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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맹파업 20주년 기념 특별기획
다시 읽는 85년 6월 구로동맹파업 노조간부 구속으로 촉발…일주일 동안 구로지역 들불처럼 확산 “노동자를 영원히 노예로 부리려는 독재정권과는 한 치의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8백만 노동자가 민주노동운동의 깃발아래 모이는 그날까지 선봉에 서서 굽힘없이 싸워나갈 것을 선언한다. … 노동자를 탄압하는 폭력정권은 물러가라!” 85년 6월 24일 구로동맹파업으로 해고된 노조원들이 7월23일 가리봉 오거리에서 ‘노동자 연대투쟁 선언-노동운동 말살정책을 분쇄하자’는 선언문 중 일부다. 한국전쟁 이후의 최초의 ‘노동자 연대투쟁’에 더해 구로동맹 파업은 ‘정치성’을 분명히 드러냈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폭압정치에서 유화국면으로 당시 상황을 먼저 들여다보자. 전두환의 폭압정치가 1983년말부터 이른바 유화국면에 접어든다. 노동운동에는 더할 나위 없는 부활의 시기였다. ‘블랙리스트’ 때문에 수년간 취업을 원천봉쇄당하고 있던 해고노동자들은 84년 1월 ‘블랙리스트철폐대책위원회’를 결성해 블랙리스트 철폐투쟁을 펼쳐나갔다. 또 3월에는 ‘기업별 노조운동의 한계 극복’을 목표로 내걸고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이하 ‘노복’)가 창립된다. 전 원풍모방 노조위원장 방용석(현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을 비롯 70년대 민주노조 간부들이 주축이 된 ‘노복’은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높이기 위한 각종 교육사업과 노동법 개정투쟁을 전개했다. 노동현장에서도 그동안 억눌렸던 요구가 폭발적인 형태로 터져 나왔다. 84년 5월 대구지역 택시 노동자 1천여명이 사납금, 부제 완화, 노조결성 방해 중지를 요구하며 시내 중심가에서 격렬한 차량시위를 벌였다. 택시 노동자들의 투쟁은 삽시간에 부산, 경북 경산, 대전, 서울, 강원 강릉 등지로 번져나갔다. 한편 청계피복 노동자들은 노조 복구투쟁을 본격화했다. 5월1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합법성에 관한 공개토론회’를 개최한 데 이어 9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3차례 합법성 쟁취대회를 열었다. 이런 가운데 구로공단을 비롯한 경인지역 사업장에서는 노조를 결성하거나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려는 활동들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80년대 중반 구로지역은 대부분의 업체가 수출을 위한 경공업제품을 생산하던 곳으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 관리직과의 차별 대우 등이 극심했다. 이들은 비슷한 근로조건과 노조결성 시기 등으로 인해 조합 간부는 물론 조합원간의 연대 프로그램을 통해 교류와 연대를 강화해 왔다. 85년 임금인상 투쟁시도 상호교류를 통해 이러한 연대는 지속된다. 당시 사건 일지 85 04.10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 결성 85.06.01 구로지역노조민주화추진연합’(구민련) 결성 85.06.22 대우어패럴 노조 집행부 김준용(위원장), 강명자(사무장), 추재숙(여성부장) 경찰에 연행 85.06.23 대우어패럴, 가리봉전자, 효성물산, 선일섬유 노조 동맹파업 결의 85.06.24~29 대우어패럴 파업 85.06.24~26 효성물산 파업 85.06.24~27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파업 85.6.25~26일 남성전기, 세진전자, 롬코리아 준법농 85.06.27~28 삼성제약 중식거부 85.06.28 부흥사 파업 85.06.29 대우어패럴 농성 강제해산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구속으로 촉발 ‘구로동맹파업’의 결정적 계기는 대우어패럴 노조간부들에 대한 경찰의 구속조처였다. 1985년 6월 22일 오전 11시. 경찰이 대우어패럴 노조사무실로 찾아와 김준용 위원장, 강명자 사무국장, 추재숙 여성부장 등 3명을 연행했다. 