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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6/23
    자신의 거주지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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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6/23
    민다나오와 술루의 모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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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06/23
    웨스트 파푸아의 위기(1995~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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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거주지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

자신의 거주지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

 

지난 4월 26일 밤 12시경 필리핀 마귄다나오(Maguindanao)의 한 마을에서 무장 군인들이 부인과 그의 아이들이 공포에 떨고 있는 앞에서 하킴(가명)을 체포했다. 군인들은 3일 동안 하킴의 온 몸을 꽁꽁 묶고 조사하였으나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자 되돌려 보냈다. 물론 군인들은, 체포영장 제시는커녕 체포 이유에 대하여 전혀 고지하지 않았으며, 체포 당일에는 하킴을 고문했다. 같은 날 그 무장군인들은 하킴 집 근처에 있는 두 집에 영장도 없이 무단 침입하여 무기를 찾는다며 가재도구를 헤집어 놓았다. 사건 내용만 보자면, 일반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인권침해와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피킷에 있는 코코넛 나무. 맨 앞에 있는 나무는 온 몸에 총알 흔적 투성이다. 윗 부분은 폭탄으로 잘려졌다.


그러나, 이곳 피해자들은 동트기 전 자신들이 살고 있던 동네를 떠나 다른 동네로 도망가야만 했다. 언제 또 군인들이 쳐들어올지 몰라 두려웠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고 살던 이들은 동네를 떠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아이들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언제 돌아갈 것이냐는 질문에, 집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이 떠나지 않는 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과의 인터뷰가 사건 발생일로부터 약 1개월이 지난 뒤 이루어졌는데, 그 때까지도 그들의 눈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민다나오의 국내 난민들

민다나오 섬은, 1997년·2000·2003년 정부와 이슬람해방전선(MILF, Moro Islamic Liberation Front) 사이의 세 차례 큰 내전을 겪었다. 민다나오 섬에 가면 아직도 전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총알 흔적이 남아 있는 코코넛 나무들과 완전히 전소해 버린 집들. 그러나 무엇보다 아직까지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수만 명의 국내 난민들(Inernally Displaced Persons, IDPs, 아래 상자설명 참조)이 전쟁의 비극을 그대로 전달해 준다. 2003년에는 약 20만 명의 국내 난민이 발생했다고 한다.

피투폰(pitoopon)에 있는 난민센터


무고한 이들은 생명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옷가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전쟁 지역에서 빠져나왔다. 일부는 친척집으로 피난갔으나, 대다수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지역의 학교나 관청 마당에 모였다. 몇 개월 그곳에서 피난 생활을 한 후 부근 빈터에 임시 처소를 짓고 공동생활에 들어갔다. 식량 배급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선단체에서 식수를 위한 우물을 만들어주기 전까지는 마실 물도 제대로 구할 수 없었다. 많은 아이들이 설사병으로 사망하기도 하였다. 이들 대부분이 농민인지라, 피난과 동시에 일자리를 잃었다. 아이들은 피난 생활 초기에는 교실이 없어 학교에 못 갔고, 계속되는 피난생활 기간 동안에는 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그냥, 자신의 집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

전쟁이 종료 된지 2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돌아가더라도 마땅히 먹고 살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전쟁으로 경작지와 경작에 사용한 동물들을 모두 잃어 버렸다). 그리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탄도 이들의 발길을 막고 있다. 실제로 지난 2월, 격전지 중 한 곳이던 피킷(Pikit)에서 불발탄이 터져 밭에서 일하던 주민이 큰 상처를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난민센터이든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긴 것은 아이들이었다.


하킴의 가족들과 난민센터에서 만난 분들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의 소원이 무엇인가요?" 그들은 주저없이 이야기한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 평화롭게 사는 것, 그것이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다. 그냥, 자신의 집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


전쟁을 멈추기 위해 나선 사람들

민다나오 섬에 사는 국내 난민들은 난민에 대한 지원과 안전한 복귀를 주장하는 시위를 통해 그들의 힘(Bakwit power, Bakwit은 따갈로그어로 국내난민을 의미함)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전쟁의 피해자로 남아있을 수만은 없다면서, 전쟁 감시 역할을 자처하며 주민들을 조직하고 교육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전쟁 감시를 위하여 주민들이 ‘반타이 시스파이어'(Bantay Ceaserifre, 전쟁감시)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지역 주민 한 명씩 돌아가면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전쟁과 군인들의 인권침해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들은 전쟁과 인권침해에 상당 부분 노출되어 있다.

