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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8/14
    [보이진 않지만 우리는] 88cc 경기보조원 노동자 김은숙씨를 만나다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보이진 않지만 우리는] 88cc 경기보조원 노동자 김은숙씨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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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여성노동조합 산하 88CC분회는 국가보훈처가 위탁 운영하고 있는 88컨트리클럽에서 일하는 경기보조원들의 노동조합이다. 88CC분회는 99년 노조를 결성한 이후 세 차례 단체협약을 갱신하며 활발한 활동을 해왔는데 이는 특수고용직인 경기보조원들로만 이루어진 노조로서는 흔치않은 소중한 선례이다. 그러나 회사는 2008년부터 조합원을 부당하게 징계하거나 해고하는 등 노골적인 노조탄압을 시작했고 이에 분회장인 김은숙씨를 비롯한 조합원들은 해고된 노동자들의 복직과 단체협약을 준수할 것 등을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다. 

 

김은숙씨를 만난 곳은 88CC가 위치한 용인시 청덕동의 한 카페였다. 그날도 은숙씨는 조합에 걸린 무수한 소송 중 하나 때문에 수원지방법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잠깐 숨을 돌린 뒤 이야기는 먼저 은숙씨가 88CC에서 경기보조원으로 일을 시작한 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경기보조원을 하게 된 이유는 딱 돈 때문이었어요. 가정형편이 어려워져서 돈이 급하게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4시간 3만원, 최대 8시간 근무’라고 쓰인 신문 광고를 보게 되었어요. 월급으로 계산해보니 상당히 고수익이었고 또 하루 네 시간씩 일하면 저녁 시간에 학원이라도 다니면서 틈틈이 자기계발도 할 수 있겠다싶어 시작했죠.”  

 

그럼에도 경기보조원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일은 나름대로의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당시는 골프가 지금만큼 대중화되지 않을 때라서 캐디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들은 정도였고 실제 어떤 일을 하는지는 잘 몰랐어요. 그런데 조금은 천대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손님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다든가하는. 막상 일을 해보니까 오해였던 부분이 크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저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용기 내서 시작하는 일이었어요.”

 

은숙씨는 함께 일하는 다른 동료들도 싱글맘이나 부모님을 부양하는 실질적 가장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짧은 노동시간과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은 용기를 내어 경기보조원을 시작하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경기보조원의 수입은 처음에 은숙씨가 생각했던 것만큼 높지 않았다. 

 

“광고에 적혀있던 ‘4시간 3만 원’의 네 시간은 한 경기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걸리는 경기 진행시간을 말해요. 그런데 저희가 하는 일은 경기 들어가기 전과 후에 필드 정리하는 일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실제 일하는 시간은 한 경기 당 보통 일곱 시간 정도에요. 대기하는 시간까지 합하면 더 길어지고요. 캐디피는 경기 건수에 따라 지급되기 때문에 사실상 평균 7시간 당 3만원을 받게 되는 거였죠. 그나마 날씨 궂은 날이나 겨울에는 경기가 없으니 돈을 전혀 벌지 못하고요.”

 

