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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내일이면 홍아를 만난다.

 

파란꼬리는 홍아를 39주 동안 배 속에 넣고 있었으니 많이 친숙해져 있을 터인데 말걸기는 그렇지 못하다. 뻘쭘하고 쑥스러운 만남이 될지도 모르겠다. 홍아에게 자극이 될까봐 조심한답시고 자주 쓰다듬어 주지도 못했다. 그래도 파란꼬리와 수다는 무척 떨었으니, 손길의 감촉은 몰라도 말걸기의 목소리는 알아 듣겠지.

 

 

임신을 노력했던 시절까지 합한다면 불안과 초조의 시간은 2년이다. 임신을 성공하지 못한다면 입양을 해야할까 고민하던 차에 어렵게 어렵게 임신에 성공했다. 하지만 처음 홍아가 생겼을 때는 주수에 비해 크기가 너무 작아서 유산 가능성도 있다고 들었다. 수주 동안 조마조마 마음 졸이며 지냈더랬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홍아가 파란꼬리의 뱃속에서 커갈수록 홍아의 존재가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홍아도 한 생명인데 스스로 성장하려는 본능이 있지 않겠는가. 인간도 그 오랜 세월 진화하면서 안전한 임신 상태를 대물림했을 터이다. 임신 개월수가 늘어나니 파란꼬리도 기운을 차렸고 우리는 슬쩍슬쩍 잘도 놀았다.

 

어느 시점을 지나자 임신의 불안은 파란꼬리와 홍아의 의학적 상태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파란꼬리의 배가 티나게 불룩 솟기 전에는 지나치는 사람들이 임신 사실을 알 턱이 없으니 길을 걸어도 불안했다. 서비스 정신이 제로에 가까운 일산의 버스들을 타고 다닐 때는 난폭 운전 때문에 언제나 긴장을 했다. 태어날 생명은 뱃속에서 나름 알아서 잘 크니 스스로를 위협하지는 않는다. 위협은 언제나 문명에 있다.

 

 

올해가 시작할 때 쯤, 홍아를 만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버릇대로 머릿속으로만 말이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2월이 되어서야 계획을 위한 계획을 수립했고 그것도 느지막이 수행했다. 결국 이 글을 쓰기 직전까지 홍아를 맞이하기 위한 일들을 하고 있었다.

 

홍아에게 방을 하나 주어야 하니 그 방에 있었던 파란꼬리와 말걸기의 옷가지와 물건들을 꺼내 다른 방들로 옮겨야 했고 그 방들의 물건들도 다시 정리해야 하는 연쇄 작업을 해야 했다. 집이 40평 정도라면야 대충 구겨 넣으면 되겠지만 20평 대 아파트니 쓰지 않는 물건들은 버려야 했다. 옷이라고는 거의 사 입지 않고 얻어 입는 파란꼬리와 말걸기는 리어카 하나 분량의 옷을 버렸다. 물론 재활용품으로.

 

말걸기는30여 년의 과거의 족적들을 아주 약간만 남겨두고 죄다 버렸다. 옷이야 얻어 온 것이니 별 거 아니지만 과거를 버린 것 같아 기분이 좋진 못하다. 아주 잠시 과거를 회상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족적을 남기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파란꼬리는 대학시절의 10분의 1만 하고 살라고 한다.

 

홍아 덕에 이번 기회에 사료들도 버렸다. 싸구려 사료일지는 몰라도 누군가는 기록, 보관해야 할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게 말걸기 책임은 아니니 그냥 내다 버렸다. 기록 관리가 중요하다고 6년을 떠들어 봐야 콧방귀도 뀌지 않는 운동권 조직들의 임무를 말걸기가 부담해야 할 이유는 없다. 얼마 전에 컴퓨터 업그레이드 하면서 실수로 수 GB의 자료들을 날렸는데 말걸기 돈 들여서 복구할 책임을 못 느껴서 그냥 생깠더랬다.

 

 

이제 새 역사는 홍아와 함께 시작할 모양이다. 어쨌거나 과거는 상당히 털어버렸으니 앞만 보고 가야 하는 운명이 도래했나 보다. 홍아를 만난다니 설렘도 있지만 생활이 아주 달라질 터라 두려움과 불만도 있다. 어찌 되었든 내일은 정신없이 지날 것이고 차차 새로운 생활에 익숙지자.

 

내일은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서 밥 먹고 병원으로 가야 한다. 그러고 보니 내일은 경칩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