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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불임금 지급 요구하던 건설노동자 폭행당해 숨져

체불임금 지급 요구하던 건설노동자 폭행당해 숨져

강릉시 건설현장에서 4개월 간 수억 원 임금 체불

최인희 기자 flyhigh@jinbo.net / 2008년03월25일 13시39분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일용직 노동자가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다 현장소장이 휘두른 둔기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강원도 강릉시 포남동 H오피스텔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이모 씨는 4개월째 임금이 지급되지 않자 지난 21일 동료 20여 명과 함께 시공업체인 D건설 현장소장을 찾아가 임금 체불에 대해 항의하고, 3개월치 임금 450여 만원의 지급을 요구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현장소장 김 모씨가 강릉시 경포동에 있는 건설노동자 숙소까지 찾아와 이 씨를 폭행, 죽음에 이르게 한 것.

 

이 씨는 현장소장이 휘두른 스탠드형 옷걸이에 가슴과 옆구리 등을 가격당해 갈비뼈가 부러졌고, 춘천 한림성심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24일 오전 장기 파열과 과다출혈로 숨졌다.

 

문제가 된 건설현장에서는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건설일용노동자 40여 명에 대해 총 2억여 원의 임금을 체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측은 전국건설노동조합과 협의를 벌여 3월 20일까지 임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으나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강릉경찰서는 현장소장 김모 씨를 붙잡아 상해치사 혐의로 입건하고, 정확한 사인 규명을 위해 25일 이 씨의 시신을 부검한 후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

 

민주노총 강원지역본부와 건설노조 강원건설기계지부 등은 긴급 대책회의를 열어 진상조사와 강도높은 처벌, 특별근로감독을 요구하는 등 적극 대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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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입점 수수료 ‘거품’…소비자 부담

백화점 입점 수수료 ‘거품’…소비자 부담

<이 백화점이 입점업체로부터 떼는 여성복 브랜드의 수수료는 판매액의 37% 수준입니다.

 

결국 입점업체가 10만 원짜리 옷을 팔면 백화점 측에 3만7천 원을 떼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터뷰>입점업체 관계자 : "37% 넘어가 버리면 업체가 힘들어지더라고요. 더 이상 오르면 업체를 운영할 수 있는 여력이 안 되거든요."

 

여성복의 경우 지난 2000년 초까지만 해도 백화점 수수료는 많아야 30%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10년도 안 돼 수수료가 7% 올랐습니다.

 

인터넷 장터의 평균 수수료 7%는 물론 대형마트의 평균 수수료 20%과 비교해도 지나치게 높아진 것입니다.

 

이렇게 수수료가 대폭 인상된 것은 유통 강자인 백화점의 일방통행식 인상 요구 때문입니다.

 

백화점들은 거의 해마다, 짧게는 6개월마다 수수료를 올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입점업체 관계자 : "적게는 1~2%, 많게는 2~4%씩 올려달라고 해요. 사정사정해서 겨우 절반으로 깍기도 해요. 올려달라고 하면 거의 따라가야죠. 합의 안 되면 바로 내쫓기는 거니까요."

 

백화점 간의 자존심 경쟁 때문에도 수수료가 올라갑니다.

 

<인터뷰> 입점업체 관계자 : "롯데가 더 받으면 현대는 우리도 같이 받아야 된다고 올리고, 현대가 올리면 롯데도 우리가 어떻게 현대보다 더 적게 받느냐고 또 올리죠. 그러면 악순환이에요."

 

하지만 백화점들은 해외 명품 브랜드에 대해서는 수수료에 특혜를 주고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해외 명품 브랜드의 수수료는 국내 브랜드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해외 명품 브랜드는 국내 업체와는 달리 인테리어비용도 부담하지 않고 매장도 가장 좋은 위치를 차지합니다.

 

<인터뷰> 이봉의(서울대 법대 교수) : "국내 입점업체가 그에 비해서 현저히 높은 수준의 수수료 부담하고 있다면 공정거래법상 부당한 차별 취급에 해당될 소지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문제는 지나치게 높게 책정된 수수료 가운데 상당액이 옷값에 반영돼 소비자 부담으로 돌아온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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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산업 규모 GDP의 1% 수준

광고산업 규모 GDP의 1% 수준

국내 광고 산업의 규모가 GDP 즉 국내 총생산의 1%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문화부가 발표한 광고 산업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06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광고산업 규모는 9조1천억 원으로 국내총생산의 1.07%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이같은 광고 산업 규모는 전년도에 비해 금액상으론 8%가량 성장했지만 관련 회사는 2%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밖에 올해 광고경기 전망지수는 광고업체는 109,광고주는 107로 나타나는 등 모두 100을 넘어 전반적으로 좋을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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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제국주의의 사악한 역사 -다함께 펌

미 제국주의의 사악한 역사
조성민
19세기 말 한줌의 유럽 열강은 자기들끼리 세계를 분할했다. 미국이 그 과정에 뒤늦게 참가했기 때문에 미국의 지배자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벌충하기 위해 신속하게 행동했다. 미국이 첫 번째 목표로 삼았던 것은 중남미였다. 미국의 주요 평론가들은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유럽의 식민지가 됐듯이 남아메리카는 북아메리카의 것이 돼야 한다." 즉 그들의 결론은 그 곳이 자신들의 제3세계라는 것이었다.1)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인 1889년 미국 지배자들은 가장 힘이 '약한' 유럽 식민 열강이었던 스페인과 전쟁을 벌였다.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에서는 스페인 지배에 저항하는 민중 반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던 터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 매킨리는 자신들의 개입이 스페인에 맞서는 쿠바의 민중 반란을 지지하기 위한 것인 양 말했다.
그러나 미국이 스페인에 승리한 이후에도 쿠바에 자유는 오지 않았다. 미국은 1959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쿠바에 계속해서 독재정권들을 세웠다. 미국은 거듭 해병대를 파병해 자국 설탕 회사들의 이윤이 위협당하는 일을 막았다.
쿠바 점령 이후 미국은 제국주의를 향한 길을 밟아 왔다. 마침내 미국은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 최고의 초강대국으로 떠올랐다. 최근만 해도 미국은 나토의 세르비아 폭격을 주도했고, 이라크를 공습했으며, 수단에 미사일을 퍼부었다. 한반도 역시 미국에 의해 1990년대에만 두 차례의 전쟁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미국은 언제나 이런 공격을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는 말로 치장한다. 그러나 미국은 자신의 이윤과 패권을 위해 전쟁을 일으켜왔을 뿐이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군사 개입을 주도했던 미군 장교 스메들리 버틀러는 그가 실제로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한 바 있다.
 
"나는 현역 해병대원으로서 34년을 보냈다. 그 시기 동안 나는 대기업과 월 스트리트와 은행가들을 위한 고급 깡패로 내 인생 대부분을 보냈다."
"한마디로 나는 자본주의의 해결사였다."
"나는 1914년에 미국의 석유 기업을 위해 멕시코가 안전한 곳이 되도록 만드는 데 일조했다. 나는 아이티와 쿠바를 씨티 은행이 수익을 긁어모으기 괜찮은 곳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나는 1909∼1912년에 브라운 브라더스 국제은행을 위해 니카라과에 평화를 확립하는 데 일조했다."
"나는 1916년에 미국 설탕 기업을 위해 도미니카 공화국을 흔들었다. 나는 1903년에 미국 과일 회사들을 위해 온두라스를 '정상화'하는 데 일조했다."
 
미국이 다른 나라에 개입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미국 자본의 이윤을 위해서이다. 한 국가에서라도 자신들의 이윤이 침해당할 처지에 놓이면 미국은 서슴지 않고 무력을 사용해 왔다.
둘째, 미국 자본이 거의 진출해있지 않은 후진 국가라 하더라도 그 국가에서 좌파 정부가 집권하게 된다면 도미노 현상처럼 인근 국가로 파급될 위험이 있다. 바로 그럴 때 미국은 그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그라나다와 같이 인구가 10만 정도밖에 안되는, 지도상에서도 찾기 힘들 정도로 조그만 나라에까지 미국은 침공했다.
셋째, 다른 제국주의 국가가 미국을 배제하고 독자적인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가려 할 때 미국은 특정 나라를 희생양 삼아 군사 행동을 저질러 왔다. 지난해 세르비아에 대한 공습은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힘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북한에 대한 전쟁 위협도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한 것이었다.
 
나는 이 글에서 미 제국주의에 대해서만 언급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 홀로 제국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프랑스·독일·소련·중국·일본 등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이 있고 그들 역시 모두 악행을 저질러 왔다. 다만 미 제국주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잔인한 행동을 일삼아 왔다는 점에서 나는 미국을 제국주의자들의 사악한 범죄를 폭로하는 대표 사례로 들추어 내고자 한다.
 
니카라과
 
중남미는 미국과 같은 대륙에 속해 있기 때문에 미국의 침략을 가장 많이 당했던 지역이다. 중남미 대부분의 나라들이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 때문에 희생됐다.
니카라과에서 미군은 세 차례에 걸쳐 반미 정부를 전복했고 장기간의 가차없는 탄압 통치를 자행했다. 미국이 두 번째로 반미 정부를 정복한 이후 세워진 소모사 정권은 잔혹한 독재로 유명했다. 그는 야당 인사들을 암살하고 자유주의 언론조차 파괴했으며 게릴라 투쟁을 벌이던 산디니스타 전사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1979년 소모사가 타도되기 직전 그는 산디니스타와 전쟁을 하면서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구아의 민간 거주지역을 폭격해 수만 명을 참살하는 대규모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2) 그의 일가족은 니카라과 산업 대부분의 실질적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 충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로즈벨트는 소모사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개새끼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개새끼(Our son of bitch)이다."
산디니스타가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자 미국은 우익 군사집단인 콘트라 반군을 후원했다. "미국이 콘트라에게 지원한 만큼, 아니 그 반의 반만큼이라도 비슷한 자원을 가졌던 게릴라 부대는 없었다. 그 정도의 자원이라면 미국에서라도 산악 지역에서 게릴라 반란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3)
1990년 2월 니카라과에서 자유 선거가 실시되자 우익인 비올레타 차모로는 "산디니스타가 계속 집권하면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라는 협박인지 선거 운동인지 모를 말을 해대고 다녔다. 그녀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고립된 니카라과에서 미국은 산디니스타 정부를 제거하고 친미 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다.
 
