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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7/05/09

어린이날 진보언론, 진보정당 유감

오세훈 서울시장이 보육, 아동 건강검진 등의 아동정책을 묶어 발표하면서 '여성이 살기 좋은 서울'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아이들이 살기 좋은 서울'이 아니고 '여성이 살기 좋은 서울'이다. 물론 서울은 여성도 살기 좋고 아이들도 살기 좋아야 한다.  하지만 아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여성으로 포장하는 것은 오세훈 시장의 아동정책이 '여성을 위한 아동정책'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으로 아동권에 대한 낮은 인식을 보여준다.

 

그런데 아동에 대한 낮은 인식은 진보정당, 진보언론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지난 5월5일 어린이날을 맞아 민주노동당은 여성위원회 주최로 여의도역에서 '국공립어린이집 확충' 선전을 했다. 당내 대선후보 3인 중 권영길 의원은 심상정 의원과 함께 아동환자를 방문했고, 노회찬 의원은 '초등학교 무상교육' 예산확보 방안을 제시했다. 심상정의원은 '아동안전 5대 제안'을 발표하면서 권영길 의원과 함께 병원을 방문했다. 당과 대선후보 3인이 아동관련 발언과 일정을 배치했다는 점에서 아동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식상하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같은 이전의 정책을 반복하는 것도 식상하고 어린이날이면 보건의료노조와 국회의원이 아동병원을 방문하는 것도 식상하다. 아동살해, 유괴, 성폭행, 학대, 빈곤, 결식, 아토피, 사교육 같은 어른들이 만든 이 사회의 모든 위험이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이 총체적 아동인권 말살의 상황에 대해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은 너무 둔감하다. 사실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것 같다.  '민생'과 '생활정치'를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거대담론, 남성중심의 정치의제에서 민주노동당도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진보언론이라고 이야기하는 레디앙은 어린이날  심상정과 노회찬 의원의 보도자료를 단신으로 보도했을 뿐이다.  물론 날이면 날마다 있는 무슨무슨 기념일마다 기획기사를 내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아동관련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고 어린이날 몇일전에 정부에서 발표한 '2006 아동학대 보고서'가 모든 국민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실을 감안할 때 레디앙이 좀더 적극적인 문제제기와 모색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레디앙에 대한 아쉬움은 어린이날 최순영 의원실에서 진행한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례 증언대회'를 기사화하지 않은 것에도 있다.  최순영 의원실에서 진행한 증언대회는 어린이집에서 일어나는 파렴치한 아동 폭행, 학대, 성폭행 사례를 부모들이 직접 참석해 증언하는 행사였다. 그동안 어린이집의 아동학대 사례는 끊임없이 발생함에도 그 문제제기가 인터넷을 통한 선정성, 한탕주의 기사가 다였다. 이런 점에서 이번 보고대회는 당사자인 부모가 직접 참석해 문제를 고발하고 이에 대한 규제방안을 국회와 사회에 촉구하는 의미있는 행사였다. 아동학대의 실태를 드러냄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출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국회와 정치의 역할이 국민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해결하는 것이라고 할 때 피해아동 부모의 울분의 목소리를 국회에 담아낸 최순영 의원실의 이번 어린이날 사업은 매해 반복되는 당의 다른 이벤트보다 훨씬 의미있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민주노동당의 사업들을 소상히 전하는 레디앙이 왜 이 보고대회는 전하지 않았을까? 어린이날 진보진영이 같이 고민해봐야할 의제를 던지기 보다 레디앙은 '노-무상교육', '심-무상의료'라는 정치구도를 만들어내는데 더 열중했다. '안전'을 던진 심상정 의원의 정책제안을 '무상의료'로 오역하면서.