경찰은 4월의 임금인상 투쟁 때 파업농성을 주도하며 노동쟁의조정법과 집회및시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이들을 구속했다. 조합간부 8명도 불구속 입건됐다. ‘구로동맹파업’의 결정적 계기인 대우어패럴 노조간부들에 대한 경찰의 구속조처였다. 전두환 정권이 노동운동을 다시 강력하게 탄압하려는 신호탄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함께 연대했던 노동조합들에게 ‘위기’ 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이미 대우어패럴 이외의 타 노조간부들에게도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6월 23일 조합간부 3명이 구속된 것에 항의하며 파업농성에 돌입한 대우어패럴 노동자들. 6월 26일 현재 물 한 모금, 음식 한 끼 못 먹고 농성을 벌였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위원장 연행 소식을 전해들은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작업을 중단하고 1백여명이 총무과로 몰려가 고발 취소를 요구하는 농성을 전개한다. 다음 날인 23일 대우어패럴 외에 가리봉전자, 효성물산, 선일섬유, 청계피복 등 노조간부 2백여명은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24일부터 동맹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한다. ▲ 6월 24일 오후 2시 효성물산 조합원 400여명은 2층 작업장에 모여 파업농성에 들어갔다. 이들 역시 창문에 ‘노동3권 보장하라’ ‘민주노조 탄압말라’는 벽보를 붙이고 플래카드를 내걸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24일 오전 8시 경 대우어패럴 노동자 350여명의 파업을 신호로 오후 2시 효성물산 노조원 4백여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같은 시간 가리봉전자 노조원 5백여명, 선일섬유 노조원 70여 명 등도 파업에 돌입한다. 이들은 ‘구속된 김준용 위원장 등 노조간부의 석방과 노조탄압 중지’를 요구하고 나아가 ‘노동악법 폐지하라’, ‘폭력경찰 물러가라’ 등을 주장했다. ▲ 대우어패럴 농성시위를 탄압한데 항의하며 노동자, 학생들이 6월 24일 여의도에서 기습 가두투쟁을 벌였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이러한 노동자의 투쟁에 대해 회사측은 단전과 단수 조처를 단행했으며 경찰은 이들 공장 일대를 철통같이 경계했다. 공단 일대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6월 25일 남성전기 조합원 3백여 명이 오후에 농성을 벌이고 세진전자 노조원 250여명, 롬코리아 1백여명이 지지 철야농성을 하는 등 연대투쟁은 7개 업체로 확산된다. ▲ 서울 중부지방노동사무소에서 농성을 벌였던 노동자들이 경찰에 의해 끌려나오고 있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에 학생 및 재야의 지지도 이어졌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등 22개 단체에서 지지 농성이 있었고, 26일 오후에는 서울대생 2명이 ‘구속노동자 석방’을 요구하며 대우어패럴 맞은 편 협동봉제 공장에 올라가 지지 구호를 외치는 등 학생들의 지지 시위가 있었다. 27일에는 효성물산 80여명과 청계 노조 조합원이 노동부 중부지방사무소에 몰려가 노동부장관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탈진, 실신…강제해산, 대규모 해고 ▲ 창문에 걸터앉아 구호를 외치고 있는 대우어패럴 농성 노동자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경찰들의 공포 분위기 조성과 음식물 차단으로 인한 조합원들의 탈진과 실신 그리고 병원후송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대우어패럴 농성시위대는 1백여명으로 줄어든다. 효성물산과 선일섬유 노조는 26일 밤에 농성을 풀었고, 가리봉전자는 27일 관리직 남자 사원들에 의해 강제 해산 당했다. 6월 28일에는 부흥사노조원 120여명이 연대파업에 돌입했으나 쇠파이프와 몽둥이로 무장한 관리자와 남성사원들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해 80여명이 강제사직서를 쓰는 등의 탄압이 계속되었다. 