그러나 은숙씨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노동조건을 감내하였다. 이러한 은숙씨의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일을 시작했던 90년대 초에 여성노동자들이 놓여있던 여성노동시장의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은숙씨가 일을 시작한 90년대 초는 널리 알려져있다시피 서비스시장이 팽창하면서 여성들이 임금노동자로 대거 취업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사실 여성들의 고용은 서비스산업 중에서도 2차 산업의 발전과 연동된 금융, 통신, 운수산업 등의 분야보다는 음식숙박, 오락 및 문화서비스, 개인 및 가사 서비스 분야 등 이른바 ‘최종소비 서비스산업’에 한정되었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영역으로 취급된 노동과 관련된 최종서비스산업은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친절하고 상냥한 응대, 배려와 보살핌, 아름다운 외모 등으로 정의된 ‘여성다움’이라는 가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 결과 서비스산업의 노동 중 일부는 ‘여성다움’을 수행하는 일과 강력히 결부되었고 그러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임금노동의 영역에 여성 노동자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는 곧 여성들의 자리는 여전히 그 한정된 공간으로 제한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편 이 시기는 고용형태와 노동과정 전반에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일어나던 때로, 이러한 변화의 핵심이었던 노동유연화 또한 성별화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남성노동자에게 우선적으로 도입된 유연화 전략이 직무유동성을 높이고 임금을 성과급으로 전환하는 기능적 유연화였다면, 여성노동자에게는 비정규직, 재택근무, 단시간노동, 파견 및 하청을 확대하는 수량적 유연화가 주된 유연화 전략으로 적용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미 여성노동자들은 ‘비핵심’적이며 ‘단순’한 노동이라 가정된 일자리에 고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노동시장의 위계에서 낮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여성노동자들은 구조조정 이후 더욱 불안정한 고용형태와 열악한 노동조건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90년대 초에 일어난 두 가지 방향의 성별화는 결국 임금노동시장에서 노동의 성격과 노동조건 등 모든 면에서 여성들의 선택지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경기보조원이라는 직업 역시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산물이다. 따라서 은숙씨와 동료들이 경기보조원의 임금이 애초의 기대에 못 미쳤음에도 이를 감내했던 까닭은 경기보조원이 여전히 나름대로 괜찮은 일자리여서라기보다는 다른 일자리 또한 이직을 할 만한 특별한 유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경기보조원은 예나 지금이나 명백히 여성들의 일자리이다. 

 

“최근에는 간혹 남자 캐디들도 있지만 제가 일을 시작했을 당시에는 100% 여자들이었어요. 20대 초중반의 젊은 사람들이었죠. 결혼한 사람들은 뽑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왜 경기보조원은 모두 여성이었을까? 경기보조원들이 하는 일은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육체노동과 감정노동, 정신노동이 결합된 복합적인 일이다. 

 

“경기보조원은 여러 가지 일을 해요 먼저 골프장 입장에서는 손님들이 이용시설을 훼손하지 않고 잘 이용하도록 감시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하죠. 가장 중요한 건 경기가 흐름을 타고 잘 진행되도록 하는 일이에요. 넓은 골프장에 여러 팀이 경기를 진행하니까 앞 팀과 뒤의 팀이 서로 방해를 받지 않아야 하니까 속도가 너무 빨라서도, 느려서도 안 되죠. 손님들에게 코스를 안내하거나 경기에 대한 조언을 하기도 하고 안전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제지도 해야 해요. 경기 시작 전이나 끝난 후에 코스를 정리하는 것도 경기보조원이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은숙씨는 경기보조원의 업무내용은 다양하지만 이른바 감정노동에 대한 능력이 이러한 과정을 진행하는데 핵심적인 요소이며 경기보조원의 대부분이 여성인 까닭도 이 때문이라 말했다. 

 

“2000대 이전에 골프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부유층이었어요. 그러니까 경기보조원에 대해서도 호스티스라고, 나쁜 말이 아니라 왜 파티 같은 거 하면 초대받은 사람들을 대접하는 안주인이 있잖아요, 그런 접대문화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경기보조원은 경기가 물 흐르듯이 잘 진행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그러다보면 내장객이 경기를 좀 더 빠르게 진행하도록 유도해야 할 때도 있거든요. 이게 딱 매뉴얼이 있는 게 아니어서 센스가 있어야 해요. 내장객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고 좋게 좋게 경기를 진행해야 하니까. 그러려면 경기 내내 내장객 마음에 들어야 해요. 만약 경기를 진행하는 중에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었다면 좀 더 빨리 진행하자고 할 때 ‘아까부터 태도가 왜 이래?’ 하게 되거든요. 그런 점에서 남자들보다는 여성들에게 더 맞는 것 같아요. 남자 캐디들은 그런 걸 좀 어려워하더라고요.” 