"평안하셔야 합니다. 제발…아무 일 없어야 합니다." 하킴 부인의 손을 잡으며 간절히 기도했다.

국내 난민에 대하여
'국내 난민'(IDP, IDP가 국내유민, 피난민, 국내 유랑민으로 번역되기도 한다)은 '무력충돌,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폭력 상황, 인권침해, 자연 또는 사람에 의해 발생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 기존 거주지를 떠날 수밖에 없거나, 떠나도록 강요받은 사람들'로서, 국경 안에서 이주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반면, '난민(refugee)'이라 함은 국경 밖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1999년 발표된 미국 난민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에서 국내 난민 발생률이 4위라고 한다. 필리핀에서 국내 난민이 생기는 주된 이유는 무력충돌(특히 민다나오 섬을 중심으로)이다. 그리고, 인프라 관련 프로젝트나 경제 특구 등의 정부계획으로 도시 빈민들이 국내 난민으로 전락하고 있다. 농촌에서는 경작지를 비경작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또는 다국적 기업의 광물 채취과정에서 많은 국내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많은 국내 난민들이 불안, 공포, 충격, 산만 등의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유엔은 국내 난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국내 난민 가이드 원칙(UN guiding principles on internal displacement)을 제정하였다. 이 원칙에 따르면, 시민들이 비자발적이고 무분별하게 주거지로부터 이탈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정부 당국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국내 난민이 발생하더라도 난민기간 동안 이들을 충분히 보호하고, 복귀나 재정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위 원칙에서 금지하고 있는 비자발적 이탈에는, 1)정치적 분리나 인종 청소, 기타 민족적·정치적·인종적 구성인원을 변경할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이탈 2)무력충돌 상황에서 안전보장이나 군인들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탈 3)강제와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 때문에 이루어지는 이탈 4)피난을 갈 정도로 안전이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재앙 때문에 이루어지는 이탈 5)대규모 처벌로 이루어지는 이탈 등이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매해 발생하는 수재민은 국내 난민으로서 위 원칙에 따라 보호되어야 한다. 또한 평택 미군기지 이전 문제도, 이전 예정지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대하여 국내 난민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위 원칙의 적용을 검토해 볼 수 있다.
<출처 인권하루소식 2005년06월11일/ by 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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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다나오와 술루의 모로들

민다나오와 술루의 모로들
"그 섬 위험하다고 하는데, 괜찮겠냐?"

필리핀 민다나오 여행을 구체화할 때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위험이었다. 하지만 위험이라는 것이, 실제 상황과 떠도는 이야기 사이에 간극이 큰지라, 여행지를 선택하는데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정작 민다나오에 와서 내가 만난 위험은 실제 존재하는 테러나 무력분쟁이 아닌 위험과 관련한 사회 현상이었다. 필리핀의 다른 섬(루존, 비사얀 등)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민다나오를 위험 지역으로 보고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리고 위험을 근거로 필리핀 사람들의 인권침해가 비일비재할 뿐 아니라, 이에 대한 문제 제기도 찾아보기 어렵다. 일례로 대형 마트에 들어가려면 경찰이나 사설경비원으로부터 가방검색과 몸 수색을 당해야 한다.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여기에 미국은 민다나오섬이 제2의 아프가니스탄이 될 거라며 떠벌리며 공포를 자극해, 1992년 민중의 힘에 의해 쫒겨난 자국 군대를 다시 민다나오섬에 파견하여 군사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필리핀 사회에 가장 큰 위험은, 필리핀 정부와 미국이 그리도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필리핀 모슬림들이 아니라, 그 모슬림들의 가난과 기나긴 역사의 시간동안 이들의 권리를 빼앗고 있는 정부의 불법행위일 것이다.

술루의 아이들


민다나오섬과 술루 섬에 있는 모슬림들은 모로(moro)라 불린다. 이들은 필리핀 국가건설이전부터 이슬람과 술탄을 중심으로 나름의 생활공동체와 정치조직을 갖고 있었다. 각 부족들과 술탄 정치조직들은 이슬람 이란 종교 아래 연대 의식을 갖고 있었고, 스페인의 카톨릭 개종 식민정책에 강력히 저항하며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스페인 식민통치 시기에도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모로 생활공동체와 정치조직은, 미국의 식민통치가 이들의 생활기반인 땅을 빼앗고 루존섬과 비사얀에 사는 카톨릭 교도들을 대거 민다나오와 술루 섬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파괴되고 말았다.

