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에 대해 이리 저리 생각하다 오래전에 끄적거려 두었던 메모를 발견했다. 요즘은 정말로, 변증법 만큼 개취급을 당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들뢰즈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들 중 하나가 헤겔주의와 변증법이라고 했던가?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 정말 모르겠다!
보편자와 개별자의 관계, 헤겔주의가 아니더라도 개인이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은 개인을 초월해있는 관계들과 관계 맺음으로써 가능하다. 개인과 전체, 개인과 시민사회의 매개 등등. 맑스의 비판이 올바르다면, 헤겔은 보편적인 것이 개별자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음에도 보편적인 것을 개별적인 존재에 선행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개별자는 보편자를 표현하는 매개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맑스는 "(헤겔과) 반대로 관념적인 것은 인간의 머리 속에서 전환되고 번역된 물질적인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얼마전 MP3 플레이어를 살까해서 조카애와 인터넷 쇼핑몰을 검색하던 중, 조카애가 삼성이 좋으니 삼성 제품을 사란다. 나는 아이팟이 더 예쁘지 않으냐 그랬더니, 고등학교 2학년이나 된 애가 이왕이면 삼성 거 사는 게 애국하는 것 아니냔다. 애국? 오, 애국. 나는 깜짝 놀라 쳐다보았는데, 사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냥, "삼촌은 삼성 싫어하거든." 짧게 말하고 말았다.
애국이라......
나와 정치적인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관계하는 사람들 대부분과 달리 나는 민주노총도, 민주노동당에도 비판적이다. 단순히 이들 단체의 정치적 내용이 아니라, 이들이 일종의 권력기관이며, 권력을 추구한다는 점 때문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권력의 내용이 어떠하든 이들은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구체적 개인들의 구체성을 말살하고 이를 '전체'라는 이름으로 은폐하고 옹호하기 마련이다.
"전체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전체를 위해"
사실, 이 멋진 구호가 이 지상에서 단 한번도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다. 하나는 어디에서도 그 의미 그대로 구현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언제나 권력의 문제가 개인과 개인, 구체적 개인의 실현보다 우선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하나의 권력은 다른 권력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많은 좌파 정당이 권력을 장악한 나라들에서 여전히 자본주의 착취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왜, 니콰라과는 무장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하고도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끝장내지 못했던가? 이러한 물음은 결국 볼세비키가 인민의 힘으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인민을 권력의 노예로 삼았던 지난 역사를 설명해준다. 권력은 끝없는 순환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만약 권력 자체의 종언을 실현하지 않는다면, 국가라는, 정부라는 권력을 폐기하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면, 여전히 권력의 노예가 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멕시코의 '사빠티스타'는 권력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만약 당이나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면, 이는 개별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보편자가 아니라, 개별자들의 연합체, 개별자들의 상호 의존적이면서 사적, 공적 이해가 자율적인 연대를 통해 해소되는 투쟁의 단위이어야 한다는 거다.
...>2007-07-22 22:29
http://blog.jinbo.net/greenparty/trackback/53
맑스의 헤겔비판이 잘 이해가 안되네요. 헤겔이 법철학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특수성에 대해 쓴 부분이 있어요. 인용해볼께요.
"남성이 외부와의 관계에서 강력하고 활동적이라면 여성은 수동적이고 주관적이다. 따라서 남자는 현실적이며 실체적인 생활의 터전을 국가나 학문에, 또한 외부세계나 자기 자신과의 투쟁과 노동에 두는가 하면, 이와 같은 분열을 거쳐야만 비로소 자립적인 자기통일을 쟁취한다. 남자에게 가족은 이러한 일체성을 차분히 직관하며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주관적인 인륜의 터전이 되어주지만, 여자는 그의 가정을 실질적인 생활의 장으로 하여 가족의 일체감 속에서 인륜적인 마음가짐을 안고 간다."
