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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민의 이런 사과

다섯살이 되니 이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논다. 엄마된 사람들은 수다도 떨 수 있어 좋다.

네살 무렵까지만 해도 친구를 옆에 앉혀놓으면, 장난감 실갱이에, 밀고 때리기 실갱이에, 어떤 엄마들은 그래도 무시하고 수다에 몰입하던데, 나는 그러지 못했었다.

이제 실갱이가 벌어지긴 하지만 서로 미안해, 괜찮아, 사과하고 화해하고 다시 놀고 다시 싸우고 다시 사과하고 다시 화해하며 그럭저럭 자기들끼리 논다. 기특해라.

 

규민이 친구집에 놀러갔다.

아이들 네 명이 모였고, 엄마들 네 명도 모였다.

그 집엔 플라스틱 미끄럼틀이 제법 큰 거 하나 있었고, 트럼폴린이라고 하던가, 고탄력판 아래 거대한 용수철이 있어 점프하며 노는 것까지 있었다. 아이들이 거기로 몰리는 건 당연하지. 네명이 한꺼번에 몰려 놀기엔 싸이즈가 작아서 계속 실갱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애들 실갱이가 일어나면 수다에 몰입하지 못 하던 습관으로, 그 모습을 한 켠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여자 친구 하나가 미끄럼틀 계단을 올라가더니 내려가지 않고 버티고 앉아있다.

그 뒤 올라가던 사람은 규민, 그리고 규민 뒤에 바로 이어서 남자 친구 하나가 계단을 붙잡고 올라갈 태세.

윗 친구는 내려가지 않고있지, 밑 친구는 빨리 비키라고 하지, 규민이 진퇴양난, 사면초가, 당황난색, 결국 세명 동시에 실갱이 벌어짐.

윗 친구, 사태의 가장 큰 책임자, 이 사람이 그냥 내려오면 일 되는 상황인데, 계속 버티기 고집. 왜 안 내려가냐는 규민의 질문에 자기는 그냥 올라오고 싶어서 올라왔는데 내려가기는 싫단다. 이 뭔 뻔뻔스러운 대답인가. 한 켠에 가만 입닫고 있는 나까지 짜증날라 한다.

타고싶은 미끄럼틀을 못 타고 있는 이 한탄스러운 상황에 설상가상으로 밑친구는 규민이 비키지 않는다고 신경질을 바락바락낸다. (사실 평소 윗친구보다 이 밑친구가 한 성깔로 유명하신 양반, 자기는 계단의 첫 칸도 밟지 않은 주제임을 파악하고 위 두사람에게 실갱이를 할 권리와 선택할 권리를 줄 것이지, 무작정 비켜비켜 비명을 내지르며 한 켠에 가만 입닫고 있을라는 나를 자꾸 발딱발딱 일어서게 할라 한다.)

왠만하면, 주변 어른들이 누구누구의 엄마가 아니고-그래서 때로는 누구편 누구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아이들 무의식 저변에 깔려있는- 공정하신(과연?) 선생님이 계신 어린이집이라면, 주변에 친구 언니 오빠들의 눈이 있고 자기가 떼쟁이로 낙인찍힐 우려가 있는 어린이집이라면, 사태는 긴장이 터지기 전에 수습되었을 것이다. 다섯살이면 그만한 이성은 있는 나이인 것이다.

그러나 주변 어른들이 죄다 누구누구의 엄마들이고, 떼쟁이로 낙인찍을 주변인들도 없는 그 곳에서 결국 셋 죄다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고, 어른들의 중재로 사태는 종결되었다.

 

내가 주목한 순간은 이 다음이다.

세 아이 대충 울음을 그치고 다시 미끄럼틀을 타기 시작하려 할때였다.

규민이 다른 두 아이 얼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더니, "미안해, 미안해"하는 것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한, 죄다 깡그리 잊었다는 의도의 표정을 짓고 미끄럼틀에 매달리려는데, 규민은 두 아이 모두에게 사과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지자면, 규민은 아무 잘못없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은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 것에 대해 통감하는 기분, 그것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그래서 안타깝구나'..

그러나 영어에서 sorry와 i'm sorry는 그렇게 차이난다지만, 우리말 '미안해'는 모호하다. 그 말을 한 이가 결국 밑지고(?) 들어가는 결판이 휙 나버리는, 미묘한 뉘앙스를 살리지 못해 미묘한 감정을 살려주지 못하고 결국 미묘한 상황과 관계를 단순하게 결판지어버리는 참으로 무책임한 말이다.

나는 이 생각을, 당시 규민의 얼굴 표정과 슬로우모션처럼 플레이되는 '미안해'를 들으며 1분 간은 하고 서있었나보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생각들은, 그러고보니 나도 그런 식의 미안해를 참 많이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했던 순간들, 나는 진심이었다. 내가 아무리 객관적이려 노력하며 두번세번 반복하여 생각해봐도 내 잘못은 별로 없는 것 같은 경우이지만 일어난 사태가 불행스러웠을 때, 나는 미안해, 미안해, 나도 더욱 주의하지 못 했던 것 같아, 어쩌구하며 사과, 사과 또 사과했었다. 그렇게해서 사태가 불행을 극복한다면, 사태의 당사자들이 깨끗한 기분을 맞을 수 있다면 무언들 못하리, 사과 쯤이야. 백만번도 할 수 있어.

 

그때는 저 바닥의 나의 진심을 실컷 퍼올려 마구 퍼주던 사과가 갑자기 몹쓸 단어처럼 느껴졌다. 공정치 못하고, 사태에 무책임하고, 특히나 사후 관계까지 무책임한.

어쩌면 내가 겪는 내 주변 관계의 억지스러움은 내가 진심이라고 남발했던 무책임한 사과의 탓도 있을지 모른다.

 

딸내미의 사회적'미안해'를 들으며 규민이도 이제 지난한 여자의 길로 들어섰구나,하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면 비약인가. 미안해 잘 안하는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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