미국은 식민통치 시기 등록하지 않은 땅을 모조리 빼앗았는데, 모든 창조물은 신의 것이고 사람은 관리자에 불과하다고 믿은 모로들의 땅은 대부분 몰수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미국은 다른 섬의 카톨릭 교도들을 대거 민다나오와 술루 섬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이들에게 모로로부터 몰수한 땅을 분배했다. 모로들은 카톨릭 교도들보다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이 제정됐다. 이주정책과 토지정책은 필리핀의 독립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됐다. 필리핀 정부는 1960년대까지 가난한 루존, 비사얀 섬의 사람들을 매주 1,000여명씩 민다나오로 보냈다(1913년 민다나오 내 모로가 76%였으나, 1939년에는 34%, 1999년에는 19%로 줄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민다나오 모로들이 토지사용권을 지키기 위해 정착민들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는데, 필리핀 정부는 모로의 그러한 행위를 그들의 성격 탓으로 돌리고 그들의 폭력성에 대한 편견을 사회에 심어주었다.

결국, 현재 비옥한 땅에서 쌀, 코코넛, 옥수수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은 루존섬, 비사얀 섬에서 온 이주민들이고, 대규모로 바나나, 파인애플, 고무를 생산하고 있는 자는 다국적기업들이다. 모로는, 땅도 뺴앗기고 공동체도 잃어 버렸다.

민다나오는 풍부한 지하자원과 거대한 플랜테이션으로 국고 수입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정부는 민다나오, 특히 모로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거의 인프라 구축이나 기타 공공서비스를 위한 재원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지난 3월 모로 자치지역 중 하나인 술루를 방문했었는데, 전기시설이 미비하여 하루에도 몇 번 정전사태가 발생했고, 수도 시설 역시 제대로 갖춰있지 않아 2층 숙소에서는 거의 물을 사용할 수 없었다). 필리핀 정부는 1999년 약 25조원을 국가 인프라 구축을 위해 집행하였으나 모로 자치 지역에는 전혀 집행하지 않았다. 필리핀 인력개발 보고서에 의하면, 가장 가난한 10개의 도 중 8개가 민다나오에 있다.

술루 사람들은 대부분 바닷가에 집을 짓고 산다.


그리고 필리핀 정부는, 정치 영역에서도 모로들을 배제하는 방식을 선택했는데, 지금까지 정부 각료와 상·하원에 모로가 단 한 사람도 배출되지 않았다.

모로에게 이슬람 종교와 문화는 그들의 정체성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나, 카톨릭 국가에서 이들의 종교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모로들의 정치세력화가 1968년 자비드 학살 사건으로 촉발되었는데, 이는 필리핀 정부가 모로 군인 30명에 대하여 형제 모슬림 나라인 말레이시아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으나 이들이 위 명령에 불복종하자 이들을 전격 처형한 사건으로, 모로에 대한 필리핀 정부의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이 사건을 계기로 모로는 본격적인 무장 투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무장투쟁은 MNLF(Moro National Liberation Front)와 MILF(Moro Islamic Liberaion Front)와 MILF(Moro Islamic Liberaion Front) 등의 정치 세력으로 발전했다.

더 큰 문제는 필리핀 군대가 납치범과 테러범을 속출한다며 마을에 들어가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권을 공공연히 침해하고 있다(필리핀 인권단체 TFDP가 2003. 1. 1.부터 6. 3.0까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인권침해가 가장 많이 발생한 지역이 민다나오이고, 군대에 의한 인권침해(50%)가 가장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고 미국은 민다나오에 있는 플랜테이션 다국적 기업 보호와 천연자원, 동남아시아 거점 확보를 위해, 모로를 외국 테러 조직과 연계시키며 테러 리스트에 포함시키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지난 2월 모로 자치지역인 술루 섬에서 무장 군인들이 일가족 4명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지만 무슨 이유로 군인들이 그들을 살해했는지에 대한 결과는 아직도 발표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일가족 살해 사건으로 교전이 확산되어 2005. 2. 1.부터 2005. 3. 24.까지 9,879가족, 57,900여명의 피난민이 발생했고, 이들에 대한 구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도, 정부와 필리핀 언론은 침묵할 뿐이다.

