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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백지영

오월 초 짧은 방학 중 은행에 갔다.

이제 은행은 방학 중 아니면 갈 수가 없다. (수수료 떼이기 싫어서 주말에 못 가.)

은행에 앉아있을 때 난 항상 게걸스럽게 잡지책을 뒤진다.

먹고나면 꼭 후회하는 미원 잔뜩 든 떡볶기를 그래도 주기적으로 먹어줘야하는 것처럼, 뒤지고 나면 꼭 후회하면서도 눈 앞에 보이면 한 번 훓어줘야하는 게 여성잡지지.

그러면서, 아직도 연예인가십과 화장법으로 도배를 하냐, 하고 꼭 혀를 차지.

근데 오월 초 짧은 방학 때 갔던 은행에서 본 잡지에는 나의 수준높은, 인간에 대한 지적 탐구력을 충족시켜줄 만한 근사한 기사가 있었는데, 백지영에 관한 것이었다.

 

뭔 잡지였는지 지금은 기억이 안 나는데, 되게 고급스러운 척 하며, 기자도 되게 멋 부리며 글을 쓴 잡지였다. 백지영 인터뷰는 딱 한 페이지였는데, 중간에 백지영의 전신 사진이 있었고, 양 싸이드에 인터뷰 글들이 한글 9pt 정도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차있었다.

 

백지영은 나에게, 오히려 그놈의 비디오 사건 때문에 호감을 주었었다.

 

사건 당시에는 그 여자를 잘 알지 못했었는데(흔한 여자땐스가수 중 하나), 사건이 나고 일 년 쯤 후에 우연히 테레비에 나온 걸 봤었다.

웬간하면 그런 일 있고 테레비에 나오겠나. 근데 그 여자는 허허 웃으면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자기는 반드시 재기해서 테레비 방송에 다시 나와야만 한단다. 그래야 자기 가족이 살 수 있단다. 거기까지 의연하게 이야기를 하더니, 막상 사건을 정확하게 상기시키는 단어가 나오자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홱 등을 보이며 황급히 일어서서 나갔다.

그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이 아니고 그런 사건이 있었던 그녀였기 때문에, 나에겐 '진짜'로 보였다. 테레비 방송을 타겠다,라는 속된 목표도, 그리고 '그래야 가족이 살고 죽는다'는 상투적 표현도, 속이 상해 울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나가며 보이는 등도 모두 '진짜'로 보였다.

 

 

그후 컴백을 했다고 잠깐 테레비에 나오는 듯 하더니, 곧바로 나이트 클럽 전단지로 얼굴을 옮겼던 것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니었던 것도 같고...

 

그러다가 지난 오월 초 은행에서 뒤적였던 잡지에서 본 것이었다.

두 세네번 페이지 잡아 넘기고 잡지랙에 다시 쳐박아둠이 마땅할 호들갑스럽게 고급인 척 하는 그 잡지를, 호감을 품고 있던 이에 대한 예의로, 한줄한줄 읽기 시작하였다.

 

역시, 백지영, 이 여자, 나, 좋아.

비디오 사건이 난지 이제 얼마가 지난 건가.

이제 이 여자는 이런 말도 하였다.

그 사건이 있어서 좋았다고. 그 사건이 있어서 떠날 사람들은 진작에 떠났고, 자기 곁에는 진정 있을 사람들만 있게 되었다고. 자기는 인기에 연연하는 가수가 되지 않았다고. 정말 노래(음악?)를 하겠다고 하지 않으면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게 되었다고.

이것도 얼마나 상투적인 소리인가.

그런데, 다른 사람이 아니고 그녀였기 때문에, '진짜'로 들렸다.

이 여자가 이런 말을 하기까지 그녀, 얼마나 깨고 깨야했을까.

 

그러나, 아무튼, 그 잡지는 끝까지 마음에 안 들었다.

백지영을 이렇게까지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다니, 우리 잡지, 특별하고 대단하지?하는 자세 같았고, <사랑 안해>라는 노래에 대해 기자가 여러 번 이야기 하던데, 이것도 기자의 음악에 대해 뭐 쫌 알지,하는 자세 같았다.

그랬더니, 얼마 후에 백지영이 테레비 가요프로그램에서 일 위 했다는 기사가 인터넷에 뜨더라니!!!!

이미 백지영은 은행 비치용 잡지들의 인터뷰 타겟 일 위였던 것이다.

 

나는 <사랑 안해>라는 노래가 진심으로 듣고 싶어졌는데(그 전에 그 여자 노래 다 싫었음), 오늘에서야 비로소 들었다. 진보넷 블로그에 누가 뮤직 비디오를 실어놨다.

비디오는 정다빈이 레즈비언으로 이쁘게 나왔다. 마치 휀씨 제품처럼 나온 레즈비언 코드를, 그래도 백지영 때문에 용서한다.

 

노래는 뭐 그저그렇다. (벌써 까먹었다.)

그냥 백지영이 좋다.

 

근데 북한이 미사일을 무더기로 쐈다는데, 이런 한가한 소리만 하고 있어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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