 

아동문제에 접근하는 민주노동당의 방식과 내용은 무엇일까?  '표'가 없다고 언제까지 무시할 것인가? 보수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아동정책을 '여성(남성은 빼고)'정책으로만 둘 것인가? 강자가 아닌 약자의 입장에서, 어른들이 아닌 아이들을 위한 아동정책이 진심으로 고민되어야 한다. 빈곤, 학대, 건강한 성장.... 수많은 문제에 대한 답을 고민해야 한다. 내년 어린이날에는 아이들이 있는 어린이날 행사를 기대해본다. 권영길 의원이 초등학생들을 국회로 초청해 '초등학생들이 바라보는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 이것만은 해줘'라는 주제로 이야기 한판을 벌여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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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밥과돈의 현실주의'로 '냅둬' 철학 극복해야.

  

"내버려두라"하면서 "해야한다"는 모순

[밥&돈.2]'밥과돈의 현실주의'로 '냅둬' 철학 극복해야.

 

2007.5.9   프레시안

 

 

  "경제가 잘 굴러가게 하는 최상의 방법은 시장의 행위자들을 내버려 두는 것이다. 따라서 최상의 경제 정책은 시장에 대한 모든 규제를 없애는 것이다."
  
  지난 200년 간 경제학자들은 이런 '자유방임주의' 경제원칙에 근거해,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정책으로부터 추상적이고 거시적인 세계관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숱한 책과 논문들을 쏟아냈다. 이제 이런 책과 논문들은 대학 도서관과 지식인들의 카페와 정부 경제부처들을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 많이 쌓였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의 세상에서 자유방임주의 경제원칙은 경제학에 대한 기초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심해마지 않는 절대 진리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시장'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지혜와 능력을 짜내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모임으로 성립된 곳이다. 그래서 이런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하다면 도덕, 전통 또는 관습의 제약을 넘어서는 것이 무제한 허용된다.
  
  이를 두고 누구는 "혼란"이니 "정신적 동물계"니 비판하면서 군기를 잡으려 들지만, 이렇게 정글처럼 보이는 북새통이야말로 시장이 자유와 효율성을 담보하는 장으로 기능할 수 있는 위대성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가슴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일들, 이를테면 인건비 몇 푼을 아끼자고 몇 년간 한솥밥 먹으며 일한 직원들 수백 명을 모조리 해고해 용역회사의 날품팔이로 만든 후 이들과 재계약을 맺는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것이 살인과 같은 극악한 인륜 파괴가 아니라면,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장이 살아나고, 종국에는 사회 전체가 살아나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돈이라는 우주의 척도"를 구현하기 원하는가?
  
  문제는 이런 자유방임주의 경제원칙에 치명적인 논리적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내버려두라'는 말은 경제정책의 독트린이 될 수 없다. '내버려두도록 정책을 펴라'는 주장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 '부조리(absurdity)'이기 때문이다.
  
  길거리에 거지들이 그득한데 그들이 기대어 선 백화점 건물 안에는 몇 백만 원에서 몇 천만 원을 호가하는 사치품들이 진열돼 있다. 이것은 그냥 '내버려두어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경제체제를 작동시키기 위한 국민들의 활동이나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노동조합의 활동은 어떤가? 이런 것들도 국민들과 노동자들이 "살인 같은 인륜 파괴가 아닌" 범위 내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각자의 지혜를 짜내"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그러니 이것들도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할 대상이 아닌가?
  
  그런데 '모든 것을 내버려두라'던 자유방임주의 경제원칙은 국가 규제나 노동조합의 활동에 대해서만큼은 유독 '적극적으로 개입해 철폐하거나 억압해야 한다'는 정반대의 원리로 탈바꿈한다!
  
  이 패러독스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내버려두라'는 원칙을 정책 원리라고 우길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논리적 모순의 발현이다.
  
  '내버려두라'는 철학을 가장 잘 체현하고 있는 것은 개(犬)들과 이들을 스승으로 삼은 그리스 견유주의자들이다. 그들이 언제 온 세상을 들쑤시고 다니며 "이것을 철폐하라"거나 "저것을 금지하라"고 핏대를 세우던가. 그들은 그저 주어진 대로의 세상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뿐이다.
  