과테말라
 
미국의 군사 개입과 대기업 이윤 사이의 관련은 중미 국가인 과테말라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1944년 과테말라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민족주의적인 정부가 수립됐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미국의 다국적기업인 유나이티드 프루트 사는 200만 제곱 킬로미터가 넘는 과테말라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회사가 토지의 85퍼센트를 놀리는 동안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주 적은 경작지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아예 경작지를 갖지 못했다.
과테말라 정부는 토지 국유화 강령을 내세웠다. 그것은 유나이티드 프루트 사의 이윤에 커다란 위협이 됐다. 1952년도 CIA의 비망록은 "외국의 경제 이해, 특히 유나이티드 프루투 사에 대한 박해"를 포함한 민주 자본주의 정부의 "과격한 민족주의적 정책"이 "거의 모든 과테말라 국민들로부터 지지나 묵인을 받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4)
CIA는 정부를 전복시키기로 마음먹었다.
1954년 과테말라에서는 미국의 원조를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그 이후 테러가 저질러졌고 과테말라는 지옥과도 같은 상황이 됐다. 쿠데타 이후 2달만에 8천여 명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살해당했다. 학살은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미국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과테말라 정부는 1980년대 초반에도 수만 명의 과테말라 민중들을 도살했다. 그 밖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과 강간을 당했다. 1992년 상반기에만 3백99명이 보안군에 의해 암살당했다. 1990년 9월 어린이 시체 3구가 발견됐는데 모두 귀가 잘리거나 눈알이 빠져있는 상태였다.5)
친미 독재정권의 쿠데타 이후 미국 자본은 과테말라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이윤을 긁어모았다. 미국 의류회사인 필립스-반 호이센 사는 과테말라 노동자들을 선풍기도 없는 폐쇄된 창고에서 하루 16시간씩 일을 시키면서도 고작 2달러밖에 안 되는 임금을 지급했다.
 
파나마
 
1981년 파나마의 포퓰리즘 지배자였던 토리호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미국은 파나마에 손을 뻗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그 이후 1983년에 친미 독재 정권인 노리에가가 권력을 잡았다.
미국은 노리에가가 마약 밀매 범죄 조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1972년부터 알고 있었다. 1983년 미국 상원의 한 위원회는 파나마가 마약 자금의 출처이자 마약 밀매의 본산지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노리에가는 미국에게 충실한 독재자였다.
노리에가가 미국에 충성하는 한 그는 아직 이용가치가 있었다. 1986년 미국의 한 마약 단속 책임자는 노리에가가 "강력한 반(反)마약 밀매 정책"을 펴고 있다면서 그를 칭찬하기까지 했다. 법무 장관 에드윈 미스는 노리에가의 범죄 행위에 대한 법무성의 조사를 중지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노리에가가 파나마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기 위해 미국의 지위를 침범할 듯한 모습을 보이자 미국의 태도는 돌변했다. 노리에가가 독자적이 된다는 것은 미국이 파나마 운하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 축소된다는 것을 뜻했다. 미국은 갑자기 노리에가를 깡패이며 마약 장사꾼이라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미국이 폭로한 사실들은 그 동안 미국 자신이 쉬쉬 하면서 감추어오던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제 파나마에 대한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리에가에 대한 비난 선전을 퍼붓기 시작했다.
처음에 미국이 시도한 군사 쿠데타는 실패했다. 그러자 1989년에는 미군 자신이 직접 파나마로 침공했다. 2만 6천 명의 미군에 의해 약 1만여 명의 파나마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1990년 운하 관리권 이양 시기에 맞춰 다시 부유한 백인 특권층에게로 권력을 이양해놓고 미군은 되돌아갔다.
 
칠레
 
미국은 칠레에서 아옌데의 좌파 정부를 전복시켰던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지원했다.
칠레 기업 중 미국 기업이 참여하고 있는 기업은 전체의 61%에 달했다. 칠레의 주요 수출품은 구리이다. 1970년에 총수출액 중 구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75.8%나 됐다. 미국의 양대 구리회사인 아나콘다와 케네코트가 칠레 구리 생산에서 주된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아옌데가 구리 광산을 국유화시킨 것은 미국의 분노를 샀다.
또한 1960년대 말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반미주의가 급속히 인기를 얻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옌데의 당선은 미국에게 큰 위협이 됐다. 미국은 아옌데의 당선으로 잇따라 다른 국가에서도 좌파 정치 세력들이 지지를 얻을까봐 심각하게 걱정했다. 헨리 키신저는 이렇게 말했다. "칠레에서 아옌데의 집권은 우리들과 라틴 아메리카의 동맹국들에게 심각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선거 직후 미 국무부는 코리 미 대사에게 "아옌데가 집권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모든 가능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권위"를 부여했다.
미국은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동원했다. 미국은 세계은행에 압력을 넣어 칠레에 대한 모든 차관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경제 원조와는 달리 미국은 칠레에 대한 군사 원조는 더 늘렸다. 이것은 정부를 취약하게 만들고 우파들이 더 참을 수 없도록 만들어 군사 쿠데타를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CIA 국장이었던 콜비에 따르면 1969년부터 1973년 사이에 CIA는 칠레 좌파를 무너뜨리려는 비밀 활동에 무려 8백만 달러나 사용했다.
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일어나는 동안 미·칠레간에 우니타스 합동 기동 훈련이 실시됐으며, 미 해군함 4척이 칠레 앞바다에 있었다. 만약 군부가 분열돼 내전이 발생하면 바로 개입하는 것이 그 전함들에 부여된 임무였다. 미국은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성공하도록 도왔을 뿐 아니라 수만 명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한 이 끔찍한 학살자를 계속해서 후원했다.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저질러온 범죄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사실상 라틴 아메리카 국가중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미 제국주의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중남미는 미국의 뒷마당이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일들은 다른 모든 대륙에서도 일어났다.
 
아프리카 - 앙골라
 
1974년 포르투갈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파시스트 독재가 타도됐다. 포르투갈 지배자들이 약화된 틈을 타 앙골라에서는 1975년 대중 봉기가 일어났다. 포르투갈 식민 통치자들이 쫓겨났고 민족주의 좌파 정부가 들어섰다. 앙골라의 우익, 특히 요나스 사빔비의 앙골라완전독립민족동맹(UNITA)은 앙골라인민해방군(MPLA) 정부의 전복을 기도했다.
미국은 앙골라에서 좌파가 집권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단호하게 행동할 태세가 돼 있었다. 앙골라 내전 초기부터 CIA는 UNITA에 무기를 제공했다. 1981년에 레이건이 집권하면서 미국 정부는 UNITA 같은 조직들에게 공개적으로 무기를 보내는 것을 금지한 의회 결의안을 폐기했다. 그 결과 앙골라는 20년 동안 유혈 참사에 빠져들었다.
앙골라 내전으로 이미 7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3분의 2가 어린이였다. UNITA는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주된 수단으로 삼았고 마을의 땅에 지뢰를 묻었다. 그 결과 6만 5천 명의 사람들이 다리가 잘렸다.
 
아시아 - 인도네시아와 이라크
 
미국이 자행했던 공작의 가장 끔찍한 사례는 인도네시아였다.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이후 민족주의 성향의 지도자 수카르노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수카르노는 좌파라고 볼 수 없었고 오히려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의 토지개혁을 제압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민족주의 성향은 미국에게 근심거리가 됐다. 당시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50만의 당원을 거느리고 있는 인도네시아 유일의 대중 정당이었고, 소련과 동유럽 등 스탈린주의 국가를 제외하면 세계 최대 규모의 비(非) 집권 공산당이었다. PKI는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카르노는 미국이 보기에 너무 유약하고 좌파들을 탄압하는 데 소심한 인물이었다.
미국은 수카르노를 제거하기 위해 1950년대 말에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미국은 군에 대한 지원, 인도네시아에 대한 경제 원조 삭감을 통해 군부의 불만과 자신감을 부추겼다.
1965년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수하르토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수하르토는 정권을 잡자마자 학살을 자행해 적어도 50만 명의 PKI 당원 및 민간인들을 죽였다. 미 CIA는 수하르토에게 자신들이 파악한 5천여 명의 PKI 당원 명부를 제공했다. 그들이 살해당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서도…
수하르토는 1975년 미국의 지원 하에 동티모르를 점령해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수하르토에 대한 서방의 지원이 바로 동티모르의 잔혹한 학살을 낳았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다른 서방 국가들이 안전하게 석유를 공급받으려면 미국의 힘에 의존해야 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부시와 클린턴은 사담 후세인을 독재자라고 비난했지만 오랬동안 미국은 바로 그 독재자를 후원해 왔다. 이전에는, 미국은 이라크의 민족주의자인 카심을 제거하기 위해 사담 후세인을 지원했다.
1979년에 이란의 팔레비 왕정이 타도되고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호메이니가 집권하자 미국은 힘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이란에 대한 장기간의 유혈 낭자한 전쟁을 벌이도록 사담 후세인을 부추겼다. 미국은 사담이 이란 군대와 쿠르드족 민간인들에게 독가스를 사용하는 것을 못 본 척 보아넘겼다.
그러나, 후세인은 미국의 지지에 지나치게 자신만만해지고 거만해져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잘못을 범했다. 이것은 국제 원유 가격에 심각한 동요를 일으켰고 이는 서방 지배자들에게는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부시는 이라크에 대한 공습을 명령했다. 미국은 과거와는 태도를 바꿔 후세인을 '제2의 히틀러'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미국의 공습으로 1991년 방공호에 몸을 숨기고 있던 바그다드의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크루즈 미사일로 숯덩어리가 됐다. 징집된 십대 이라크 병사들이 사막에서 수천 명씩 학살당했다. 쿠웨이트로부터 바스라 도로를 따라 피난하던 수천 명의 이라크 시민들이 폭격으로 사지가 산산조각났다.
1991년 1차 걸프전과 미국의 경제 제제 결과로 적어도 50만 명의 이라크 어린이가 죽었고 1백만 명이 영양실조에 걸려 있다고 추산된다. 그런데도 UN은 아무런 손도 못 쓰고 있다.
 