모로들의 주장은 민다나오의 독립부터 자치권의 확보까지 다양하지만, 중요한 공통분모는 과거 국가가 부당하게 빼앗은 모로의 땅을 반환하고, 그들의 공동체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모로의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라고. 과거에 집착해 현재까지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지금의 질서를 파괴하는 그들이야말로 필리핀 사회의 위험 요소라고. 하지만, 과거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땅과 공동체를 파괴 당하고 현재까지 소외와 가난으로 허덕이는 이들을 누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불법행위에 국가권력이 개입하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불법을 바로잡겠다고 정의를 회복하겠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위험하다면, 무력과 제도를 이용해 소중한 개인과 공동체의 권리를 빼앗는 국가 권력은 정당한 것인가?

물론 이유가 정당하다고해서 무력사용이 옹호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배경을 무시한 채, 그들이 무장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주장과 그들의 행동을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고, 위험을 과장·왜곡하는 것 역시 심각한 문제이지 않을까?

잠시 술루에 체류했을 때, 숙소 바로 옆 고등학교에서는 졸업식이 한창이었다. 베르디의 개선 행진곡에 맞춰 당당하게 걸어나가던 술루의 학생들, 그들의 미래는 과연 어떨까? 파그만의 정원에 나온 한 구절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현재는 감옥에 갈 위험이 있고 미래는 희망이 없다면, 무엇을 선택하란 말인가? 
<출처 인권하루소식 2005년04월30일/ by 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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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파푸아의 위기(1995~2002)

웨스트 파푸아 내의 인권침해와 관련하여, 아래 저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번역이 매우 거칩니다. 양해해 주셔요~~

 

 

 

Papuans at risk

some personal observations, 1995-2002

-At Ipenburg-

 

1. introduction

 

1995년부터 2002년까지 파푸아에 있는 evengical Christian church에서 신학을 강의하였다. 아래 내용은 그 기간 동안 내가 목격한 것과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다.

 

1962. 8. 15. 네덜란드, 미국, 인도네시아가, 단기간의 유엔 관리 이후 인도네시아게 네덜란드 뉴기니아를 이양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는 3 당사자가 웨스트 파푸안들과 전혀 상의도 없이 뉴욕에서 만나 합의한 것이다.

1962. 10. 1. 인도네시아 군대는 뉴기니아에 침입했고, 그 즉시 인도네시아에 반대하는 사람이나 또는 반대할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을 협박하고 체포하고 죽이는 등으로 지배의 초석을 다지기 시작했다.

1945년 이래, 군대는 웨스트 자바, Minahasa(permesta rising), south sulawesi(Islamic republic of makassar, moluccas(republik maluku selatan) 등 여러 지역에서 자바사람들의 지배에 저항하는 민중봉기들을 진압해 온 경험이 있다.

그러한 진압들은 내부에서 일정 정도 지지를 받았다. 미국도 반공산주의 활동의 일환으로 그들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웨스트 파푸아는 다른 지역들과 다르다. 우선, 웨스트 파푸아는 국제적으로 1950년부터 1962년까지 인도네시아와 전혀 별개의 나라로 인식되었다.

인도네시아 군대는 웨트프 파푸아에 상주해 있으며 그 특별한 지위를 강화하고 있다. 군대는 웨스트 파푸아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굉장한 사업상의 이익을 누리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는 군사 훈련 경험을 위해서 중요하고, 군인들의 진급을 위해서도 중요한 장소가 되고 있다.  

 

기자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신뢰할 만한 정보를 얻기란 상당히 어렵다.  

최근 1998년 수하르토 몰락 이후, 개혁 정책의 기치 아래, 인권침해를 감시할 수 있는 2개의 단체가 생겼다. Elsham Papua, Justice and Peace Secretariat of the Jayapura Diocese이다.

 

2. 킬링필드라고 표현할 정도로 웨스트 파푸아 상황은 심각한가?