대우어패럴에서는 노사간 협상이 6월 28일 있었으나 보복조치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달라는 노조의 요구를 회사가 거절함으로써 30분 만에 결렬된다. 마침내 6월 29일, 물도 끊기고 전기도 끊긴 상태에서 굶주리며 버티던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작업장 벽을 뚫고 진입한 관리자와 구사대들에 의해 강제해산당하면서 막을 내렸다. 동맹파업과 이를 지지하는 농성·시위 과정에서 모두 43명이 구속되고, 연인원 370명이 구류를 살았으며, 7백여명이 강제로 사표를 쓰거나 해고당했다. ▲ 6월 27일 노동부장관 면담을 요구하며 노동부 서울중부지방사무소에서 항의 농성하던 효성물산과 청계피복노동자들 중 한 명의 노동자가 허리를 다쳐 실신상태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김영미 효성물산 전 위원장은 “구속 후 1심서 풀려난 노동자들은 운동지도부가 궤멸되고 동지들이 흩어지면서 자연스레 운동을 이어갈 수 없었다”며 “결혼 전후로는 보수적인 남편과 집안에 노동운동 경험을 얘기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학생구속자가 없는 것과 관련 “공장에 8명의 학생들이 있었지만 노동자들이 보호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며 “경찰서에서도 배후조정 추궁이 있었지만 끝내 학생들이 앞장서 활동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학생들 가운데 ‘작은책’ 발행인이었던 강순옥씨 등이 있었다. ▲ 6월 28일 윤순녀, 이창복 등 민주, 민권운동단체들이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구로공단 노동자 연대 투쟁 탄압분쇄’ 연대농성 투쟁에 돌입했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부흥사의 안경환 전 조합원은 “심상정, 공계진, 문성현, 김영대 등 몇몇 당 활동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90년 이후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며 “바람직 한 것은 노동 등 각계에 층층이 쌓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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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2%가 전세계 부의 절반 소유-<유엔 연구소>
“전태일은 열사도 투사도 아니다” | ||||||||||||||||||||
[인터뷰]36주기를 앞둔 어머니 이소선의 목소리 | ||||||||||||||||||||
오도엽 기자 odol@jinbo.net / 2006년11월05일 21시46분 | ||||||||||||||||||||
전태일열사가 불이 된지 서른여섯 해가 됐다. 고혈압과 당뇨, 며칠 전에는 방에서 넘어져 걸음마저도 절룩거리는 열사의 어머니께 11월 13일이 다가오니 마음이 어떠시냐고 물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988년 책이 나왔지만 누구도 어머니께 책이 나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책을 보면 어머니가 아파할 것을 안 주위의 사람들은 어머니 눈에 책이 띄지 않게 하였다. “만호(현재 전태일기념사업회 황만호 사무국장)한테 그 책을 달라고 했더니, 지도 모른데. 그래서 내가 돌베개에 가서 사오겠다고 하니 갖다 주는 거야. 종득(전태일기념사업회 민종득 상임이사)이한테 전화해 왜 책 나온 거 말하지 않았냐고 하니까, 어머니 알면 아파하실까봐 그랬다는 거야.” 어머니는 열사에 대해서 인터뷰를 하든지 강연을 하고나면 사흘 밤은 꼬박 앓아누우신다고 한다. 책을 펴고 말을 하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커다란 돋보기로 밤을 새워 그 책을 읽은 어머니는 아직도 아프다. 책을 보신 아픔이 사라지기도 전, 다시 어머니께 열사에 대한 질문을 했다. 아마 11월 한 달은 꼬박 아파하셔야 할 것이다. 가시지 않은 아픔 위에 인터뷰를 시작하자 대뜸하시는 말이 “태일이는 열사도 투사도 아니야”다. “쌍문동 이백팔번지에 살 때 풀밭에 천막을 치고 살았지. 