패배도 한다 - 베트남
 
미국은 1880년대부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민족해방 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 군에 재정적 지원을 했다. 그러나 1954년에 결국 프랑스가 패배하고 물러나자 미국은 이번에는 베트남을 자신의 관할권 아래 두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를 물리친 베트남 인민들은 사기 충만해 있었고 투철한 반제국주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평화적으로 선거가 치러진다면 미국의 베트남 지배는 수포로 돌아갈 것이 확실했다.
1965년에 국무부 장관 딘 러스크는 하원 외교위원회에 출석해 동남아시아가 "엄청난 전략적 중요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풍부한 천연 자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진정으로 두려웠던 것은 베트남에서 좌파 민족주의자가 집권함으로 인해 그 운동이 전염병처럼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으로 확산되는 것이었다.
남베트남 정권이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상태에서 미국은 억지로 남베트남 정부를 살려놓은 후 전쟁을 벌였다. 베트남 전쟁은 소위 '비둘기파'라고 인식되고 있는 민주당의 로버트 케네디에 의해 이루어졌다.
베트남 민중들은 소련이나 중국의 도움 없이 미국에 맞서는 인민 전쟁을 벌였다. ― 당시 소련은 스탈린이 죽고난 후 권력 이양 문제를 놓고 국내적 문제에 골몰해 있었고, 중국은 원래 국경문제로 베트남과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베트남 민중들을 지원하지 않았다.
미국은 압도적인 화력의 우세를 이용해 베트남 인민들을 학살했다. 미국은 네이팜 탄을 민가나 도로에 퍼부어댔고 고엽제를 뿌려댔으며 점령한 마을의 주민들을 몰살시켰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동안 모든 나라가 사용했던 폭탄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폭탄을 베트남에 퍼부었다. 그러나 결국 미국은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
베트남 전에서 미국이 패배한 결정적인 이유는, 베트남 민중들이 결연한 자세로 반제 투쟁을 벌였던데 반해 미군 병사들은 자신감이 없었고 부대의 사기와 기강이 무너진 데 있었다. 미국 내 징집 기피자가 수십만 명에 달했다.
미국의 역사가 마릴린 영은 베트남 장군과의 대화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약 미국이 용병술을 다르게 구사했다면 결과는 달라졌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역사는 이미 당신들 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조국을 위해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이었습니까?"
많은 이들이 미국의 행동들을 보면서 미국은 무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노엄 촘스키의 책을 읽다보면 이렇게 사악하고 강력한 제국의 행동을 도대체 저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아쉽게도 촘스키는 미국의 실책과 패배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베트남 인민들의 영웅적인 항쟁은 미국을 물리쳤다.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는 전 세계 좌파 활동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미국은 베트남전의 패배로 인해 국제적인 분쟁에 개입하는 데 주춤했으며 사기저하됐다.
미국은 1980년대 말에서야 비로소 베트남 증후군에서 회복해 파나마 침공이나 걸프전같은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저지를 수 있었다.
 
한국
 
미 제국주의 문제는 한국의 대중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은 한반도를 분할하고 남한에 이승만 정권을 세웠다. 1950년에는 소련과의 제국주의 전쟁을 위해 한반도를 전쟁터로 삼았다. 미국 폭격기들은 한반도 대부분을 파괴했다.
미국의 장군 오도넬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한반도 거의 전체가 끔찍히도 엉망진창이 돼 버렸다고 말하겠다. 모든 것이 파괴됐다. 서 있다고 할 만한 건물이 없었다."
미군은 한국전쟁에서 핵폭탄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신무기인 네이팜 탄(소이탄)을 실험했다.
한국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미국은 한국의 모든 독재자들을 후원했으며 전두환의 공수부대가 광주의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을 묵인했다.
주한미군은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사용료도 안 내는 기지를 남한 곳곳에 두고 있다. 되레 주한미군은 전국에 1백여 개의 기지를 두고 한국정부로부터 매년 30억 달러에 이르는 방위분담금을 받는다.
최근 노근리 양민학살, 매향리 사격장 폭탄 투하, 용산 미군기지에서 독극물을 방류한 것, 불평등한 SOFA 문제 등으로 대중들 사이에서 반미 감정이 고조돼 왔다. 그 때문에 현재 미군은 궁지에 몰려 있고 독극물 방류에 대해 형식적인 사과나마 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일본 오키나와에서의 대중적 반미 시위, 푸에르토리코 비에케스 섬의 강력한 사격장 폐쇄 시위 등 국제적 항의 운동에 부딪혀 있다. 강력한 대중 시위만이 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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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부터 07년까지 투쟁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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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몰리뉴] 영웅주의, 대리주의 버리고, 계급적 복수를

존 몰리뉴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통해 테러가 가지는 한계성는 계속 밝혀져 왔다"고 지적하며 "개인의 복수가 아닌, 우리가 원하는 역사의 복수, 계급적 복수"를 위해 "노동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테러는 대중 투쟁의 역할을 개인이나 소수가 대체하는 것

맑시스트들에게 테러라는 개념은 최근의 논쟁이 아니다. 낯선 주제가 아니고 새로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다행이다. 911과 런던 테러에 발빠르게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 논쟁하고 논의에 참가할 때 테러와 관련한 오랜 논의의 전통이 있기 때문에 응집력 있게 대응할 수 있었다. 테러와 관련한 주제는 맑스주의자들에게 있어 새로운 주제도 아니고, 맑스주의가 태동할 시기부터 있어 왔다.


맑스와 엥겔스 가입했던 의인동맹이란 조직이 국제사회주의 동맹이 됐고, 맑스와 엥겔이 공산당 선언을 쓰게 됐다. 이들은 의인동맹의 음모론을 버리도록 설득하고 나서 의인동맹에 가입했다. 당시에 음모라는 것은 오늘날의 테러리즘이 가진 의미는 아니었지만 원칙적으로는 같다. 비밀조직을 가지고 역모를 해서 쿠테타를 일으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맑스는 그런 '음모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맑스는 '공개적인 활동을 통해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맑스가 테러를 반대했던 것은 맑스의 역사관과도 연결된다. 맑스에게 역사변혁의 추동력은 계급투쟁에 있다는 것, 개인적 영웅적 행위나 장군이 치르는 전쟁이 아닌 수백 수 천명의 대중이 함께 투쟁할 때만이 역사는 변한다고 믿었다. 테러는 부르주아가 가진 역사관의 거울이다라고 할 수 있다. 영웅적인 개인의 행위로 역사가 발전한다고 믿었던 부르주아들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테러는 계급이 대중적으로 투쟁할 수 있는 역할을 개인이나 소수가 대체하는 것을 뜻한다. 테러는 노동계급이 주창하는 내용과 직접적으로 거스르는 내용이다. 맑스는 당시에 유토피아적이고 음모론에 기대는 주장에 반대하며 맑스주의의 테러에 대한 반대 입장을 취했고, 본격적으로 정착됨으로써 러시아 혁명과 맑스주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 1세대 혁명세력은 '나로드니키'였다. 대부분 지식인들이었고, 짜르 체제에 대한 불만이 컸다. 대안적인 세력으로 희망을 걸었던 것이 농민들이었고, 이상주의적으로 농촌으로 들어가서 농민들과 함께 변혁을 기도했지만 그게 잘 안되자 이들은 테러를 택하며 짜르와 측근들을 암살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맑스주의가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선택의 기로에 있어서 테러리즘에 대한 반대 입장이었다.


테러리즘, 대중투쟁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테러리즘을 어떻게 볼 것이냐, 어떤 계급이 사회주의를 일으킬 수 있는 주체가 될 것이냐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레닌도 테러리즘에 반대한 역사가 있다. 레닌이 테러리즘에 대해서 저술한 것이 있다. 글을 보면 몇 가지 점이 드러난다. 테러에 관한 저술을 할 때 그 글을 보면 테러리스트에 개인적인 영웅과 용맹스러움에는 존경과 존중을 표했다. 하지만 개개인의 용기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테러가 대중투쟁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은 레닌도 단호했다. 레닌은 테러를 정당화하려는 여러 이론과 논리를 단호히 거부했다. 러시아에서 테러를 지지한 사람들은 짜르 측근을 암살하면 할 수록 국가권력이 점차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이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이런 논리를 단호히 거부했다. 테러로 암살을 하면 오히려 억압적인 국가권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운동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했던 논리를 거부했던 것은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것과 공통점이 있다. 관련해 트로츠키는 테러는 '폭탄을 품고있는 개량주의에 불과하다'고 했다.


다른 테러리스트는 테러를 감행함으로 대중을 감화 감동시켜 투쟁에 나서게 영감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도 말이 안 된다고 레닌은 주장했다. 레닌은 우리가 역사적인 경험으로 볼 때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난다고 말했다. 트로츠키는 훌륭하게 요약했는데, 테러가 아무리 성공하고, 목표를 달성해도 역효과는 나타날 수밖에 없다. 테러가 일어남으로 대중은 의식 속에서 자신의 역할은 과소평가하고 축소해 사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테러가 성공해 암살해도, 무역센터 초토화된다고 해도 테러리스트의 메세지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맡겨라, 우리 엘리트들이 대신 투쟁할 것이다'라는 메세지만 전 할 뿐이기 때문이다.


테러, 자본의 폭력에 비하면 새발의 피일 뿐


맑스주의에서 테러에 대해 두가지 더 이야기 할 것인데, 이런 주장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상황이다. 첫번째는 아무리 테러가 파괴력을 발휘하는 테러라 해도 테러가 자행하는 폭력은 자본주의가 자행하는 폭력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는 것이다. 부르주아 사상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지 히로시마의 원폭, 베트남 전쟁을 볼때 자본의 폭력이 얼마나 더 잔인한지를 알 수 있다. 이런 폭력을 자행한 사람들이 오히려 폭력이 자행되면 도덕적 우위를 점하면서 민간인의 희생을 강조하며 도덕론을 펼치고 있다. 지난 1세기 반 동안 테러리스트가 희생시킨, 무고하다는 시민과 민간인 보다 히로시마에는 단 몇 초만에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아프간과 이란에서 그런 폭력은 지금도 계속일어나고 있다. 맑스주의자들이 테러에 대해서 입장을 얘기할 때 지배계급이 가진 위선적이고, 이중적 태도와 도덕군자처럼 행하려는 것을 꼬집고 우리는 그런 위선을 절대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한다.