 

웨스트 파푸안들의 사망률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인도네시아 통계청은 웨스트 파푸안을 다른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구별하지 않고 사망률을 잡고 있다. 또한, 정치 상황 때문에, 웨스트 파푸안만의 사망률율을 파악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1962년부터 그 지역은 군사 통제 지역이다(DOM or daerab operasi militer). 이는 민정과 상의하지 않고 군대가 그 지역의 안보를 통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1965년 군대는, 시민들의 일에 개입할 권한을 갖기 시작했다. 실제, 그들은 최고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민간당국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민정 최고 지위는 군 장교나 이전 장교들로 구성되어 있다. 퇴역한 군 장교들은 군부의 지휘를 받고나 영향을 받고 있다. 

군대의 지위는 일당 독재 체제하에서의 당과 유사하다.

 

더구나 외국 기자들은 거의 웨스트 파푸아에 들어갈 수 없다. 모든 외국기자들이, 도시 밖의 지역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찰의 특별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경찰과 군에게 보고를 해야만 한다. Paniai와 star mountains 같은 지역은 외국인 기자들이 전혀 접근할 수 없다. 웨스트 파푸아에서 일하는 국적이탈자는, 군정보기관의 조사가 끝난 뒤 허가를 받아야지만 일할 수 있다. 수하르토 시대에는 미디어가 전면 통제되었고, 조사 저널리즘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다. 유력 중앙지는, 웨스트 파푸아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만 웨스트 파푸아에 대하여 보도를 하였다. 일반적으로으로, 인도네시아 신문은 웨스트 파푸아에 대하여 거의 보도를 하지 않고 있다.  

 

3. 5개의 사건

나와 부인은 2명의 10대 아이들과 함께 1995년말부터 2002. 3.까지 웨스트 파푸아에서 살았다. 정치적 긴장이 계속되었다. 몇 명의 파푸안 친구들과 동료들은 협박을 받았다. 1998년 수하르토가 권좌에서 물러나자 약간 숨통이 트였다. 그러나 웨스트 파푸안들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다. 원인은 다음과 같다. 의료 부족, 정치적 폭력, 범죄, 가정폭력, 교통사고 등그러나 이것은 이슈가 되지 못한다. 만약 경찰이나 군대 폭력으로 사망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조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경찰은 공안당국의 폭력을 공공연히 비판하는 국민들을 명예훼손으로 조사하고 구속 기소하고 있다.

 

5가지 사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a)UNCEN 대학의 학생이던 Steven Suripatty가 1998. 7. 4. 교내에서 자유 발언 시위를 하던 중 군인에 의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군대는 사건 조사를 거부했다. 물론 무고한 구경꾼이자 우리 학교 교수의 딸이 군인이 쏜 총에 맞아 무릎에 부상을 입었다. 군대는 무릎 수술과 관련하여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았다.

 

b) Fajar Timur 신학대학교의 강사인, Me in Paniai 출신 Obeth Badii가, 1998년 의문사를 당했다. 그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중이 그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범인을 조사하는데 필요한 검시 등의 조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은 정의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사실, 원래 살해 공격 목표는 Waena에서 Obeth의 집 옆에 사는, Kompas 기자 Octovianus Mote였을 가능성이 높다. Obeth는 이미 Octo에게, 이상한 사람이 옆집에서 왔다갔다는 하는 것을 보았다고 경고했다. Octo는 Obeth와 마찬가지로 Paniai 사람이고, 외모도 비슷했다. 3명의 증인이 있었으나, 한 명은 길에서 사고로 사망했고, 다른 한명은 라이트와 번호판이 없이 최고 속도로 달린 자동차에 치여 사망하였으며, 나머지는 도망가고 없다.

 

c)2000. 12. 밤, 경찰이 파푸안 내륙에서 온 고등학생, 대학생들의 기숙사를 급습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학생들은 해안에 사는 학생들보다 과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100여명의 학생들이 포위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미성년자였다. 그들 중 대부분은 그 다음 날 석방되었는데, Cenderawasih Pos에 의하면, 체포된 여학생들이 경찰이 그들을 강간하지 않은 것을 감사해 했다고 한다. 경찰 폭력 피해 학생들을 치료한 병원의 원장은, 나에게 학생들이 입은 상처가 의미하는 공포를 표현했다. 큰 상처는, 경찰들이 고의로 상해를 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응급처치 없이 트럭에 실려 왔다. 부러진 어깨와 손발이 많았다. 병원장은 경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상처에 관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경찰들의 폭력 행위 일부는 스위스 nueu zurcher zeitung 신문사의 기자인 Oswald Iten가 증언하였다. 당시 그는 이민법 위반을 이유로 기소되어 자야퓨라에 있는 한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는, joni karunggu와 orry doronggi가 경찰서에서 경찰에게 맞아 죽을 때 현장에 있었다.

