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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에디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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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초 kbs joy라는 케이블 채널에서 트랜스젠더 게스트와 유명 MC가 출연하는 토크쇼 <XY그녀>가 방영되었다. <XY그녀>는 방영 1회만에 막을 내렸다. 그야말로 ‘첫방이 막방’이 된 경우였다. 트랜스젠더 당사자인 나조차도 당시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잘 되었음 좋겠다’는 응원보다는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도 구분해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인데…’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떠올랐던 것 같다.
포털 사이트 뉴스 기사를 뒤져서 해당 프로그램과 관련된 사진을 찾아보았다. KBS 방송국 앞에서 ‘<XY 그녀>를 폐지하라’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항의하는 사람들의 사진이 많이 나왔다. 그 피켓에 적힌 문구들 중 몇 가지가 눈에 띄었다. “내 아들 딸 된 것도 억울한데 시청률 미끼로 트랜스젠더 방송하면 부모가슴 무너진다”, “극소수 트랜스젠더를 위한 것이 공영방송?”, “우리 아들이 여자되면 kbs가 책임질거냐?, 질병을 부추기는 kbs 수신료 반대한다!”
이런 내용의 피켓을 들고 집회나 시위를 벌이는 이 ‘적극적인’ 사람들의 대부분은 ‘부모’, ‘가정’, ‘올바른’, ‘건강’, ‘국민’ 등의 몇 가지 단어를 조합한 이름의 시민단체에서 활동한다. 이들은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이자 ‘부모’로서 ‘가정’을 수호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올바른’ 삶을 살 것을 호소한다. 이들이 제시하는 ‘건강’과 ‘올바름’의 기준에 트랜스젠더는 들어맞지 않는다. 이들의 기준에서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은 질병 혹은 신경정신과적 ‘문제’와 연결된다. 트랜스젠더는 곧 ‘문제 있는 사람’이고, ‘건강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이 ‘문제 있는 사람들’은 ‘치료’되어야 한다. 이런 도식 안에서 트랜스젠더는 사회 전체의 건강을 갉아 먹는 위험한 존재, 혹은 병을 앓는 불쌍한 사람으로만 이해될 뿐이다. 어느 쪽으로 이해되든, 이들에게 트랜스젠더가 한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취급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MtF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하고 그에 맞는 의료를 택하기까지 우여곡절 많았던 내 삶
나는 반강제적으로 ‘성 주체성 장애’ 판정을 받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한국 사회에서는 ‘성 주체성 장애(f640)’ 판정을 받아야만 자기 정체성에 맞는 의료 절차를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료기관은 장애 여부를 판정하기 위해 나 같은 신청자에게 500문항의 질문지에 응답할 것, 30분을 넘지 않는 몇 번의 상담에 응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질문지와 상담에서의 내 답변을 검토한 후 내가 정말로 ‘성 주체성 장애’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진단한다. 그 몇 장의 진단서가 내 정체성이 장난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내가 반평생이 넘도록 스스로에게 되물은 질문들, 학교나 가정에서 물어보지도 심지어 들어보지도 못했던 ‘다른’ 고민들, 내가 느꼈던 막연함,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들인 노력들, 살아남기 위한 결정들보다도 장애판정 진단서가 갖는 힘이 더 컸다.
‘그럼 밑에는 한거야?’ ‘니가 무슨 트랜스젠더야, 너는 티가 나잖아’
물론 성 주체성 장애 판정을 받고 트랜지션 의료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4년동안 트랜지션을 거치면서 느꼈던 한 가지는, 트랜지션 의료의 진행여부에 따라 트랜스젠더가 아닌 사람들이 갖는 이해의 폭이 달라진다는 점이었다. 트랜지션을 거치는 트랜스젠더는 트랜지션을 거치지 않는 트랜스젠더에 비해서 자기를 설명하기 위해 해야 하는 부가설명도 훨씬 적어지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시간도 훨씬 빠르고, 자기가 말한 것 이상의 추가적 질문을 맞닥뜨리는 일도 현저하게 적다.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차이가 있는데, 하물며 이 사회의 ‘주류’인 시스젠더 이성애자와는 얼마나 다를지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트랜스젠더는 ‘그들’이 생각하는 특정한 기준을 충족해야만 ‘진정한’ 혹은 ‘건강한’ 트랜스젠더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성기 성형 여부에 대한 질문과 ‘티가 난다’ 류의 코멘트는 트랜스젠더들이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들 중 하나다. 특히 MtF 트랜스젠더는 하리수 씨 때문인지 (혹은 덕분인지) 트랜스젠더라는 개념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정체성이다. 그러나 널리 인식되는 것에 비해 그 인식의 내용이 어떠한지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여성보다 더 ‘여성스러운’, 부담스럽지 않은 외모와 말투, 요란하지 않은 옷차림과 화장, 성적 지향은 이성애,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의 직업 활동,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삶, 집안을 뒤집어 놓은 커밍아웃,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굳이 어려운 길을 선택해야 하는 삶… 방금 언급한 기준 중 두 가지 이상은 가져 줘야 ‘(시스젠더 이성애자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트랜스젠더’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MtF로 커밍아웃한 후에 만난 사람들이 내게 건넨 질문들이 저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던 것을 볼 때, 이것들이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트랜스젠더의 기준으로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트랜스젠더는 이렇게 ‘불쌍한 삶’을 살아야 ‘주류’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것일까.