보로꾸를 세면도 바르지 않고 쌓아두고 천막을 친 게 집이야. 세면을 바르면 철거반원이 와서 허물면 보로꾸가 깨지잖아. 태일이는 철거반원이 오면 미리 벽돌을 내려두거든. 철거반원한테 당신들이 허물고 가도 우리는 잠을 자려면 또 벽돌이 쌓아야 한다, 벽돌이 깨지면 돈을 주고 사야하니까 미리 벽돌을 치운다고 한 거야, 그 뒤론 태일이가 없어도 철거반원이 오면 조장이 그 집은 벽돌 깨지지 않게 조심히 내려놔 하는 거야. 그러면 태일이가 일을 마치고 와서 다시 쌓았지.” 열사가 일을 마치고 나면 집에 오면 밥도 먹지 않고 벽돌을 쌓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밥을 지어 밥 먹고 하라고 차려주고 물을 뜨러 나갔다 오면 밥은 먹지 않고 일을 하고 있더란다. “밥 먹고 하라니까 하면 먹었다는 거야, 물 뜨러 간 사이에 밥을 다 먹을 수 없거든. 아랫집에 애들 둘이 사는데 벽돌을 쌓다보면 집들이 허물어져 아랫집이 훤히 보이는 거야. 아이들이 굶고 있거든, 그러니까 지 밥을 갖다 준 거야, 반이라도 먹고 주지 그러면, 저야 배고프면 어떻게라도 먹을 수 있지만 쟤들은 말도 못하고 굶어야 하잖아요 하는 거야. 태일이가 풀빵을 여공들에게 사줬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야.” 어머니는 아들이자 열사 전태일을 투사도 열사도 아닌 ‘사람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가 불이 되고, 청계천의 노동현실을 보고 일어선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한다. 36년 전 11월 13일에 어머니는 가지 않으셨다. 그 날 쌍문동에서 방송을 들으셨다. “쌍문동 이백팔번지에 사는 전태일이 기름을 붓고 몸에 불을 부쳤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야, 기어이 기름을 부었구나….” 조금 뒤 열사의 친구가 용케 잡히지 않고 빠져나와 어머니를 모시고 가려고 택시를 타고 왔더란다. 타고온 택시를 타고 가자고 했지만 어머니는 버스를 타고 가신다고 했단다. “19번 버스가 평화시장까지 가거든, 내가 택시 타고 빨리가서 태일이를 보면 기절하고 쓰러질게 분명해, 그래서 버스 타고 가자고 한 거지, 너(전태일)는 갔지만 나는 어찌 할까를 생각해야 할 것 아닌가, 그걸 생각하려고 택시를 안 탔는데 태일이 친구는 그 걸 모르고….” 허연 가제로 칭칭 감겨 입하고 코만 보인 아들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전태일열사는 빨리 죽기 위에 옷 속에 스폰지를 넣고 기름을 부었다. “엄마 나는 죽을 거야. 옷에 스펀지까지 넣었거든. 빨리 죽으려고. 어머니께 이 추한 모습 안 보여 주려고. 나 살리려고 다른 약 구한다 주사 놔준다 애쓰지 말고 내 말 꼭 들어 줘. 내 말 안 들어주면 나중에 천국에서 엄마 만나도 안 볼거야. 내 말 들어준다고 꼭 대답 해줘.” 그 말은 내 죽음을 헛되지 않게 어머니가 싸워 달라는 부탁이다. “엄마 들어주겠다고 더 크게 말해줘.” 말을 할 때마다 열사의 명치 부근이 부글부글 끓더란다. 그것을 본 의사가 열사의 목청 부분을 따니까, 말을 한 마디 할 때마다 피가 울컥 울컥 쏟아졌단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내 몸이 가루가 되도 끝까지 할 거다 하니, 더 크게 대답하라고 하는 거야, 말을 할 때마다 피가 폭 쏟아지고 크게 대하라고, 피가 푹 쏟아지고, 그걸 보고 탁 쓰러졌지.” 전태일은 열사도 투사도 아닌지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뒤로 투사가 되었다. “태일이가 말한 근로기준법 8가지 들어주지 않으면 장례식을 치루지 않는다고 했지, 시체를 동강동강 내서 내 치마 폭에 싸서 이 산에다 묻고, 저 산에 묻더라도.” 당시로 7천만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주겠다는 유혹도 있었다. “그 착한 아들의 뼈를 팔고 피를 팔아 좋은 집에 사고 따뜻한 밥 먹느니 죽어야지.” 중앙정보부에서 군법회의, 안기부로 어머니의 발걸음은 이천년대로 이어지고 있다. 36주기 추모식보다 앞서는 걱정이 있다. 분열되는 모습이 안타깝다. 쉽게 자신의 밥자리를 찾아가는 옛 식구들 때문에 안타깝다. 남편을 여읜 다음 해에 아들을 잃자 시어머니가 방에 담배를 밀어 넣어주더란다. 넋을 놓을지 모르니 담배라도 피우며 정신을 놓지 말라고. 일흔여덟, 어머니의 정신은 날이 서있다. "한 번 이 소리하고 나면 사흘 동안 이 속에 들었던 것 까뒤집어 놔았꼬 견딜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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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양극화 현상 갈수록 심화 | ||||||
