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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강사로 소문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인 세미나에서 그 강사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죠. 그러다 그 강사는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100만원짜리 수표 한 장을 높이 쳐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돈을 갖고 싶지요? 어디 이 돈을 갖고 싶은 사람 손 한 번 들어보십시요." 그러자 세미나에 참석한 그 수많은 사람들 대부분이 손을 들었습니다. 강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 중에 한 사람에게 이 돈을 드릴 생각입니다. 하지만 먼저 나의 손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쳐들었던 100만원짜리 수표를 손으로 이리저리 마구 구겼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이 수표를 가지기를 원하십니까?"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강사의 그 행동에 놀라면서도 역시 거의 모든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좋아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그 100만원 짜리 수표를 땅바닥에 던지더니 구둣발로 밟으며 더럽혔습니다. 그리고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구겨지고 더러워진 그 100만원짜리 수표를 집어들고, 아직도 그 돈을 갖고 싶은지를 물었습니다. 또 다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이때 강사는 힘차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100만원짜리 수표를 마구 구기고 발로 짓밟고 더럽게 했을지라도 그 가치는 전혀 줄어들지 않습니다. 100만원짜리 수표는 항상 100만원짜리 수표의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인생이라는 무대에서는 여러 번 바닥에 떨어지고, 밟히며, 더러워지는 일이 있습니다. 실패라는 이름으로, 또는 패배라는 이름으로 겪게 되는 그 아픔들... 그런 아픔을 겪게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평가절하 합니다. 허나 놀라운 사실은 실패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의 가치는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구겨지고 짓밟혀도 여전히 자신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이 수표처럼 말입니다." |
이번설에 시골내려가서 할머니에게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됐다. 우리 할아버지도 1942년 정도에 일본 북해도로 징병으로 끌려가셨다. 그리고는 해방이 되고도 1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돌아오셨다. 그러나 얼마후에 625가 터졌다. 그런데 놀라운건 우리 할아버지가 625때 인공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태백산맥에 나오던 이름모를 수많은 빨치산들속에 우리 할아버지도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왜 인공에 가담했는지, 어떤일을 했는지 알수는 없지만 인공에 가담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모를 흥분을 가져왔다. 그러나 1.4후퇴 이후 경찰과 국군의 인공 색출작전으로 할아버지는 산속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그러자 경찰들이 집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당시에 5~6살 먹은 아버지는 경찰들이 무서워서 항상 대문밖에서 경찰이 오는지 않오는지 동구밖을 지켜봤다고 한다. 그리고 밥먹을때도 항상 할아버지 밥을 남겨서 밤에 몰래 할아버지가 집에 오면 먹고가라고 내놓았다고 한다. 며칠후 경찰들은 결국 할머니를 잡아가서 3일동안이나 채찍을 휘두르며 숨은곳을 데라고 고문하셨단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죽을 각오로 끝내 얘기를 하지 않았다. 등쪽에 살점이 뜯겨나가서 1주일동안은 바닥에 등도 대지 못하고 옆으로 누워서 잠을 자야했다고 하셨다. 그러자 이번에는 경찰들이 우리 할아버지의 형(큰아들)을 잡아가려고 한것이다. 이에 놀란 상할아버지가 결국 할아버지가 숨은곳을 알려주었고, 할아버지를 비롯한 동네 사람 3명도 같이 잡혀갔다. 그길로 우리 할아버지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총살당하셨다. 할머니는 시신이라도 찾으려고 한달동안이나 남몰래 주변을 찾아나셨지만 결국 시신을 찾진 못했다. 할머니 말로는 그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억울한 것은 이일을 계기로 상할아버지가 할머니와 어린 우리 아버지를 집에서 쫓아내신 것이다. 참고로 우리 상할아버지네는 그당시에도 먹고살만했으며 큰아들과 그 아들도 모두 학교를 나와서 지금은 출세해서 잘살고 있다. 그렇게 맨몸으로 쫓겨난 할머니는 곧 재혼을 하게 되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일만 하시며 살아야 했다. 아버지 또한 초등학교 근처도 못가본채 평생 농사를 지으며 죽도록 고생만 하셔야 했다. 세월이 지나서 몇년전에 큰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일제 징용에 대해 보상신청을 했으나, 인공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탈락됐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이번에 듣게된 놀라운 할아버지 얘기였다. 할머니는 의외로 담담하셨다. 하도 오래전의 일이기도 하지만, 그동안의 모진 고생으로 가슴에 맺힌 한들이 응어리진 탓이기도 할것이다. 한동안 머리와 가슴속이 멍했다. 일본에 끌려가 갖은 고생끝에 귀국하게된 할아버지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투쟁의 길로 함께한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를 지키고자 고문도 마다않던 할머니 어린나이에도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밥한그릇 남길줄 알았던 우리 아버지, 자랑스런 할아버지를 두고서도 떳떳하게 드런내지 못하고 오히려 평생 가난에 찌들려 고생해야 했던 우리 아버지... 그리고 이제야 그런 이야기를 들어야 했던 나.... 갑자기 태백산맥이 생각난다. 수없이 죽어간 이름모를 빨치산들이... |