 

d) 2002. 2. 대낮에 2명의 경찰이 33살의 파푸안 목사 robert ongge를 abepura 시장 근처에 있는 중국인 친적 집에서 살해하였다. 파푸안 사람들은 이 죽음에 즉각적이고 광범위하게 저항하였다. 그의 마을인 kampong harapan에서, 자야푸라와 sentani 길을 막았는데, 이 길은 공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경찰 수뇌부는 2명의 경찰이 어린 나이와 경험미숙으로 분별없이 행동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지방신문인 cenderawasih pos가 희생자의 가족과 친구들을 인터뷰하면서 조사하려고 하였으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희생자는 정치 활동과 무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카르타에서 오랜 목사 일을 한 후 단지 중국인 아내와 2명의 자식과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kampong harapan에서 새로운 교회 일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e)UNCEN 대학을 졸업한 젊은 청년 Johan이, 그의 약혼녀와 함께 있던 저녁 살해당했다. 4명이, 약혼녀 앞에서 그를 단검으로 찔렀다. 단검은 몸에 박혀 있었고, 증거로 회수되었다. 회수된 단검은 군인들만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범인들은 그를 경찰로 보고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항구에서 경찰이 군인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군인들은 경찰에게 보복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군 지휘부는, 누구의 단검도 분실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조사는 끝났다. UNCEN 학생들은 수사와 재판의 의지가 없는 경찰에 분개했다. 그들은 자야뿌라와 Waena 길을 막으며 시위를 하였다.

 

5가지 사건의 피해자 중 그 누구도 정치 활동가로 알려진 사람은 없었다. 경찰은 항상 사건을 덮고, 범인을 보호하고자 했다.

 

d) 사건에서 경찰은, 인권침해가 아니라 군에 대하여 공격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인도네시아 인권단체인 komnas-ham이 이 사건을 조사했는데, 경찰 대변인은 그 단체가 편파적이고 선동적이라고 발표했다.

 

4. 다른 사건들

 

5가지 사건은 자야뿌라 근처에서 발생한 것이나, 이 외에도 경찰이나 군대가 시위자들을 상대로 한 인권침해 사건을 무수히 많다. 예를 들면, 1998년 biak, 2000년 nabire, sorong, timika, manokwari 등이다.

최근에 발생했던 가장 심각한 사건은 2000. 10. wamena에서 122명의 희생자를 낳은 사건이다. 2000년에 발생한 이 사건으로 웨스트 파푸안들은 어쩔 수 없이, 종교와 문화의 상징인 모닝 스타 국기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와히드 대통령인 1999. 12.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와 경찰은 국기게양을 분리주의, 반역으로 보고 사형선고 등을 하고 있다.

 

군인 뿐 아니라 민간인들도 웨스트 파푸안들을 살해하고 있다. 우리가 sentani에 살았을 때 우리는 거의 매년, 독점권을 지키려고 buginese 사람들이 sintani 시장에서 파푸아 사람들을 살해한 것을 보았다. 우리는 범인이 재판을 받았다는 소식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3명의 웨스트 파푸안들이 sentani의 jalan pos tujuh에서 buginese 모토 택시 드라이버를 살해하였을 때, 세명 모두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 살해는 바로 직전 시장에서 살해당한 파푸아 사람의 죽음을 보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찰과 군대는, 웨스트 파푸안들이 정의를 위해 시위를 하면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2000. 8. 웨스트 파푸안들이 sentani 시장에 불을 질렀는데, 이는 buginese 공동체가 선술집에서 살해당한 웨스트 파푸안 살인자를 넘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5. 배경, 상황

 

웨스트 파푸아에는 심각한 인권침해가 발생하고 있다. 그러한 인권침해는 매우 광범위하여 자연재앙처럼 피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범인은 면책특권을 누리고 있다. 경찰부터, 검사, 변호사, 판사까지 법률 시스템은 부패하였고 비효율적이다. 조사보도를 위한 표현의 자유가 없다. Ngo는 약하고, 정부와 당의 통제를 받고 있다.

동티모르, 아체와 비교해 볼 때 웨스트 파푸안들은 말레이지아 외모와 비슷하여 쉽게 구별할 수 있다(곱슬거리는 머리, 검은 피부).

