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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6

교생일기 2

 

아침에 눈을 뜨면 6시가 좀 넘어 있다. 해는 이미 떠서 사위가 밝다. 이번 주는 네 시간 이상을 자기가 힘들어서 아침에 눈을 뜨는 게 힘들었는데 신기하게도 아무리 전날 술을 먹고 뻗어도 6시가 되면 눈이 떠졌다. 나갈 준비를 마치고 대문을 나가 걸어내려가는 길에 들어서면 상쾌한 기분이 든다. 시야에 펼쳐진 남산 자락과 서서히 떠오르는 아침 햇살 그리고 곧 보게될 우리반 아이들 얼굴을 생각하면 기운이 불끈 솟는다.

 

잰걸음으로 종점약국을 지나 지하도를 건너면 남산3호터널입구 정류장이 나온다. 그곳에서 143번 버스를 기다린다. 이 정류장은 명동 쪽으로 넘어가는 방향에만 있고, 길 건너 맞은편은 아예 인도가 없기에 따라서 정류장도 없다. 그래서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가는 버스를 타면 한신아파트 정류장에서 내려 거꾸로 좀 걸어 올라가야 한다.

 

터널 입구가 바로 앞에 보이는 곳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보면 동굴탐험 혹은 시간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버스가 터널에 진입해 꽤 긴 시간을 달린 후 다시 바깥이 나오면 이제 옛 서울 성곽 안으로 들어온 셈이다. 단지 공간만 이동한 것이 아니라 시간도 과거의 어느 때로 돌아가는 듯 한 기분이 든다. 왜 그럴까 가만히 생각을 해봤는데 어쩌면 내가 지금 버스를 타고 가는 곳이 ‘학교’이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시설은 현대화되고 체벌하는 교사도 없어졌지만 여전히 학교는 갑갑하고 권위적인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다. 왠지 모르게 내 행동을 스스로 규제하게 되고, 담임선생님의 눈치를 끊임없이 봐야한다는 몸에 각인된 기억들이 올라온다.

 

퇴근할 때 다시 터널을 통과해 해방촌으로 돌아오면 다시 2010년 5월의 시간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또 그렇게 말처럼 되돌아오게 되진 않는 것 같다. 학창시절 내 몸의 모든 욕구를 짓누르며 책상 앞에 앉아 몇시간이고 공부하던 때처럼 지금은 새벽에 잠들기 전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다음 날 수업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담임교사: 자 여러분들이 올해 저랑 같이 생활하면서 새로 알게 된 규칙을 얘기해봅시다. OO이가 일어나서 한번 말해봅시다.

학생1: 급식실에서 밥 먹을 때 음식을 하나도 남기면 안 되는 거요.

담임교사: 아 그렇죠. OO이는 이 규칙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느낌을 솔직하게 한번 말해봅시다.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학생1: 먹기 싫은 것도 있는데 그걸 다 일부러 먹어야 하니깐 짜증이 났어요.

담임교사: 아..짜증이 났다라.. 뭐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표현이 좀 그렇네요. 짜증난다라. 선생님이 예전에도 얘기했죠? 선생님은 짜증난다라는 표현을 참 싫어합니다. 짜증난다라는 표현을 하게 되면 자기 마음도 덩달아 더 짜증이 나게 되는 것이지요. 음.. 다른 규칙에 대해서도 한번 물어봅시다. XX는 올해 저랑 같이 생활하게 되면서 새로 갖게된 규칙이 뭐가 있나요?

학생2: 급식실에서 점심을 먹을 때 얘기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담임교사: 아 그렇죠. 다른 반은 밥 먹으면서 얘기도 하고 그러는데 저희 반은 제가 대화를 나누지 못 하도록 했으니 좀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기분이 어땠나요?

학생2: 학교에 있으면서 친구랑 얘기할 시간도 별로 없고 해서 밥 먹는 시간에라도 같이 친구랑 얘기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얘기를 못 하게 하시니깐 좀........

담임교사: 좀...다음에 표현이 뭡니까? 좀 어떻다는 거죠?

학생2: 좀... 그랬어요.

담임교사: 아 좀 그랬다라..? 음 뭔가 모호하네요? 다른 학생이 또 이 규칙에 대해서 어떻게 느꼈는지 얘기를 해볼까요?

학생3: 제가 저번에 밥 먹다가 좀 떠들었는데 선생님이 째려봐서 막 안에 있는 음식이 토나올 것 같앴어요.

 

우리 반 도덕 시간에 있었던 상황이다. 그 때 난 뒤에 앉아 참관 중이었는데 분위기가 정말 살벌했다. 그 때 메모했던 것과 지금 남아있는 기억으로 대충 재현을 해보았는데 그때의 긴박한 분위기가 잘 전달이 될런지 모르겠다..

 

아무튼. 담임선생님의 의도와 달리 아이들은 정말 ‘솔직하게’ 규칙들에 대한 자신들의 감정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처음엔 당황한 듯 했고, 아이들의 ‘적나라한 표현’이 끝이 날 줄 모르자 화가 매우 나보였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갑자기 선생님이 애들을 쥐어패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매우 쫄아있었는데, 다행히 물리적인 폭력이 발생하진 않았다. 대신 선생님의 분노 섞인 훈계가 시작되었다.

 

선생님이 솔직하게 표현해보래서 진짜 솔직하게 말했는데, 정작 선생님은 “제가 평소에도 여러분에게 때와 상황에 맞는 말하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적 있죠? 그런데 어떻게 여러분은 감히 선생님한테 짜증이 난다는 말을 할 수가 있고 또 째려본다라는 표현을 할 수가 있죠?”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오늘 이 상황에서 과연 무엇을 배워갈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겼다.