노동부 ‘2005년 임금구조 통계조사’…대·중소기업, 학력별 임금격차 더 벌어져 | ||||||
대기업-중소기업, 학력간 임금격차가 더 벌어지는 등 갈수록 임금 양극화 현상이 심각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부가 지난해 6월 기준 상용노동자 5인 이상 6,495개(약 49만명) 사업체를 표본으로 한 ‘2005년 임금구조 기본 통계조사’ 결과를 31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대기업일수록 높은 임금 수준이 지속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10~29인 규모 사업체를 100으로 놓고 볼 때 500인 이상 사업체는 지난해 127.8(1.3배)로 2004년의 127.8에 비해 높아졌다. 반면 5~9인 사업체는 지난해 87.7로 2004년의 91.8로 낮아졌다. 이는 그만큼 대-중소기업간 임금격차가 더 벌어진 것을 의미한다.<표2 참조>
또한 고학력화가 진행 중인 가운데 고학력일수록 높은 임금수준을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르면 전체노동자 중 대졸이상 노동자는 2000년 24.0% 2001년 25.2%, 2002년 28.3%, 2003년 28.7%, 2004년 28.9%, 2005년 31.7%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고졸 노동자 1인당 임금을 100으로 놓고 볼 때 대졸 노동자는 154.9(1.5배)로 2004년 152.3에 비해 다소 증가했다. 대졸자의 임금수준은 99년 151.7을 보인 이래 2002년을 제외하고 전반적으로 증가추세를 이루고 있는 것. 대졸이상 노동자의 월급여액을 고졸노동자와 비교할 때 2001년 152.3%를 제외하고는 99년 151.7%, 2000년 150.9%, 2002년 149.4%로 축소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중졸이하의 경우도 지난해 85.5로 전년도보다 다소 올랐으나 99년 88.9를 보인 이해 해마다 하향곡선을 긋고 있는 등 학력차에 따라 임금격차가 더 벌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표1 참조>
노동자의 고령화 현상은 더욱 심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르면 노동자 평균연령은 37.7세로 99년 99년 35.9세, 2000년 36.2세, 2001년과 2002년 36.5세, 2003년 37.1세, 2004년 37.5세에서 매년 높아져가고 있다. 연령별 임금수준은 남성노동자가 45~49세, 여성노동자가 30~34세에 임금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으로 노동부는 남녀 노동자가 임금 격차는 지속적으로 축소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남성노동자 대비 여성노동자 월급여액(상여금 및 성과급 제외)은 2002년(64.8%)을 제외하고 99년 63.8%, 2000년 64.8%, 2001년 65.1%, 2003년 65.2%, 2004년 65.7%, 2005년 66.2%로 매년 높아지고 있으나 60%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성별 임금격차는 여전히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
‘KBS독립영화관’ 11월 특집…‘파업전야’ 등 4편 첫 방송 | |||
1990년 4월 7일, 서울 혜화동에 자리한 예술극장 '한마당', 영화가 상영중인 극장 안으로 한무리의 경찰이 진입합니다. 조명이 켜지고, 털털거리며 돌아가던 영사기가 이윽고 멈추더니 영사기와 플름에 대한 경찰의 압수작업이 시작됐습니다. 상영 시간을 채 다 못 채우고 멈춰선 영화의 제목은 '파업전야'. 한국공연윤리위원회 심의를 받지 않은데다, 파업을 선동하는 불온한 내용이라는 것이 압수의 이유였습니다. 그로부터 16년. 영화 '파업전야'가 지상파 TV를 통해 시청자들을 만납니다.