인종주의가 정치적 어려움의 문제를 가중시키는데, 자바 모슬림들은 곱슬거리는 머리와 돼지고기를 즐겨 먹는 흑인 기독교 웨스트 파푸안들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다.

교육은 열악하고, 인권침해문제를 외부에 알리기 위해 필요한 영어교육도 충분하지 않다. 시드니 모닝 헤럴드를 제외하고는 외국 통신원이 없다. 외국 신문사들은 국내 통신원이나 경찰이나 군대의 앵무새인 antara와 같은 공식적인 뉴스 에이전시에 의존하다.

군사우월주의는, 수하르토 정권이 신법령을 공포하기 이전부터, 약 40여년 동안 지속되었다.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보았을 때, 정치와 경제면에서 군인들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상당히 많은 경제적 이익을 부여받고 있다.

 

Zacharias sawor는 파푸아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네덜란드에서 교육을 받았고 인도네시아 지배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1962년 초창기 인도네시아 지배 과정을 서술하였다.

인도네시아 군대는, 억압적인 식민지 권력으로부터 파푸아 사람들을 해방시켜준 것이 아니라, 점령군처럼 행동하였다. 군대는 정복의 권리로서 땅과 사람, 재산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정부와 교육에서 네덜란드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려고 노력했다. 교육과 시험은 즉각 네덜란드어에서 인도네시아 말로 바뀌었다. 선생과 공무원들은 토요일 오전 사무실에서 군사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네덜란드 시대의 모든 책은 인도네시아 것으로 대체되었다. 그곳이 뉴기니아의 문화, 자연환경에 전혀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교육, 무역, 공무 등을 교육받은 파푸안 사람들은 네덜란드어에 능숙하고 네덜란드 기준을 따랐는데, 이들은 친 네덜란드 사람들, 반 인도네시아 사람들로 의심받았다. 인도네시아 군대의 시각에서 이는 적을 의미한다.  

 

1962. 12. 인도네시아 군대가, 친인도네시아 그룹과 함께 jayapura의 kota raja에 있는 교사 훈련 칼리지, 공무원 학교, 농업칼리지, 기독교 학교 등의 기숙사를 공격하였다. 학생들은 구타 당했고, ifar gunung에 있는 군대 캠프로 끌려와 감금당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파푸안의 지도자급 그룹들을 투옥되거나 살해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싹을 잘로 놓으려고 했다. .

 

정보기관은 인도네시아 정부 전복 혐의자 또는 그와 연계되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비밀리에 제거하는 정책을 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2000. 10. wamena에서, 웨스트 파푸아 독립 열망의 상징인 모닝 스타 플래그를 짓밟기 위해 과도한 폭력을 사용했다. 웨스트 파푸안들이 이에 대하여 폭력으로 대항하자, 경찰청장은 웨스트 파푸안들이 사람을 죽이고 불태우며 여자들과 아이들을 강간하는 동물들이라고 발표했다. 그 해 11월, 지방경찰청장은 NGO와 만나는 자리에서, 공공연히 파푸아 사람들이 범인이라고 발표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인권침해를 정당화 하고 있다.

 

6. 경찰과 군대의 전략

 

인도네시아 공안당국은 전략차원에서 비사법적 살해를 비롯해 인권침해를 자행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인도네시아 법에 저촉되는 어떠한 것도 용납하지 않기 위해 공안정국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들은 웨스트 파푸아 지도자들을 살해함으로써, 처벌의 효과와 동시에 예방의 효과도 보고있다. 

군대는 갈등을 조성하기도 한다. 군대는 갈등을 조성한 후, 법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정당하게 군사 행동을 개시하고 있다.

 

A)갈등 유발

 

살해가, 단순히 한 개인을 살해하는 것 이상의 목적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살해는 특정 그룹의 보복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이는 공안당국의 개입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폭력을 유발하는 전략은, 평화로운 국기 게양식을 막는 방법으로 종종 이용되고 있다.

1999. 12. 와히드 대통령이 국기 게양식을 허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모닝 스타 게양을 국가 모독으로 보고 처벌하고 있다.

2000. 10. wamen에서 군대는 국기게양식에 모인 사람들이 군대의 명령에 따라 국기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발포하였다. 그리고 군대는 국기를 짓밟고, 그 위에 오줌을 누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군대는 그 지역의 병원들에게 부상자를 치료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시체 검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한꺼번에 매장되었다.

