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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0

교생일기 5월 10일

 

첫 수업을 한 날. 어제는 망원동에서 이사를 도와주고 집에 돌아오니 12시였다. 이번 주 교안들을 완벽히 짜놓은 것도 아니었는데, 한 시간만 더 놀다 가야지 한 시간만 더 더 하다가 결국은 그렇게 늦게 돌아왔다. 다음 날 출근하기가 어지간히도 싫었던 게다.

 

밤 늦게 부랴부랴 교안을 다시 제대로 검토해보고 머릿 속으로 수업 시뮬레이션을 했다. 오늘이 일일 담임을 하는 날이기도 해서 아침 조례 시간에 무슨 멋진 얘기를 해주어야 하나 고민도 했는데, 막상 가보니 일일 담임이 별 큰 의미는 없었던 것 같다.

 

40분 수업을 딱 시간 맞춰서 끝냈는데 기분이 뭔가 찝찝했다. 교안 그대로 기계적으로 대본 읽듯 진행한 수업이었다. 내가 앞에서 진행을 하는데 아이들이 반응이 없이 조용히 있어서 속으로 당황도 많이 했는데 나중에 그 상황을 복기해보니 그때 내 감정은 불안하고 불편한 상태였던 것 같다. 아이들과 내가 소통이 되고 있는 것인지 같은 맥락 안에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불안했다. 불편했던 이유는 그 수업 장면이 내 교육관과 맞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다. 시끌시끌하니 아이들도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는 수업을 그려왔는데, 정작 내 수업은 결과적으론 하나의 잘 짜여진 주입식 수업이었다.

 

교안을 어떻게 꾸역꾸역 생산해낼지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나도 모르게 교사용 지도서에 이미 정해져 있는 교육목표에 매몰되었던 것이다. 내가 짰던 교안 안에 학습목표 즉 하나의 정답이 이미 전제되어 있었고, 수업 중에 다음 활동으로 넘어갈 수 있는 근거는 그 '정답'이 나왔는가의 여부였다. 생각보다 아이들은 '정답'을 금방금방 잘 얘기를 해줬고, 덕분에 40분짜리 교안은 원래 계획대로 잘 실행이 되었지만 정작 아이들에게 어떤 학습이 일어났는가에 대해선 자신이 없어졌다.

 

'주장과 근거를 알 수 있다'라는 학습목표가 아이들의 삶에서 왜 중요한 것인지, 즉 내가 학생의 입장이라면 지금 '주장과 근거가 무언지'를 왜 배워야만 하는가에 대한 부분을 과연 제대로 다룬 것인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미 정해져서 획일적으로 하달된 국가의 교육과정, 학습목표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었나 합리화도 해보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나의 언어로 40분간의 활동내용을 재조직하고 아이들의 삶과 좀 더 연결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일말의 후회가 든다.

 

해당 차시의 학습목표가 이미 정해져있을 때, 학습자에게 그 주제가 왜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그 학습목표를 교수자로서 어떻게 잘 녹여낼 수 있을지 고민해보지 않을 때 '교사'는 어느 순간 '진리'라는 잣대로 아이들이 옳은지 그른지를 평가하게 되는 것 같다. 참 무서운 일이다. 5교시 과학시간, 한 아이가 실험에 집중을 안 하고 돋보기로 종이를 태우는 장난을 치고 있었을 때, 아이의 그 행동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대뜸 아이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들어간 학급은 6학년 1반. 담임선생님의 성향이 좀 더 명확하게 보인다. 질서를 상당히 좋아하신다. 급식실에서 밥을 먹을 땐 옆 사람과 대화를 해선 안 되고, 밥을 싹싹 다 먹어서 교사에게 검사를 맡아야 나갈 수가 있으며, 체육대회 응원 중에 다른 교사나 학부모가 먹을 걸 줬다고 해서 담임 교사의 허락없이 먹으면 안 되고 등등. 첫날 난 그런 규칙도 모르고 아이들하고 친해져보겠다고 급식실에서 옆에 앉은 학생에게 계속 말을 걸었더랬다. 애들이 대꾸를 안 하길래 난 애들이 나한테 별 관심이 없는 건가라고 생각을 했었다. 푸핫.