두번째는 맑스주의가 테러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나 입장인데, 이는 무조건적인 평화주의적 입장에서 모든 폭력은 반대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맑스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의 특정 시점에서는 폭력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억압받는 민중들이 떄로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테러사건이 발생했을 때 고립시켜 따로따로 보면은 테러일수 있고, 당연히 지배계급은 테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테러는 대중투쟁의 일부분일 수도 있다. 좋은 예로 지금 현재 이라크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항을 우리는 테러라고 보지 않는다. 이라크에서의 저항은 테러가 아니다. 이라크에서 저항의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테러가 발생했다고 해서 전체적인 이라크 민중이 점령에 저항하고 반대하는 투쟁을 거부하거나 부인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아가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분석해야 하는 특성이 있다. 좌파 진영, 맑주의자들은 그것에 대해서는 사건에 맞는 반응과 대항을 해야 한다. 역사 속에서 자기만의 특성을 갖고 있지만, 전체적인 설명은 불가능하겠지만 몇 가지만 지적하겠다. 우선은 테러 사건을 분석할 때 우리의 대응을 논할 때 누가 그 테러를 감행했고, 왜 그랬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테러의 대상이 누구였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 테러 사건이 발생하게 된 정치적 맥락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정치적 맥락과 형색을 대중과 지배계급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가 파악이 되고, 대중들도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테러의 3가지 구분, 우파, 민족주의자, 좌절당한 급진주의자


테러를 자행하는 주체가 누구인지의 문제에 있어서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파, 신파시스트들의 테러의 예를 들면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볼로뉴아폭탄테러, 런던의 아시아 지역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에서 터진 수제폭탄(터지면서 못이 튀어나오는 폭탄), 북아일랜드에서 독립에 반대했던 민병대, 남미나 중미에서 있었던 자살 폭탄테러들도 있었다. 이러한 종류의 테러리스트들에 대해서는 무조건 반대이다. 주장이던 행위 전략에 대해서 모든 것을 부정한다. 재미있는 것은 우익이 자행하는 테러에 대해서는 언론이나 자본이 빈축을 사거나, 크게 뭐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분류는 2차 대전 이후에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의 테러였다. 이것의 예는 많다. 알제리 민족해방 전선, 바스크 자유조국, IRA, 알카에다를 비롯한 관련 조직들이 있다. 좌파들은 이런 테러가 자행된 이유는 억압과 빈곤에 있다고 얘기하는데 자본과 언론들은 오히려 빈라덴이 가난했냐며 반문한다. 그러나 중간계급도 제국주의적 억압에 고통을 받을 수 있다. 지배계급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식민 국가에서 억압을 느끼고 고통을 받을 수 있다. 제국주의의 통제, 지배 하에서는 중간계급들은 우리 민족이 열강에게 받는 수치를 참을 수 있는가 라며 투쟁의 의혹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있다.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싶은데, 국가권력은 아니어서 군대, 경찰이 없으니 제국주의 열강에 직접적으로 전쟁을 치를 수 없는 상황에서 테러를 저지르는 영화 '알제리의 전투'라는 영화를 보면 알제리 민중이 프랑스 식민통지에 저항하는 내용의 중간에는 계급이 자행하는 테러를 보며 중간에서 행동 하게 된다.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그렇다. 노동계급을 우리의 희망으로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기 떄문이다.


세번째 분류를 보면 이렇게 명칭을 달아보고 싶다. 좌절당한 급진주의자들. 19세기 후반 부터 20세기 까지의 아나키스트, 60-70년대 독일, 이탈리아 붉은 여단, 미국의 웨더맨(일기에보자) 영국에도 테러집단은 있었으나 영향력은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류에 따라서 어떠한 분류인지에 따라서 우리의 대응이 달라야 할 것이다.


첫 번째는 무조건 반대한다. 세번째 부류는 속해있는 사회에서 대중적 지지를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세 번쨰 부류에 대해서는 상황 전환시키는데 있어서 좌파들, 혁명적 사회주의 맑시스트들이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테러리스트가 되지 않게 방지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이탈리아 붉은 여단 좌파진영에 크나큰 타격을 줬는지 알기 떄문이다.


테러의 대상이 누구냐의 문제도 있다. 테러는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그러나 대상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우리의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 테러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짜르이거나, 평범한 노동자가 무고하게 희생된 것일 수도 있다. 1984년 IRA가 대처수상과 그 측근을 브라이턴 호텔에서 암살을 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이 '왜 총알이 빗나갔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러나 이런 반응은 7월 런던 폭탄 테러의 반응과는 사뭇 다르다. 테러가 대상에 따라 반응이 다를 수 있다는 테러의 가장 큰 오류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이다. 당시 7월 지하철 폭탄 테러는 노동자들이 대부분 희생된 것. 무차별적으로 불특정 다수였기 때문에 토니블레어와 전쟁에 반대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테러의 배경과 정치적 맥락


테러가 어떤 정치적 맥락에서 일어났는가이다. 예를 들어 911의 경우테러 분석의 틀과 맥락은 미국의 제국주의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테러가 일어났다는 것을 환영하는 경향도 있었다. 정치적 맥락을 봤을 때 당연히 미국은 보복에 나설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들이 무역센터가 파괴되서 주저앉는 것을 보면서 예정된 시나리오대로 수천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겠구나를 알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에서 런던에 있었던 지하철 폭탄테러도 연결된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영국 정부의 지지, 미국에 대한 지지 때문에 영국 테러가 일어난 것. 이 이야기는 너무 당연하다. 911이후 부시는 대테러 전쟁, 하고자했던 아젠다를 정당화 할 수 있는 구실로 삼았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지배계급은 더 많은 시민권과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삼았다. 더 나아가서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 상황이 발생하게 된 원인과 책임을 이슬람 사람들에게 전가시키려 했다. 이런 정치적 맥락 때문에 인종차별적인 공격이 강화됐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극우의 공격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정치적 맥락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의 대응이 달라질 수 있다. 이는 우연이겠지만 영국 테러가 일어날 당시에 나는 맑스주의 포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행사가 그 주 주말이었다. 포럼의 행사 장소에도 두 곳이 있었는데 그 한가운데서 폭탄이 터졌다. 폭탄테러 때문에 불편을 겪은 것은 사실이나, 반전 시위와 농성을 조직해 실행에 옮겼다. 많은 활동가들이 포럼 때문에 런던에 와 있었기 때문에 농성 조직이 가능했고, 우선 대응하면서 제일 먼저 한 것은 폭탄테러 사건에 반대 한다는 입장 명확히 했고, 희생자들의 가족에게 조의를 표하는 것이 먼저 였다.


처음부터 이라크 전쟁과 영국테러의 뻔한 연관성을 강조했다. 시민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계속해서 주장했고, 영국에 살고 있는 이슬람 공동체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농성을 발빠르게 조직해서 옮겼다. 공격당한 모스크, 인종 차별적 공격이 있었던 곳에서도 집회를 조직했다. 테러가 영국에서 일어나면서 이데올로기 싸움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블레어는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려는 목소리를 잠재우는 도구로 사용하려 했고, 그리고 반대편에서 좌파들은 근본적 책임이 블레어 정부에 있다고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블레어의 책임이고, 노동계급이 단결하는 인종 등 모든 요소들을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런 측면에서 영국 반전단체인 '전쟁저지연합'에서 오는 9월 24일 영국의 전국적인 집회를 조직중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극악한 착취의 체제이고 폭력의 체제이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살아있는 이상 전쟁과 죽음 학살을 끊임없이 봐야 한다. 그런데 이런 자본주의를 종식시키려면 대중적인 노동계급의 투쟁밖에 없다. 아무리 파괴력이 강하다 해도 몇몇 개인이 폭탄을 터트리거나 암살한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리주의라는 것 버려야 한다.


개인의 복수로 우리가 만족할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역사의 복수, 계급적 복수다. 지배계급과 체제를 지탱하는 사람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체제를 멸망 시켜야 하고 계급을 멸종 켜야 한다. 이것을 노동계급이 해야 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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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금언

"전쟁의 시작단계에서 진군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다. 그러나 일단 공세로 나가기로 결정했으면, 마지막 순간까지 밀어붙여야 한다."
- 나폴레옹의 전쟁금언 에서


전쟁의 기술과 관련한 유명한 고전으로는 손자의 손자병법 ,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등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폴레옹 또한 이들 못지않게 전쟁기술에 관한 비중 있는 인물로 거론된다. 한국에서는 흔히 나폴레옹 하면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을 남긴 인물 정도로 기억되고 있지만, 사실 그는 군사적 정치적 천재로서 세계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가 남긴 전쟁금언들은 오늘날에도 다방면으로 연구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주의 깊게 검토해보고자 하는 것 역시 나폴레옹의 전쟁금언들 중 하나다. "일단 공세로 나가기로 결정했으면, 마지막 순간까지 밀어붙여야한다"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기업을 운영하는 자본가들은 아마도 이 구절을 이른바 공격경영의 이론적 근거로 삼으려 할 것이다. 노동운동에 복무하는 동지들도 나름대로 이 구절로부터 무언가 영감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며, 단호하고 대담한 공격의 필요성을 입증하기 위한 근거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그처럼 간단하지는 않다. 나폴레옹은 단순하게 "돌격 앞으로!"를 외치지는 않았다. 또한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나폴레옹의 실제 경험을 통해 그의 주장이 갖고 있는 한계가 드러나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전쟁금언이 갖고 있는 의의를 충분히 이해하고 살리기 위해서는 비판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심사숙고


나폴레옹은 "진군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심사숙고"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비단 전쟁뿐만 아니라, 노동조합투쟁과 같은 일상적인 대결에서도 흔히 등장한다. 많은 노동조합들에서 과연 바로 지금이 전면전에 들어가야 할 시기인가, 아니면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격론을 벌이곤 한다. 자본가에 맞선 투쟁은 가상공간에서의 게임과는 달리, 아주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에 그러한 격론은 불가피하다. 즉 우리는 승승장구하며 빛나는 승리를 쟁취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쓰라린 패배를 겪어야 할 수도 있다. 패배할 경우 노동자들은 빚더미에 올라 끔찍한 경제적 고통을 맛보게 되고, 구속과 같은 처벌을 감수해야만 하며, 심지어 노동조합이 파괴되는 사태까지 야기될 수 있다. 때문에 당면한 투쟁의 조건과 상황, 자본가들의 준비정도와 우리의 준비정도, 서로가 갖고 있는 힘의 크기 등에 관하여 치밀하고 객관적이며 냉정한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심사숙고"의 결과 지금은 오직 자본가들에게만 유리한 시점이며, 우리로서는 투쟁의 준비가 대단히 불충분한 상황이라면 전면적인 싸움을 뒤로 미루고 보다 철저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오직 자본가들에게만 유리한 시점에서 우리가 먼저 싸움을 시작한다는 것은 용감한 행동일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대개의 경우 그 용감성조차도 단지 맹목성에 불과했음이 드러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투쟁을 위한 충분한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으며, 가장 적절한 시기가 다가왔는데도 싸움에 나서지 않는다면 모든 훌륭한 기회들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불가피하게 투쟁에 나서야만 하는 경우