정규직-비정규직의 아름다운 연대를 본받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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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몰리뉴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통해 테러가 가지는 한계성는 계속 밝혀져 왔다"고 지적하며 "개인의 복수가 아닌, 우리가 원하는 역사의 복수, 계급적 복수"를 위해 "노동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테러는 대중 투쟁의 역할을 개인이나 소수가 대체하는 것 맑시스트들에게 테러라는 개념은 최근의 논쟁이 아니다. 낯선 주제가 아니고 새로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다행이다. 911과 런던 테러에 발빠르게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 논쟁하고 논의에 참가할 때 테러와 관련한 오랜 논의의 전통이 있기 때문에 응집력 있게 대응할 수 있었다. 테러와 관련한 주제는 맑스주의자들에게 있어 새로운 주제도 아니고, 맑스주의가 태동할 시기부터 있어 왔다. 맑스와 엥겔스 가입했던 의인동맹이란 조직이 국제사회주의 동맹이 됐고, 맑스와 엥겔이 공산당 선언을 쓰게 됐다. 이들은 의인동맹의 음모론을 버리도록 설득하고 나서 의인동맹에 가입했다. 당시에 음모라는 것은 오늘날의 테러리즘이 가진 의미는 아니었지만 원칙적으로는 같다. 비밀조직을 가지고 역모를 해서 쿠테타를 일으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맑스는 그런 '음모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맑스는 '공개적인 활동을 통해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맑스가 테러를 반대했던 것은 맑스의 역사관과도 연결된다. 맑스에게 역사변혁의 추동력은 계급투쟁에 있다는 것, 개인적 영웅적 행위나 장군이 치르는 전쟁이 아닌 수백 수 천명의 대중이 함께 투쟁할 때만이 역사는 변한다고 믿었다. 테러는 부르주아가 가진 역사관의 거울이다라고 할 수 있다. 영웅적인 개인의 행위로 역사가 발전한다고 믿었던 부르주아들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테러는 계급이 대중적으로 투쟁할 수 있는 역할을 개인이나 소수가 대체하는 것을 뜻한다. 테러는 노동계급이 주창하는 내용과 직접적으로 거스르는 내용이다. 맑스는 당시에 유토피아적이고 음모론에 기대는 주장에 반대하며 맑스주의의 테러에 대한 반대 입장을 취했고, 본격적으로 정착됨으로써 러시아 혁명과 맑스주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 1세대 혁명세력은 '나로드니키'였다. 대부분 지식인들이었고, 짜르 체제에 대한 불만이 컸다. 대안적인 세력으로 희망을 걸었던 것이 농민들이었고, 이상주의적으로 농촌으로 들어가서 농민들과 함께 변혁을 기도했지만 그게 잘 안되자 이들은 테러를 택하며 짜르와 측근들을 암살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맑스주의가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선택의 기로에 있어서 테러리즘에 대한 반대 입장이었다. 테러리즘, 대중투쟁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테러리즘을 어떻게 볼 것이냐, 어떤 계급이 사회주의를 일으킬 수 있는 주체가 될 것이냐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레닌도 테러리즘에 반대한 역사가 있다. 레닌이 테러리즘에 대해서 저술한 것이 있다. 글을 보면 몇 가지 점이 드러난다. 테러에 관한 저술을 할 때 그 글을 보면 테러리스트에 개인적인 영웅과 용맹스러움에는 존경과 존중을 표했다. 하지만 개개인의 용기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테러가 대중투쟁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은 레닌도 단호했다. 레닌은 테러를 정당화하려는 여러 이론과 논리를 단호히 거부했다. 러시아에서 테러를 지지한 사람들은 짜르 측근을 암살하면 할 수록 국가권력이 점차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이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이런 논리를 단호히 거부했다. 테러로 암살을 하면 오히려 억압적인 국가권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운동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했던 논리를 거부했던 것은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것과 공통점이 있다. 관련해 트로츠키는 테러는 '폭탄을 품고있는 개량주의에 불과하다'고 했다. 다른 테러리스트는 테러를 감행함으로 대중을 감화 감동시켜 투쟁에 나서게 영감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도 말이 안 된다고 레닌은 주장했다. 레닌은 우리가 역사적인 경험으로 볼 때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난다고 말했다. 트로츠키는 훌륭하게 요약했는데, 테러가 아무리 성공하고, 목표를 달성해도 역효과는 나타날 수밖에 없다. 테러가 일어남으로 대중은 의식 속에서 자신의 역할은 과소평가하고 축소해 사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테러가 성공해 암살해도, 무역센터 초토화된다고 해도 테러리스트의 메세지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맡겨라, 우리 엘리트들이 대신 투쟁할 것이다'라는 메세지만 전 할 뿐이기 때문이다. 