■ KBS독립영화관 11월 특집…독립영화 4편 첫 방송 KBS독립영화관(매주 금요일 밤 1시 10분, 1TV)이 오는 3일과 10일 2주에 걸쳐 '한국독립영화의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특집방송을 마련합니다. 11월 특집으로 마련된 이번 방송에서는 특히 1970~90년대 한국 독립영화사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난 작품들이 방영될 예정이어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첫주인 11월 3일에는 한국 독립영화 1세대로 분류되는 이익태 감독의 1970년 작 '아침과 저녁 사이', 한옥희 감독의 76년 작 '색동'과 함께, 1980년대 독립영화계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는 이정국 감독의 단편 '백일몽'(84년 작)이 방영됩니다. 11월 10일에는 1990년대 한국 독립영화의 상징, '파업전야'가 처음으로 방송 전파를 탑니다. 1990년 세계 노동절 101주년 기념으로 영화집단 장산곶매가 제작한 16mm 장편영화 '파업전야'는 바로 한 해 전 장산곶매가 5.18 광주를 소재로 만든 영화 '오! 꿈의 나라'와 함께 8,90년대 한국 독립영화의 지표가 됐던 작품입니다. 이번 특집을 기획한 KBS 송현주 PD는 "70~90년대 우리나라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통해 한국 독립영화 역사을 다시 보는 기회를 마련하고 싶었다"며 "독립영화의 현주소를 짚어보고, 관심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 압수·상영금지 속 전국 30만 관람 이번 특집에서는 특히 90년대 초반, 당국의 필름 압수와 상영금지 속에서 '비밀리'에 유통됐던 독립영화 '파업전야'가 처음으로 TV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어서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은, 장윤현 등 4명의 감독이 공동 연출한 '파업전야'는 80년대 말 노동현장의 현실을 담아내며 독립영화계에서 본격적인 사실주의 영화의 등장을 알린 작품. 2천만 원의 제작비로 3개월간 제작된 이 영화는 당시 부평에 있는 한 금속공장에서 촬영했고, 등장하는 배우들 중 상당수가 현장 노동자들이었던만큼 당시 노동현장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990년 4월 7일, 한마당 극장에서의 상영 이틀째 경찰의 압수조치가 시작되면서 사실상 공식 상영 경로가 막힌 '파업전야'는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상영을 계속했는데요, 당시 영화가 상영되는 대학 구내에서는 진입을 시도하는 경찰 병력과 이를 저지하는 학생들간의 몸싸움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이후 전국 11개 도시에서 30만 명 이상이 이 영화를 본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영사기와 필름이 압수되던 상황을 TV 방영이 가능하도록 만든 16년의 세월. 그 시간들은 '파업전야'를 공동 연출했던 주인공들에게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당시 함께 영화를 만들었던 4명의 연출자(이은, 이재구, 장동홍, 장윤현) 중 한 사람인 이은 씨는 제작자로 변신해 현재 MK픽처스 대표로 있고, 1997년 '접속'으로 공식 데뷔한 장윤현 감독은, 영화 '텔미 섬씽' 이후 영화 제작투자에 전력하다 현재 영화 '황진이' 연출에 한창입니다. KBS독립영화관 '한국 독립영화의 전설'은 오는 3일 밤 1시 10분 시청자들을 찾아갑니다. |
김유선 노사연 소장, 통계청 경활조사 부가조사 분석 | ||||||||||||
“국가가 비정규직 차별 되레 조장” | ||||||||||||
교육훈련 격차 무려 7.2배…비정규직 절반 이상 ‘비자발적’ 취업 | ||||||||||||
원자료(raw-data) 분석방법 차이에 따라 해석이 다르기도 하지만 비정규직 규모 증감추이나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격차가 이제 구조화(또는 고착화) 양상을 띤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통계청의 올 8월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 결과를 보자. 31일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의 분석결과에 따르면, 비정규직 규모는 2003년 784명에서 2006년 845만명으로 꾸준히 늘어나고 있지만 전체 임금노동자 가운데 비정규직 비율은 2003년부터 매년 55.4%, 55.9%, 56.1%, 55.0%로 55~56% 안팎에서 구조화되고 있다. 임금도 그렇다. 