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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2

1. 이번주 화요일인가 수요일쯤에 정말 뜬금없이 입영영장이 날아왔다. 아마 술을 마시고 집에 밤늦게 들어간 날에 온 것이었을텐데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서 부엌 식탁에 나갔는데 '입영통지서 등기 수령서' 이런 스티커가 붙어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전날 낮에 집에 아무도 없을때 우체부가 왔다가 아무도 없어서 그런걸 붙이고 갔는데 그걸 본 엄마나 아빠가 그 스티커를 내가 보기 좋은 곳에 놔둔 거였다.

 

좀 많이 충격을 받았다. 작년에 여권발급상 이래저래해서 병무청에 해외여행허가를 올해 말까지로 받았기에 그 때까진 영장이 안 날아오겠거니 하고 있던 차에 갑작스레 7월 28일 입영일이라는 통보를 받으니 퍽이나 놀란거다. 병무청 홈페이지에서 확인을 해보니 입영대상자라는 창이 떴고, 그럼 난 어떻게 연기를 해야하나 싶어서 고민을 좀 하다가 바로 병무청으로 전화를 했다. 상담을 받으려면 주민번호를 넣으라고 해서 비위가 상했지만 뭐 어쩔 수 없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의 사람이 되어 주민번호 13자리를 꼬박 누른 다음 상담원과 통화를 했다. 결론은 내가 현재 행정상 휴학생이기에 졸업예정자 신분으로 영장을 미루긴 힘들고 국가공무원시험 이딴 거를 응시해서 일단 미루면 된다는 것이었다. 작년에 여권 받기 전에 출국허가를 받으면서 병무청 직원들에게 물어볼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병무청에 병역연기 상담(!)을 받기 위해 전화를 거는 건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나 군대 안가려는 거 알까봐 괜히 주눅드는 기분이랄까. 아직도 모범생 정서가 남아있는거겠지. 나와 통화를 하던 병무청 직원들은 이미 내가 입력한 주민번호를 통해 최소한 나의 병역관련 정보들은 모니터에 뜬 걸 보고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 덕분인지 그 사람들은 내가 예전에 출국허가를 올해 말까지 받았다는 점 그리고 올 4월에 한국에 들어와있다는 것을 이미 다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연기를 하고 싶으면 한번 더 외국에 나갔다 오라는 것이었다. 개인정보를 철저히 들여다 보는 훌륭한 국가 전산 시스템 그리고 그에 맞추어 친절한 충고를 해주는 공무원들에게 경의와 찬사를!

 

2. 국가시험에 응시원서를 접수하고 해당 응시증을 우편이든 인터넷으로든 제출을 하면 그 시험 합격자발표 날짜를 기준으로 다시 영장이 날아온다고 한다. 어떻게 해서든 내년 3월 다시 학교를 다니는 시점까지는 버텨야 할텐데 인터넷을 부랴부랴 뒤져보니 내가 지금 응시원서를 접수할 수 있는 국가시험은 죄다 합격자발표가 8월 아니면 9월이다. 동일 사유로는 입영연기를 할 수 없다는데 그럼 겨울쯤에 영장 또 나오면 그땐 뭘로 미뤄야 하는거지? 이런 걸로 스트레스를 받아야만 하는게 너무 슬프고 억울하다.

 

 

 

3. 입영날짜를 연기할 수 있는 각종 시험들을 검색하다가 고시넷이라는 사이트가 걸려들었다. 모든 공무원시험 일정들이 정리된 글이 올라와 있었다. 예전에 귀동냥한게 있어서 사시에 응시하면 응시날짜부터 합격자발표까지 기간이 꽤 되지 않을까 싶어서 개똥 찾는 기분으로 뒤졌는데 사시행시외시 이런 건 다 원서접수 날짜를 놓쳤다는 걸 알고 나니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는 속담이 뜬금없이 떠오르더라. 게시판 글들을 보다가 각종 고시 기출문제 게시판을 발견하게 되었다. 급 호기심이 생겨서 얘네는 도대체 어떤 시험을 보나 싶어서 다운 받아 봤더니 위에 보이는 것처럼 장난이 아니었다. 행시 2차 시험 문제들이라는데 뭐 교정학에서 국제법, 경제학, 교육학, 심리학, 민법형법, 회계학, 정치학 영어 일어 중국어 스페인어 등등 웬놈의 과목들이 이렇게 많은지 과목수만으로도 압도가 돼버렸다. 설마 공무원 되는 애들은 정말 이 많은 걸 다 공부하는 걸까? 믿기지가 않아. 맨날 속으로 무시하고 경멸하는 직업이 공무원이었는데 시험과목들을 보고 나니 순간 공무원들에 대한 존경심마저 들고 말았다. 한편으론 문제들을 직접 보니 유형이 대입 논술 구술면접과 별 다를바 없어보이길래 안정된 직장 얻는 것도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방식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서 만만한 생각도 들었고.

 

4. 뭣보다 요즘 계속 돈벌이 궁리를 하다보니 한 때 나의 꿈이었던 활동가로서의 삶은 일단 접히는 것인가 싶어 참 씁쓸하다. 뭐 마틴아저씨처럼 다른 생계수단을 가지면서 활동을 계속 할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아무래도 한국 맥락에서는 활동가로 살거나 아님 다른 생계 수단을 갖거나 하는 식이 되는건 아닌가 하는 분석이 나에게도 적용되는 건가 싶어서 마음 한구석이 찝찝하다. 내 스스로 가능성을 좁히고 싶진 않은데 말이다.

 

잠은 잘 안 오고, 창 밖에 빗소리는 계속 들려오는 울적한 밤이다.

 

p.s.

아들 영장이 날아왔으니 부모님도 심란스럽고 궁금해하셨을 법도 한데 아예 나에게 묻지를 않아서 오히려 내가 놀랐다. 지난 달에 한번 대판 다퉈서 더 그런거란 생각이 든다. 엄마가 잠깐 물어보긴 했지만 내가 쉽게 미룰수 있다고 얘길 했더니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문제의 해결이 아닌 봉합일 뿐이고 언젠가는 결국 또 한번 다시 터질거란 생각이 마음이 유쾌하지 못하다.

 

요즘 세상이 하도 무서우니 설마 내가 지금 포스팅 하는 글도 꼬투리를 잡는 건 아닌지 괜히 긴장이 된다. 사실 그렇게 대단한 글을 쓴것도 아니고 고작 개인 블로그 포스팅인데 말이다. 병역거부 초창기 때처럼 병역기피 선동죄 이런 거에 걸려드는 건 아닐까 하는 자기검열의식이 찾아드는데, 국가시스템 속에서 쪼잔해지는 내 모습에 공감을 해줘야 할지 아님 부정을 해야 할지 하는 자기분열감도 든다. 결국 '검색로봇의 검색을 허용하지 않을래요' 버튼을 눌렀다. 나이 들어서 군대 안가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병무청 내부부서도 있다던데 이 버튼으로 그런 병무청 직원들은 피할 수가 있겠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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