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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 추석

올해는 추석을 앞두고 계속되는 비로 인해 추석을 코앞에 두고 지난 18일 토요일에 벌초를 다녀왔다. 나와 같이 벌초를 못한 사람들이 많아 ,오가는데 고생을 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출발했는데 도로가 뻥 뚤렸다. 오랜동안 고향길을 다녔다. 아침과 밤에도 출발을 해보고, 고속도로 국도 등 여러 형태로 다녀 보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의 열 시간이 걸린다. 이번에는 두시간 반이다. 낮에 갈때에는 고속도로는 재미가 없어 국도를 잘 이용한다. 국도로 가면 오곡이 무성한 들판과 산을 구경할 수도 있고, 가다가 아무데나 쉴 수도 있다. 고속도로는 차만 바라보고 달려야 한다. 서울에서도 사람들 머리만 처다보고 가야하는 지하철 보다는 길거리를 구경할 수 있는 버스가 좋다.

 

고향 마을은 갈수록 사람소리 들리지 않고 조용하다. 노인들이 한분씩 한분씩 돌아가시니 마을길에 모여 계시지도 아니하고, 아이들이 없으니 골목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도 없다. 동네 뒷산에 아버지 어머니 묘에는 삐죽삐죽하게 풀들이 무성하다. 그간 톱이 없어 주위의 나무들을 제대로 잘라내지 못하였는데, 새 톱으로 나무들을 잘라 내었다. 소나무를 베어서 넘어지는데 머리가 따갑다. 머리 위를 쳐다보니 붉은 벌이 떼로 몰려와서 몸에 붙는다. 도망을 가면서 머리에 붙은 벌은 떼어 내었는데, 팔과 손 머리에 벌에 쏘였다. 소나무가 넘어지면서 벌집을 건드렸는가 보다.

 

어릴적 산에 가서 벌에게 쏘이고, 벌집을 떼느라 많이 쏘여본 적이 있어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벌 중에는 파리 같이 작은 땡삐(벌)부터 엄지 손가락 만큼이나 큰 장수벌(말벌)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땡삐는 작지만 숫자가 많고, 옷 속에 들어가서도 쏘이기 때문에 아예 옷을 벗어서 털어내야 할 정도다. 내가 쏘인 장수벌도 크기가 세가지나 된다. 엄지 속가락 만하게 큰 놈 한테 물리면 머리가 띵하고, 입에서 가스 냄새가 나기도 한다. 어떤 놈은 사람에게 쏘고 가면서 침을 빼지 못해 꽁지 살점을 떼고 날아가기도 한다. 쏘인데가 퉁퉁 붙는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렇게 벌에 쏘여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기에 요즘 방송에서 벌에 쏘여서 죽었다고 하는 뉴스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벌초를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에 쏘여 제대로 벌초를 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한다. 좀 지나 벌이 집으로 들어가고 쏘인 자국은 가렵고 좀 아프기는 해도 벌초를 계속하는데는 지장이 없다. 나중에 베다만 나무들을 벌집을 피해서 다 베고 말았다.

 

이번 벌초에는 힘들어 하는 아내에게 가자는 말을 하기도 그렇고, 시간도 촉박한지라 그냥 혼자 살짝 다녀오려고 혼자 벌초를 하러 왔다. 아무도 없는 산에서 혼자 벌초를 하는게 심심하기도 하고, 낫질도 서툴러 시간이 많이 걸린다. 남들과 같이 예초기로 하면 쉬울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오랜만에 햇볕도 짱짱하여 덥기도 하다. 준비해간 점심도 속이 답답하여 먹고 싶지 않아 물만 먹고 천천히 풀을 베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산에 데리고 가서 조상들 묘소를 알려 주었다. 그러면서 당신께서 돌아가시면 높은 산에 뭍지 말고 얕은산에 뭍으라고 하시면서 묘자리를 지정해 주셨다. 묘소에 앉으면 산 아래로 마을이 보이고, 저 멀리는 우리 논밭만 있는 골짜기가 보인다. 한 동네에서 태어나서 일제시대를 겪고 전쟁과 가난을 지나면서 살다가신 어른들이다. 멀리 보이는 골짜기 논밭을 가꾸어 자식들을 키우셨다. 오늘 나의 삶을 돌아보면 조상님들의 삶에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항상 죄송한 마음으로 지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처음에는  열개의 묘에 벌초를 했다. 그때는 어머니가 살아 계셔서 벌초를 하고 집에서 명절을 지낼수 있었기에 할 만했다 . 그후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고향집이 없어지게 되니 당일 가서 벌초를 하고 돌아와야 하기에 벌초를 많이 하기에 힘에 부쳤다. 먼저 도시에 살면서 조상들의 묘를 돌보지 않는 6촌이 해야할 묘에 벌초를 그만 두었다. 내가 다 하기 힘에 부치고, 앞으로 계속할 수도 없을것 같아서였다. 산 속에 묵혀 있는듯하고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윗대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 벌초는 다음부터 하지 말고, 아버지 어머니 묘만 벌초를 할까 하는 약한 마음이 든다. 동네 사람들께 맡기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해 본다. 그래도 할 수 있데까지 내가 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고향을 올 일도 없어질 것이다.

 

벌초를 거의 마칠무렵 동네 친구의 전화가 왔다. 그의 장모님이 돌아가셔서 병원에 모셔져 있다고. 요즘도 고향 친구들이 일년에 서너차례 모임을 가지고 있기에 흉사에 우리가 참여를 해야 한다. 동네에 있는 친구를 만나 우리가 해야 할 부조에 대해 의논을 하고 처리를 부탁했다. 벌초를 마치고 병원에 문상을 가니 아직 조문 준비가 되지 않아 절은 못하고, 점심도 먹지 못했던 차에 밥만 한그릇 얻어 먹고 왔다.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는데 대구에 있는 친구의 아내가 3년전에 위암으로 위를 잘라 냈는데, 지금 또 발병을 해서 위험하다고 한다. 병원에 왔기에 그곳에 있는 누나네도 가서 자형을 만나고 왔다. 벌초만 하고 그냥 조용히 오려고 했는데...

 

이렇게 벌초를 다녀오고 추석에는 고향을 가지 않으니 집에 있다. 식구가 없고 제사도 안 지내기에 음식도 별로 장만하지 않고, 추석에도 아이와 세명이 머리를 숙인다. 하루 집에 있다가 장모님께 뎌녀오고 다음날은 배추밭에 가서 일을 하고 온게 추석의 끝이다. 좀 나돌아 다닐수도 있을텐데, 자꾸 귀찮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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