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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포인트 기획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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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이라는 주제를 지금 꺼내 들기에는 때가 적당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건강, 한때의 유행어로 웰빙이니 참살이니 하는 걸로 불렸던 그것이 화두인 때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가 버렸으니 말이다. 요즘의 화두는 그저 생존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렇기에 건강은 지금 더더욱 중요한 주제다.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어쩌면 밑천으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건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건강이 단지 병 없는 몸, 병 없는 정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웰빙 열풍이 알려 주었던 수많은 팁들에서 알 수 있듯 건강하기 위해서는 돈이, 시간이, 어쩌면 열정까지가 필요하다. 또한 건강한사회를위한국민연대라는 단체의 다양한(?) 활동들에서 알수 있듯 건강이라는 것은 무엇이 병인지를 규정하는, 무엇이 정상인지를 규정하는 권력과 이어져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건강”이라는 것에 관하여.
건강한 사회를 위협하는 병균들
건강한사회를위한국민연대, 약칭 건사연 ― 질병 퇴치 운동 NGO쯤 되어 보이는 이름을 가진 이 단체의 홈페이지(pshs.kr)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퀴어망제 사진보기”라는 커다란 배너다. 퀴어망제란 다름 아닌 퀴어문화축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단체의 홈페이지에 이런 배너가 있는 것은, 이 단체가 “정상적인 성 개념 확립”을 제 1 강령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애만을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인류의 정상적인 사랑이라고 믿는”, 그리고 “남녀 간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결혼 제도만이 정상적인 결혼 제도라고 믿는” 이들은 “대한민국 사회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단체이다.
건강이 무엇이길래 이런 활동의 이름으로 쓰일 수 있는 것일까? 국어대사전은 건강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무 탈이 없고 튼튼함. 또는 그런 상태”로 정의하고 있다. WHO는 조금 더 나아간다. “병이나 질환의 부재 뿐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한 웰빙의 상태”가 바로 건강이다. 문제는 여기서 탈이니 병이니 하는 것이 무엇인지, 튼튼함이니 완전한 웰빙이니 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열려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이 결정하면 그것이 사회적으로 합의되는 경우 ― 예컨대 암을 건강의 지표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거나 매우 적을 것이다 ― 도 물론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 동성애는 이미 오래전에 DSM(미국 정신 질환 편람)에서 삭제되었지만 건사연 같은 이들에게는 여전히 치유되어야 할 병이다.
이런 사례를 우리는 장애의 경우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장애를 누군가의 몸이나 정신이 갖는 결함으로 생각하지만, 다른 어떤 이들은, 적어도 많은 경우, 그것이 단순히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사회적 기준과 인프라가 충분히 보조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는 문제라고 여기고 있다. 누군가가 지하철을 편히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다리를 움직이지 못해 휠체어를 타기 때문이 아니라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없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세상을 살아보지 못했으므로, 어딜 가나 계단이 아니라 엘리베이터와 경사로가 있는 곳에서 하지마비가 장애일지 아닐지를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이처럼 건강을 개인의 문제로 사유할 때에는, 사회적 통념과 기준을 벗어나는 많은 것이 병이 된다. 건강이 정상성과 결부되어 사유될 때, 소위 ‘비정상적인 것’은 병이 된다. ‘비정상적인 사람’은 병균이 된다.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 암탉은 그저 자기 자리에서 울 뿐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위협이 된다. 비성소수자가 건강한 사람이자 정상적인 사람이 되면, 성소수자는 그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회를 위협하는 병균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에이즈니 뭐니 하는 ‘그럴 듯한’ 담론과 결합하면 효과는 더욱 커진다. 티브이에 게이가 나오면 자기네 아들도 게이가 된다는, 그리고는 에이즈에 걸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병균’들이 가진 ‘전염성’이라는 위협에 대한 공포감을 보여주는 가장 흔한 현상이다.
