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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은 없다, 망한 데서 시작하라: 민주공화국과 불화하는 젠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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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은 없다, 망한 데서 시작하라: 민주공화국과 불화하는 젠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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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 웹진 <글로컬포인트> 기획편집팀

 

 

1.

대부분의 폭력 범죄는 그것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비롯한 구체적인 활동들이 있을 때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성폭력, 아내 폭력(가정폭력), 데이트 폭력과 같은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은 그것에 반대하는 여성운동이 활발할 때 일시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을 띤다. 범죄 발생률이 일반적으로 신고율을 토대로 측정되기 때문이다. 폭력 발생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성과로 폭력의 가시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 요즘 거의 매주 열리는 촛불집회에서 들리는 노래다(<대한민국 헌법 1조>).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해 정·재계 유력 인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우리가 낸 피같은 세금을 ‘해처먹는’ 카르텔의 실상과 ‘비선 실세’ 논란까지 백만 명이 모이지 않는 게 이상할 만큼 충격적인 일들이 연이어 드러나는 현실에 맞서, 우리는 ‘민주공화국’을 외치며 매주 행진한다.

 

2.

여성에 대한 폭력과 민주공화국 이야기로 글을 시작했다. 두 이야기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폭력으로 명명되기 시작한 역사는, ‘우리’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항하는 운동은 ‘네가 옷을 그렇게 입어서’, ‘당해도 싸다’, ‘네가 너무 예민하다’는 가해자의 언어에 맞서는 운동이기도 했다. 우리는 가해자와 ‘하나’로 묶일 수 없는 피해자의 다른 언어를 드러내고, 피해자의 관점에 입각한 정치적 개념들을 만들어가며 싸워 왔다.

다시 돌아와서, 공화국(共和國)의 뜻을 생각한다. 사전적 정의는 ‘공화 정치를 하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국가’다. 한문 그대로 풀면 ‘함께(共) 화(和)하는 나라’라는 의미를 갖는다. 공(共)에는 ‘함께‘라는 의미 외에, ’한가지‘라는 의미가 있다. 화(和)한다는 말은 서로 응한다는 말부터 사이가 좋다는 말까지 의미의 범위가 넓다. 이런 복잡한 의미들을 고려하면 ’모두 하나로 모여 즐거운 나라‘라는 의미가 가장 가까울 것 같다. 물론 <대한민국 헌법 1조>는 경쾌하고 신나는 노래지만, 백만 명의 운집한 사람들 속에서 이 노래를 듣다보면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든다. 공화(共和)는 가능한가? 다시 말해서, 여기 모인 100만 명의 우리는 ’하나로 모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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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1월 초에 있었던 두 번의 집회가 끝난 후 SNS에는 광장에서 겪은 성폭력을 고발하는 글들로 넘쳐났다. 불쾌한 플러팅부터 사람이 많은 틈을 탄 신체 접촉, ‘여자가~’로 시작하는 모욕적인 말들, 진보를 참칭하는 남초 사이트에 올라온 ‘촛불 여고딩 XX하기’ 게시물을 고발하는 여성들의 움직임이었다. 박근혜가 싫지만 박근혜를 닭년, 암탉, 온갖 ‘년’ 들어간 욕설로 비하하는 여성혐오적 행태 역시도 불편하다는 글들도 올라왔다. 여성, 장애인, 청소년, 동물을 타자화하는 구호를 문제제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동시에, ‘성폭력 당할 걱정을 하며 집회에 나가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는 남성들의 지지하는 글도 올라왔다. 여성을 모욕하는 말들에 별 문제의식이 없었는데 이젠 그런 말을 쓰지 않아야겠다는 다짐들도 많았다. 집회 주최측은 소수자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집회문화를 만드는 데 힘쓰겠다는 사과를 했다. 나도 그날 성폭력 비슷한 것을 겪었다. 나는 그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생각했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는 말은 정말로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산적해있다. 박근혜를 욕하는 건데 왜 애먼 여성들이 발끈하냐는 반박, 공부할 시간에 집회 나온 청소년이 기특해서 기특하다는데 그것도 문제냐는 비아냥, 여성과 장애인을 멸시하는 욕설을 ‘민중’이 사용하더라도 그것은 정당한 분노의 반영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근엄한’ 질책까지, ‘진보’ 남성들을 중심으로 많은 반박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몇 가수들의 정권 비판 노래들이 여성 멸시, 비하, 혐오에 기대어 있다는 여성들의 비판을 검열과 표현의 자유 침해로 규정한다. DJ DOC의 <수취인분명> 노래 가사의 ‘미쓰 박’이 왜 부적절한 표현인지 조목조목 짚는 글에는 ‘친박페미’, ‘국정원의 사주를 받았냐’, ‘분열을 일으키지 말라’는 댓글이 달렸다.

‘분열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가장 먼저, 박근혜를 몰아내는 것은 중심 문제이고, 집회에서 여성 참가자들이 당하는 폭력과 모욕은 주변 문제라는 인식이 드러난다. 여성, 장애인, 청소년, 동물에 대한 폭력은 정권퇴진이라는 ‘대의’ 아래에서 별 것 아닌 문제라는 것이다. 불편하면 오지 말든가 참아라, DJ DOC가 무대에 서는 것이 불편하면 잠깐 나갔다 오면 되지 않겠냐는 아무말 대잔치에 어이가 없었다. 집회 참가자의 절반은 우리 소수자들과 그 친구들이었다. 이들이 전부 집회를 보이콧한다면, 그때도 ‘소수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소수자들의 정당한 제기가 ‘분열 책동’이라는 사람들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닭년을 비롯한 욕설이 불편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이미 갈등하고 있으며, 문제제기는 갈등 해결의 첫 단추다.