정규직을 100으로 할 때 비정규직 월 평균임금은 2003년 51.0, 2006년 51.3이고, 시간당 임금 역시 각각 53.1, 52.4였다. 해가 바뀌어도 그 수준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상위 10%와 하위 10% 간 임금격차를 나타내는 임금불평등도 마찬가지다. 시간당 임금을 기준으로 할 때 2003년 5.1배에서 2005년 5.4배로 증가한 뒤 2006년에도 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OECD 국가 중 임금불평등이 가장 심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2005년 4.5배)보다 더 심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없다. 그나마 올 8월 조사에서 눈에 띠는 대목은 정부부문인 공공행정에서 비정규직 규모가 늘었다는 점이다. 2003년 15만명(20.4%)에서 2006년 20만명(25.0%)으로 규모, 비율이 모두 늘었다. 정부가 공공부문에서부터 비정규 대책의 모범을 보이겠다고 했던 공언(公言)이 공언(空言)임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올해로 7회째인 부가조사에서 처음 실시된 취업의 자발성 여부와 교육훈련 수혜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들이다. 교육훈련, 기업을 매개고리로 정규직에 편중
먼저 본인부담 교육훈련은 정규직(2.5%)과 비정규직(2.6%)으로 거의 같았고, 회사부담 교육훈련은 정규직(27.0%)이 비정규직(12.2%)의 2.2배였다. 상식을 크게 벗어나는 격차는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가기관이 부담하는 교육훈련 격차가 7.2배에 달했다는 점이다. 정규직이 12.2%인 반면 비정규직은 1.7%에 그쳤다. 이를 두고 김유선 소장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교육훈련 격차는 상당부분 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실시(또는 지원)하는 교육훈련 프로그램이 노동자 개인의 수요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기업을 매개고리로 해 정규직에 편중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 소장은 특히 “국가기관부담 교육훈련에서 7배가 넘는 격차가 생긴 것은 국가기관이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더 조장하고 있음을 반증한다”고 비판했다. ‘목구멍이 포도청’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가사·육아와 노동을 병행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파트타임 같은 비정규직을 택하는 여성노동자가 많은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과 달리 우리나라엔 어쩔 수 없어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 조사에서 취업의 자발성 여부가 '수치'로 드러났다. 정규직은 현재 일자리에 자발적으로 취업한 경우가 93.0%였지만 비정규직은 48.1%에 그쳤다. 절반이 넘는 51.9%가 비자발적 취업자인 셈이다. 비자발적으로 취업한 사유는 ‘생활비 등 당장 수입이 필요해서’(34.0%), ‘원하는 일자리가 없어서’(8.8%) 순이었다. ‘안정된 일자리’(44.3%)와 ‘근로조건 만족’(42.0%)을 이유로 정규직으로 취업했다는 경우와 대별된다. 고용형태별로는 호출근로(91.7%)에서 비자발적 취업자가 가장 많았고, 가내근로(65.3%), 장기임시근로(55.5%), 용역근로(53.3%), 시간제근로(53.0%), 특수고용(48.5%), 기간제근로(48.2%), 파견근로(41.5%) 등의 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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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건설…깨져도 받을 수없는 합의안이다 | |||||||
포항건설 합의안 부결...또 다시 선택한 투쟁 | |||||||
오도엽 기자 odol@jinbo.net / 2006년09월14일 12시42분 | |||||||
아침부터 집을 지키고 있는 포항건설노동자 정 씨는 답답하다. 아들은 학교에 가고, 아내는 일터에 갔다. 마트에서 시간제로 일하는 아내의 벌이로는 생활비도 팍팍한 형편. 아들이 다니는 학원도 다음 달부터는 그만 둬야할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추석은 생각할 여유조차도 없다. 담배라도 끊어야 하는데, 파업 이후로 끊기는커녕 더욱 늘어가는 게 담배다.