테러, 자본의 폭력에 비하면 새발의 피일 뿐 맑스주의에서 테러에 대해 두가지 더 이야기 할 것인데, 이런 주장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상황이다. 첫번째는 아무리 테러가 파괴력을 발휘하는 테러라 해도 테러가 자행하는 폭력은 자본주의가 자행하는 폭력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는 것이다. 부르주아 사상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지 히로시마의 원폭, 베트남 전쟁을 볼때 자본의 폭력이 얼마나 더 잔인한지를 알 수 있다. 이런 폭력을 자행한 사람들이 오히려 폭력이 자행되면 도덕적 우위를 점하면서 민간인의 희생을 강조하며 도덕론을 펼치고 있다. 지난 1세기 반 동안 테러리스트가 희생시킨, 무고하다는 시민과 민간인 보다 히로시마에는 단 몇 초만에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아프간과 이란에서 그런 폭력은 지금도 계속일어나고 있다. 맑스주의자들이 테러에 대해서 입장을 얘기할 때 지배계급이 가진 위선적이고, 이중적 태도와 도덕군자처럼 행하려는 것을 꼬집고 우리는 그런 위선을 절대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한다. 두번째는 맑스주의가 테러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나 입장인데, 이는 무조건적인 평화주의적 입장에서 모든 폭력은 반대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맑스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의 특정 시점에서는 폭력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억압받는 민중들이 떄로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테러사건이 발생했을 때 고립시켜 따로따로 보면은 테러일수 있고, 당연히 지배계급은 테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테러는 대중투쟁의 일부분일 수도 있다. 좋은 예로 지금 현재 이라크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항을 우리는 테러라고 보지 않는다. 이라크에서의 저항은 테러가 아니다. 이라크에서 저항의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테러가 발생했다고 해서 전체적인 이라크 민중이 점령에 저항하고 반대하는 투쟁을 거부하거나 부인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아가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분석해야 하는 특성이 있다. 좌파 진영, 맑주의자들은 그것에 대해서는 사건에 맞는 반응과 대항을 해야 한다. 역사 속에서 자기만의 특성을 갖고 있지만, 전체적인 설명은 불가능하겠지만 몇 가지만 지적하겠다. 우선은 테러 사건을 분석할 때 우리의 대응을 논할 때 누가 그 테러를 감행했고, 왜 그랬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테러의 대상이 누구였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 테러 사건이 발생하게 된 정치적 맥락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정치적 맥락과 형색을 대중과 지배계급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가 파악이 되고, 대중들도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테러의 3가지 구분, 우파, 민족주의자, 좌절당한 급진주의자 테러를 자행하는 주체가 누구인지의 문제에 있어서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파, 신파시스트들의 테러의 예를 들면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볼로뉴아폭탄테러, 런던의 아시아 지역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에서 터진 수제폭탄(터지면서 못이 튀어나오는 폭탄), 북아일랜드에서 독립에 반대했던 민병대, 남미나 중미에서 있었던 자살 폭탄테러들도 있었다. 이러한 종류의 테러리스트들에 대해서는 무조건 반대이다. 주장이던 행위 전략에 대해서 모든 것을 부정한다. 재미있는 것은 우익이 자행하는 테러에 대해서는 언론이나 자본이 빈축을 사거나, 크게 뭐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분류는 2차 대전 이후에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의 테러였다. 이것의 예는 많다. 알제리 민족해방 전선, 바스크 자유조국, IRA, 알카에다를 비롯한 관련 조직들이 있다. 좌파들은 이런 테러가 자행된 이유는 억압과 빈곤에 있다고 얘기하는데 자본과 언론들은 오히려 빈라덴이 가난했냐며 반문한다. 그러나 중간계급도 제국주의적 억압에 고통을 받을 수 있다. 지배계급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식민 국가에서 억압을 느끼고 고통을 받을 수 있다. 제국주의의 통제, 지배 하에서는 중간계급들은 우리 민족이 열강에게 받는 수치를 참을 수 있는가 라며 투쟁의 의혹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있다.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싶은데, 국가권력은 아니어서 군대, 경찰이 없으니 제국주의 열강에 직접적으로 전쟁을 치를 수 없는 상황에서 테러를 저지르는 영화 '알제리의 전투'라는 영화를 보면 알제리 민중이 프랑스 식민통지에 저항하는 내용의 중간에는 계급이 자행하는 테러를 보며 중간에서 행동 하게 된다.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그렇다. 노동계급을 우리의 희망으로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기 떄문이다. 세번째 분류를 보면 이렇게 명칭을 달아보고 싶다. 좌절당한 급진주의자들. 19세기 후반 부터 20세기 까지의 아나키스트, 60-70년대 독일, 이탈리아 붉은 여단, 미국의 웨더맨(일기에보자) 영국에도 테러집단은 있었으나 영향력은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류에 따라서 어떠한 분류인지에 따라서 우리의 대응이 달라야 할 것이다. 첫 번째는 무조건 반대한다. 