병균들의 건강
암세포도 생명이잖아, 라고 외치는 사람은 드라마에나 나온다. 병균의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물론,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한국에서 병균들 ― 성소수자들, 장애인들, 이주노동자들, 여성들을 물리적으로 퇴치하려는 시도가 흔하지는 않다. 물론 이렇게 말하기에는 많은 폭력이 행해지고 있고, 심지어 그 중 일부는 공적으로, 조직적으로 행해져 왔다. 최근 알려지고 있는, 한센인, 장애인들에게 행해진 강제 불임 시술 및 낙태는 이 병균들이 사회에 파고 들어오는 것을 막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주노동자의 이동을 제한하고 미등록 이주노동자 당사자 및 그 자녀들의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제도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차단하는 시도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를 테면 중산층 이상의 한국인 (때로는 백인까지도) 비장애인 비성소수자 비청소년 남성을 제외한 다른 모든 병균들은 살상되거나 추방되거나 감금된다. 그들의 삶이 어떻게 이어지는지에, 사람들은, 그러니까 중산층 이상의 한국인 비장애인 비성소수자 비청소년 남성들은 관심이 없다.
병균의 건강에 아무런 관심도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에이즈 예방약으로 알려진 트루바다 처방 기준에서 찾을 수 있다. 성소수자들 (정확히는 그들이 아는 유일한 성소수자인 듯한 게이 남성을) 비난하는 ― 때로 동정과 연민의 탈을 쓰고 행해지는 그 비난의 ― 가장 흔한 수사는 에이즈의 창궐이다. 그러나 트루바다는 현재 한국에서 HIV/AIDS 감염인 당사자, 그리고 당사자와 사실혼 관계에 있는 주민등록상 이성인 배우자에게만 처방된다. 저들의 논리에 따르면 에이즈 예방이 가장 절실한 것은 게이 남성들이지만, 그들은 감염된 피해자가 아니라 병균이므로, 약은 그들에게 처방되지 않는다.
장애인의 원활한 생활을 위한 보조기구 기술보다, 태아의 장애를 감별하는 기술이 더 빠르게 발전하는 듯 보이는 것이 단지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장애인 활동 보조 지원은 갈수록 줄어들지만 태아 기형 검사는 수많은 지자체들에서 지원하고 있다. 물론 현행법상으로는 장애 태아의 중절은 불법이다. 하지만 부모의 특정 장애 및 유전병을 이유로 한 임신 중절은 여전히 허용되고 있으며, 가족의 강요나 의사의 강권으로 불임 시술을 받는 장애인 당사자 역시 적지 않다. 병균의 전파는 이런 식으로 차단된다.
병의 전파나 장애아의 출생까지 가지 않아도 이야깃거리는 충분할지도 모른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의료 서비스에의 접근 자체가 어렵다. 등록 이주노동자라도 통역 가능자가 적은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HIV 감염을 이유로, 혹은 신체 장애를 이유로 치료를 거부 당하는 일 역시 부지기수다. 남성의 신체를 중심으로 의학 연구가 진행되는 탓에 여성들의 질환에 대한 연구는 늘 한 템포 늦다. 어쩌면 사람을 살리기도 바쁜 세상, 구태여 병균들의 건강을 챙기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병균으로 태어난 게 잘못일까
병균들의 삶이 건강할 수 없는 것은 마치 원죄인 듯 보인다. 내가 짓지 않은 죄, 그러나 나의 출생에부터 각인되어 있는 죄로서의 원죄 말이다. 개개인의 삶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어떤 것들 ― 성소수자임, 장애인임, 외국인인, 여성임과 같은 것들을 이유로 우리는 건강에 접근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한 가지 더의 원죄를 꼽아 보자면 그것은 가난일 것이다.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고 했던가, 가난이 개개인의 책임이, 숫제 죄가 되어 버린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건강을 이야기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의료 서비스의 영리화다. 얼기설기나마 의료보험제도가 구비되어 있는 한국이지만, 큰돈이 드는 병은 금세 누군가의 삶을 가난으로 몰아넣곤 한다. 병에 걸리기 전부터 가난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건강과 맞바꿀 돈조차 없다면, 악순환에 빠져드는 수밖에 없다. 가난해서 병에 걸리고 병에 걸려서 가난해지는 악순환 말이다. 아주 약간의 여유라도 있다면 보험에 가입하는, 병원 갈 돈을 아껴서라도 보험료는 꼬박꼬박 내는 것은 저 악순환을 피하기 위한 또 다른 악순환이다.
