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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란 상황에서 더욱 필요한 것, 비폭력저항

현재 이란 상황에서 더욱 필요한 것, 비폭력저항

Don’t give up on nonviolence in Iran

 

by Bryan Farrell | June 23, 2009, 3:13 pm

 

지난 주말 시위 중에 총격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이란 여성인 네다에 대한 전세계적 관심이 증폭되면서 기존에 비폭력 저항을 외치던 뉴스보도들의 초점이 이제는 이란 정권의 폭력적인 시위진압 쪽으로 옮겨졌다. 이와 같은 보도 분위기 속에서 비폭력 저항에 대한 회의감이 자연스레 증가하고 있다.

 

의 한 기사에서는 위와 같은 분위기 변환에 주목하면서 최근 유튜브에 올라온 한 시위 영상에 나오는 문구를 다음처럼 인용하였다.


“사람들은 간디와 마틴 루터 킹을 평화적 시위의 사례로 주목을 해왔다. 하지만 지금 나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마틴 루터 킹은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그의 투쟁은 현재 이란의 상황에 들어맞지 않는다. 한편, 간디가 운동을 전개했을 당시는 지금과는 다른 독특한 상황이었다. 그는 당시 인도의 민중들에게 외세(영국)에 지배받아선 안 된다는 점만 납득시키면 되었기 때문에 평화적인 시위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이란의 경우에는 민중들이 맞서 싸울 외세가 존재하지 않으며, 수백만의 지역적 지지자들을 수반한 독재정권만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이 곳 이란에서는 폭력적 저항이 필요하다.”

 

방금 인용한 것과 같은 주장은 보통 비폭력에 대한 피상적 지식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이들이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비폭력이 독재정권에 맞서 싸울 때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은 역사적 실례들을 통해 반박된다. 칠레의 피노체트, 필리핀의 마르코스, 세르비아의 밀로세비치 등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비폭력 저항의 힘을 확인하였다). 비폭력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또한 간디나 마틴 루터 킹의 성공 사례들이 평화적인 시위대들을 때려잡지 않는 문명화된 권력을 상대로 싸웠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전제한다. 하지만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마틴 루터 킹이 한창 활동할 당시에 미국 남부지역에서는 지역 관료들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동안 시위대들에 대한 린치들이 허다했다는 점, 혹은 인종주의자들이 마틴 루터 킹의 집에 폭탄을 던졌던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이렇게 당시 미국에서 시위대들에게 폭력을 가한 집단들이 지금 재집권에 성공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을 지지하는 “수백만의 지역 지지자”들과 과연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도의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중 주목할 만한 사건 중 하나는 암리차르 학살 사건이다. 그 당시 90명의 영국 군인들 비무장 상태이던 400여명의 민간인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15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학살하였다. 이 때 민간인들은 단지 추수를 기념하는 종교 의례를 치르고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마틴 루터 킹이나 간디가 행한 비폭력 저항이 쉽게 행해진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폭력적 저항이 맞닥뜨렸던 손실을 간과하는 것이며 동시에 비폭력 저항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보여줬던 엄청난 용기와 헌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이란에 제3국이 개입을 해야 한다거나 이란의 시위대들이 무장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유는 비단 이것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이란 민중들이 이미 예전에 폭압적인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서 비폭력의 방식을 택한 적이 있다는 귀중한 역사적 교훈을 잊으면 안 된다. 미국이 세운 샤 정권의 통치가 25년째를 맞이하던 1979년, 이란 민중들은 불매 운동과 파업, 비협조 전략을 택하면서 거리로 뛰쳐나왔다. <비무장 반란>의 저자 커트 쇽은 책에서 비폭력 운동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이면서 다음처럼 진술한다. “샤 정권 하에서 사람들이 흘렸던 피들이 시민들의 거대한 불복종 운동으로 씻겨져 나갔다.”


1979년의 이란 혁명이 결과적으론 지금처럼 온갖 종류의 인권 침해를 자행하는 정권을 불러왔다고 사람들이 얘기를 하기도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우리는 이란인들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크리스 헤지스는 그가 쓴 최근의 칼럼(“이란이 가졌던 민주주의는 우리가 빼앗아 간 것이다")에서 다음처럼 서술한다.

 

이란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자유와 대의 정부에 대해 가르쳐 주는 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원치도 않는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투쟁을 통해서 이런 가치들을 학습한 바 있다. 오히려 배워야 할 것은 우리이다. (중략) 우리야말로 중동지역에서 가장 큰 문제이다. 우리는 그 동안 우리의 잔혹한 폭력을 통해서 마흐무드 아마디네자드 정권과 오사마 빈 라덴이 존재하는 것을 가능케 해주었다. 우리가 이 지역에 앞으로도 계속해서 폭탄 파편들을 떨어뜨리면서 이슬람 지역을 쥐고 있을수록 우리 자신의 왜곡된 거울로 존재하는 괴물들은 세를 더욱 더 불려나갈 것이다.

 

우리가 이란의 거리에서 싸우는 시위대들에게 도덕적인 지지를 보내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폭력적인 저항을 말하는 것은 아마도 외국군의 개입을 불러올 것이고 이는 결국 이란의 민주주의 시계를 우리가 이미 이루어 놓은 것보다도 더 이전으로 돌리는 것 밖에 안 될 것이다.

 

*Bryan Farrell is a New York-based writer, covering topics that range from the environment and climate change to foreign policy and militarism. His work has appeared in The Nation, In These Times, Plenty, Earth Island Journal, Huffington Post and Foreign Policy In Focus. Visit his website at BryanFarrell.com.

 

*기사 원문 출처 http://wagingnonviolence.org/2009/06/dont-give-up-on-nonviolence-in-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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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알게된 라는 사이트에 올라오는 글 중에 제목이 흥미로워보여서 읽다가 낼름 번역까지 해보았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번역을 해본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비비씨 들으면서 이란 얘기가 자주 나오기도 했고 마침 오늘 만난 염한테 이란과 중동의 정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듣기도 해서 비폭력에 관한 글이길래 비록 논의의 수준이 그다지 깊은 건 아니지만 흥미롭겠다 싶어서 옮겨왔다.

 

사실 오늘 비폭력 핸드북 번역과 관련하여 얘기를 나누다보니 번역에 대한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이렇게 또 후딱 해버려서 참으로 민망하다.

 

원 기사에 달려있던 링크들을 번역문에도 달아보려 했는데 예전처럼 링크 달때 누르던 source 버튼을 눌러보니 뭔가 약간 변화가 생긴 듯 하다. 내가 아는 짧은 html 독해력으론 어떻게 못 할것 같아서 그냥 쉽게 포기했다. 파이어폭스를 써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_-(기사에서 인용된 뉴스나 칼럼 링크들이 궁금하신 분들은 원문 페이지로 가셔서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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