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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3

내 몸에 줄줄이 달린 선을 뽑는다
뭣보다 먼저 핸드폰을 던져두고
시계도 풀어놓고
승용차 따윈 물론 세워둔다
태양에 꽂은 전선만 남겨 두고
배낭 하나로 집을 나선다
훌훌 씨방 떠난 풀씨처럼
이제 어디에 닿을지 모른다
줄을 벗어 났으니
광막한 공간이 나를 품어줄 것이다.
 
  -조향미 시 '탈선(脫線)


- 여기 와서 변한 생활 습관 중에 하나는 예전보다 더 메일을 열심히 확인한다는 거. 생각나는 사람들, 하고 싶은 말들이 있을때 메일을 띄워놓고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며 매일마다 메일부터 확인을 한다. 아마 한국에서라면 결코 상상 못했을 짓인데. 밤에 궁상맞아지면 문자라도 한통 보내던 버릇이 남아서 이제는 메일로 그 욕구를 충족하는가 싶다. 사실 주로 쓰는 메일함의 80 아니 90프로 이상은 hrnet 메일이다. 사무실 활동하던 한 때에는 열심히 hrnet 메일을 읽으며 감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거의 스팸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 기륭전자 관련한 박래군의 메일에 대한 개굴의 리플을 읽다가 우연히 발견한 시 한 귀절에 잠시 넋을 읽고 말았다. 그래서 구글에서 시 전체를 찾아서 읽어 보았다. "줄을 벗어 났으니 광막한 공간이 나를 품어줄 것이다" 이상하게 이 구절에 위안을 받는 느낌이었다.

- 확실히 인터넷이 집에 설치되고 나서부턴 생각을 덜 하게 된다. 아니 글을 덜 쓰게 된다. 혼자 저녁 만들어 먹으면 심심하니깐 늘 노트북으로 서핑을 하며 세월아 네월아 저녁을 해치운다. 올림픽 때문에 야구가 잠시 쉬는 바람에 다시보기를 할 수 없는게 아쉬운 요즘이다. 이번 주에 플랏을 뜨고 여행 다녀와서 다시 홈스테이 들어가면 마음껏 인터넷을 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치 월동준비 하듯 이 영화 저 영화 이 만화 저 만화 열심히 다운을 받아놓고 있다. 덕분에 노트북은 쉴 틈이 없다. 내가 자는 동안에도, 학원을 다녀오는 동안에도 느려터진 속도로 꾸역꾸역 차곡차곡 하드디스크를 채워가고 있다. 처음엔 뿌듯하다가도 이제는 내가 마치 다운 중독증에 걸린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 이번 주 주말에 다시 또 한번 이사를 할 생각을 하니 적잖이 신경이 쓰이는 것 같다. 특히나 냉장고에 채워놓은 갖가지 야채들을 열심히 점검하면서 무얼 더 사야할지 남은 저녁들 식단은 어떻게 짜야 효율적으로 재료를 소비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게 요 며칠 주된 고민 중에 하나가 되어 버렸다. 대애충 아다리를 맞추려고 노력 중인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재료를 한 번 더 사와서 남으면 버리거나 아니면 없는 재료로 적당히 허기를 채울 수 있을 정도로만 요리를 하거나. 아님 인스턴트로 때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봐얄 듯 싶다.

- 13시간 뱅기 타고 여기 오고 나서부터 거의 매일같이 드는 느낌이었지만 요 며칠 특히나 더 뱃속에 숙변에 쌓여가는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다. 여기선 두유를 찾을 수가 없어서, 그리고 아침을 적당히 때우려면 가장 간단한게 씨리얼인데, 결과적으로 몇 년만에 우유를 일상적으로 다시 먹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우유 덕택에 화장실 가면 쑹쑹 일을 봤는데, 그새 또 내성이 생겼는지, 우유만으로는 아쉬운 뭔가가 있는 것 같다. 아침마다 사과도 열심히 먹고 나름 영양섭취도 신경쓰는데, 이상하게 한국에서와는 달리 뱃속이 거북한 느낌이다. 빵을 너무 많이 먹어서 이젠 뱃속에서 거부하는 걸까. 한국 돌아가면 바로 단식부터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 알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저녁에 남들하고 어울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학교 왔다갔다 하고 적당히 마트 왔다갔다 하면서 산책하는 것밖에 없는데, 늘 해야할 일 리스트는 줄지 않는 느낌이다. 리스트는 대체로 누구에게 편지 혹은 메일 보내기, 여행정보나 생활실용정보 알아보기 등이다. 삶에 기름끼가 빠져서 담백해졌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무미건조한 일상이 되어버린 건지 헷갈린다. 그래서 그런지 기분도 하루에 여러 번씩 요동을 치는가보다 싶다. "줄을 벗어났으니 광막한 공간이 나를 품어줄 것이다"라고 생각하기엔 내가 정말 지금 줄을 벗어난걸까 하는 회의가 더 자주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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