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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85년 6월 구로동맹파업

구로동맹파업 20주년 기념 특별기획
다시 읽는 85년 6월 구로동맹파업

노조간부 구속으로 촉발…일주일 동안 구로지역 들불처럼 확산

“노동자를 영원히 노예로 부리려는 독재정권과는 한 치의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8백만 노동자가 민주노동운동의 깃발아래 모이는 그날까지 선봉에 서서 굽힘없이 싸워나갈 것을 선언한다. … 노동자를 탄압하는 폭력정권은 물러가라!”

85년 6월 24일 구로동맹파업으로 해고된 노조원들이 7월23일 가리봉 오거리에서 ‘노동자 연대투쟁 선언-노동운동 말살정책을 분쇄하자’는 선언문 중 일부다. 한국전쟁 이후의 최초의 ‘노동자 연대투쟁’에 더해 구로동맹 파업은 ‘정치성’을 분명히 드러냈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폭압정치에서 유화국면으로

당시 상황을 먼저 들여다보자. 전두환의 폭압정치가 1983년말부터 이른바 유화국면에 접어든다. 노동운동에는 더할 나위 없는 부활의 시기였다. ‘블랙리스트’ 때문에 수년간 취업을 원천봉쇄당하고 있던 해고노동자들은 84년 1월 ‘블랙리스트철폐대책위원회’를 결성해 블랙리스트 철폐투쟁을 펼쳐나갔다. 또 3월에는 ‘기업별 노조운동의 한계 극복’을 목표로 내걸고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이하 ‘노복’)가 창립된다. 전 원풍모방 노조위원장 방용석(현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을 비롯 70년대 민주노조 간부들이 주축이 된 ‘노복’은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높이기 위한 각종 교육사업과 노동법 개정투쟁을 전개했다.

노동현장에서도 그동안 억눌렸던 요구가 폭발적인 형태로 터져 나왔다. 84년 5월 대구지역 택시 노동자 1천여명이 사납금, 부제 완화, 노조결성 방해 중지를 요구하며 시내 중심가에서 격렬한 차량시위를 벌였다. 택시 노동자들의 투쟁은 삽시간에 부산, 경북 경산, 대전, 서울, 강원 강릉 등지로 번져나갔다.

한편 청계피복 노동자들은 노조 복구투쟁을 본격화했다. 5월1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합법성에 관한 공개토론회’를 개최한 데 이어 9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3차례 합법성 쟁취대회를 열었다. 이런 가운데 구로공단을 비롯한 경인지역 사업장에서는 노조를 결성하거나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려는 활동들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80년대 중반 구로지역은 대부분의 업체가 수출을 위한 경공업제품을 생산하던 곳으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 관리직과의 차별 대우 등이 극심했다. 이들은 비슷한 근로조건과 노조결성 시기 등으로 인해 조합 간부는 물론 조합원간의 연대 프로그램을 통해 교류와 연대를 강화해 왔다. 85년 임금인상 투쟁시도 상호교류를 통해 이러한 연대는 지속된다.

당시 사건 일지

85 04.10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 결성
85.06.01 구로지역노조민주화추진연합’(구민련) 결성
85.06.22 대우어패럴 노조 집행부 김준용(위원장), 강명자(사무장), 추재숙(여성부장) 경찰에 연행
85.06.23 대우어패럴, 가리봉전자, 효성물산, 선일섬유 노조 동맹파업 결의
85.06.24~29 대우어패럴 파업
85.06.24~26 효성물산 파업
85.06.24~27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파업
85.6.25~26일 남성전기, 세진전자, 롬코리아 준법농
85.06.27~28 삼성제약 중식거부
85.06.28 부흥사 파업
85.06.29 대우어패럴 농성 강제해산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구속으로 촉발

‘구로동맹파업’의 결정적 계기는 대우어패럴 노조간부들에 대한 경찰의 구속조처였다. 1985년 6월 22일 오전 11시. 경찰이 대우어패럴 노조사무실로 찾아와 김준용 위원장, 강명자 사무국장, 추재숙 여성부장 등 3명을 연행했다. 경찰은 4월의 임금인상 투쟁 때 파업농성을 주도하며 노동쟁의조정법과 집회및시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이들을 구속했다. 조합간부 8명도 불구속 입건됐다.

‘구로동맹파업’의 결정적 계기인 대우어패럴 노조간부들에 대한 경찰의 구속조처였다. 전두환 정권이 노동운동을 다시 강력하게 탄압하려는 신호탄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함께 연대했던 노동조합들에게 ‘위기’ 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이미 대우어패럴 이외의 타 노조간부들에게도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6월 23일 조합간부 3명이 구속된 것에 항의하며 파업농성에 돌입한 대우어패럴 노동자들. 6월 26일 현재 물 한 모금, 음식 한 끼 못 먹고 농성을 벌였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위원장 연행 소식을 전해들은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작업을 중단하고 1백여명이 총무과로 몰려가 고발 취소를 요구하는 농성을 전개한다. 다음 날인 23일 대우어패럴 외에 가리봉전자, 효성물산, 선일섬유, 청계피복 등 노조간부 2백여명은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24일부터 동맹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한다.