세번째 부류는 속해있는 사회에서 대중적 지지를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세 번쨰 부류에 대해서는 상황 전환시키는데 있어서 좌파들, 혁명적 사회주의 맑시스트들이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테러리스트가 되지 않게 방지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이탈리아 붉은 여단 좌파진영에 크나큰 타격을 줬는지 알기 떄문이다. 테러의 대상이 누구냐의 문제도 있다. 테러는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그러나 대상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우리의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 테러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짜르이거나, 평범한 노동자가 무고하게 희생된 것일 수도 있다. 1984년 IRA가 대처수상과 그 측근을 브라이턴 호텔에서 암살을 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이 '왜 총알이 빗나갔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러나 이런 반응은 7월 런던 폭탄 테러의 반응과는 사뭇 다르다. 테러가 대상에 따라 반응이 다를 수 있다는 테러의 가장 큰 오류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이다. 당시 7월 지하철 폭탄 테러는 노동자들이 대부분 희생된 것. 무차별적으로 불특정 다수였기 때문에 토니블레어와 전쟁에 반대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테러의 배경과 정치적 맥락 테러가 어떤 정치적 맥락에서 일어났는가이다. 예를 들어 911의 경우테러 분석의 틀과 맥락은 미국의 제국주의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테러가 일어났다는 것을 환영하는 경향도 있었다. 정치적 맥락을 봤을 때 당연히 미국은 보복에 나설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들이 무역센터가 파괴되서 주저앉는 것을 보면서 예정된 시나리오대로 수천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겠구나를 알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에서 런던에 있었던 지하철 폭탄테러도 연결된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영국 정부의 지지, 미국에 대한 지지 때문에 영국 테러가 일어난 것. 이 이야기는 너무 당연하다. 911이후 부시는 대테러 전쟁, 하고자했던 아젠다를 정당화 할 수 있는 구실로 삼았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지배계급은 더 많은 시민권과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삼았다. 더 나아가서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 상황이 발생하게 된 원인과 책임을 이슬람 사람들에게 전가시키려 했다. 이런 정치적 맥락 때문에 인종차별적인 공격이 강화됐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극우의 공격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정치적 맥락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의 대응이 달라질 수 있다. 이는 우연이겠지만 영국 테러가 일어날 당시에 나는 맑스주의 포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행사가 그 주 주말이었다. 포럼의 행사 장소에도 두 곳이 있었는데 그 한가운데서 폭탄이 터졌다. 폭탄테러 때문에 불편을 겪은 것은 사실이나, 반전 시위와 농성을 조직해 실행에 옮겼다. 많은 활동가들이 포럼 때문에 런던에 와 있었기 때문에 농성 조직이 가능했고, 우선 대응하면서 제일 먼저 한 것은 폭탄테러 사건에 반대 한다는 입장 명확히 했고, 희생자들의 가족에게 조의를 표하는 것이 먼저 였다. 처음부터 이라크 전쟁과 영국테러의 뻔한 연관성을 강조했다. 시민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계속해서 주장했고, 영국에 살고 있는 이슬람 공동체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농성을 발빠르게 조직해서 옮겼다. 공격당한 모스크, 인종 차별적 공격이 있었던 곳에서도 집회를 조직했다. 테러가 영국에서 일어나면서 이데올로기 싸움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블레어는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려는 목소리를 잠재우는 도구로 사용하려 했고, 그리고 반대편에서 좌파들은 근본적 책임이 블레어 정부에 있다고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블레어의 책임이고, 노동계급이 단결하는 인종 등 모든 요소들을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런 측면에서 영국 반전단체인 '전쟁저지연합'에서 오는 9월 24일 영국의 전국적인 집회를 조직중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극악한 착취의 체제이고 폭력의 체제이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살아있는 이상 전쟁과 죽음 학살을 끊임없이 봐야 한다. 그런데 이런 자본주의를 종식시키려면 대중적인 노동계급의 투쟁밖에 없다. 아무리 파괴력이 강하다 해도 몇몇 개인이 폭탄을 터트리거나 암살한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리주의라는 것 버려야 한다. 개인의 복수로 우리가 만족할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역사의 복수, 계급적 복수다. 지배계급과 체제를 지탱하는 사람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체제를 멸망 시켜야 하고 계급을 멸종 켜야 한다. 이것을 노동계급이 해야 만 한다. |
"전쟁의 시작단계에서 진군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다. 그러나 일단 공세로 나가기로 결정했으면, 마지막 순간까지 밀어붙여야 한다."