하지만 현실에서는 위에서 다룬 것처럼 단순하게 문제가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의 투쟁대열이 미처 충분한 준비를 완료하지 못했고 전체적으로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시점이지만, 달리 운신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투쟁에 나서야만 하는 경우들이 있다. 특히 최근의 노동자투쟁들은 종종 그런 양상을 띤다. 자본가들은 자신에게 들이닥치고 있는 절박한 위기를 노동자에게 떠넘기기 위해 공세적으로 발톱을 드러낸다. 정리해고의 이름으로 하루아침에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쫓겨난다. 민주노조를 박살내려는 포악한 공격이 이루어진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은 단결의 첫걸음인 노동조합 건설에 성공하자마자 운명을 건 싸움터로 빨려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자본가들의 가차 없는 공격 속에서 우리는 투쟁의 준비정도와 무관하게 투쟁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이처럼 충분히 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투쟁을 강요당했다 하더라도, 일단 투쟁이 시작된 이상 수세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가장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



공세를 취해야 하는 이유


나폴레옹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아무리 숙달된 기동능력을 가졌더라도 후퇴는 항상 부대의 사기를 약화시키게 된다. 왜냐하면 아군은 승리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는 반면 적은 승리의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노동자투쟁에서도 다르지 않다. 노동자들이 자본의 공격에 맞서 단호한 응징을 가하지 못한다면, 반대로 자본의 공격에 우왕좌왕하고, 숨을 곳을 찾고, 도망칠 궁리를 한다면 자본가들은 더한층 기세등등해질 것이다. 돌풍처럼 투쟁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한번 꺾인 투지는 다시 회복하기 힘들다. 가령 하나의 투쟁에서 노동자들이 충분한 자신감을 갖지 못하여 투쟁의 수위를 스스로 낮추는 경우가 있다. 이때 이들은 스스로 투쟁의 수위를 낮춤으로써 자본가들도 적정선에서 양보하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곤 한다. 하지만 그런 희망은 근거 없는 희망이다. 노동자가 스스로 투쟁수위를 낮출수록 자본가들은 노동자투쟁을 더욱더 얕잡아볼 것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자본가들은 더욱더 공격적인 태도로 완전한 승리를 향해 돌진할 것이며, 노동자들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주려 광분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해서 "애당초 투쟁에 나서지 말았어야 했다"고 투덜거리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나폴레옹이 이야기했듯이 전면적인 투쟁을 개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서는 최대한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이 투쟁이 시작되었다면 최선을 다해 그 싸움을 전개하는 것만이 상황을 유리하게 반전시켜나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다.

그러므로 투쟁의 시기에 사기를 끌어올리고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최초의 접전에서 확실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역량을 핵심지점에 집중시킬 수 있어야 하며, 우리의 기세와 투지에 놀란 자본가들이 대열을 추스르고 반격을 가해오기 전에 지속적으로 공세를 취하여 탄탄하게 진지를 확보해야만 한다. 요컨대 어떤 상황에서든 일단 투쟁이 개시되고, 비록 불리하지만 그 투쟁을 피해갈 도리가 없는 상황이라면, 더 이상 머뭇거림이나 주저함 없이 최고의 결의와 투지로 무장하고 가장 공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만이 우리의 피해를 최소로 줄이고 승리의 가능성을 최대로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전진과 후퇴


그러나 전술은 단선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노동자투쟁의 일정한 시기에 옳았던 입장도 자본가들의 전술이 바뀜에 따라 옳지 않은 것으로 뒤바뀔 수 있다. 자본가들의 투쟁력이든 노동자들의 투쟁력이든, 이 투쟁력은 대단히 유동적이며 수시로 변화한다. 특히 투쟁의 매 국면마다 변동하는 대중들의 사기, 심리, 정서, 분위기까지 고려한다면, 특정한 시기에 유효했던 투쟁방향이 다른 시기에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밀어붙여야 한다"는 나폴레옹의 주장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나폴레옹 자신의 경험이 그것을 보여준다. 승승장구를 거듭했던 나폴레옹은 자신감으로 충만한 채 러시아 원정에 나선다. 러시아는 나폴레옹 군대를 즉각 격퇴하는데 실패하고, 수세적으로 후퇴했다. 이 모습을 보고 나폴레옹은 승리감에 도취된 채 진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곧 늪에 빠졌다. 자신의 근거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옴으로써 각종 군수품을 조달하는데 애를 먹었다. 러시아의 날씨와 토양에 익숙하지 못한 나폴레옹 군대는 빠르게 지쳐갔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진격의 템포와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었지만, 후퇴하는 러시아 군대를 보며 승리감에 젖은 나폴레옹은 치밀한 계산을 하는데 실패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성공하지 못하고, 큰 타격만을 입은 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주어진 상황에서 전진과 후퇴의 배합을 적절히 할 수 없는 자에게는 쓰라린 실패만이 기다리고 있다. 노동자투쟁에서도 다를 바 없다. 과감히 진격해야 할 시기에 움츠리고 주저앉음으로써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주는 사례가 종종 있다(가령 최근의 철도파업들). 후퇴의 시점을 적절하게 잡아내지 못함으로써 더 큰 손실을 입게 되는 경우 또한 있다. 어떤 경우에 속하든 간에, 전진과 후퇴의 적절한 결합에 실패하는 경우 항상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 노동운동의 역사적 교훈이었다.



역사적 교훈


이상의 논의는 대략 3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다.

(1) 전면적인 투쟁을 앞둔 상황이라면 치밀한 준비와 계획 속에서 가장 적절한 진격의 순간을 잡아채기 위해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며, 투쟁의 조건이 채 무르익기 전에 때 이른 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도 있다. 투쟁을 준비한다는 것은 곧 그 투쟁을 이끌어나갈 선진층과 광범한 대중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좁히고, 최대한 밀접하게 결합하도록 조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본가들은 미리 시험적인 도발을 가함으로써 이 선진층을 "색출"하고 대중으로부터 솎아내고 싶어 한다. 충분한 사전 조직화를 통해 이 덫에 걸려드는 것을 막아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아무 때나 "결전"을 선포해서는 안된다. 여기서는 말 그대로 "심사숙고"가 필요하다.

(2) 하지만 상황이 언제나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항상 우리에게 유리한 시점과 조건에서만 투쟁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적을 전혀 상정하지 않고 전투를 사고하는 것이다. 수많은 생존권투쟁들이 보여주듯이, 미처 충분한 준비태세를 갖추지 못했지만 불가피하게 투쟁에 나서야만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 상황에서 "심사숙고하는 태도"는 아주 빠르게 "머뭇거리는 태도"로 변화한다. 일단 돌이킬 수 없이 투쟁이 개시된 상황이라면 더 이상 주저함 없이 가장 단호하고 공세적인 태도로 투쟁에 나서야 한다. 그것만이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하고 가장 나은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3) 그럼에도, 전진과 후퇴에 관한 경직된 태도는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때로는 우리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후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힘을 다해 끝까지 싸워보지도 않은 채 지레 겁을 먹고 후퇴한다면 그 후퇴는 치욕적인 후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해 싸웠고, 단지 지금으로서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 이상 투쟁을 밀어갈 수 없다면, 더 멀리 내다보고 더 멀리 도약하기 위해 후퇴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 현명함이 없다면 오직 "쓰라린 경험" 외에는 얻을 것이 없을 것이며, 과연 무엇이 실패의 교훈인지 깨닫지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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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봄은 만인에게 평등했는가?

봄은 만인에게 평등했는가?
6월10일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부산교사결의대회 연대사


봄은 만인에게 평등했는가



열 몇 살 아이들이 아파트 옥상에서 동백꽃처럼 낙화하고 무덤조차 없는 아이들의 뼛가루가 황사처럼 날리는 땅. 이 척박한 땅에서도 봄은 과연 만인에게 평등했는가.

새기 들하고 발 뻗고 누울 게딱지만한 집을 지키겠다고 살인범이 되어 세 시간의 물대포와 최루탄에 생쥐처럼 끌려 내려오던 철거민들. 그들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위에서 빛나던 햇살은 얼마나 따사로웠는가.

월남전 파병용사에 해외 산업역군에 60평생 일만 해 온 늙은 노동자가 외친 "서러움이 뭔지를 알려거든 나를 보아라" 그 외마디 절규에 600명을 연행하고 마흔두 명을 구속시키는 걸로 화답했던 참여정부의 곤봉과 군홧발 위에도 햇살은 자애로웠는가.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집으로 돌아간 텅빈 학교에서 한 달 6-70만원으로 당직을 서며 혼자 라면발을 건져 올리는 경비용역 아저씨들의 젓가락질 위에도 햇살은 온화했는가.

급식종사원인 엄마와 학생인 아들이 아침마다 가는 목적지가 같건만 단 하루도 함께 등교해 본 적이 없다는 신발공장 해고노동자 정희.

매일 아침 엄마에게 등을 돌린 채 뛰어가는 아들의 그 작은 등에서 잔인하게 부서져 내리던 햇살은 얼마나 찬란했는가.

그 아들을 불러세워 함께 가자 단 한번도 얘기할 수 없었다던 정희는 "난 다시 태어나면 우리 재경이 학교에 선생으로 태어날 거야. 그래서 하루만이라도 재경이 손잡고 학교에 같이 가보는 게 소원이야"

꺼이꺼이 울며 술주정마저 서럽던 못난 에미의 눈물 위에도 햇살은 눈부셨는가.


그 정희를 제가 처음 만난 건 그 아이 열두살 때였습니다.