 

이 날 도덕 수업의 학습목표는 “법과 규칙을 지켜야 하는 까닭을 알아봅시다”였다. 교육과정 안에서 법과 규칙은 이미 항상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전제가 되어 있었다. “법과 규칙을 왜 지켜야 하는 것인지” 혹은 “법과 규칙은 누가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라는 식의 접근은 애초부터 차단되어 있었다. 교사는 이미 정해져있는 수업목표 즉 “법과 규칙을 지켜야 하는 까닭”을 도출하기 위해서 “법과 규칙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서부터 출발을 하였는데 아이들은 정말 솔직하게 자신의 답답함과 짜증을 이야기해버렸다. 자신의 예측에서 벗어난 말을 하는 아이들에 대해 교사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진 않았지만 여전히 그 학생들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에 대해선 이해를 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교사 혼자서 정한 뒤 아이들에게 지킬 것을 요구했던 “밥 먹을 때 조용히 하기,” “음식 하나도 남기지 말기” 규칙은 여전히 교사에게 중요한 가치였다. 규칙 혹은 약속을 구성원 모두의 합의에 의해 민주적으로 정할 수도 있다는 메세지를 아이들은 자신들의 솔직한 감정을 통해 표현했지만 교사는 이 메세지를 캐치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이 날 교사는 아이들에게 ‘이유 없는 반항’이라는 표현을 썼다. 사춘기는 이유 없는 반항의 시기라고도 하는데 지금 학생들을 보면 자기는 그런 말이 이해가 된다는 말을 했다. 동시에 하지만 교사 자신은 그래도 여러분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이들이 ‘이유 없는 반항’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교사는 여전히 알지 못했고, 오히려 자기는 그런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아량’을 보여주었다. 촛불집회 참여자들은 좀 반성을 해야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모범생은 단지 학업성취가 높아서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다. 모범생은 학업성적의 우수함보다도 교사가 원하는 답을 얘기해줄 수 있는 학생이다. 이미 정답을 가지고 있는 교사의 의중을 헤아려 교사가 좋아할 만한 말을 할 수 있는 눈치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이날 도덕 수업에서 선생님은 일부러 평소에 ‘행실이 안 좋은’ 학생들에게 먼저 질문을 해서 자신의 정했던 규칙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고자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엔 나중에 지목한 모범생들로부터 “처음엔 규칙이 어렵고 힘들기도 했지만 지키다보니 익숙해졌고 왜 이 규칙이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알게되었습니다”라는 원했던 답을 들을 수가 있었다.

 

담임 교사는 나와 다른 교생에게 “선생님의 교육관대로 자유롭게 아이들을 만나십시오”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이날 상황을 지켜본 나와 다른 교생은 더더욱 담임 교사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이 날 사건이 있고 교사는 “그럼 알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규칙을 힘들어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오늘부턴 밥 먹을 때 소곤소곤 얘기를 해도 되도록 허락을 하겠습니다”라고 규칙을 개정(!)하였지만, 나와 다른 교생은 섣불리 같이 밥을 먹고 있는 아이들에게 얘기를 걸 수가 없었다.

 

이 학교에 있는 아이들도 24대1의 경쟁률을 뚫고 ‘추첨’을 통해 입학한 ‘프라이드’를 가진 아이들이지만, 교사들 역시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서울 전역에서 몰려온 ‘전문성과 인성’을 갖춘 교사들이다. 실제로 선생님들은 하루 8시간 노동시간 따윈 신경쓰지 않고 저녁 8시 9시까지 뭔가를 끊임없이 준비했고, 수업공개나 계발활동 프로그램 등 여러 모로 노력하는 분들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전문성’이 뛰어난 만큼 교사 자신의 ‘교육관’도 불가침의 영역이었고, 자기 교육관에 충실한 교육을 하면 할수록 그 교육관에 부합하지 않아서 교사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수도 늘어나는 모습을 보았다.

 

자기 담임선생님이 설령 무서운 존재일지라도 ‘스승의 날’이 되면 아이들은 그동안 배운 바대로 교사에게 감사의 편지와 선물을 전달했고, 이에 교사는 감동을 받는다. “여러분들 이런 식으로 행동할 거면 그냥 앞으로 제가 교생이 되어서 다음 주부터 저학년으로 내려가고 대신 교생선생님이 여러분 담임을 하겠습니다. 스승의 날 편지 이런 것도 왜 씁니까? 그냥 저에겐 쓰지 마십시오”라고 말을 했는데 어쨌든 아이들은 담임 교사에게 감사의 표현을 담은 편지를 써주었고, 이에 감동을 받은 ‘엄한’ 교사는 눈물을 흘리는 동안 자신의 ‘엄한’ 교육방식에 대한 성찰은 못하게 된다. “죽도록 두드려 팬 교사였지만 그래도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때 선생님처럼 날 사랑한 사람도 없었더라. 그 선생님 덕분에 지금 내가 이렇게 자랄 수 있었다”라는 식의 언설이나 “엄하지만 학생들을 사랑하는 교사”는 이렇게 재생산되고 공고화되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건 내 교육관과 전혀 맞지 않는 선생님과 2주일을 보내면서도 그 선생님을 미워하지 않는 연습을 했다는 거. 그 선생님이 왜 저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지, 지금 저 선생님의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서 내 맘이 편해질 수 있었다. 어쨌든 난 우리 담임 선생님과 매일 피드백을 주고받으면서 많이 배우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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