- 나폴레옹의 전쟁금언 에서
전쟁의 기술과 관련한 유명한 고전으로는 손자의 손자병법 ,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등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폴레옹 또한 이들 못지않게 전쟁기술에 관한 비중 있는 인물로 거론된다. 한국에서는 흔히 나폴레옹 하면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을 남긴 인물 정도로 기억되고 있지만, 사실 그는 군사적 정치적 천재로서 세계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가 남긴 전쟁금언들은 오늘날에도 다방면으로 연구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주의 깊게 검토해보고자 하는 것 역시 나폴레옹의 전쟁금언들 중 하나다. "일단 공세로 나가기로 결정했으면, 마지막 순간까지 밀어붙여야한다"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기업을 운영하는 자본가들은 아마도 이 구절을 이른바 공격경영의 이론적 근거로 삼으려 할 것이다. 노동운동에 복무하는 동지들도 나름대로 이 구절로부터 무언가 영감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며, 단호하고 대담한 공격의 필요성을 입증하기 위한 근거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그처럼 간단하지는 않다. 나폴레옹은 단순하게 "돌격 앞으로!"를 외치지는 않았다. 또한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나폴레옹의 실제 경험을 통해 그의 주장이 갖고 있는 한계가 드러나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전쟁금언이 갖고 있는 의의를 충분히 이해하고 살리기 위해서는 비판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심사숙고
나폴레옹은 "진군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심사숙고"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비단 전쟁뿐만 아니라, 노동조합투쟁과 같은 일상적인 대결에서도 흔히 등장한다. 많은 노동조합들에서 과연 바로 지금이 전면전에 들어가야 할 시기인가, 아니면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격론을 벌이곤 한다. 자본가에 맞선 투쟁은 가상공간에서의 게임과는 달리, 아주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에 그러한 격론은 불가피하다. 즉 우리는 승승장구하며 빛나는 승리를 쟁취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쓰라린 패배를 겪어야 할 수도 있다. 패배할 경우 노동자들은 빚더미에 올라 끔찍한 경제적 고통을 맛보게 되고, 구속과 같은 처벌을 감수해야만 하며, 심지어 노동조합이 파괴되는 사태까지 야기될 수 있다. 때문에 당면한 투쟁의 조건과 상황, 자본가들의 준비정도와 우리의 준비정도, 서로가 갖고 있는 힘의 크기 등에 관하여 치밀하고 객관적이며 냉정한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심사숙고"의 결과 지금은 오직 자본가들에게만 유리한 시점이며, 우리로서는 투쟁의 준비가 대단히 불충분한 상황이라면 전면적인 싸움을 뒤로 미루고 보다 철저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오직 자본가들에게만 유리한 시점에서 우리가 먼저 싸움을 시작한다는 것은 용감한 행동일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대개의 경우 그 용감성조차도 단지 맹목성에 불과했음이 드러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투쟁을 위한 충분한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으며, 가장 적절한 시기가 다가왔는데도 싸움에 나서지 않는다면 모든 훌륭한 기회들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불가피하게 투쟁에 나서야만 하는 경우
하지만 현실에서는 위에서 다룬 것처럼 단순하게 문제가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의 투쟁대열이 미처 충분한 준비를 완료하지 못했고 전체적으로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시점이지만, 달리 운신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투쟁에 나서야만 하는 경우들이 있다. 특히 최근의 노동자투쟁들은 종종 그런 양상을 띤다. 자본가들은 자신에게 들이닥치고 있는 절박한 위기를 노동자에게 떠넘기기 위해 공세적으로 발톱을 드러낸다. 정리해고의 이름으로 하루아침에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쫓겨난다. 민주노조를 박살내려는 포악한 공격이 이루어진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은 단결의 첫걸음인 노동조합 건설에 성공하자마자 운명을 건 싸움터로 빨려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자본가들의 가차 없는 공격 속에서 우리는 투쟁의 준비정도와 무관하게 투쟁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이처럼 충분히 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투쟁을 강요당했다 하더라도, 일단 투쟁이 시작된 이상 수세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가장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
공세를 취해야 하는 이유
나폴레옹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아무리 숙달된 기동능력을 가졌더라도 후퇴는 항상 부대의 사기를 약화시키게 된다. 왜냐하면 아군은 승리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는 반면 적은 승리의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노동자투쟁에서도 다르지 않다. 노동자들이 자본의 공격에 맞서 단호한 응징을 가하지 못한다면, 반대로 자본의 공격에 우왕좌왕하고, 숨을 곳을 찾고, 도망칠 궁리를 한다면 자본가들은 더한층 기세등등해질 것이다. 돌풍처럼 투쟁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한번 꺾인 투지는 다시 회복하기 힘들다. 가령 하나의 투쟁에서 노동자들이 충분한 자신감을 갖지 못하여 투쟁의 수위를 스스로 낮추는 경우가 있다. 이때 이들은 스스로 투쟁의 수위를 낮춤으로써 자본가들도 적정선에서 양보하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곤 한다. 하지만 그런 희망은 근거 없는 희망이다. 노동자가 스스로 투쟁수위를 낮출수록 자본가들은 노동자투쟁을 더욱더 얕잡아볼 것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자본가들은 더욱더 공격적인 태도로 완전한 승리를 향해 돌진할 것이며, 노동자들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주려 광분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해서 "애당초 투쟁에 나서지 말았어야 했다"고 투덜거리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나폴레옹이 이야기했듯이 전면적인 투쟁을 개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서는 최대한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이 투쟁이 시작되었다면 최선을 다해 그 싸움을 전개하는 것만이 상황을 유리하게 반전시켜나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다.