"그러므로 가족애는 이를 가장 숭고한 모습으로 서술해놓은 것 가운데 하나인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서는 특히 여성의 법칙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아직 완전한 현실성을 획득하는 데는 이르지 못한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실체성, 즉 내면의 법칙이며 지하에 있는 옛 신들의 법칙으로, 그것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영원의 법칙이며, 따라서 공적인 국가의 법칙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대립은 가장 고도의 인륜적인, 따라서 또한 가장 비극적인 대립이며, 그 책에서는 개인 차원에서 여성과 남성의 대립이라는 투로 부각되어 있다,"
여기서 헤겔이 말하고싶은 것은 공적인 세계는 남자들의 것이기 때문에 남자들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지만, 여자들의 세계는 가족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공적인 것과 대립하고 남자들과는 다른 차원의 윤리의식, 즉 개인의 내면에서 가족에 대한 인륜적 관계로 간다는 말이에요. 헤겔은 정확히 현실을 비판하고 있거든요.
맑스는 헤겔을 잘 이해하고 있었을텐데요. 자본가나 농민, 노동자와 같은 특수성이 해체되고 보편성의 토대 위에 개별성이 존중받는 꼬뮌사회는 헤겔의 이상인데.
꼬뮌사회가 헤겔의 이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맑스의 <자본>을 뒤적여 봤습니다. 헤겔을 잘 알지 못하고 다시 헤겔 공부를 할 생각도 없기에 굳이 말하자면, 잘 아시겠지만 헤겔에게는 보편적인 것이 개별적인 것에 우선하지요. 제 생각에 맑스의 <자본>은 사실 개별자와 보편자의 관계에서의 전도의 문제, 말하자면 개별적인 것들의 특수성과 차이를 제거하고 동일화하는 논리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본>에서 가치형태의 전개과정이 그것을 잘 보여고주고 있고 상품물신성 비판은 곧 동일성 논리를 비판하는 것이고요.
앞의 인용한 맑스의 글은 <자본> 2판 서문에 있는 글인데, 가치형태의 전개과정을 통해 맑스는 보편자가 개별자를 통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개별자가 보편자로 인해 그 존재를 인정받게 되는, 전도된 관계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입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옛날 생각이 좀 났습니다.
그런데 마르스는 아톰 이후에 나온 로봇 이름 아닌가요. 마르스 여동생이 우란이인데.
이봐요!!! 바쁘세요? 대답을 안하니까 다음 말을 못하겠잖아요. 우란이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꼬뮌은 헤겔의 이상이 맞아요. 그런데 헤겔이 살아있었을 때는 그것을 자본가나 노동자라는 식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현실에 있어야말이죠. 맑스는 사회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라는 두개의 적대적 진영으로 갈라져 있는 걸 봤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쓴거에요. 그건 그렇고 자본 2판 서문은 저도 지금 봤는데 여기서도 맑스가 말하는게 헤겔 변증법을 비판하는 것같진 않아요. 이를테면
"나의 변증법적 방법은 그 근본에서 헤겔의 그것과 다를 뿐 아니라 정반대다. 헤겔에게는 [그가 이념(Idee)이라는 명칭 하에 자립적 주체로까지 전환시키고 있는] 사고과정이 현실세계의 창조자고, 현실세계는 이념의 외부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는, 반대로, 관념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이 인간의 두뇌에 반영되어 사고의 형태로 변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이 소린 자기가 헤겔 변증법을 변형시켰다는 얘기잖아요.
"변증법이 헤겔의 수중에서 신비화되기는 했지만, 변증법의 일반적 운동형태를 포괄적으로 또 알아볼 수 있게 서술한 최초의 사람은 헤겔이다. 헤겔에게는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 신비한 껍질 속에 들어 있는 합리적인 알맹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로 세워야 한다."
외피가 그렇다는 것이고 알맹이는 똑같다는 얘기잖아요.
"변증법은 그 신비로운 형태로 독일에서 유행했다. 왜냐하면, 변증법이 현존하는 것을 찬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그 합리적인 형태에서는 부르주아지와 그 이론적 대변자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줄 뿐이다."