  이는 복잡한 정치·사회 문제에 끼어들지 않고 그저 자기 앞가림이나 잘 하고 돈벌이에 골몰하는, 대다수의 우리 서민 '속물들'이 이미 몸소 실천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내버려두라'고 믿는 이들이 어째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자', '이것을 금지하자', '저것을 철폐하자'는 주장을 끝도 없이 쏟아내는 것일까. 왜 노동자 파업은 '하지 말라'고 하면서,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자유무역협정(FTA)을 '하자'고 하는 것일까?
  
  내버려두라는 그들은 정작 왜 그리 말이 많은가? '내버려두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건 대체 무슨 말장난인가? 이쯤 되면 이런 말장난을 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개들이 지향하는 '모든 것이 그대로 내버려두어진 상태'가 아니라 '대단히 독특한 어떤 질서'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미국의 소설가 아인 란드가 일찍이 그려냈던 바, 그 질서는 "돈이라고 하는 우주의 척도"에 따라 만물과 만사가 줄을 서는 세상이다. 이 세상에서는 노조가 금지되고, 기업은 완전한 영리활동의 자유를 누리고, 금융은 수익성만을 좇아 어디로든 오갈 수 있고, 부자는 높은 세금을 물어야 할 일이 없다.
  
  그러면 '낫'을 '낫'이라고 부를 일이지, 즉 '돈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자'고 솔직하게 말할 것이지, 왜 사람 헷갈리게 '자유방임' 같은 복잡한 말로 신비화하려 드는가.
  
  "개량보다는 굶주림이 낫다"?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끝도 없이 지적하는 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규제 등을 통해 자본의 횡포를 일부 막는다고 해서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곤 했다.
  
  '화폐'를 통한 상품의 교환, 이를 통해 화폐가 스스로 증식하는 '자본'으로 변하게 돼 있는, 그래서 인간과 자연이 모두 상품으로 변해 돈 가진 자에 의해 한없이 휘둘리게 돼 있는 이 체제의 작동원리가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저런 '개량적'인 정책으로 이런 모순을 은폐하는 것은 기만일 뿐이며, 피억압 민중들이 근본적이고도 혁명적인 체제 타파를 위해 행동하는 것만이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내 주변만 하더라도, 보이느니 하루의 노동에 때 묻고 지친 사람들이요 들리느니 고달픈 살림살이에 찌든 이야기일 때가 많다. 그러니 그 친구의 이야기에 짐짓 귀가 기울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 친구가 항상 언급하는 "근본적이고도 혁명적인 체제 타파"는 언제쯤 가능한 것인가?
  
  서민과 농민과 노동자들, 즉 피억압 민중들이 체제의 모순을 각성하고 다 같이 일어설 때에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런 각성의 순간이 올 때까지 그들은 지금처럼 계속 고달프게 굶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혁명적인 체제 타파 이외에, '바로 지금, 바로 여기'의 상황을 개선할만한 노력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놀랍게도 그 친구는 아직도 "개량보다는 굶는 쪽이 낫다"고 한다. 쓸데없이 개량을 시도하면 민중들의 계급의식만 무뎌진다는 것이다. 그는 요새는 아예 "차라리 끔찍한 경제공황, 즉 자본주의의 위기를 기다리자"고 말하기도 한다. 그 편이 사람들이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깨달을 때까지 겪어야 할 고통의 시간을 줄여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경제공황이 벌어지면 무너지는 가정은 누구의 가정인가? 직장을 잃게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로 인한 고통은 얼마나 오래 갈까? 이런 질문들은 그의 안중엔 없는 것 같다.
  
  그 친구의 주장을 처음 들은 지도 어언 20년이 지났다. 그 기간 동안 우리에게는 세계화, 외환위기, FTA 등 파란만장한 사건들이 지나갔다. 그 와중에 숱한 사람들이 노숙자나 졸부가 되었고, 이혼이나 실직을 당하기도 했다. 나는 종종 그가 이런 사람들의 '하찮은' 고통에 일말의 관심이나 있는지 궁금해지곤 한다.
  