물론 트랜스젠더의 삶이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특히 직장에서 일을 할 때 곤란한 상황들이 종종 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일을 잘하는 것’ 외의 덕목들을 트랜스젠더에게 요구할 때 특히 어려움이 발생한다. 성별정정을 안/못 한 트랜스젠더에게 지정성별에 따른 외모 꾸미기와 말투를 강요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헤어스타일 등이 ‘여성스럽지’ 혹은 ‘남성스럽지’ 않다는 지적을 받은 트랜스젠더가 그 지적이 부당하다고 문제제기하면 예민한 사람이자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지적을 받은 당사자가 “내가 나의 지정성별’답게’ 행동하지 않은 것이 정확히 어떤 피해를 주었다는 거냐”고 반문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대개 “남들 보기 그렇잖아” 같은 두루뭉술한 말들이다. 이런 상황이 지겨워 얼굴에 철판을 깔고 커밍아웃을 하면 조심스럽게 대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거기에 이어지는 ‘배려 돋는’ 질문 공세가 또다른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
그래도, 트랜스젠더라서 다행이야
한편, 이런 삶을 살면서도 트랜스젠더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대부분의 시스젠더 이성애자 여남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기대 등을 볼 때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시스젠더 이성애자 여남에게는 나이에 따라 해야할 일들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시스젠더 이성애자들의 ‘주류 문화’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가야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을 해야 하고, 취업을 하고 좀 지나면 결혼,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통과의례’는 누구라도 넘어야 하는 굳건한 관문이다. 이 단계별 관문을 넘지 않은 사람들은 실패자로 여겨지고, 이 문화에서는 개인의 행복보다는 가족을 이루는 것이 상위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사랑해서 결혼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보다는 “나이가 차서 결혼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흔하게 들리고, 자기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택하는 경우보다는 당장 먹고 살기 바빠서 좋아하는 것과 관계없는 일을 한다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한때는 “넌 좋겠다. 생리도 안하고 임신도 안해도 되니까 날로 먹네?”, “야 넌 결혼하지마, 애 낳지마 하고 싶은대로 살아” 같은 말들이 나에게 상처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출산과 육아로 인해 고통받는 친구를 보고… 나는 조용해졌다. 트랜스젠더인 나는 이 ‘주류 문화’의 자장에서 한발 비켜서 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나에게 먹고 사는 일 이상의 거창한 기대는 별로 하지 않는다. 내 주변의 기대치가 낮은 덕분인지, 나는 지금 꽤나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 결혼에 대한 압박이 없으니 나 하나 건사할 수 있는 정도의 소득이라면 문제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일에 도전할 수 있는 여유도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 같다. 획일적인 집단문화 속에서 ‘사연 많은 열외자’로 사는 삶의 장점이다.
도화지와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린다면
마지막으로, 누구에게나 흰 도화지와 크레파스가 주어지고, 이것들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해보자. 선생님은 누구든 자유롭게 자기가 원하는 색을 써서 그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학생의 성별에 따라 쓰기 쉬운 색과 쓰기 어려운 색, 그리기 쉬운 주제와 어려운 주제가 이미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다. 예를 들면, 여학생이라면 ‘남자 아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로봇이나 트럭 같은 것보다는 분홍 토끼 인형 같은 것을 그리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그렇다.
나는 도화지에 아들이라 불렸던 내 이름을 적은 뒤 이름 끝에 하트를 붙일 것이다. 그 옆에 멋진 대형 트럭을 그리고, 분홍색과 반짝이를 뿌릴 것이다. 그리고 그림에 <내가 갖고 싶은 것>이라고 이름을 붙여 제출할 것이다. 그리고 그림에 쏟아질 수많은 질문과 질타에 “왜 안 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있는지도 몰랐던 사회가 만들어놓은 틀이 왜,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나의 정체성은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건강한 사회’를 의식적으로 건강한 사회로 만들 수 있다. 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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