국의 우수한 교육기관을 유치해 외국 학교와 국내 학교들이 경쟁하게 함으로써 한국 교육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것이고, 둘째는 미국 유학생이 8만 5천여 명인 현실을 감안할 때 유학 수요를 흡수해 외화 유출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싸한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우선, 하버드나 예일 같은 미국 유수의 대학이 한국에 분교를 세워 자신들의 졸업장을 나눠줄 가능성을 거의 없다. 게다가 유학의 주된 목표가 미국 명문 대학의 졸업장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알아주지도 않을 분교 졸업장에 만족할 한국 학생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 들어올 교육기관들의 거의 대다수는 돈벌이가 목적인 영리 대학들일 것이다. 이들은 어학이나 교양과정만 한국에서 운영하고 전공수업은 미국에서 함으로써, 미국의 본교로 한국 유학생을 유치하는 구실을 주로 해 유학도 줄 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 교육 경쟁력 강화에 대해 생각해 보자. 교육 경쟁력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더 좋은 교육 환경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는 것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미국식 대학 경쟁 체제와 한국 대학의 ‘미국대학 따라하기’경쟁은 학생들의 교육 환경 개선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그것은 대학의 자산 불리기 경쟁일 뿐인 것이다. 결국 정부에서 말하는 교육 경쟁력 강화는 등록금 인상을 말하는 것이다. 참고로 하버드대학교의 자산은 2004년까지 226억 달러(약 22조원)자산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이화여대는 2004년까지 5천7백38억 원의 자산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경쟁력이고 미국을 따라가려면 등록금이 얼마나 더 올라야 될 것인가. 이 상황에서 대학들이 자산을 학생들을 위해 투자하리라고 생각하면 너무 순진한 생각이 아닐까. 자산의 1~2%만 투자해도 학생들이 등록금을 내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는데 말이다.

이 교육개방의 문제는 대학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나도 얼마 전에 안 것이지만 자립형사립고인 민족사관학교는 1년 등록금이 천만 원을 넘는다고 한다. 또 송도 경제자유구역에 국제학교라는 이름으로 1년 등록금이 2천만 원으로 예상되는 초․중․고등학교가 2008년에 개교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서 현재 한나라당은 자립형 사립고 확대를 요구하고 정부는 이를 수용할 태도이다. 한미FTA가 체결되면 이런 빈부 차별 교육이 초․중등교육에서 한층 강화될 것이다. 정부에서는 초․중등교육은 한미FTA에서 협상대상이 아니라고 하지만 정부의 공식입장은 FTA협상과 별도로 국가 경쟁력 강화차원에서 신자유주의적 교육 개편을 추진할 것이라는 것이다. 한미FTA가 체결된다면 정부의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은 가속화 될 것이다. 그 결과 국립대는 법인화되고, 중등교육기관 역시 법인화의 길을 걸을 것이며 정부의 교육 지원금은 축소되면서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솟게 될 것이다. 교육 역시 양극화를 피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교사 입장 역시 교원 평가제를 통한 성과급제가 적용되어 정부의 교사 봉급 지원이 줄게 될 것이고, 교사는 ‘수요자’가 원하는 지식을 ‘공급’할 수밖에 없게 되어 학교는 ‘학원’이 될 것이다. 어떻게 보아도 교육 경쟁력이 강화가 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괴물에 맞서는 우리의 자세

이러한 괴물 같은, 아니 시스템이라는 괴물의 졸개이자 충실한 행동대장인 괴물 FTA은 어째서 우리 정부는 추진하는 것인가. 손해만 보는 장사가 아닌가. 사실대로 말하면 마냥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니다. 무슨 이득이 있으니까 한미FTA를 추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그것이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의 것이 ‘절대’ 아니라는 점이긴 하지만 말이다. 괴물을 조정하는 것은 앞에서 ‘1%클럽’이라고 비유한 다국적 기업들이다. 미국에만 다국적 기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삼성, 현대, LG가 우리나라의 대표적 다국적 기업이고 한미FTA가 체결된다면 많은 이득을 보는 이들이다. 이들 역시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 하고 있는 것처럼 칠레, 베트남 등지의 나라에서 민중 착취로 인한 이득을 보고 있다. 즉 FTA는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와 하든지 간에 양극화를 가속시키고, 민중을 착취하고 죽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미FTA가 체결되면 미국의 민중들도 마찬가지로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결국 이득을 취하는 것은 다국적 기업인 것이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다음 정권을 포기하면서까지 한미FTA를 추진하고 있다. 그것은 FTA가 체결되더라도 그들 자신들은 삼성으로 대표되는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얻는 막대한 이득이 있다는 말이다. 사회 지배층은 양극화가 진행되더라도 자신들이 얻는 몫으로 충분히 양질의 서비스를 받으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민중들은 언제 우리의 목숨을 하루끼니로 잡아먹을지 모르는 괴물과 함께 살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적어도 그 괴물에 저항을 해서 우리의 목숨과 삶터를 지켜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 당면한 FTA라는 괴물과 시스템이라는 우두머리격인 괴물을 상대할 수밖에 없다.