 

b)분열 조장

 

군 정보기관은 파푸아-인도네시아의 갈등을, 이주민들과 원주민 사이의 갈등으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군인이 유발한 사건 때문에, 이주자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웨스트 파푸안들의 정치적 열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설립된 웨스트 파푸아 의회지도자 Theys Eluay가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청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살해범이 웨스트 파푸안 중의 한명이라고 발표했다. 살해 동기로는, Theys가 지역자치를 위한 정부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그 후에 자야뿌라에 있는 head of kopassus는, 사망 발생일 날 그와 같이 이동 중에 있던 한 사람이 자치 및 독립과 관련한 그의 지위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 총을 쏘았다고 발표했다.

 

2000. 12. 학생들 하숙집에 폭력이 발생했는데, 이것도 Balie과 Paniai 지방 출신의 과격한 학생들과 해안가 출신의 좀더 온건한 학생들을 분리하기 조장된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 기자 Oswald Iten이 유치장에 있으면서 목격한 바에 의하면, 치명적인 사고가 몇 건 더 발생했다. 여튼 이 사건으로 100여명 이상의 학생들이 체포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종교의 차이도 분열과 내부 갈등을 조장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I. S. Kijne 신학대학 교수는 익명의 사람으로부터 교회가 무슬림들에 의해 전소됐다는 전화를 받았다. 종교간의 갈등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실제 Ambon과 North Moluccas 지역에 발생하고 있다.

 

Moluccan 지역 출신의 21살 여학생이 UNCEN 대학 출신의 학생에게 맞아 사망한 일이 발생했다. 범인은 Baliem Valley 출신의 Dani 사람이었다. 충격과 슬픔으로 700여명의 학생들이 강의를 중단하고 일주일 내내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여학생의 시신은 학교 강당에 놓여져 있었다. 계속 추도가 진행되는 동안 괴한이 들어와서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쳤다. 한 여학생이 특정 강사를 모욕하며 소리질렀다. 장례식 때 지방경찰청장이 Dani 그룹에게 보복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학생들 누구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경찰은 나중에 정신병 환자의 소행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기소되었거나 재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c)역량있는 지도자들 제거하기

몇 명의 지도자들이나 잠재적 지도자들이 제거되고 있다.

 

d)시민군

 

동티모르에서도 민병대가 제 몫을 다 했다. 민병대는 정규군보다 덜 훈련되었으나 훨씬 저렴하다. 군대의 통제아래 있지만 그들은 군대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

 

7. 파푸아 사람들의 사망률

 

우리는 in Yoka Pantai, a Papuan village on the shore of Lake Sentani.에 사는데, 1년에 평균 1000명당 28명이 사망하였다.

 

Izaak Samuel Kijne 신학대학에 700여명의 학생이 있고, 연령대가 20-30대인데, 2001년에 15명이 사망했다. 건강한 집단에서 21%가 사망했음을 보여준다. 사망 원인은 교통사고, 가정폭력, 경찰폭력, 살해, 자살, 결핵과 같은 질병, 말라리아, 폭력 등이다.

의료시설도 매우 미참하다.

 

8. 결론

 

웨스트 파푸아에서 상당히 많은 인권침해가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제대로 보고되지 않고 있다. 이는, 웨스트 파푸안이 인권침해와 침묵을 통한 면책에 길들여져 있고, 이를 자연재앙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찰이나 군대에 의한 인권침해를 보고하면, 증인이 위협받거나 살해당할 수 있기에 감히 보고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다.  

 

또한 외신 기자의 접근도 거의 불가능하다.

웨스트 파푸아에 시드시 모닝 헤럴드 외신 기자를 제외하고는 외국 통신원이 없다. 많은 기사들이 정부가 통제하는 Antra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지방 기자들은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사실조사에 기초한 보도가 거의 불가능하다. 웨스트 파푸아에 라디오 방송국은 오직 하나밖에 없고, 텔레비전도 하나 밖에 없다. 이 모두 정부가 통제한다. 더구나 인권침해를 보도하지 못하도록 위협하고 있다.

 

경찰과 군인들은 공공연히 웨스트 파푸안은 동물, 범인들, 돼지 들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

범인들은 면책특권을 누리고 있다.

인권침해가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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