열세살 아래는 취업이 안 되니까 이름도 두개였고 나이도 두가지였던 소위 생계형 위장취업자였던 아이.

목표량 달성이 생명보다 중요했던 공장에서 부산 사투리를 잘 못 알아들어 조장에게 터진 날 밤에 기숙사 옥상에 올라가보면 영어를 몰라 미싱사한테 엉뚱한 라벨을 갖다줘서 목덜미까지 손가락 자욱이 선명했던 그 아이가 쭈그려 앉아 울고 있곤 했었습니다.

그 아이의 꿈은 미싱사가 되는 거라 했습니다.

우리가 최대한 아낄 수 있는 시간은 점심시간 20분이 전부였던 시절. 밥을 굶어가며 미싱을 배워 마침내 장군처럼 미싱을 타게 된 정희는 열네 살 때 이미 미싱바늘에 찍혀 손톱 두개가 없었습니다.

대학생하고 연애를 하면서 기숙사 삼동에 그 소문이 파다해져서 영웅처럼 의기양양하던 영자를 보면서 정희의 소원은 대학생하고 연애 한 번 해보는 걸로 바뀌었습니다.

그때 우리들 사이에선 영자처럼 두꺼운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고 헷세나 니체같은 책들을 미싱바늘 갈듯이 서로 바꿔가며 끼고 다니다가 밤엔 베고 자고 그랬습니다.

교복 입은 또래들을 보면 처음엔 눈물이 나다가 나중엔 저절로 욕이 나온다던 그 공순이들이 군복 입은 사람들을 보면 처음엔 무섭다가 나중엔 저절로 욕이 나오게 된 게 87년 꼭 이맘때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거리에서 만난 건 영자의 돈도 빼앗고 몸도 빼앗고 꿈마저 짓밟은 사장보다 더 나쁜 대학생이 아니라 또는 시내버스 안내양 시절 대학생 회수권을 들고 버스에 올라서는 파마 잘나오는 미장원 얘기 부츠 세일하는 얘기나 늘어놓던 한심한 대학생이 아니라 최루탄이 안개처럼 뒤덮인 거리를 질주하던 진짜 대학생들이었습니다.

준비물을 안 챙겨갔다고 국민교육헌장을 못 외운다고 모내기 하는 날 결석했다고 코피가 나도록 줘패던 수많은 박정희들이 아니라 세상의 주인은 노동자라던 믿어지지 않는 말씀들을 하시던 여러분들 참스승들이었습니다.

그후로 우리들은 더이상 읽지도 않는 책들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지도 않았고 안내양하면서 삥땅해뒀다가 남의 버스 탈 때 마패처럼 내밀곤 하던 몇 년이 지난 대학생 회수권도 비로소 버릴 수 있었습니다.


16년전 오늘.그 아이들이 얼마나 여러분들을 자랑스러워했는지 아십니까?

정문 앞에서 부터 쫓기고 쫓기는 숨바꼭질 끝에 부산대학교 기계관 앞에서 마침내 하늘을 향해 오르던 전교조 부산지부의 깃발을 보며 그 아이들이 얼마나 울었는지 아십니까?

16년전 오늘. 선생님들을 그렁그렁 눈물 매달고 지켜보던 그 아이들의 수천마리의 새들의 비상처럼 터져나오던 갈채소리를 아직도 기억 하십니까?

그때 그날 신용길 선생님이 형형한 눈빛으로 읽어가시던 축시를 들은 이후 정희는 시인이 되는 게 꿈이라 했습니다.

준재를 두고 떠나시는 그 오죽한 순간에도 눈을 세상에 남겨 전교조 합법화의 그날을 보리라던 꼭 신용길 선생님의 현신 같았던 조직.

1500명의 선생들을 학생들마저 폭력혁명의 도구로 삼는 좌경 용공 의식화 교사로 내몰고도 꺾을 수 없었던 조직.

학부모의 손에 머리채가 잡혀 정문 밖으로 끌려 나가는 선생님들을 울며 불며 따라오며 선생님들을 돌려달라고 목 놓아 울던 아이들을 가졌던 참 행복한 조직.

그 조직을 아이들로 부터 분리해내는 게 이제는 강압이 아니라 자발적 복종으로 너무나 인텔리스러운 방식의 구조조정이 교원평가제입니다.

수백만개의 사업장은 말할 것도 없고 금융 철도 통신 전력 도로 건설 운송 다 휩쓸어버린 신자유주의자들의 오직 단 하나 마지막 남은 미션. 학교입니다.


신입사원이 들어와도 비정규직이니 환영식도 없고 수시로 짤려나가니 환송식을 할수도 없는 수많은 현장들.

아무도 노젓는 법을 나누지 않고 친구의 노를 몰래 부러뜨려 놓아야 내가 강물을 건널 수 있다고 믿었던 자들은 결국 그 강의 끝이 유토피아가 아니라 망망대해로 이어져 혼자 탄 뗏목으로는 난파할 수밖에 없다는 걸 처음엔 잘 몰랐습니다.

제일은행 노동자들이 짤릴 때 주택은행 노동자들은 시금치를 무치거나 아이의 장난감을 고르는 일이 더 중요했었고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짤릴 때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은 대부분 잔업을 하거나 축구를 보고 있었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이 먼저 짤릴 때 남성 노동자들은 이제 시집이나 가라고 농담처럼 말했고 형님들이 짤릴 때 동생들은 '헹님은 인자 낚시도 실컷 댕기고 땡 잡았네' 라고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웃으면서 했던 똑같은 말을 울면서 듣게 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수백만의 머리에 총알이 박혔지만 아무도 자기가 그 대상이 되리라는 걸 상상할 수 없는 이 짜릿한 러시안 룰렛 게임.

이미 1300만 중에 840만이 비정규직이지만 아직도 내가 비정규직이 되리라는 걸 예상하지 않는 이제는 자본과 노동의 전선이 아니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전선이 돼버린 이 스릴 넘치는 치킨 게임.

급식종사원 당직경비 영양사 사서 각종 보조의 이름으로 불리는 학내 비정규직들에게 익숙해진 우리들은 머잖아 하청교사 용역교사에게도 서서히 익숙해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미션의 임파서블은 거기까지 입니다.

신자유주의의 관리자거나 희생양이거나 두 종류만 키워내면 되는 학교에서 아무도 참교육을 말하지 않는 그때까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밀어내는 것도 자본이고 이제 와서 아빠 힘내시라고 노래불러주는 것도 자본이고 집도 사고 차도 사야 하는데 당신이 아프면 큰일이라고 걱정해주는 것도 자본이고 사고가 나면 남편보다 먼저 달려와 주는 것도 자본이고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도 자본이고 또 하나의 가족이 된 자본은 이제 안아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들과 우리가 공평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영역이 그것들도 죽는다는 사실이었는데 황 박사의 생명 연장의 꿈은 결국 자본 연장의 꿈이 될 것입니다.

상위 10%에 비해 하위 10%의 사망율이 다섯배가 높은 나라에서 노무현이가 보톡스 맞듯이 쌍꺼풀 수술하듯이 줄기세포 갈아 끼우고 죽지도 않고 러시아로 행담도로 삽질하러 다니는 상상을 해보십시오.

이건희 명예박사 사건 일명 이명박 사건으로 존재감을 뿌듯하게 확인한 이건희 하고 똑같은 게 수십개 수백개가 여기저기 돌아다닌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정형근이가 호텔방에서 묵주하고 바꾼 난자로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같은 것들을 아예 프레스로 찍어 낼 수도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저는 벌써 소름이 끼칩니다.


동지여러분. 아이들을 일진이라고 때려잡던 소탕작전은 마무리 됐습니까?

사립학교법 죽어라 반대하는 한나라당 떨거지들. 학생과 교사를 좌경과 건전으로 분리해 좌경학생을 격리조치하고 좌경교사를 감찰하라는 신선한 발상이 화수분처럼 샘솟아 오르는 교육인적자원부. 천성산에는 철도를 놓고 아이들의 머리에는 고속도로를 내서 살기 좋은 새마을을 만들고 싶어 환장을 한 아직도 건재한 수많은 이 땅의 박정희들.

진짜 일진은 그것들 아닙니까?

국민들의 주머니를 털고 동료들간의 왕따를 조장하고 폭력으로 나와바리를 유지하는 그들이야말로 우리시대 진정한 일진들 아닙니까?

이 일진세력들을 그대로 둔 채 교원평가제가 시행되면 아이들은 저절로 영악해지고 선생들은 알아서 비겁해질 겁니다.

아이들은 꿈을 잃어가고 선생들은 영혼을 잃어가는 학교에서 중간고사 끝난 나른한 봄날의 4교시. 선생님께 첫 사랑 이야기를 조르는 아이들도 더 이상은 없을 테고 그 아이들에게 진달래를 불러주는 친구 같은 선생님도 더는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을 상대로 첫 사랑의 황홀한 꿈을 꾸는 아이들도 없을 테고 선생님들은 더 이상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지 않게 될지도 모릅니다.

학교가 아닌 아파트 옥상으로 등교하는 아이들은 점점 많아질 테고 그때 우리는 아이들의 책상만이 아니라 옆자리 선생님의 빈 책상위에도 하얀 국화꽃을 올려놓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 밖에는 별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여러분들.

나는 그 아이들은 담싹 안아주고 싶어 다가가는데 가까이 갈수록 멀어지는 아이들. 그럼 어쩌시렵니까?

나는 아이들에게 밤새워 메일을 쓰는데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는 아이들.

그런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보내기' 대신 '취소'를 누르며 긴 밤을 서성거릴 때. 그 뜨거운 마음들을 다 어쩌시렵니까?

쏟아내지지도 않고 내려놔지지도 않은 채 자갈처럼 구르며 온 가슴을 헤집고 다닐 결국에는 상처가 될 그 걷잡을 수 없는 사랑들을 다 어쩌고 사시렵니까?


권미경이라는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한 열세 살 때부터 홀어머니와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오빠.어린동생 둘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글재주가 유난했던 영민한 아이였습니다.

똑똑하면 안 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똑똑하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혹시 아십니까?

미싱만 잘 밟으면 되는 공순이가 그림 잘 그리는 저주를 받아 초등학교 6년 내내 게시판에 그림이 걸려 있던 기억이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혹시 상상해보셨습니까?