 

88CC는 고객헌장에서 “우리 골프장을 찾으시는 모든 고객은 당연히 친절한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 ‘서비스’란 친절함으로 대표되는 감정노동을 의미한다. 한 골프캐디 채용위촉기관 또한 경기보조원은 “골프장의 이미지 메이커이며 홍보요원”이고 “골프장 됨됨이의 바로미터”이기라고 말한다. 이러한 통념은 한국에서 일반적인 것인데, 경기보조원은 입지, 코스, 시설 관리 등과 함께 골프장을 평가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경기보조원에게 감정노동이 중요시 되는 상황은 경기보조라는 일의 필연적인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예컨대 스코틀랜드에서는 나이든 남성이, 일본에서는 나이든 여성이 주로 경기보조를 하며 이들이 하는 일은 친절한 서비스가 강조되는 은숙씨의 일과는 사뭇 다르다. 따라서 중요한 점은 한국의 골프산업에서 경기보조원에게 기대하는 역할, 즉 경기보조원이라는 직업이 놓인 사회적 맥락인데, 이는 앞서 말한 최종소비 서비스산업의 사업전략과 관계가 있다. 경쟁에 노출된 골프장이 경기보조원들의 친절함, 즉 강도 높은 감정노동을 회사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에 감정노동은 여성들에게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 숙련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며 여성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더 나아가 여성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라 기대하는 사회적 통념 또한 이러한 상황을 악화시킨다. 이는 텔레마케터, 승무원, 간호사 등 다양한 서비스분야의 여성노동자들 역시 겪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감정노동은 자연스럽거나 쉬운 일이 아니다. 

 

“경기보조원 일 중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내장객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경기보조원에 대해 내장객이 거는 클레임 중 90% 이상은 아까 말한 것처럼 경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사실 경기보조원이 정도에서 벗어나는 일은 거의 없거든요. 만약 뭔가 갈등이 일어난다면 내장객이 무리한 요구를 해서일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런데 그럴 때에도 ‘죄송합니다.’하며 쩔쩔맬 수밖에 없어요. 회사는 내장객 위주라 ‘억울해도 받아들여라’할 뿐이니까요. 성희롱이 있어도 ‘손님인데 어떡하니’, ‘똥 밟은 셈 쳐라’, ‘네가 더 잘 대처하지 그랬니’, 그런 식이죠.”

 

이처럼 ‘서비스를 받을’ 소비자의 권리가 강화되는 동안, 감정노동과 친절경쟁이 이윤을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전략이자 노동과정의 핵심 요소로 강조되는 동안,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더 열악해졌다. 감정노동에 대한 강조가 감정노동을 이른바 ‘핵심’적인 노동으로 인정하고 가치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비핵심’적인 노동으로 가정하여 유연화하는 한편 감정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관리와 통제는 강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은숙씨 또한 88CC를 비롯한 골프장에는 경기보조원에 대한 다양한 근무수칙과 이를 지키지 않았을 시 받게 되는 벌점제도가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방식의 통제가 가능한 이유는 고용형태와 성별로 인해 회사와 여성노동자들의 권력관계가 매우 불평등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우리는 인원수가 많고 여자들이고 고졸들이라 권리의식이 높지 않았어요. 게다가 88CC는 국가보훈처에서 위탁 경영하는 곳이라 사장이 군인 출신이다 보니 회사 분위기도 군대식이었어요. 근무수칙은 무조건 지켜야 하고 관리자에게 잘 보여야 하고. 불합리하고 억울하다 해도 회사나 관리자한테 아무도 토를 달 수 없는 구조였어요. 노동법도 적용이 안 되잖아요. 명절이면 다른 직원들은 회사에서 주는 선물꾸러미 하나씩 들고 나오는데 우리는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요. 요구는 많은데 없는 존재였죠. 우리는.”