▲ 6월 24일 오후 2시 효성물산 조합원 400여명은 2층 작업장에 모여 파업농성에 들어갔다. 이들 역시 창문에 ‘노동3권 보장하라’ ‘민주노조 탄압말라’는 벽보를 붙이고 플래카드를 내걸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24일 오전 8시 경 대우어패럴 노동자 350여명의 파업을 신호로 오후 2시 효성물산 노조원 4백여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같은 시간 가리봉전자 노조원 5백여명, 선일섬유 노조원 70여 명 등도 파업에 돌입한다. 이들은 ‘구속된 김준용 위원장 등 노조간부의 석방과 노조탄압 중지’를 요구하고 나아가 ‘노동악법 폐지하라’, ‘폭력경찰 물러가라’ 등을 주장했다.


▲ 대우어패럴 농성시위를 탄압한데 항의하며 노동자, 학생들이 6월 24일 여의도에서 기습 가두투쟁을 벌였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이러한 노동자의 투쟁에 대해 회사측은 단전과 단수 조처를 단행했으며 경찰은 이들 공장 일대를 철통같이 경계했다. 공단 일대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6월 25일 남성전기 조합원 3백여 명이 오후에 농성을 벌이고 세진전자 노조원 250여명, 롬코리아 1백여명이 지지 철야농성을 하는 등 연대투쟁은 7개 업체로 확산된다.


▲ 서울 중부지방노동사무소에서 농성을 벌였던 노동자들이 경찰에 의해 끌려나오고 있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에 학생 및 재야의 지지도 이어졌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등 22개 단체에서 지지 농성이 있었고, 26일 오후에는 서울대생 2명이 ‘구속노동자 석방’을 요구하며 대우어패럴 맞은 편 협동봉제 공장에 올라가 지지 구호를 외치는 등 학생들의 지지 시위가 있었다. 27일에는 효성물산 80여명과 청계 노조 조합원이 노동부 중부지방사무소에 몰려가 노동부장관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탈진, 실신…강제해산, 대규모 해고


▲ 창문에 걸터앉아 구호를 외치고 있는 대우어패럴 농성 노동자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경찰들의 공포 분위기 조성과 음식물 차단으로 인한 조합원들의 탈진과 실신 그리고 병원후송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대우어패럴 농성시위대는 1백여명으로 줄어든다. 효성물산과 선일섬유 노조는 26일 밤에 농성을 풀었고, 가리봉전자는 27일 관리직 남자 사원들에 의해 강제 해산 당했다. 6월 28일에는 부흥사노조원 120여명이 연대파업에 돌입했으나 쇠파이프와 몽둥이로 무장한 관리자와 남성사원들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해 80여명이 강제사직서를 쓰는 등의 탄압이 계속되었다.

대우어패럴에서는 노사간 협상이 6월 28일 있었으나 보복조치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달라는 노조의 요구를 회사가 거절함으로써 30분 만에 결렬된다. 마침내 6월 29일, 물도 끊기고 전기도 끊긴 상태에서 굶주리며 버티던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작업장 벽을 뚫고 진입한 관리자와 구사대들에 의해 강제해산당하면서 막을 내렸다.

동맹파업과 이를 지지하는 농성·시위 과정에서 모두 43명이 구속되고, 연인원 370명이 구류를 살았으며, 7백여명이 강제로 사표를 쓰거나 해고당했다.


▲ 6월 27일 노동부장관 면담을 요구하며 노동부 서울중부지방사무소에서 항의 농성하던 효성물산과 청계피복노동자들 중 한 명의 노동자가 허리를 다쳐 실신상태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김영미 효성물산 전 위원장은 “구속 후 1심서 풀려난 노동자들은 운동지도부가 궤멸되고 동지들이 흩어지면서 자연스레 운동을 이어갈 수 없었다”며 “결혼 전후로는 보수적인 남편과 집안에 노동운동 경험을 얘기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학생구속자가 없는 것과 관련 “공장에 8명의 학생들이 있었지만 노동자들이 보호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며 “경찰서에서도 배후조정 추궁이 있었지만 끝내 학생들이 앞장서 활동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학생들 가운데 ‘작은책’ 발행인이었던 강순옥씨 등이 있었다.


▲ 6월 28일 윤순녀, 이창복 등 민주, 민권운동단체들이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구로공단 노동자 연대 투쟁 탄압분쇄’ 연대농성 투쟁에 돌입했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부흥사의 안경환 전 조합원은 “심상정, 공계진, 문성현, 김영대 등 몇몇 당 활동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90년 이후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며 “바람직 한 것은 노동 등 각계에 층층이 쌓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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