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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에 들르듯이

이 글은 내일아침이면 비웃음을 당할지도 모르나, 일기장에 들르듯이...

 

지금은 와인을 삼분의 이 병 마시고 난 후다.(Thanx, koo)

얼음을 잔뜩 쳐넣고 마셨건만, 11.5%의 알콜이 날 알딸딸하게 만들었다.

비웃음을 당할 지 모르는데도 떠들어댈 수 있게.

 

상대는 35도가 되는 진도 홍주를 마셨다.(이것도 Thank you, koo)

고로 나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니, 생활고 때문인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나는 생활고에 덜 시달린다. ?

그렇지는 않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편견이다.

나는 매일 8시 반쯤 되면 극도로 피곤한 생활인이다.

(그러나 그때부터 술을 마시면 다시 에너지를 회복한다.)

 

내가 먼저 가라타니 고진 이야기를 꺼냈다.

윤리를 이야기하는 상대에게.

가라타니 고진은 요즘 우리 집 안에 히어로이다.

뭐, 히어로까지야..

내가 가라타니 고진을 처음 읽은 건 녹색평론에서다.

녹색평론에 짧게 실린 그의 글은 선거와 제비뽑기에 관한 것이었다.

요는, 선거는 결국 비민주적이고, 제비뽑기가 대안이다,였다.

나는 제비뽑기니 각종 추첨이니 하는 것들에 죽어라고 운이 없는 편에 속하기 때문에 처음엔 생뚱맞다는 기분으로 그 글을 읽었다가 그의 글에 완전히 넘어가서, 맞어, 선거 다 없애고 이젠 제비뽑기 해야돼,하고 결론을 내렸었다.(430 보선을 보라)

그 글이 나에게 무척 즐거웠기에 당시, 오늘밤 진도 홍주를 마셨던 상대에게 제비뽑기 얘기를 꺼냈다가 본론 얘기도 채 꺼내보기 전에 오히려, 가라타니 고진의 글 얘기만 상대로부터 진탕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가 문학동네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말'을 재미있게 읽은 후 였다.

 

얼마 전 나는 그 '근대문학의 종말'을 너무도 흥미있게 읽었다.

요는, 문학이란 살아있(어야한)다,는 거다(내가 너무 감상적인가).

문학은 내적지향을 잃고 타인지향을 사는 대량생산/대량소비 시대에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다. 그러나 결국 문학이란 형식을 잃었다. 인도의 떠오르는 소설가, 아룬다티 로이는 소설 그만두고 댐건설반대운동가가 되었다. 가라나티 고진은 그런 그녀를 두고 '진짜' 문학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글을 이렇게 정리하면 누가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번 그글을 읽어보아야겠다.)

하여간에 나는 제비뽑기에 이어, 근대문학의 종말도 너무나 재미있게 읽어, 가라타니 고진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알아보기로 하였다. 그랬더니, <윤리21>이란 책이 딱 보였다.

(그 전에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란 책도 보였지만.)

 

그래서 나는 그에게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21>을 읽어보지 그래?하고 말을 건넸다, 오늘밤.

왜?하고 그가 되물었다.

음, 당신이 이야기하는 윤리와 그가 이야기하는 윤리가 어쩐지 맞닿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내 가방이 어디 있더라...하고 갑자기 그는 가방을 찾았다.

그는 가방을 찾으러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다른 방까지 갔다.

왜, 지금 가방을?

가방을 가지고 돌아온 그가 가방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꺼낸 책은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 21>이었다.

이 순간은, 누군가가 키스 자렛의 바하 연주를 좋아한다는 말을 끝내자마자 상대가 자켓 안주머니에서 자렛이 바하를 연주한 씨디를 꺼냈다는 순간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었다.

클로즈업, 슬로우모션.

 

이 감격적 순간 이후로 나는 감정이 과장되어버렸다.

나로서도 의심스러운 이야기를 여과없이 마구 떠들어대었다.

스스로도 조심스러운 이야기란, 자본주의를 씹으면서도 막상 대안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나의 대안은 누가 놀고있네,하고 뱉어버리면 그만일지도 모를 유치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름, 일상에 촘촘히 뿌리내려진 거미줄과 같은 촉수에서 나온 것이었다.

비록, 가라타니 고진처럼 '칸트'와 '들뢰즈'를 쉴새없이 인용할 수는 없는 것이라도 자본주의를 경계하는 마음은 일맥상통한다. (그렇지않은가)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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