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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1

 
어느 날씨 좋은 가을 오후
 
한국은 아직도 많이 덥다고 하는데, 여기는 완연한 가을이다. 물론 여름에도 반팔 꺼내 입은 날이 손꼽을 정도로 드물어서 이게 정말 내가 아는 여름인가 하는 생각으로 지냈지만, 지금은 아침 저녁으로 부는 쌀랑한 약간은 싸늘한 바람이 가을을 물씬 느끼게끔 한다.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른 하늘. 하늘은 높고 말은 살이 찐다는 가을이 한국에만 있는게 아니었던거다.
 
이태리에서는 찌는 듯한 공기와 따가운 태양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는데, 반대로 여기서는 이번주에 특히나 더 태양이 사랑스럽게 여겨진다. 여전히 자외선이 따갑긴 하지만, 볕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정말 기분이 왔다갔다 한다. 해가 없으면 날도 우중충 기분도 우중충 해지는데 해가 나올라치면 쉬는 시간이든 점심시간이든 무조건 바깥에 나와서 일광욕?을 즐긴다. 이렇게 생활패턴이 변할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는데, 생각해보면 이런 변화가 참 신기하기도 하고 묘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그렇다.
 
삶이 단순해지고 새로운 자극이나 활력이 없어지면 이렇게 되는걸까 싶게도 요즘 자꾸만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곤 한다. 특히나 몸으로 느끼는 대기의 기운이나 바람의 냄새 촉감은 예전에 경험했던 특정한 시공간을 떠오르게 한다.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에 불현듯 대학 1,2학년때 환활을 갔던 마을의 골목길들과 마을회관이 떠오르는가 하면, 아침에 학원으로 걸어가는 길에 맡는 싸늘한 공기와 지나가는 자동차의 매연을 느끼면서는 문득 2년 전 복학했을 때 아침마다 지나던 거리를 떠올리는 식이다. 온수역에서 타던 빈 열차, 신대방삼거리역에 내려 버스로 환승하기 위해 걷던 길, 학교 정문에 내려 강의실까지 걸어가던 길. 그 때 듣던 윤도현 1집과 넬의 노래들. 유럽 여행 직후에 활기 넘치던 순간들이었는데. 학교 수업 마치고 750번을 타고 경찰청에 내려 아랫집으로 걸어가던 기억들. 서대문에서 다시 부천으로. 신길역에서 갈아타는 1호선. 그렇게 긴 동선을 어떻게 소화해낼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경이로운 생각도 잠시 든다.
 
의식 저편에서 꺼내져온 기억들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도 하고 금세 다른 기억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학원에서 컴퓨터실 문닫을 때까지 지영이와 대화를 하다가 문닫는다는 소리에 급히 짐을 챙겨 건물을 빠져나와서 바라보는 석양에 문득 관악산 자락이 떠올라버렸다. 학교 기숙사 옆에 있던 오분산에 올라가 서울을 내려다보던 장면이 생각났다가, 기숙사 살 때 운동장과 빨래방이 생각나다가 사범대 내정의 벤치가 떠오르다가 하는 식이다. 특정한 장면마다 함께 했던 사람들 얼굴도 줄줄이 스쳐지나간다. 재밌는건 최근 1,2년 간의 기억은 의외로 잘 떠오르지가 않는다는 거다. 내가 요 며칠 왜 부쩍 옛날 기억들이 떠오르는걸까 생각을 하다가 언젠가 읽었던 소설 중에 과거의 기억에 집착하는 캐릭터를 보았던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데 유감스럽게도 소설 제목이나 작가 제목은 전혀 떠오르질 않는다.
 
어느 가을 날 아침의 상쾌한 공기, 대낮의 따스한 햇살, 밤에 술한잔 하러 가는 길의 싸늘한 공기. 몸에 각인된, 그러나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기억들이 이렇게 센치하게 만드는 것 같다. 여기서 이렇게 한가하게 적당히 사람들을 만나고 적당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하루하루들이 나중엔 어떤 식으로 떠올려질까..하는 생각까지 하는 나는 정말 한가하긴 한가보다.
 
인터넷이 안 되어서 워드에 쳐놓은 걸 유에스비에 옮겨담다가 문득 또 뎅 출소하던 날 기억이 떠올라버렸다. 그 날도 바람이 서늘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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