파업을 접고 일을 하고 싶다. 아니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도저히 이번에 나온 합의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 13일 조합원 임시총회에서 갈등을 거듭하다 반대에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의 투쟁이 아쉬워서도, 하중근 열사의 죽음을 이대로 끝낼 수 없어서도 아니다. “합의안이 가결되었다고 현장에 돌아갈 수 있느냐하면 그게 아니야. 고용이 보장되지 않았는데 파업을 그만둔다고 돌아갈 일터가 있는 게 아니잖아. 죽고 머리통이 깨져가며, 집에서는 눈초리를 받아가며 싸운 대가가 이번 합의안은 아냐.” 2천여 명이 모여 합의안 찬반투표를 했는데, 찬성은 7백여 명, 반대는 1천3백여 명이었다. 투표가 끝나고 구속된 이지경 위원장을 대신한 최규만 직무대행은 책임을 통감하고 직무대행직을 사임하였다. 집행부의 한 간부는 한숨을 내쉰다. “합의안을 만들고, 가결되리라고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상이외로 반대가 많았다. 실제 투쟁에는 힘이 실리지 않으니, 교섭에서 우위를 점하기도 힘들고, 이대로 끌고 간다는 것도 부담이 된다. 조합원들의 뜻을 알았으니 비상대책위를 꾸려 투쟁의 힘을 다시 일궈가는 길 밖에 없다.” 이번 합의안은 기존 단체협약에서 보장되었던 인사원칙인 ‘조합원 우선채용’ 조항마저 포기한 ‘개악안’이라고 조합원들은 반발을 한다. 실제로 파업지도부는 전문건설업체가 제시한 기존보다 후퇴된 단협안을 수용하였다. “이대로 파업을 끌어가는 것은 조직력을 약화시키고, 노조가 깨지는 일마저 발생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되었다.
“노조가 깨진다고 했는데, 합의안에 찬성을 하고, 파업을 멈춘다고 조직이 지켜질 것 같으냐. 개악된 단체협약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노조는 끝장이다”고 정 씨는 흥분을 한다. “아예 잘 됐다. 다시 싸우는 길 밖에 없다. 가결되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도 됐다. 이번 찬반투표 결과는 그동안 평화적인 싸움만을 외쳤던 지도부에 대한 불신임도 포함된 것이다”며 주섬주섬 조끼를 입는다. 오후 3시에 있을 집회에 나가기 위해서다. 하지만 정 씨의 마음은 오락가락한다. 다시 힘을 내서 싸울 수 있을까, 아내의 눈초리는 더욱 날카로워질 텐데, 추석은 어찌하고, 아들 학원은 그만두게 해야 하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걱정거리는 이어가지만 조끼를 입고 머리띠를 챙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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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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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다 갑니다. 자료 고맙습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