미경이의 글재주는 작업시간에 빵 먹었다고 조장한테 터지고 온 날. 구비 구비 서러운 일기를 써내려가는데 밖엔 써먹을 데가 없었습니다.

매일 매일이 유서 같았던 일기장을 몇 권이나 남겨놓고 공장 옥상에서 고단하기만 했던 스물두 살의 몸뚱이를 끝내 날렸던 미경이의 유서는 그러나 막상 외마디였습니다.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그 유서를 왼쪽 팔뚝에 볼펜으로 비명처럼 새겨 넣고 갔습니다.

그 미경이를 신용길 선생님의 바로 앞자리에 묻으면서 신선생님께 부탁했습니다.

작가가 되는 꿈을 꾸었으나 살아서는 도저히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던 미경이가 선생님의 곁으로 갔습니다.

수만 벌의 옷을 만들었지만 단 한 벌도 그 옷의 주인일 수 없었던 미경이의 소원은 제비꽃 한복을 입어보는 거 였습니다.

여기저기 터지고 부러진 스물두 살 몸뚱이 여며서 그 옷을 수의로 입혀서 보냈습니다.

비록 눈으로 보실 수는 없더라도 제비꽃 향기가 나는 아이가 있거들랑 시도 읊어주시고 문학도 가르쳐 주시구려.

미경이 같은 아이들이 가진 꿈을 살아서 이룰 수 있는 무상교육. 전 그게 꼭 됐으면 좋겠습니다.


전교조 부산지부 동지여러분.16...년 동안 정말...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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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quot;더 이상 그들의 손으로 덫을 놓지 않습니다&quot;

"더 이상 그들의 손으로 덫을 놓지 않습니다"


지난 4월30일(토) 부산역에서 열린 115주년 노동절 기념 집회때..
김진숙 지도위원의 연설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따끔한 소리, 그 울림에 많이 울었습니다..

눈에 확연한 줄어든 대오..

"주5일제 되면서 토요일 집회하면 안된다"는 말을..
일상처럼 하고 일상으로 받아 들이는 정규직 노동자가 있는한..

박창수 열사의 아들 용찬이가 박 열사가 죽던 나이가 되고,
김주익 열사의 아들 준엽이가 김 열사가 죽던 그 나이가 되어도..
우리는 말로만 '연대'를 외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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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하리란 걸 알면서도 밤새워 쓰는 편지도 있고 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기다려지는 편지가 있습니다.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기다리게 되는 사람이 있고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밤은 자꾸 오고 술마저 취하지 않는 밤. 새벽이 얼마나 더디 오는지 새벽을 견뎌 본 자는 압니다.

그런 밤, 신내린 무당처럼 산에 올라 부를수록 상처가 되는 이름을 목놓아 부르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언제나 늦게 오던 사랑. 다시는 볼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그게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일은 얼마나 쓸쓸합니까?


내가 스물 하나 일 때 박창수도 스물 하나였고 내가 스물 셋일 때 스물 하나였던 김주익을 만났던 언제나 거기서부터 떠오르는 이 형벌같은 기억들은 얼마나 잔인한 일입니까?

참 잘 자란 용찬이가 지 에미가 가슴속에 눈물의 저수지를 파놓고 그 물 떠 먹여가며 그 물로 씻겨서 키웠을 용찬이가 우리가 처음 만났던 스물 한 살. 소나무처럼 푸르른던 그 때 그 애비의 나이가 되었건만 아직도 죄스럽기만 한 우리는 준엽이 그 아이가 그 애비만한 나이가 될 때 그 때 우린 그 아이 앞에 무엇이 되어 서 있을까요?

내게 남은 시간들을 다 내주고 그들이 단 하루를 더 살 수 있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 하루동안 아이들만이라도 볼 수 있게 했어야 했습니다. 그 따뜻하고 보드라운 것들을 비벼보고 만져보고 빨아도 보고 부서지도록 안아도 보고 그랬어야 했습니다. 미안하다는 너무너무 미안하다는 그 말이라도 했어야 했습니다.


감빵안에서 징벌방에서 그리고 대공분실에서 혼자 당하는 일의 처절함, 혼자 견뎌내야 하는 그 참혹함을 알면서도 하나는 감방 안에서 하나는 크레인 위에서 하나는 도크바닥에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던 겁니다.

박위원장이 주익씨를 만나지 않았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저승에도 북극이란게 있고 남극이란 것도 있어서 그들의 거리는 천리나 만리나 되게 멀어서 그들이 우연히라도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 예수님께 빌고 부처님께도 빌었습니다.

박위원장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보냈냐고 주익이를 어떻게 이렇게 보냈냐고 얼마나 원망을 하겠습니까? 그 착해빠진 사람이 혼자서 목에 밧줄을 걸 때까지 니들은 도대체 어디서 뭘했던 거냐고 물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산 자는 누구나 죄인이었던 그 날 이후. 우리는 각자의 양심에 검은 리본을 달았었고 스스로에 대해 반성이란 것도 했습니다. 129일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목매달아 죽은 시신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을까? 함께 하지 못했던 자책감에 몸부림을 했었고 우리 모두의 죄를 혼자 뒤집어쓰고 속죄한 재규형 때문에 한 동안 서로 눈을 마주치는 일조차 두려워했습니다. 누구나 복수를 다짐했었고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맹세도 했습니다. 그들이 남기고 간 새*들 또래의 아이들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살가죽이 불에 닿는 느낌이었고 키가 큰 사람을 보는 것 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고 했었습니다.

연대해야 더 이상 죽지 않는다고 수 천번도 더 외쳤고 값비싼 댓가를 치르고 깨달은 노동자는 하나란 사실을 다시는 잊지 말자 했습니다. 우리 그 때 그러지 않았습니까? 우리 그 때 다들 그러지 않았습니까? 부산 노동자도 그랬고 울산 노동자도 그랬고 여성노동자도 그랬고 남성 노동자도 그랬고 늙은 노동자도 그랬고 젊은 노동자도 그랬습니다. 정규직도 그랬고 비정규직 노동자도 그랬고 금속노동자도 그랬고 병원노동자도 그랬고 밖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그랬고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그랬습니까


그 일로부터 20년이 지나고 200년이 지난 것도 아닌데 그토록 철폐를 외쳤던 신자유주의는 우리들의 자연스런 일상이 되어 있습니다.

비정규직은 먹고 살기 위해 잔업철야를 해야하고 정규직은 짤리기 전에 한 대가리라도 더 하려고 잔업특근에 목숨을 겁니다. 연대투쟁 열심히 하는 집행부는 재선에 실패하고 임금 많이 올리고 성과급 많이 따내는 집행부는 인정받습니다.

성과급 받아서 차 바꾸고 그 차 값 할부금 때문에 잔업을 또 하고 뼈골 빠지게 잔업한 돈 모아서 큰 집으로 이사했으니 융자 갚고 관리비 감당하려면 특근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큰 아이 학원비는 점점 늘어나는데 작은 아이마저 학원을 시작해야 하고 그렇게 키운 새*들을 죄다 비정규직이 되고 비정규직과 실업자는 각자 알아서 알맞은 방법으로 자살하고 정규직은 과로사와 산재로 죽습*다.

열 사람 하던 일을 다섯 사람이 해도 충분하다는 걸 우린 점점 늘어나는 과로사와 근골격계를 감수하면서 입증해줬고 그렇게 우리는 저들의 구조조정을 합리화 시켜줬습니다. 결국 다섯 사람이 하던 일을 세사람이 해도 된다는 또 다른 구조조정의 무덤을 우린 우리 손으로 열심히 파고 있습니다.


이제 자본가들은 더 이상 그들의 손으로 덫을 놓지 않습니다. 노동자들 스스로 덫을 만들고 그 덫에 걸릴 순서를 알아서 정하고 1번 비정규직, 2번 여자, 3번 늙은이 순으로 차례대로 그 덫에 밀어넣습니다.

공장 한쪽에서 비정규직은 투쟁하고 그 코앞에서 정규직들이 탁구를 치고 족구를 하는 것도 더 이상 낯선 광경이 아닙니다.

비정규직의 숫자가 정규직을 넘어선 공장에서 노조간부들이 사무실에 앉아 각자 등돌리고 게임에 몰두하는 모습도 이제 자연스런 일상이 돼버렸고 에어컨 빵빵한 노조 사무실 소파에서 노조간부들이 연예인 X파일을 논할 때 엉덩이 붙이고 앉을데라곤 화장실 바닥 밖에 없는 청소용역 아지매들에겐 회사의 냉대보다는 노조의 무관심이 더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이은주의 자살에 대한 관심만큼 이용석의 죽음에 우리들이 관심을 쏟았더라면 박일수는 안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직도 저는 합니다. 최희섭이나 박주영에 대한 관심의 반만이라도 우리가 과거사법, 사립학교법에 대해서 가진다면 자식을 먼저 보낸 늙은 부모님들이, 줄줄이 돌아가시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전교조 동지들이 그들끼리만 거리를 헤매는 수치스런 일만큼은 막아낼 수 있다고 저는 여전히 믿습니다.

농민들이 제 손으로 키운 과일을 불태우며 울면서 싸우는데 수입과일을 사먹는 노동자가 어찌 세상의 주인일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쏟은 오물을 청소용역 아지매를 전화로 불러 치우게 하는 노조간부가 누구의 존경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규정이라는 이유로 역 구내에서 노점상 할머니와 노숙자를 눈물 한 방울도 없이 쫓아내는 노조간부가 집회에 나와서 외치는 평등과 해방은 얼만큼이나 진실입니까?

배차 시간 때문이란걸 알지만 장애인이 온 힘을 다해 손을 드는데 그냥 지나치는 버스 노동자가 자신들이 투쟁할 때 누구에게 당당히 연대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지율스님의 그 일관된 진정성이 김주익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그 생각을 왜 우리는 안합니까?

이주노동자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칠건 빨리빨리와 씨8놈이 아니라 연대와 인간의 가치입니다.