앞서 한미FTA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심각하게 생각되지만 앞서 말한 것은 한미FTA의 일부일 뿐이다. 먹거리의 안정성, 의료부문, 통신(휴대폰, 인터넷 등)을 비롯한 각종 공공서비스 부분을 따지고 든다면 문제는 더욱더 심각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한미FTA에 대처해야 할 것인가. 정부는 지금 미국과 한창 FTA를 협상 중이다. 하지만 그 협상은 비공개로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고, 무척이나 급하게 진행하고 있다. 국민들이 FTA의 진상을 파악하기도 전에 타결할 것 같이 종종걸음치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한미FTA가 진행되고 있는지 세부적인 내용은 알 수 있는 도리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되도록 많은 국민이 FTA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국민의 반수 정도는 FTA를 찬성한다고 한다. 국정홍보처의 FTA 미화 광고가 효과를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도 그랬듯이 FTA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 지 못한 어름한 상태에서 그러한 광고를 보면 혹 할 수 있고, 우리가 살 길은 무조건 FTA 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FTA의 진면목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라. 나에게 돌아올 직접적인 피해를 알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는 있지만, 무턱대고 찬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FTA라는 괴물의 실체를 알려야 한다.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주변 사람들과 FTA에 대해 이야기해 보거나 들려주어야 한다. 그런 다음 한미FTA에 대해 반대 목소리가 더욱 커질 때, 대다수 국민들이 FTA를 반대할 때, 뭉쳐진 민중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은 효순이․미순이 촛불시위 때처럼 가두시위의 모습이 될 것이다. 서명운동도 빼 놓을 수 없다.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보아야 한다. 정부가 비밀리에 FTA를 추진하고 있는 행태를 봐서 지금 민중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부가 애써 듣지 않으려하는 민중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려주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 바쁜 걸음으로 진행 중인 한미FTA의 발걸음을 늦출 수 있고 결국 뒷걸음질 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더욱 근본적인 우두머리 괴물인 시스템이 남아 있다. 자본주의라는 담론은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뿌리박혀서 어디서부터 그것이 우리를 조종하는 시스템인지 모를 지경이다. 나 역시 사실 소비지향적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의 진짜 모습은 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좀 먹는 괴물이다. 이러한 인식이 먼저 있어야 하겠다. 그러고 나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 기존의 시스템에 저항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생각을 흔히 부르는 말로 ‘진보’라고 한다. 반면 시스템을 고수하고 가지고 있는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을 ‘보수’라고 한다. 우리는 보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지배층이 원하는 바다. 지배층에게 그들의 더 큰 이득을 위해 이용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진보를 따라서도 안 될 것이다. 진보라고 하는 흔한 모습들 중 하나는 그들이 지배층이 되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이미 진보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 올바른 눈을 가져야 한다. 착하기는 쉽지만 올바르기는 어려운 일이다. 착하다고 칭찬을 듣는 것은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쳇바퀴를 잘 돌고 있다는 칭찬에 다름 아니다. 곧 착한 것이 전부 올바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세상을 올바로 보고 삶을 올곧게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소설가 장정일은 책을 무척 많이 읽는다고 하는데 이유는 나쁜 시민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렇듯 우리는 올바른 눈을 가지는 노력을 해야 하고 그것을 가지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단 그 태도가 흑백논리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이분법적인 닫힌 생각은 의미가 없다. 올바른 삶을 살기위해서는 눈과 귀와 입, 그리고 마음까지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 진보든 보수든 시스템이든 자기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생각해 볼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맞서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 역시 앞서와 마찬가지로 민중들에게서 찾아야 한다. 봉준호 감독은 <괴물>을 괴물과 싸운 그 가족들에게 바치는 영화라고 하였다. 그 가족의 모습은 어떠한가. 한강변에 조그만 매점을 가진 가족. 우리 민중과 다름 아닌 모습이 아닌가. 그리고 그 괴물을 물리치는 것은 누구도 아닌 모두 가족의 힘이 아니었던가. 괴물에 맞서 같이 싸운 이름 없는 노숙자 역시 지금 민중의 한 모습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강두 가족으로 대표되는 민중들의 힘으로 시스템을 쓰러 뜨려야 한다. 시스템이라는 괴물에 맞서 싸울 방법은 현재 시스템을 속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럼 그 대안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 대안에 대해서는 저마다 많은 생각이 있을 것이다. 모자라지만 거기에다가 나의 의견을 보태자면, 나는 그것을 ‘촌락공동체’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표방한 세계화에 맞서는 지역주의이다. 농업을 밑거름으로 하는 새로운 삶터를 만드는 방법이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삶터가 아니다. 원래 우리 겨레의 삶이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모든 문화, 놀이, 일들이 피어났던 곳은 바로 촌락이었다.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삶이 풀뿌리에서 시작되어 풀뿌리에서 끝나야 한다. 땅을 파헤치고 콘크리트로 뒤덮는 발전과 개발, 그리고 단절이 아니라 땅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소통하는 삶터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꼭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길다면 길게 영화 <괴물>을 통해서 시스템이라는 진정한 괴물과 현재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는 한미FTA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이러한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저마다 스스로 가진 올바른 눈이 가장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우리 모두 당장에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몇 십 년이 걸릴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삶을 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을 읽을 많은 선배님, 동기들, 후배님들이 예비 선생님이라서 희망적이다. 학생들에게 세상을 올바로 보는 눈을 키워 주고 그들 스스로의 삶을 소중히 여기게 만들어 줄 수 있기에. 민들레를 닮을 수 있는 선생님이 될 사람들이기에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재미있지도 않은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는 것이 적어, 쓸 말이 많고 글이 어지럽습니다. 따꼼한 질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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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길구나. 그 때는 많은 사람들이 FTA가 뭔지도 몰랐을 때인데, 미친소촛불집회 이후 지금은 식상도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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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 술자리에서

난 너도 이해해.

 

너도 이해해.

 

둘 다 이해하는데,

난 왜 눈물이 나지?

 

왜냐면 나도 이해 받고 싶으니까.

-좀 더 크면 이해 받지 않아도 상관 없어질까?

 

그리고 좀 싸우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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