그러므로 투쟁의 시기에 사기를 끌어올리고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최초의 접전에서 확실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역량을 핵심지점에 집중시킬 수 있어야 하며, 우리의 기세와 투지에 놀란 자본가들이 대열을 추스르고 반격을 가해오기 전에 지속적으로 공세를 취하여 탄탄하게 진지를 확보해야만 한다. 요컨대 어떤 상황에서든 일단 투쟁이 개시되고, 비록 불리하지만 그 투쟁을 피해갈 도리가 없는 상황이라면, 더 이상 머뭇거림이나 주저함 없이 최고의 결의와 투지로 무장하고 가장 공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만이 우리의 피해를 최소로 줄이고 승리의 가능성을 최대로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전진과 후퇴
그러나 전술은 단선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노동자투쟁의 일정한 시기에 옳았던 입장도 자본가들의 전술이 바뀜에 따라 옳지 않은 것으로 뒤바뀔 수 있다. 자본가들의 투쟁력이든 노동자들의 투쟁력이든, 이 투쟁력은 대단히 유동적이며 수시로 변화한다. 특히 투쟁의 매 국면마다 변동하는 대중들의 사기, 심리, 정서, 분위기까지 고려한다면, 특정한 시기에 유효했던 투쟁방향이 다른 시기에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밀어붙여야 한다"는 나폴레옹의 주장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나폴레옹 자신의 경험이 그것을 보여준다. 승승장구를 거듭했던 나폴레옹은 자신감으로 충만한 채 러시아 원정에 나선다. 러시아는 나폴레옹 군대를 즉각 격퇴하는데 실패하고, 수세적으로 후퇴했다. 이 모습을 보고 나폴레옹은 승리감에 도취된 채 진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곧 늪에 빠졌다. 자신의 근거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옴으로써 각종 군수품을 조달하는데 애를 먹었다. 러시아의 날씨와 토양에 익숙하지 못한 나폴레옹 군대는 빠르게 지쳐갔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진격의 템포와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었지만, 후퇴하는 러시아 군대를 보며 승리감에 젖은 나폴레옹은 치밀한 계산을 하는데 실패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성공하지 못하고, 큰 타격만을 입은 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주어진 상황에서 전진과 후퇴의 배합을 적절히 할 수 없는 자에게는 쓰라린 실패만이 기다리고 있다. 노동자투쟁에서도 다를 바 없다. 과감히 진격해야 할 시기에 움츠리고 주저앉음으로써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주는 사례가 종종 있다(가령 최근의 철도파업들). 후퇴의 시점을 적절하게 잡아내지 못함으로써 더 큰 손실을 입게 되는 경우 또한 있다. 어떤 경우에 속하든 간에, 전진과 후퇴의 적절한 결합에 실패하는 경우 항상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 노동운동의 역사적 교훈이었다.
역사적 교훈
이상의 논의는 대략 3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다.
(1) 전면적인 투쟁을 앞둔 상황이라면 치밀한 준비와 계획 속에서 가장 적절한 진격의 순간을 잡아채기 위해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며, 투쟁의 조건이 채 무르익기 전에 때 이른 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도 있다. 투쟁을 준비한다는 것은 곧 그 투쟁을 이끌어나갈 선진층과 광범한 대중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좁히고, 최대한 밀접하게 결합하도록 조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본가들은 미리 시험적인 도발을 가함으로써 이 선진층을 "색출"하고 대중으로부터 솎아내고 싶어 한다. 충분한 사전 조직화를 통해 이 덫에 걸려드는 것을 막아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아무 때나 "결전"을 선포해서는 안된다. 여기서는 말 그대로 "심사숙고"가 필요하다.