  '밥과 돈'은 현실주의를 갈망한다
  
  일본의 소설가 시바료타로는 태평양전쟁 당시 전차병이었다고 한다. 일왕의 항복 선언으로 패전을 맞게 된 순간, 그가 느낀 것은 일본 지배층들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였다.
  
  '팔굉일우'가 어쩌고 '신무천황의 자손'이 어쩌고 하는, 온갖 요설과 망상과 수사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도 모르고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숱한 사람들이 희생됐으며, 그렇게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난 결과는 패전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 "입만 살아 있는" 엘리트들에 비해, 시바료타로가 뼈아프게 아쉬워했던 것은 "현실주의"였다. 그것도 탱크의 묵직한 중량감이 대표하는, 질량과 속도와 에너지와 화력으로 이뤄진 "전차병의 현실주의"였다.
  
  그래서 그 전차병은 나이가 들어 문필가로서의 경륜이 깊어질수록, 허위와 착각의 광상으로 얼룩진 소화 시절의 일본을 넘어서서, "전차병의 현실주의"로 차근차근 나라를 건설해 마침내 러일전쟁의 승리를 이루었던 그 옛날 명치 시절의 일본을 그리워하게 됐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전차도 그다지 현실적인 물건은 아니다. '최소인원으로 최대살상'이라는 전쟁의 논리는 초현실적인 상황의 산물이다. 그러니 "전차병의 현실주의"가 찾아낸 이상이 고작 "백인들과 맞장을 뜨겠다"고 전 국민들을 몰아치던 명치 시절의 국가주의로 귀결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탱크보다 전쟁보다 국가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밥과 돈"이다. 탱크, 전쟁, 국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또 이런 것들로 인해 이익보다는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더 많다.
  
  하지만 밥과 돈을 필요로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자유무역을 통한 경제성장과 도시인의 편익 증대를 운운하며 한미 FTA를 찬양하는 사람들 가운데 미국산 쇠고기와 유전자조작(GM) 농산물을 매일 주식으로 먹겠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또한, 자본주의를 성토하면서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경제를 외치는 사람들 중에 철저하게 화폐경제와 단절돼 간디처럼 '물레 돌려 옷 지어 입는' 사람을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
  
  우리들 대다수에게 있어서, '밥과 돈'은 '변소와 손톱깎기'처럼 좋든 싫든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래서 밥과 돈의 문제는 탱크보다 훨씬 더 절실하게 현실주의를 갈망한다.
  
  'IMF 위기 터널' 다음엔 'FTA 터널'?
  
  1997년 외환위기 이래로 10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이 '밥과 돈'에 대한 이야기가 점점 더 경제 담론의 중심을 파고 들어왔다. 그런데 그런 담론들 가운데 진정으로 '밥과 돈의 투박한 현실주의'에 철두철미했던 이야기는 얼마나 있었나.
  
  '경제성장'이나 '경쟁력 강화'와 같은 구호, 혹은 주문(呪文)을 몇 천만 명이 함께 외쳐대면 밥도 돈도 다 해결된다는 식의 이야기가 마치 논박불능의 과학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수언론과 주류 학자들과 보수 정치인들의 입을 통해 전파되고 있다.
  
  그런데 "몇 년 만 참으면 밥도 돈도 다 해결될 것"이라던 약속, 외환위기 이후 '그들'이 금융체제를 마음대로 변화시키고 정리해고 등 온갖 엄혹한 조치를 취하면서 우리를 무마했던 그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우리가 지난 10년간 헤메 온 어두운 터널의 출구는 아직 먼빛으로나마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은 지난 10년의 부도수표에 대한 해명을 내놓기는커녕 이제 '동시다발적인 FTA'라는 또 하나의 어두운 터널로 우리들을 몰아세우고 있다.
  
