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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1/22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선데이 교육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김정명신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늘 쓸쓸하다.


서울 안암동,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오래된 동네라 여름내 집앞마다 커다란 고무화분에는 한련화, 과꽃, 봉숭아꽃들이 피어있는 곳이다.  올 겨울, 집앞을 흐르는 정릉천에는 성북구청에서 썰매장을 만들어 놓아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1960년대, 초등학교시절 나도 그곳에서 밥먹는 시간만 빼놓고 온종일 롱 스케이트를 탄 적이 있었다. 그 당시 한 사설업자가 개천을 막아 스케이트장을 만들었는데 비록 규모도 작고 날씨가 푸근해지면 얼음이 녹아 질척질척한 스케이트장이었지만 집에서 몇 발자국만 나가면 되는 곳이라 나는 엄마의 걱정어린 얼굴을 뒤로하며 겨우내 밖에서 스케이트를 탔었다.  몇 해 겨울동안 스케이트장이 반짝 개설되더니 수지가 안 맞는지 폐쇄되어 겨울에도 다시 물이 흐르는 개천이 되었었다.


지난 가을,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집앞 골목길 끝 헤어지며 두 손을 잡고 어머니를 한번 안아드렸었다. 그렇게 헤어지고 개천 변에 핀 과꽃을 보고 걷는데 눈물이 났었다. 나는 내 어머니를 보면 늘 쓸쓸하다.  젊은 시절, 내가 말귀를 알아들을 나이가 되자 ' 명신아, 모든 것은 하고싶을때하라' 고 자주자주 말씀했다.노화와 퇴화와 소멸....세월이 육신을 나꿔채 간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가끔 운전하며 길이 막힐 때, 앞차 뒷유리에 ‘출장 목욕서어비스-송파구청’이란 팻말을 보았을 때  ‘어머니 목욕탕을 모시고 가야하는데....’ 생각을 자주한다.


 올해 80세가 넘은 나의 어머니는 무척 색다른 분이다.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젊은 시절, 예쁘장한 얼굴에 겉보기엔 매우 여성스러웠지만  무척  쾌활하고 큰 배포와 낙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나들이 날 아침엔 바느질집에서 늘 새 한복이 배달되고, 마당 수돗가에 앉아 늘 고무신을 하얗게 닦기도 하셨다. 때로는 흔치않던 일제 스카프 두장을 사서 바느질집에 보내  저고리를 만들어 입으시기도했다.  어머니가 대청마루 밝은 곳에 앉아 화장하는 모습을 항상 보고 자란 나는 여자가 화장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나는 화장을 마친 얼굴로 약속 시간에 늦을 때, 상대방에게 너무 미안해 몸둘 바를 몰랐지만 화장을 멈추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해,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생 남편으로부터 독립하길 바랐는데 마침내 독립하고 보니 내나이 60이 넘었구나" 

나는 여자로서 직감적으로 이해했지만 자식으로서 당황스러웠었다.  요즘도 나는 백화점에서 니트류를 싸게 팔면 곧장 달려가 어머니 옷을 사곤한다. 입기편한 니트류-정호진니트, 까르트니트, 에스깔리에...어머니 때문에 알게된 니트상품  사들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젠 옷을 아무렇게나 입으신다. 어느샌가 부터 모자를 쓰시고, 무릎이 나온 보온용 바지를 입으신다. 신발도 아무렇게나...예전엔 SAS 신발도 사다드리면 기뻐하시며 즐겨신으셨는데...어머니는 1-2년전부터 “나는 요즈음 기억력이 없다”는 말씀을 하신다. 뵈러 갈 때마다 ‘오늘이 며칠이냐?’며 같은 질문을 한시간 내내 하신다.  외식도 귀찮다며 거절하시고 좋은 음식도, 좋은 옷도 모든 것이 어머니에게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더구나 날이 갈수록 어머니는 귀찮다며 삶의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갑자기 노쇠해서 변해 가는 어머니는 내게 몹시 낯설다. 그런 엄마를 보는 나까지 무기력해진다. 이렇게 노화를 낯설어하는 나도 머지않아 내 아이들에게 저렇게 낯선 모습으로 비칠 날이 올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노화과정을 거치는 삶의 전 과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항상 당황스럽다. 나이가 들어 육신이 노화되고 그 와중에 삶이 지혜로워진다는 것,  내게 새로운 숙제를 남긴다.(2006.1.22 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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