 

담임 선생님 왈, 내가 수업 시간에 극존칭을 쓴다고 한다. 예컨대 "제가 생각하기에는"이라고 말하기 보다 "선생님이 생각하기에는"이라고 말 하는 것이 좀 더 나을 것 같다고 하시고, "자리에 앉으시고요"보단 "자리에 앉고요" 정도면 될 것 같다고 하신다. 나의 극존칭때문에 제3자에겐 교사로서의 전문성과 자신감이 왠지 부족해보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난 실제로 내가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기에 더 조심스러운 것이고, 존댓말도 그래서 이젠 아예 입에 붙어버렸다.

 

공간 민들레에서 처음 아이들을 만나 그네들을 지칭할 때 자꾸 '학생'이라는 표현이 나와서 그걸 의식하고 고쳐보려고 꽤나 애를 썼었다. 분명 '학생'이라는 표현 이면에 존재하는 권력관계가 있는 것 같다. 보통 한국말에서 '학생'이 있으면 '교사'가 전제되고 그 순간 학생과 교사 사이에 위계가 발생하는 측면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학생'이 아니라 '아이'니까 더 반말을 쓸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다. 다른 계기들도 있었겠지만 난 민들레에서 아이들을 만나면서 최소한의 존중의 차원에서 존댓말을 하는 습관이 어느새 붙어버렸는데 이런 내 생각이나 가치관을 지금 학교에서 이해받긴 왠지 힘들 것 같고 적당히 타협을 보며 교생실습 한 달을 끝냈으면 한다. 그러려면 나의 적절한 '연기력'이 필요할 것 같다.

 

재미있는 건, 내가 수업시간에 교안을 다 못 외워서 잠깐 교사용 지도서를 들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 대해서 나중에 언급하시면서, 교사가 책을 이렇게 접은 상태로 들고 있는 모습은 학생들에게 너무 권위적으로 보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기에게 '극'존칭을 쓰면서 한편으론 책을 양손으로 접어들고 서있는 교사를 보면서 어떤 느낌을 가졌을지가 너무나 궁금해진다.

 

사족1.

2주차를 맞으니 36명의 아이들이 한명 한명씩 좀 더 보이기 시작한다. 이젠 정말 아이들 한명 한명의 표정만 봐도 그 안의 우주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각자가 얼마나 다양한 개인사와 배경을 갖고 있을 것인가. 그런 아이들이 무려 36명씩이나 한 시공간 안에 모여 '교육'이라는 것을 받는다. 뭔가 불가능한 상황 같은데 그 속에서도 아이들은 매일 뭔가를 배워갈 것이다. 아이들 사이에서 잘 어울리지 못 하는 학생들 중엔 교생에게 먼저 다가와 친해지려는 아이도 있지만, 교생에게도 선뜻 못 다가오는 아이들을 보니 괜히 마음이 짠해지고 내가 자꾸만 뭔가를 해줘야 할 것 같은마음이 들었다. 마치 내가 테레사 수녀가 된 양 말이다. 2주라는 짧은 기간동안 일대일의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 힘들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냥 가만히 그 아이를 지켜보자니 자꾸 신경이 쓰인다. 슈퍼맨만큼의 에너지와 48시간의 하루, 그리고 유능한 상담능력을 갖고 싶단 생각이 잠시 들었다. 이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동정이 아니라 진실한 연결의 욕구인지에 대해선 아직 잘 모르겠다. 

 

사족2.

학교란 공간이 확실히 학생의 행동 하나하나를 효과적으로 잘 통제하는 것 같다. 걷는 방법에서부터 인사하는 방법, 신발을 갈아신는 곳, 밥 먹을 때 줄 서는 법 등등 모든 행동 패턴이 정해져있고 학생이 이를 따르지 않을때에는 처벌이 뒤따른다. 교사도 학생도 아닌 교생이란 어중간한 신분인데, 어느 새 나도 학생들처럼 늘 공손한 자세를 무의식중에 하고 있었다. 학창시절 몸에 베인 기억이 학교란 공간에서 되살아난게 아닐까..

 

사족3.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에서 아규를 만났다. 왠지 모르게 무지 반가웠다. 사람이 그리운건가.

 

12시 전에 교안과 활동지, 프'레'젠테이션을 다 마무리 하고 잠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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