그러니까 이 소린 자기가 신비로운 외피를 벗겨내고 합리적인 형태로 변형시켜서 분노와 공포를 안겨주겠단 소리잖아요. 내가 보기엔 그게 그건데.
P.s. 껍데기가 왜 중요하냐구요. 알맹이가 중요하지.
감사합니다. 좋은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맑스가 <자본>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이런 거라고 생각해요. <자본> 1편과 2편은 내적모순과 외적모순의 상호 전화를 다루는 부분인데, 전 특히 가치형태의 전개과정이 동일성의 논리에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참 현대적인 주제인데 들뢰즈건 데리다건 다 이부분을 암시만 하고 비켜가요. 아니 비켜간다기보다 더 이론적(관념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말이 맞겠지요.
음, 하지만 전 이런 부분이 참 재미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전 다른 작업을 하고 있거든요. 웃기지요. 재미있는 건 안 하고 재미 없는 걸 한답니다.
그런데요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해도 자본은 다시 화폐로 전환하지 않나요. 맑스가 가변자본은 항상 자본가들의 손의 머무른다고 했잖아요. 가변자본은 화폐잖아요.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화폐를 주면 노동자는 그 화폐로 생활수단을 구입하고 화폐는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자본가에게 가잖아요. 노동자는 생활수단을 구입하고 남은 화폐를 은행에 보내는데 은행은 그 화폐를 자본가에게 보내잖아요. 결국 화폐의 운동은 시작도 자본가고 끝도 자본가고 그 결과 자본가의 손에 엄청난 화폐잖아요.
자본에 이렇게 써있어요. 화폐가 어떤 상품소유자의 수중으로부터 다른 상품소유자의 수중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화폐의 유통이라고 해요. 화폐의 유통은 동일한 과정의 끊임없는 단조로운 반복이에요. 여기서 화폐는 구매수단으로 기능해요. 이 과정을 보면 화폐가 노동력과 교환되면서 교환수단으로 기능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뒤에 가면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가 나와요. 구매자는 그 상품의 대가를 지불하기 전에 그 상품을 산다고 해요. 구매자는 채무자가 되고 이때 화폐는 지불수단이에요. 그런데 노동력의 가격은 정해져있지만 노동력은 노동을 통해서만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에 보통 한달치를 일하고 한달치를 받아요. 그러면 이 돈은 지불수단이죠. 그리고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가 발전하면 채무의 지불기일에 대비하기 위한 화폐축적이 필요하게 된다. 부르주아사회의 발전과 함께 지불수단의 준비금이라는 형태로서의 퇴장화폐는 증대한다고 해요. 퇴장화폐의 저수지는 화폐가 유통으로 흘러들어가고 유통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수로로 되며, 이리하여 유통하고 있는 화폐는 결코 그 유통수로에서 범람하지 않는다고 해요. 복잡한 얘기지만 결국 화폐-더 많은 화폐 이 운동을 생각하면 수많은 매개를 거쳐 화폐는 전사회적으로 유통되면서 모두 자본가의 손으로 흘러들어가요. 중요한건 은행이 뭐하는덴지 알아내야하는거죠. 포드가 뱅킹시스템을 알면 혁명이 일어날거라고 했어요. 좀 알아보세요. 전 별로 관심이 없어서.
다시 설명해드릴께요. 똑같은 파우더를 하나는 싸구려 용기에 담고, 하나는 비싼 용기에 담아서 앞에건 만원에 팔고 뒤에건 10만원에 팔았어요. 눈으로 보면 달라보여요. 하지만 써보면 똑같다는 걸 알게되요. 변증법은 유기적 전체기 때문에 그 전체를 다 이해해야 그 둘이 똑같다는걸 알 수 있을거에요. 헤겔 논리학하고 맑스 자본하고 방법적 원칙이 같다고 해요. 두개 다 안읽어봐서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래요.
우란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mars는 화성을 뜻합니다.
토탈리콜이랑 화성인침공 중에 어느게 좋으세요?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