1300만 중에 840만이 비정규직이 되는데 10년이 채 안 걸렸습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은 무궁화와 고속철이 아니라 같은 열차의 앞칸과 뒷칸일 뿐입니다. 1호차부터 10호차까지 비정규직을 인질로 태우고 지옥으로 돌진하는 이 죽음의 고속철을 11호차부터는 정규직이 실려있고 자유석엔 우리 아이들이 실려 달려가고 있는 겁니다. 300KM로 달리는 고속철에서 혼자 뛰어내릴 수 없습니다. 다 죽지 않으려면 멈춰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게 콩 한쪽뿐이라 하더라도 그걸 나눌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진정한 연대입니다. 대우자동차 창원 공장처럼 부산은행처럼 정규직이 나서서 비정규직을 조직하는 일부터 합시다. 비정규직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다 죽지 않으려면 그래야만 합니다.

스물 한 살 용접공 제게 그 때 가장 두려웠던 건 아침이 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매일 그런 아침을 맞을 비정규직들에 실업자들에게 우리가 희망이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14년째 되풀이하는 다짐이지만 내년에 좀더 달라져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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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85년 6월 구로동맹파업

구로동맹파업 20주년 기념 특별기획
다시 읽는 85년 6월 구로동맹파업

노조간부 구속으로 촉발…일주일 동안 구로지역 들불처럼 확산

“노동자를 영원히 노예로 부리려는 독재정권과는 한 치의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8백만 노동자가 민주노동운동의 깃발아래 모이는 그날까지 선봉에 서서 굽힘없이 싸워나갈 것을 선언한다. … 노동자를 탄압하는 폭력정권은 물러가라!”

85년 6월 24일 구로동맹파업으로 해고된 노조원들이 7월23일 가리봉 오거리에서 ‘노동자 연대투쟁 선언-노동운동 말살정책을 분쇄하자’는 선언문 중 일부다. 한국전쟁 이후의 최초의 ‘노동자 연대투쟁’에 더해 구로동맹 파업은 ‘정치성’을 분명히 드러냈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폭압정치에서 유화국면으로

당시 상황을 먼저 들여다보자. 전두환의 폭압정치가 1983년말부터 이른바 유화국면에 접어든다. 노동운동에는 더할 나위 없는 부활의 시기였다. ‘블랙리스트’ 때문에 수년간 취업을 원천봉쇄당하고 있던 해고노동자들은 84년 1월 ‘블랙리스트철폐대책위원회’를 결성해 블랙리스트 철폐투쟁을 펼쳐나갔다. 또 3월에는 ‘기업별 노조운동의 한계 극복’을 목표로 내걸고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이하 ‘노복’)가 창립된다. 전 원풍모방 노조위원장 방용석(현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을 비롯 70년대 민주노조 간부들이 주축이 된 ‘노복’은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높이기 위한 각종 교육사업과 노동법 개정투쟁을 전개했다.

노동현장에서도 그동안 억눌렸던 요구가 폭발적인 형태로 터져 나왔다. 84년 5월 대구지역 택시 노동자 1천여명이 사납금, 부제 완화, 노조결성 방해 중지를 요구하며 시내 중심가에서 격렬한 차량시위를 벌였다. 택시 노동자들의 투쟁은 삽시간에 부산, 경북 경산, 대전, 서울, 강원 강릉 등지로 번져나갔다.

한편 청계피복 노동자들은 노조 복구투쟁을 본격화했다. 5월1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합법성에 관한 공개토론회’를 개최한 데 이어 9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3차례 합법성 쟁취대회를 열었다. 이런 가운데 구로공단을 비롯한 경인지역 사업장에서는 노조를 결성하거나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려는 활동들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80년대 중반 구로지역은 대부분의 업체가 수출을 위한 경공업제품을 생산하던 곳으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 관리직과의 차별 대우 등이 극심했다. 이들은 비슷한 근로조건과 노조결성 시기 등으로 인해 조합 간부는 물론 조합원간의 연대 프로그램을 통해 교류와 연대를 강화해 왔다. 85년 임금인상 투쟁시도 상호교류를 통해 이러한 연대는 지속된다.

당시 사건 일지

85 04.10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 결성
85.06.01 구로지역노조민주화추진연합’(구민련) 결성
85.06.22 대우어패럴 노조 집행부 김준용(위원장), 강명자(사무장), 추재숙(여성부장) 경찰에 연행
85.06.23 대우어패럴, 가리봉전자, 효성물산, 선일섬유 노조 동맹파업 결의
85.06.24~29 대우어패럴 파업
85.06.24~26 효성물산 파업
85.06.24~27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파업
85.6.25~26일 남성전기, 세진전자, 롬코리아 준법농
85.06.27~28 삼성제약 중식거부
85.06.28 부흥사 파업
85.06.29 대우어패럴 농성 강제해산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구속으로 촉발

‘구로동맹파업’의 결정적 계기는 대우어패럴 노조간부들에 대한 경찰의 구속조처였다. 1985년 6월 22일 오전 11시. 경찰이 대우어패럴 노조사무실로 찾아와 김준용 위원장, 강명자 사무국장, 추재숙 여성부장 등 3명을 연행했다. 경찰은 4월의 임금인상 투쟁 때 파업농성을 주도하며 노동쟁의조정법과 집회및시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이들을 구속했다. 조합간부 8명도 불구속 입건됐다.

‘구로동맹파업’의 결정적 계기인 대우어패럴 노조간부들에 대한 경찰의 구속조처였다. 전두환 정권이 노동운동을 다시 강력하게 탄압하려는 신호탄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함께 연대했던 노동조합들에게 ‘위기’ 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이미 대우어패럴 이외의 타 노조간부들에게도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6월 23일 조합간부 3명이 구속된 것에 항의하며 파업농성에 돌입한 대우어패럴 노동자들. 6월 26일 현재 물 한 모금, 음식 한 끼 못 먹고 농성을 벌였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위원장 연행 소식을 전해들은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작업을 중단하고 1백여명이 총무과로 몰려가 고발 취소를 요구하는 농성을 전개한다. 다음 날인 23일 대우어패럴 외에 가리봉전자, 효성물산, 선일섬유, 청계피복 등 노조간부 2백여명은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24일부터 동맹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한다.


▲ 6월 24일 오후 2시 효성물산 조합원 400여명은 2층 작업장에 모여 파업농성에 들어갔다. 이들 역시 창문에 ‘노동3권 보장하라’ ‘민주노조 탄압말라’는 벽보를 붙이고 플래카드를 내걸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24일 오전 8시 경 대우어패럴 노동자 350여명의 파업을 신호로 오후 2시 효성물산 노조원 4백여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같은 시간 가리봉전자 노조원 5백여명, 선일섬유 노조원 70여 명 등도 파업에 돌입한다. 이들은 ‘구속된 김준용 위원장 등 노조간부의 석방과 노조탄압 중지’를 요구하고 나아가 ‘노동악법 폐지하라’, ‘폭력경찰 물러가라’ 등을 주장했다.


▲ 대우어패럴 농성시위를 탄압한데 항의하며 노동자, 학생들이 6월 24일 여의도에서 기습 가두투쟁을 벌였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이러한 노동자의 투쟁에 대해 회사측은 단전과 단수 조처를 단행했으며 경찰은 이들 공장 일대를 철통같이 경계했다. 공단 일대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6월 25일 남성전기 조합원 3백여 명이 오후에 농성을 벌이고 세진전자 노조원 250여명, 롬코리아 1백여명이 지지 철야농성을 하는 등 연대투쟁은 7개 업체로 확산된다.


▲ 서울 중부지방노동사무소에서 농성을 벌였던 노동자들이 경찰에 의해 끌려나오고 있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에 학생 및 재야의 지지도 이어졌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등 22개 단체에서 지지 농성이 있었고, 26일 오후에는 서울대생 2명이 ‘구속노동자 석방’을 요구하며 대우어패럴 맞은 편 협동봉제 공장에 올라가 지지 구호를 외치는 등 학생들의 지지 시위가 있었다. 27일에는 효성물산 80여명과 청계 노조 조합원이 노동부 중부지방사무소에 몰려가 노동부장관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탈진, 실신…강제해산, 대규모 해고


▲ 창문에 걸터앉아 구호를 외치고 있는 대우어패럴 농성 노동자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경찰들의 공포 분위기 조성과 음식물 차단으로 인한 조합원들의 탈진과 실신 그리고 병원후송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대우어패럴 농성시위대는 1백여명으로 줄어든다. 효성물산과 선일섬유 노조는 26일 밤에 농성을 풀었고, 가리봉전자는 27일 관리직 남자 사원들에 의해 강제 해산 당했다. 6월 28일에는 부흥사노조원 120여명이 연대파업에 돌입했으나 쇠파이프와 몽둥이로 무장한 관리자와 남성사원들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해 80여명이 강제사직서를 쓰는 등의 탄압이 계속되었다.

대우어패럴에서는 노사간 협상이 6월 28일 있었으나 보복조치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달라는 노조의 요구를 회사가 거절함으로써 30분 만에 결렬된다. 마침내 6월 29일, 물도 끊기고 전기도 끊긴 상태에서 굶주리며 버티던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작업장 벽을 뚫고 진입한 관리자와 구사대들에 의해 강제해산당하면서 막을 내렸다.

동맹파업과 이를 지지하는 농성·시위 과정에서 모두 43명이 구속되고, 연인원 370명이 구류를 살았으며, 7백여명이 강제로 사표를 쓰거나 해고당했다.


▲ 6월 27일 노동부장관 면담을 요구하며 노동부 서울중부지방사무소에서 항의 농성하던 효성물산과 청계피복노동자들 중 한 명의 노동자가 허리를 다쳐 실신상태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김영미 효성물산 전 위원장은 “구속 후 1심서 풀려난 노동자들은 운동지도부가 궤멸되고 동지들이 흩어지면서 자연스레 운동을 이어갈 수 없었다”며 “결혼 전후로는 보수적인 남편과 집안에 노동운동 경험을 얘기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학생구속자가 없는 것과 관련 “공장에 8명의 학생들이 있었지만 노동자들이 보호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며 “경찰서에서도 배후조정 추궁이 있었지만 끝내 학생들이 앞장서 활동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학생들 가운데 ‘작은책’ 발행인이었던 강순옥씨 등이 있었다.


▲ 6월 28일 윤순녀, 이창복 등 민주, 민권운동단체들이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구로공단 노동자 연대 투쟁 탄압분쇄’ 연대농성 투쟁에 돌입했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부흥사의 안경환 전 조합원은 “심상정, 공계진, 문성현, 김영대 등 몇몇 당 활동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90년 이후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며 “바람직 한 것은 노동 등 각계에 층층이 쌓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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