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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름의 더위

 

이번 여름은 무섭도록 긴 장마와 짜증스럽고 질긴 한국의 무더위와는 별로 인연이 없다. 날씨도 제각각인 동네를 돌아다녔으니 더위도 나름의 더위를 맛보았다. 집에 들어 앉아 맞은 더위가 아니어서 그런지 더운 것도 맛이다.

 

 

6월 말에 도착한 하바로프스크는 한국에서라면 이 계절 한낮에는 내려갈 수 없는 영상 12도였다. 밤에는 9도까지 내려갔다. 오후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오락가락하는 가랑비와 함께 돌아다닌 하바로프스크에서는 쌀쌀함, 혹은 약간의 추위를 느꼈다. 시원한 초여름이다.

 

그렇다고 동토의 땅이라 알려진 시베리아가 춥거나 서늘한 땅은 아니다. 오히려 '충분히' 더운 곳이다. 하바로프스크에서는 더위를 마주하지 않았지만, 비가 내리기 전 하바로프스크는 28도까지 올랐단다.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는 더위를 피할 수 없었다.

 

맑은 하늘 아래에서 하루 종일 달궈진 열차는 밤새 열이 가시지 않았다. 열대야의 더위는 이미 6월 말, 7월 초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맛보았다. 한 개의 차량에 4인실이 9개가 있는 '쿠페'라는 등급의 열차를 탔었다. 방마다 창이 있었지만 창문을 내릴 수가 없었다. 독특한 생김새의 열쇠같은 도구가 있어야 하는데 차장만이 갖고 있었다. 말이라도 통한다면 얘기라도 해보겠으나 러시아에서 영어란 별 소용이 없다. 한국어는 더더욱.

 

시베리아의 햇살은 따갑다. 그리고 햇살이 비치는 시간이 길다. 그리고 시베리아는 건조한 동네가 아니다. 강도 많고 짙푸른 녹음이 만연하다. 습한 기운과 따가운 햇살은 음료수와 맥주를 유혹하기 충분하다. 시베리아의 아저씨들은 낮부터 1.5리터 이상의 맥주 PET병을 끼고 산다. 그게 아무리 따뜻한 맥주라도.

 

 

바이칼 주변 도시인 이르쿠츠크는 7월초에 34도까지 올라가는 더위를 기록했다. 이렇게까지 더운 적은 없었다고 한다. 해가 거듭할수록 날이 더워진단다. 지구온난화가 이런건가? 이르쿠츠크 시내에서는 사뭇 떨어져 있는 앙가라강변 통나무집 호텔에서 몇 일 머물렀는데, 이 통나무집들의 창문들은 창틀에 제대로 물리지 않았다. 더위때문이란다. 이 통나무집들은 오래전 소비에트 시절 국가가 모든 인민에게 나누어주었던 여름 휴가 별장이었다. '다차'라고 한단다. 소비에트가 무너지면서 이 별장들은 이용하던 각 개인의 소유가 되었다. 개인이 소유한다는 건 개인이 팔아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부의 다차는 숙박업자에게 팔렸단다. 말걸기가 방문한 곳은 한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작년에 이르쿠츠크의 모기업으로부터 인수한 것이란다. 어쨌든 오래된 통나무집들이, 올여름 더위 때문에 자기몸 구석구석을 늘이고 있다.

 

햇볕이 쨍한 이르쿠츠크 시내를 돌아다닌다는 것은 꽤나 괴로운 일이다. 이런 날은 바람도 잘 불지 않는다. 한겨울에는 코를 베어간다는 이르쿠츠크가 한여름에는 사람을 증발하게 만든다. 시베리아를 여름에 방문한다면 꼭 맥주값은 챙기고 가시라. 오후 늦게 카페에 앉아 시원한 맥주나 음료수를 마시는 일은 방문객으로서는 꼭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알콜은 오히려 더위를 부추길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이런 더위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한가운데 초승달 모양으로 난 깊은 웅덩이, 바이칼 호수는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하다. 숲에 가려 호수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호수가 주변에 있다는 건 몸으로 안다. 갑자기 찬 기운이 돌면 호숫가다. 강한 햇살에 끈적이는 몸이라도 호숫가에 있으면 문득 추위마저 느낀다. 바이칼 호수의 물은 한여름에도 평균온도가 4도란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경험 상 그럴듯하다.

 

해가 지기 직전에 바이칼 호수로부터 안개가 밀려온다. 무척 차가운 물방울인 이 안개가 호숫가와 알혼섬의 후자르마을을 뒤덮는 장면은 장관이다. 바이칼 호수에 떠 있는 알혼섬은 밤에는 춥다. 하루 종일 맑은 날이었어도 그렇다. 이틀밤 중 둘째날은 벽난로에 불을 때고 잤다. 재밌는 건, 벽난로의 불이 꺼져버린 이른 아침의 추위는 결코 방안에서 이겨낼 수 없다는 점이다. 이른 아침이 춥다면 밖으로 나와서 햇살을 쬐야 한다. 공기는 방안보다 차지만 햇살이 몸을 녹여준다. 잠에 취해 이게 싫다면 벽난로에 찰싹 붙어서 남아있는 온기를 빨아들이는 수밖에.