얼마 전 내 통장에는 칠십만 원 가량의 돈이 들어 왔다. 돈을 보낸 것은 모 실비 보험 회사였다. 만성 요통으로 한 번에 십오만 원짜리 도수치료를 다섯 번 받고서 증빙서류를 제출한 참이었다. 허리는 다 낫지 않았지만 현금이 떨어졌으므로 나의 치료는 중단되었다. 얼마간의 본인부담금이 있으므로 보험금으로 들어온 돈은 칠십오만 원이 채 되지 않았고, 이 돈으로 다시 치료와 보험금 처리를 반복한다 해도 나의 치료는 다시금 중단될 것이다. 그나마 실비 보험 가입이 되어 있는 것, 그래서 잠깐이나마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 내가 가진 행운의 전부였다.
아직 영리 병원이 들어서지는 않았지만, 민영 보험의 활성화는 의료의 영리화를 부추긴다. 누구나가 실비 보험쯤은 가진 요즘, 병원에서는 의료보험 적용을 받지 않는 고가의 치료법을 권유한다. 저 ‘누구나’에 들지 못한 이들이 받을 수 있는 치료법을 실시하는 병원은 갈수록 줄어 간다. 한편, 그렇게 늘어난 치료법에 지불되는 비싼 돈은 누구에게 로 갈까. 내가 낸 십오만 원 중 얼마가 물리치료사의 몫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담당 물리치료사는 거의 종일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진료 ―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첫 방문을 제외하고는 의사의 진료를 거치지 않고 도수치료실로 바로 들어갔다 ― 를 받을 수 없을 만큼 환자가 끊이지 않는 병원이었다.
물리치료사 친구는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일을 그만 두었다. 잠시 휴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아예 직업을 바꾸어 버렸다. 몸이 견딜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가 전셋집이라도 하나 마련할 만큼 충분히 돈을 번 것도 아니다. 타인의 건강과 또 다른 타인의 수익을 위해 자신의 건강을 버렸을 뿐이었다. 이것은 물론 물리치료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 시간은 길고 임금은 낮으며 산재 보험 처리율마저 낮은 한국에서,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언제나 건강을 버리고 목숨만을 유지하는 일이다. 물려받은 것 없이 태어나 노동자가 된다는 것, 적어도 건강에 관한 한 한국에서 가장 흔한 원죄다.
병균들의 연대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 편이랬다. 아니, 그 말이 틀렸더라도 이제는 맞는 말로 만들어야만 할 성 싶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서로 다른 병균이지만 그래 봐야 같은 병균이다. 장애인 운동은 탈시설을 요구하고 있고 HIV/AIDS 감염인 운동은 요양병원을 요구하고 있지만, 장애인과 HIV/AIDS 감염인은 똑같이 진료를, 나아가 지역사회에서의 생활을 거부당하고 있다. 물리치료사 앞에서 나는 고가의 치료를 몇 번이고 받는 팔자 좋은 사람이었겠지만 직장에서 나는 내 허리를 바쳐 누군가의 돈을 벌어주는 평범한 노동자다.
또한 우리는 서로 다른 병균들만은 아니다. 여성 감염인, 성소수자 노동자, 노숙 장애인 ― 우리는 복합적인 병균들이다. 여러 개의 원죄를 동시에 안고 있는, 그래서 여러 개의 이유 아닌 이유로 배제 당하는 그런 병균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 다수는, 이미 사람이 아니라 병균임을.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이유로 병균이 되었는지를. 서로 다른 병균들에게 서로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같은 메커니즘에 다른 이름이 붙었을 뿐인 것인지를. 병균들의 건강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우리가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그래서 우리는 만나 보기로 했다. 다양한 병균들을. HIV/AIDS 감염인을, 여성 노동자를, 장애인을, 노숙인을, 트랜스젠더와 여성 파킨슨병 환자를. 이 수많은 병균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생각과 어떤 일을 함께 할 수 있을지를 이야기해 보고자 했다. 이제 겨우 시작이지만, “건강”이라는 제목의 특집으로, 그 만남들의 결과물을 내어 놓는다. 이것이 우리가 더 많은 병균들을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병균들의 건강을 챙기는 사회를 만드는 첫 단계가 되기를 바란다.
이 글에는 두 가지의 “우리”가 등장한다. 하나는 이 웹진을 만들고 있는 우리고, 또 하나는 이 웹진을 읽고 있는 우리다. 서로 달라 보이는 두 집단을 하나의 단어로 묶어 칭한 것이 억지가 아니기를 바란다. 우리가 같은 병균이기를, 함께 읽고 쓰는 우리가, 다른 곳에서도 함께이기를, 바란다. 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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