 

4.

다시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로 돌아가서, 문제가 된 이번 촛불집회에서만 여성을 모욕하는 욕설과 성폭력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여성 대통령을 겨냥하는 여성멸시적 욕설은 박근혜가 대선후보로 거론되던 시절부터 있었고, 집회 대오 내부에서 여성을 타자화하는 문제는 2008년을 기점으로 여초카페를 중심으로 조직된 여성 참가자들이 증가할 때부터 여성들 사이에서는 이미 토론되고 있었던 문제였다. 집회에 참여하는 시민 대중으로, 민중으로 묶이지만 여성은 그 속에서도 ‘여성’이었다. 워마드의 일부 유저를 중심으로 한, 남성 운동권들에 대한 강한 불신과 ‘꿘혐’ 정서는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운동권 내부에서 여성 운동가들이 겪은 폭력을 다루는 페미니스트 전희경의 <오빠는 필요없다>는 운동에 참여하는 여성주의자들이 꼭 한번씩은 읽고 공감하는 책이다.

모든 일들이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명명되지 않고 말해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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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렇다면, 말해지지 않던 일들을 말하게 된 지금의 변화는 무엇으로 가능해진 것일까? 지금 여기의 페미니스트 운동을 언급하지 않고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메갈리아의 등장 이후로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여성들이 크게 증가했다. 운동권 식으로 말하자면 운동의 외연이 확장되었고, 일상언어로 말하자면 우리 편이 많아졌다.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 메갈리아의 등장과 그 분화,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강남역 페미사이드 추모의 물결, Girls do not need a Prince 티셔츠와 그 이후의 논쟁,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 #OO_내_성폭력 해쉬태그 운동까지 1년 반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많은 싸움과 소중한 성과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강남역 페미사이드와 #OO_내_성폭력 해쉬태그를 강조하고 싶다. 지난 5월 17일 강남역 인근의 공용 화장실에서 일어난 여성살해 사건이 여성에 대한 증오 범죄라는 점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강남역 페미사이드는 동일한 시공간이 성별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여성들이 ‘오직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죽은 여성을 집단적으로 추모하는 것은 ‘남혐’도 아니고 여남 간 분열 조장도 아니다. 그것은 여성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는, 적극적 애도의 시작이다.

강남역 페미사이드를 둘러싸고 한동안 인터넷이 시끄러웠다. ‘평등주의자’들의 “여자 남자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요”부터, ‘정신분열증 환자의 우발적 살인이니 여성혐오가 아니’라는 모 좌파단체의 입장 발표(자기들이 뭐라고 입장을 발표하는지 모르겠다), 강남역 사건으로 논쟁하다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글까지 많은 글들이 올라왔다. 훗날 더 자세하게 해석되어 기록되겠지만, 나는 강남역 사건을 둘러싼 이 모든 말들이 성별화된 일상적 폭력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자 하는 여성과 그 폭력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남성’들 사이의 잦아들을 수 없는 갈등이었다고 생각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서로의 보완자가 아니라 대립하는 두 계급이다(sex class).

#OO_내_성폭력 해쉬태그 운동 역시도 그렇다. OO에는 문단, 체육계, 학교, 운동권, 가정 등등 사회의 거의 모든 집단이 해당되었다. 남성이 권력을 독점하고 가족 관계나 성애적 관계로 맺어진 여성에게 그 권력의 산물을 분배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안전한 공간은 없다. 공사 영역의 구분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을 가정에 묶어놓음으로써 노동을 위계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그 구분 자체가 남성중심적이기 때문에 여성에게는 공사 영역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에게는 ‘홈 스위트 홈’이 여성에게는 노동 착취의 공간이고, 성적 학대의 공간이다. 공적으로 말해지거나 기록되지 않았던 이 폭력들이 해쉬태그 운동을 통해 드러났다. 가해자들 중 일부는 실명이 공개되었고, 여성들의 폭로와 연대는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다.

사적 관계(면식범)에서의 폭력, 여성이 겪는 성별화된 일상적 폭력이 가시화되면서 지금 우리는 운동의 새로운 전선을 긋고 있다. 여성은 남성과 다른 세상에 살고 있으며, ‘여성 문제’야말로 우리의 일상과 사회를 전면적으로 재조직할 것을 요구하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급진적인 것이라는 문제의식으로.

 

6.

마지막으로, 들어줄 청중의 등장을 말하고 싶다. 강남역 사건과 성폭력 고발 운동이 우리에게 말할 무대를 열어주었다면, 그것은 들어줄 청중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우리는 말하며 들었고 들으며 말했다. 민중이 하나로 묶일 수 없고 공화가 가능하지 않듯, 여성도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여성들 사이에도 계급과 성 지향 등 다양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여성’으로 환원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우리는 전략적으로 정체성의 정치를 차용한다. 여성이 환원될 수 없는 개별적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집단인 것처럼 사고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여성’으로서 겪는 구체적 경험이 실재하기 때문이다. 자매애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강남역 10번 출구> 페미니스트 행동의 구호와 영화 <매드맥스>의 주제를 생각한다. “우리는 그래도 어디든 간다”와 “낙원은 없다, 망한 데서 시작하라”. 한번 ‘빨간 약’을 먹으면, 세상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이고, 연결될수록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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