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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518

7시 반에 눈을 떴지만, 잠결에도 누군가의 배를 찾는 규민(규민은 누군가의 배를 가끔 만지작 거려야 잘 잠) 때문에 꼼짝않고 그냥 누워만 있었다.

한 8시 반 쯤 되었을까. 삼십분 쯤 더 있다가 규민을 깨우자,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규민이 선생님이 규민이 왜 안오냐고 한 전화였다. 시계를 보니 10시20분이었다.

 

나는 요즘 사실 겁이 난다고 해야할까, 두려워 하고 있다고 해야할까, 귀찮아하고 있다고 해야할까, 하여간에 총체적 슬럼프이다.

 

벼락을 맞듯 나란 인간을 밑바닥부터 바꾸고 야심차게 나의 새 일을 계획한 것이 불과 한두어달 전이다. 나는 이 새 일에 그야말로 인생을 걸었다. 그만큼 진지하고, 진지하다.

이것이 꺾이면 나는 갈 데가 없다. (정말 산골로 들어가야 할것이다.)

하늘을 채운 의지 뿐만 아니라, 바랐던 바를 솔직하게 드러낸 것이 더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나는 늘상 내가 바라는 바는 서너번 째 후의 순서로 돌려놓는 것에 익숙했었다.

 

그러나 이제보니 그건 나의 약은 계산이었던가 보다.

쓰다보니(새 일이 뭔지 이미 다들 알고 있을테니 괜히 돌려말하지 말고 소설 쓰고 있다고 밝히면서, 무지 쪽팔림), 숨이 턱 막히는 데가 나온다. 이 부분은 내가 더 물고 늘어져야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게 몹시도 귀찮다. 그냥 거기서 슬쩍 돌아 나가버렸다. 그러고나니 한글 2004를 열기도 꺼려진다. 안 열고 있다. 이게 어디서 생겨난 못된 버릇일까.

 

생각해보니 나는 원래 그 모양이었다. 무척 집중하고 있다가도 한 순간 몹시 귀찮다고 느낀다. 그러면 그냥 살짝 도망나온다. 아예 손을 놓으면 티가 나니까, 티 나지 않도록 비슷한 모양새를 만들어놓고서는 그 고비언덕을 살짝 돌아나오는 것이다. 공부할때도 그랬다. 일을 할 때도 그랬다. 다행히 공부나 일은 그런 식이어도 상관없었다. 더 생각해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원래 그 모양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식으로 끝까지 가지 않아도 대충 다 돌아가는 세상인 것이다.

같은 논리는 아니었지만, 나는 평소 대충 돌아가는 세상에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말을 곧잘 하였다. 옳은 것이 옳은 대로 몫을 찾지 못해도 대충 돌아가는 세상, 원래는 옳은 것은 결국 옳은 몫을 찾고, 나쁜 것은 벌을 받아야하는 건데, 언제까지 기다리며 살고있어도 옳은 거나 나쁜 거나 지지구리 제자리이니... 그냥 제자리이기만 한가, 다양한 방식으로 돌연변이하며 다양한 버전의 제자리이다. 점입가경의 제자리이다.

 

그러나 사실은, 지구상에는, 귀찮은 순간에도 살짝 돌아가버릴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 몇몇 일들 덕분으로 진짜 세상은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두들 가능한한 그 일을 떠맡지 않으려고 도망가지만, 도망할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이 할 수 없이 떠맡아 세상을 돌리고 있다. 나머지는 다 거기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기생의 습관을, 이게 꺾이면 갈 데가 없다고 하는 절대절명의 일에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 쓰고 있는 것이 몰두할 수 없을 만큼 재미가 없어서 그런가,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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