 

따라서 88CC 경기보조원들의 투쟁이 맨 처음 이러한 권력관계의 문제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생각해보면 제가 교육기간일 때도 데모가 일어난 일이 있었어요. 경기보조원들이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이라서 정이 있거든요. 처음 들어와서 잘 모를 때 언니들이 보살펴주면서 되게 잘 해줬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한 언니에게 경기 진행이 늦다고 관리자가 내장객들 있는 앞에서 막 뭐라고 하다가 말대꾸를 한다며 따귀를 때린 거예요. 결국 그 언니는 일을 하지 못하고 돌아왔고요. 우리는 그 관리자가 징계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때 언니들이 데모를 했죠. 불법데모요. 결국 주모자는 해고가 됐지만 그 일이 인상이 깊었어요. 회사가 정말 문제가 많구나, 그런데 저렇게 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그 이후 몇 차례의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지만 회사는 바뀌지 않았다. 이런저런 약속을 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99년 정식으로 노조를 만들게 되었다. 

 

“골프장에서 일한 지 8년 차 되는 해였어요. 회사에 캐디가 되게 많을 때여서 억울한 일도 많았죠. 관리자가 욕을 하거나 폭행을 해서 나가는 일도 있었어요. 그러다가 문제가 된 게 정년이었어요. 처음에 경기보조원을 채용할 때에는 다들 이십대였으니까 회사도 나이를 문제 삼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십 년씩 일하는 사람들이 생기니까 정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리고 43세로 정년을 정했어요. 우리 모두 분노했죠. 그 해 결국 노조를 만들었어요.”

 

그렇게 경기보조원들로만 이루어진 노조가 탄생했다.  

 

“그때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를 때라 그게 특수한 사례인지도 몰랐어요. 지금 생각하면 꿈같은 일이죠. 우리에게 중요했던 것은 노조를 만들면 데모를 해도 바뀌지 않는 문제들을 법으로 지킬 수 있게 된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막상 노조를 만들고 보니 갑갑했어요. 노조를 만든 겨울에는 가입률이 되게 높았는데 봄이 되서 다시 일할 시기가 오니까 가입률이 떨어졌죠. 회사가 간부를 해고하면서 노조를 탄압하기 시작했는데 우리는 일당이라 투쟁을 하면 할수록 손해니까요. 그러다가 가을에 단체협상을 하자고 하니까 우리를 노조로 인정할 수 없다며 직장폐쇄를 했어요. 그렇게 40일간 국가보훈처 앞에서 농성을 하면서 결국 첫 번째 단협을 맺었죠.”

 

2년 후 단협을 갱신할 시기가 되었을 때 회사는 또다시 직장폐쇄를 했지만 다시 긴 농성 끝에 두 번째 단협도 이뤄냈다. 그렇게 유급 출산휴가, 육아휴직 등 법적 효력을 지닌 소중한 성과들을 이뤄냈다. 안전시설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골프장 카트에 대해서도 적절한 안전시설과 보험을 보장받게 되었다.  

 

“노조를 만들고 가장 바뀐 것은 이제 회사도 내장객도 우리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거였어요. 우리가 노조를 만드는 과정을 내장객들도 보았잖아요. 예전에는 내장객들이 우리한테 성적인 농담도 많이 했는데 노조를 만든 후에는 여기서는 입조심 해야 된다고들 했어요. 우리 누구 한 사람이 무서운 게 아니라 노조가 무서운 거죠. 사업적으로 사람을 만나기 위해 골프를 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용자라 노조의 역할을 아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러다보니 88CC가 경기보조원들이 오고 싶어 하는 회사가 됐어요. 노조가 있어서 함부로 못한대, 거기 가자, 이렇게요. 노조를 만들고 단체협상을 하는 게 특수고용직으로서는 흔한 일이 아닌데 좋은 모범사례가 되어서 다른 곳에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이렇듯 노조를 통해 88CC 조합원들은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조금씩 바꾸어나갔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힘을 갖게 되는 일은 회사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2008년, 5년 간 회사와 갈등 없이 노조활동을 해나가고 있을 때, 탄압은 느닷없이 시작되었다. 