(2) 하지만 상황이 언제나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항상 우리에게 유리한 시점과 조건에서만 투쟁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적을 전혀 상정하지 않고 전투를 사고하는 것이다. 수많은 생존권투쟁들이 보여주듯이, 미처 충분한 준비태세를 갖추지 못했지만 불가피하게 투쟁에 나서야만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 상황에서 "심사숙고하는 태도"는 아주 빠르게 "머뭇거리는 태도"로 변화한다. 일단 돌이킬 수 없이 투쟁이 개시된 상황이라면 더 이상 주저함 없이 가장 단호하고 공세적인 태도로 투쟁에 나서야 한다. 그것만이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하고 가장 나은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3) 그럼에도, 전진과 후퇴에 관한 경직된 태도는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때로는 우리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후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힘을 다해 끝까지 싸워보지도 않은 채 지레 겁을 먹고 후퇴한다면 그 후퇴는 치욕적인 후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해 싸웠고, 단지 지금으로서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 이상 투쟁을 밀어갈 수 없다면, 더 멀리 내다보고 더 멀리 도약하기 위해 후퇴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 현명함이 없다면 오직 "쓰라린 경험" 외에는 얻을 것이 없을 것이며, 과연 무엇이 실패의 교훈인지 깨닫지도 못할 것이다.■
"더 이상 그들의 손으로 덫을 놓지 않습니다"
지난 4월30일(토) 부산역에서 열린 115주년 노동절 기념 집회때.. 김진숙 지도위원의 연설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따끔한 소리, 그 울림에 많이 울었습니다.. 눈에 확연한 줄어든 대오.. "주5일제 되면서 토요일 집회하면 안된다"는 말을.. 일상처럼 하고 일상으로 받아 들이는 정규직 노동자가 있는한.. 박창수 열사의 아들 용찬이가 박 열사가 죽던 나이가 되고, 김주익 열사의 아들 준엽이가 김 열사가 죽던 그 나이가 되어도.. 우리는 말로만 '연대'를 외치지 않을까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부치지 못하리란 걸 알면서도 밤새워 쓰는 편지도 있고 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기다려지는 편지가 있습니다.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기다리게 되는 사람이 있고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밤은 자꾸 오고 술마저 취하지 않는 밤. 새벽이 얼마나 더디 오는지 새벽을 견뎌 본 자는 압니다. 그런 밤, 신내린 무당처럼 산에 올라 부를수록 상처가 되는 이름을 목놓아 부르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언제나 늦게 오던 사랑. 다시는 볼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그게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일은 얼마나 쓸쓸합니까? 내가 스물 하나 일 때 박창수도 스물 하나였고 내가 스물 셋일 때 스물 하나였던 김주익을 만났던 언제나 거기서부터 떠오르는 이 형벌같은 기억들은 얼마나 잔인한 일입니까? 참 잘 자란 용찬이가 지 에미가 가슴속에 눈물의 저수지를 파놓고 그 물 떠 먹여가며 그 물로 씻겨서 키웠을 용찬이가 우리가 처음 만났던 스물 한 살. 소나무처럼 푸르른던 그 때 그 애비의 나이가 되었건만 아직도 죄스럽기만 한 우리는 준엽이 그 아이가 그 애비만한 나이가 될 때 그 때 우린 그 아이 앞에 무엇이 되어 서 있을까요? 내게 남은 시간들을 다 내주고 그들이 단 하루를 더 살 수 있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 하루동안 아이들만이라도 볼 수 있게 했어야 했습니다. 그 따뜻하고 보드라운 것들을 비벼보고 만져보고 빨아도 보고 부서지도록 안아도 보고 그랬어야 했습니다. 미안하다는 너무너무 미안하다는 그 말이라도 했어야 했습니다. 감빵안에서 징벌방에서 그리고 대공분실에서 혼자 당하는 일의 처절함, 혼자 견뎌내야 하는 그 참혹함을 알면서도 하나는 감방 안에서 하나는 크레인 위에서 하나는 도크바닥에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던 겁니다. 박위원장이 주익씨를 만나지 않았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저승에도 북극이란게 있고 남극이란 것도 있어서 그들의 거리는 천리나 만리나 되게 멀어서 그들이 우연히라도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 예수님께 빌고 부처님께도 빌었습니다. 박위원장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보냈냐고 주익이를 어떻게 이렇게 보냈냐고 얼마나 원망을 하겠습니까? 그 착해빠진 사람이 혼자서 목에 밧줄을 걸 때까지 니들은 도대체 어디서 뭘했던 거냐고 물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산 자는 누구나 죄인이었던 그 날 이후. 우리는 각자의 양심에 검은 리본을 달았었고 스스로에 대해 반성이란 것도 했습니다. 129일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목매달아 죽은 시신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을까? 함께 하지 못했던 자책감에 몸부림을 했었고 우리 모두의 죄를 혼자 뒤집어쓰고 속죄한 재규형 때문에 한 동안 서로 눈을 마주치는 일조차 두려워했습니다. 누구나 복수를 다짐했었고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맹세도 했습니다. 