  이번에는 그 흔해빠진 장밋빛 통계수치조차 제대로 내놓지 않고, 근거도 논리도 박약한 "서비스산업의 업그레이드"이니 "금융강국으로의 발전"이니 하는 현란한 수사를 동원한다. 급기야는 "광개토대왕의 후예니까 괜찮아"라는 영화 제목과 같은 말까지 내놓는다.
  
  'IMF 외환위기 10년'이라는 터널을 지나 이제 '동시다발적인 FTA'라는 새로운 터널을 앞에 둔 지금의 한국경제는 분명히 기로에 서있다.
  
  이럴 때 가장 절실한 것은 소리 높여 구호를 외치고 깃발을 흔들어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발밑의 지형지물부터 차분하게 둘러보는 것이 아닐까. 즉, '밥과 돈의 현실주의'가 필요한 게 아닐까.
  
  책임 있는 가장이라면 누구도 몇 마디 그럴듯한 말들에 현혹돼 가산을 모조리 어딘가에 '올인'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가장의 현실주의, 즉 '내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배우게 하려는 데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소박한 질문과 나지막한 대답이 지금 절실하다.

   
 
  홍기빈/국제정치경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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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진보구정감사 보고서를 내며

[2006년 진보구정감사 보고서를 내며]



민주노동당 서울시당이 2006년 한 해 동안 25개 지역위원회와 함께 진행한 진보구정감사의 결과를 「진보구감 보고서」로 묶어서 내게 되었습니다. 이 보고서를 통해 더 많은 서울시당 당원들과 진보구정감사의 내용을 공유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울러 다른 지역 당부에도 서울시당의 사례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보고서는 서울시당 소속 지역위원회의 당직자와 당원들이 발로 뛰면서 만든 현장 보고서입니다. 몇 명의 정책전문가가 만든 보고서가 아닌 25개 지역위원회의 조직적 활동의 결과물이며, 지역에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공부하고 투쟁한 결과입니다. 서울시당의 진보구정감사 사업과 보고서는 이런 점에서 남다른 의의가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은 지역정치를 바꾸기 위한 한국 정치사 사상 최초의 실험을 지역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수 십 년 동안 견제 받지 않고 권력을 나눠 먹어온 ‘그들만의 정치’를 ‘우리의 정치’로 바꾸는 것입니다. 2005년부터 시작된 진보구정감사는 그간 보수․토호 세력들에 의해 독점되어온 지역정보를 공개함으로써 그 자체로 주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고 잘못된 지역정치를 바꾸는데 기여해왔습니다. 2005년 성북지역위원회의 구청장 업무추진비 공개와 문제점 지적, 2006년 서울시구청장협의회의 행정정보공개 거부에 대한 투쟁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진보구정감사는 보수지역정치의 문제를 폭로하는 것을 넘어 진보적 대안을 제시하고 그 가치와 노선을 지역에서 실현하기 위한 실험으로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보고서에 담긴 자치행정, 보건복지, 아동․보육 각 분야의 진보적 대안들과 이들 지역의제를 중심으로 한 지역사업이 그 예입니다.

2003년 진보국감, 2004년 서울시당의 진보시감에 이어, 2005년 서울시당의 10여개 지역위원회가 참가한 진보구정감사는 2006년 서울시당 대부분의 지역위원회가 참여하는 지역사업의 모범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서울시당에서 부터 시작된 구정감사가 2007년부터는 중앙당 차원에서 전국적인 ‘행정사무감사’로 준비되고 있다고 합니다. 진보구정감사가 전국화되는 것과 함께 이 사업이 중앙당-광역시도당-지역위원회의 유기적 연계 속에 기획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렇게 될 때만이 일회적인 구정감사가 아니라 일상적인 지역사업과 연계되는, 그리고 지역을 바꾸는 ‘구정감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이 보고서가 나오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신 지역위원회 당직자, 당원 동지들게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전합니다. 민주노동당이 앞장서 서울을 바꾸고 세상을 바꿉시다.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진보구감 보고서 인사말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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