 

“2008년이면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던 해인데, 그 때 정부가 주장한 게 공기업 선진화와 특수고용 노동권 불인정 두 가지였잖아요. 88CC는 그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된 곳이어요. 청와대도 보훈처도 민영화를 하기 위해 매각을 하려면 노조는 어떤 이유로든 죽여야한다고 보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회사가 노조, 그리고 노조와 맺은 단협을 전면 부정하고 그 해 가을에 조합원 58명을 해고하면서 시작된 싸움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투쟁이 길어지다 보니 생계 문제가 심각해졌다. 

 

“원래 우리 조합원들은 그날 벌어서 그날 살아왔던 사람들이에요. 1년 동안 매일 집회를 하다 보니 투쟁비에 소송비에 타격이 너무 컸어요. 그래서 지금은 각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한 달에 한 번 집회를 하면서 이어가고 있어요. 제가 아르바이트라고 하는 건 우리 진짜 직장은 88CC라는 의미에서고 실제로는 전업으로 일하고 있죠. 조합원들이 구할 수 있는 일이 많지가 않아요. 다른 골프장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고 청소를 하거나 마트나 물류창고,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은숙씨는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 투쟁을 해 나가는 까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실 도망가고 싶을 때도 많아요. 그런데 내가 여기서 도망을 치면 내 남은 인생이 좀 그럴 것 같아요. 노조는 내 자존감, 자존심이에요. 회사로부터, 고객으로부터 부당한 일이 너무 많았는데 그런 일들에 대해 아무런 돌파구가 없었어요. 동료가 어려워도 모른 척 해야 하고. 그런데 노조에서 일하면서 내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어요. 1년 내내 욕먹고 온갖 회유와 차별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그걸 견디는 나에 대한 프라이드와 동료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거예요.”

 

그렇게 노조를 만들고 지키는 과정은 특수고용이라는 고용형태와 노동과정으로 갈라진 경기보조원의 특수성을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경기보조원은 서로 업무 연관성이 없는 일이어서 개인주의적으로 일할 수 있어요. 실제로 그런 분위기도 있고요. 잘 지내기는 했지만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경기를 맡게 되니까 일하는 시간대, 공간이 각각 달라서 내 앞 번호, 뒷 번호 정도만 같이 밥 먹고 카풀하고 그 정도에요. 그러니 회의를 한 번 하려고해도 같은 시간에 모이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다들 일이 끝난 저녁에 회의를 잡게 되는데, 그러면 그 날 오전 경기 때문에 새벽에 출근한 사람은 하루 종일 기다려야 하니까요. 정말 일상적인 조합 활동조차도 조합원 반 이상의 엄청난 희생으로 만들었어요. 정시출근, 정시퇴근하면 소원이 없겠다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투쟁을 시작하기 전에 다 노조 탈퇴하고 떨어져나가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럼 나도 그만 두면 되지, 했어요. 그런데 투쟁을 막상 시작하니까 한 명도 이탈자가 없었어요. 그러고 보면 어렵게 노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조합원 각자의 노조가 된 것 같아요. 하나하나 자기가 참여해서 만들고 지켰으니까요.” 

 

따라서 경기보조원, 특수고용노동자, 여성노동자로서 88CC 분회의 투쟁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다른 경기보조원과 특수고용노동자, 여성노동자들과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이렇게 일을 하기도, 노조를 만들기도, 그 노조를 지키는 것도 녹록치 않은 까닭 역시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은숙씨는 “갈 데까지 가보자”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회사에 복귀를 하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마지막 질문에 은숙씨는 이렇게 말했다. 

 

“2008년도에 처음 투쟁을 하면서부터 ‘싸움 끝나면 어디 갈까?’ 하는 얘기를 하곤 했어요. 투쟁이 끝나면 다 같이 소풍을 가는 게 우리 전통이거든요. 어디로 갈지는 그때 가서 조합원들한테 물어봐야죠. 그런데 장소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같이 가는 게 중요하지. 우리 꿈은 크지 않아요. 소풍 가고  매일 얼굴보고 잡담하고, 같은 공간, 88CC라는 자리에서 그렇게 지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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