그들이 남기고 간 새*들 또래의 아이들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살가죽이 불에 닿는 느낌이었고 키가 큰 사람을 보는 것 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고 했었습니다. 연대해야 더 이상 죽지 않는다고 수 천번도 더 외쳤고 값비싼 댓가를 치르고 깨달은 노동자는 하나란 사실을 다시는 잊지 말자 했습니다. 우리 그 때 그러지 않았습니까? 우리 그 때 다들 그러지 않았습니까? 부산 노동자도 그랬고 울산 노동자도 그랬고 여성노동자도 그랬고 남성 노동자도 그랬고 늙은 노동자도 그랬고 젊은 노동자도 그랬습니다. 정규직도 그랬고 비정규직 노동자도 그랬고 금속노동자도 그랬고 병원노동자도 그랬고 밖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그랬고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그랬습니까 그 일로부터 20년이 지나고 200년이 지난 것도 아닌데 그토록 철폐를 외쳤던 신자유주의는 우리들의 자연스런 일상이 되어 있습니다. 비정규직은 먹고 살기 위해 잔업철야를 해야하고 정규직은 짤리기 전에 한 대가리라도 더 하려고 잔업특근에 목숨을 겁니다. 연대투쟁 열심히 하는 집행부는 재선에 실패하고 임금 많이 올리고 성과급 많이 따내는 집행부는 인정받습니다. 성과급 받아서 차 바꾸고 그 차 값 할부금 때문에 잔업을 또 하고 뼈골 빠지게 잔업한 돈 모아서 큰 집으로 이사했으니 융자 갚고 관리비 감당하려면 특근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큰 아이 학원비는 점점 늘어나는데 작은 아이마저 학원을 시작해야 하고 그렇게 키운 새*들을 죄다 비정규직이 되고 비정규직과 실업자는 각자 알아서 알맞은 방법으로 자살하고 정규직은 과로사와 산재로 죽습*다. 열 사람 하던 일을 다섯 사람이 해도 충분하다는 걸 우린 점점 늘어나는 과로사와 근골격계를 감수하면서 입증해줬고 그렇게 우리는 저들의 구조조정을 합리화 시켜줬습니다. 결국 다섯 사람이 하던 일을 세사람이 해도 된다는 또 다른 구조조정의 무덤을 우린 우리 손으로 열심히 파고 있습니다. 이제 자본가들은 더 이상 그들의 손으로 덫을 놓지 않습니다. 노동자들 스스로 덫을 만들고 그 덫에 걸릴 순서를 알아서 정하고 1번 비정규직, 2번 여자, 3번 늙은이 순으로 차례대로 그 덫에 밀어넣습니다. 공장 한쪽에서 비정규직은 투쟁하고 그 코앞에서 정규직들이 탁구를 치고 족구를 하는 것도 더 이상 낯선 광경이 아닙니다. 비정규직의 숫자가 정규직을 넘어선 공장에서 노조간부들이 사무실에 앉아 각자 등돌리고 게임에 몰두하는 모습도 이제 자연스런 일상이 돼버렸고 에어컨 빵빵한 노조 사무실 소파에서 노조간부들이 연예인 X파일을 논할 때 엉덩이 붙이고 앉을데라곤 화장실 바닥 밖에 없는 청소용역 아지매들에겐 회사의 냉대보다는 노조의 무관심이 더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이은주의 자살에 대한 관심만큼 이용석의 죽음에 우리들이 관심을 쏟았더라면 박일수는 안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직도 저는 합니다. 최희섭이나 박주영에 대한 관심의 반만이라도 우리가 과거사법, 사립학교법에 대해서 가진다면 자식을 먼저 보낸 늙은 부모님들이, 줄줄이 돌아가시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전교조 동지들이 그들끼리만 거리를 헤매는 수치스런 일만큼은 막아낼 수 있다고 저는 여전히 믿습니다. 농민들이 제 손으로 키운 과일을 불태우며 울면서 싸우는데 수입과일을 사먹는 노동자가 어찌 세상의 주인일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쏟은 오물을 청소용역 아지매를 전화로 불러 치우게 하는 노조간부가 누구의 존경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규정이라는 이유로 역 구내에서 노점상 할머니와 노숙자를 눈물 한 방울도 없이 쫓아내는 노조간부가 집회에 나와서 외치는 평등과 해방은 얼만큼이나 진실입니까? 배차 시간 때문이란걸 알지만 장애인이 온 힘을 다해 손을 드는데 그냥 지나치는 버스 노동자가 자신들이 투쟁할 때 누구에게 당당히 연대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지율스님의 그 일관된 진정성이 김주익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그 생각을 왜 우리는 안합니까? 이주노동자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칠건 빨리빨리와 씨8놈이 아니라 연대와 인간의 가치입니다. 1300만 중에 840만이 비정규직이 되는데 10년이 채 안 걸렸습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은 무궁화와 고속철이 아니라 같은 열차의 앞칸과 뒷칸일 뿐입니다. 1호차부터 10호차까지 비정규직을 인질로 태우고 지옥으로 돌진하는 이 죽음의 고속철을 11호차부터는 정규직이 실려있고 자유석엔 우리 아이들이 실려 달려가고 있는 겁니다. 300KM로 달리는 고속철에서 혼자 뛰어내릴 수 없습니다. 다 죽지 않으려면 멈춰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게 콩 한쪽뿐이라 하더라도 그걸 나눌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진정한 연대입니다. 대우자동차 창원 공장처럼 부산은행처럼 정규직이 나서서 비정규직을 조직하는 일부터 합시다. 비정규직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다 죽지 않으려면 그래야만 합니다. 스물 한 살 용접공 제게 그 때 가장 두려웠던 건 아침이 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매일 그런 아침을 맞을 비정규직들에 실업자들에게 우리가 희망이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14년째 되풀이하는 다짐이지만 내년에 좀더 달라져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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