 

그렇다고 바이칼의 주변을 돌아다니는 게 덥지 않은 일은 아니다. 바이칼 위에 떠 있는 하늘은 새파랗다. 자외선, 적외선 만땅의 따가운 햇살은 부드러운 하얀 피부를 거친 붉은 가죽으로 바꾸고 머리까지 열이 오르게 한다. 호수로부터 불어오는 바람과 밀려오는 안개 속이라면 추위를 느끼겠지만 바람과 안개 속이 아니라면 덥다. 지치도록 덥다.

 

 

바이칼의 햇살 속의 추위와는 다르게 몽골의 초원은 그림자 속 바람의 추위를 선사한다. 몽골의 초원은 여름이 우기라고는 하지만 연 강수량이 300mm 밖에 되지 않는 건조한 땅이다. 올 여름에는 비도 많이 오고 구름도 많아서 사람들이 좋아한단다. 기상이 변하는 건 시베리아 뿐만이 아니라 몽골도 그러하다.

 

건조한 곳은 무더위가 없다. 햇살을 피한다면 열을 식힐 수 있다. 한국의 더위보다 좋은 건 이것이다. 초원에서 어려움이 있다면 열 식힐 나무그늘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도 올 여름은 구름이 많아 수시로 그늘이 생겼다. 구름이 해를 가리고 그 순간에 바람이 분다면 싸늘함을 느낀다. 만약 뒤산 능선에 올라 계곡으로부터 불어 올라오는 바람과 마주친다면, 그리고 햇볕 아래임에도 불구하고 방풍자켓이 없다면 추위에 벌벌 떨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순간에도 따가운 자외선은 여전하다.

 

초원에서는 햇살 아래 오래 버티기 힘들다. 한낮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하루 종일 풀을 뜯는 양들도 한낮에는 그늘을 찾는다. 한 떼의 양들이 외딴 집이 만들어 은 작은 그늘로 다닥다닥 모여 있는 장면도 볼 수 있다.

 

몽골의 초원이 바이칼과 비슷하다면 밤에는 불을 때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몽골 초원의 게르 안에서 불을 때면 순식간에 더워진다. 그 온기가 새벽에는 다 사그라들어서 바이칼에서처럼 이른 아침에는 햇살로 몸을 녹이는 게 추위를 떨치기에 좋다. 한여름에 건조한 건 한국인에게는 낯선 일이기는 하나 사막이 아니라면 입술 찢어지는 일은 별로 없다니 약간 건조한 게 더위를 이기기에는 좋긴 한 듯하다.

 

 

태국과 일본은 한국 이상으로 무더운 곳이다. 7월 중순 태국에서는 운이 좋게도 구름이 많이 껴서 강렬한 남쪽 나라의 햇살을 피했다. 가이드는 진정한 태국의 여름을 맛보지 못했다고 서운한(?) 듯했으나 결코 맛보고 싶지 않은 더위다. 태국의 더위는, 뭐랄까, 텁텁하고 뜨거운 기운이 나를 감싸고 있다고나 할까. 한낮에는 걷는 것 자체가 싫다. 태국은 너무 더워서 집에 부엌이 없다는 얘기도 있다. 음식을 사먹는단다. 부엌이 없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고는 하는데 특히 여름이라면 불 댄 음식을 정말 만들고 싶지 않을 것 같다.

 

태국에서 길거리를 지나면서 딱 8대의 자전거를 보았다. 태국 여행을 시작할 때 가이드가 3박 4일 동안 자전거 몇 대 못 볼 거라고 해서 세어 봤는데 3대는 세워져 있던 것이고 5명이 자전거를 타고 있는 걸 보았다. 이와 달리 오토바이나 스쿠터는 셀 수도 없이 많다. 이게 다 더워서 그렇단다.

 

 

일본은 땅이 워낙 남북으로 길어서 동네마다 날씨가 제각각이기는 할 것이다. 8월 초순 서울과 동경의 여름은 비슷하다. 동경과 그 주변은 서울보다 조금 더운 정도인 듯. 무더위도 비슷하다. 다만 서울보다 공기는 깨끗해서 텁텁함은 훨씬 덜하다. 대신 햇살은 더 따갑다. 공기가 깨끗하면 그늘은 더 시원하기 마련이니 숲 속과 나무 아래에서 쉬어가며 구경다니는 건 할 만하다. 그러나 빌딩 숲에서는 그늘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메탈릭한 분위기의 동경 어느 동네에서는 오직 더위를 피하기 위해 쇼핑센터만 전전했다. 그게 살 길이다 싶어서.

 

동경에서는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무척 많은데 양산을 쓰고 타는 사람들도 많다. 한낮에는 그늘에서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더위를 식히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목적지에는 에어컨이 있을 터이니 저렇게 달리겠지 싶다. 동경은 결코 에어컨 없이 여름을 보낼 수 없는 도시인 듯하다. 서울처럼.

 

 

6월 말부터 들락날락, 한 달 넘는 시간을 한국이 아닌 곳에서 보냈다. 집에 들어 앉아, 혹은 서울바닥 돌아댕기며 맞는 더위가 가장 익숙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맞닥드리기 싫은 더위인 것 같다. 재미가 없어서 그런가보다. 이제는 이놈의 서울 더위도 올 봄에 챙겨 놓은 에어컨 없이는 못 보낼 듯하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에어컨 없이 헥헥거리며 여름을 보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