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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85년 6월 구로동맹파업

구로동맹파업 20주년 기념 특별기획
다시 읽는 85년 6월 구로동맹파업

노조간부 구속으로 촉발…일주일 동안 구로지역 들불처럼 확산

“노동자를 영원히 노예로 부리려는 독재정권과는 한 치의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8백만 노동자가 민주노동운동의 깃발아래 모이는 그날까지 선봉에 서서 굽힘없이 싸워나갈 것을 선언한다. … 노동자를 탄압하는 폭력정권은 물러가라!”

85년 6월 24일 구로동맹파업으로 해고된 노조원들이 7월23일 가리봉 오거리에서 ‘노동자 연대투쟁 선언-노동운동 말살정책을 분쇄하자’는 선언문 중 일부다. 한국전쟁 이후의 최초의 ‘노동자 연대투쟁’에 더해 구로동맹 파업은 ‘정치성’을 분명히 드러냈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폭압정치에서 유화국면으로

당시 상황을 먼저 들여다보자. 전두환의 폭압정치가 1983년말부터 이른바 유화국면에 접어든다. 노동운동에는 더할 나위 없는 부활의 시기였다. ‘블랙리스트’ 때문에 수년간 취업을 원천봉쇄당하고 있던 해고노동자들은 84년 1월 ‘블랙리스트철폐대책위원회’를 결성해 블랙리스트 철폐투쟁을 펼쳐나갔다. 또 3월에는 ‘기업별 노조운동의 한계 극복’을 목표로 내걸고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이하 ‘노복’)가 창립된다. 전 원풍모방 노조위원장 방용석(현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을 비롯 70년대 민주노조 간부들이 주축이 된 ‘노복’은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높이기 위한 각종 교육사업과 노동법 개정투쟁을 전개했다.

노동현장에서도 그동안 억눌렸던 요구가 폭발적인 형태로 터져 나왔다. 84년 5월 대구지역 택시 노동자 1천여명이 사납금, 부제 완화, 노조결성 방해 중지를 요구하며 시내 중심가에서 격렬한 차량시위를 벌였다. 택시 노동자들의 투쟁은 삽시간에 부산, 경북 경산, 대전, 서울, 강원 강릉 등지로 번져나갔다.

한편 청계피복 노동자들은 노조 복구투쟁을 본격화했다. 5월1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합법성에 관한 공개토론회’를 개최한 데 이어 9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3차례 합법성 쟁취대회를 열었다. 이런 가운데 구로공단을 비롯한 경인지역 사업장에서는 노조를 결성하거나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려는 활동들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80년대 중반 구로지역은 대부분의 업체가 수출을 위한 경공업제품을 생산하던 곳으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 관리직과의 차별 대우 등이 극심했다. 이들은 비슷한 근로조건과 노조결성 시기 등으로 인해 조합 간부는 물론 조합원간의 연대 프로그램을 통해 교류와 연대를 강화해 왔다. 85년 임금인상 투쟁시도 상호교류를 통해 이러한 연대는 지속된다.

당시 사건 일지

85 04.10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 결성
85.06.01 구로지역노조민주화추진연합’(구민련) 결성
85.06.22 대우어패럴 노조 집행부 김준용(위원장), 강명자(사무장), 추재숙(여성부장) 경찰에 연행
85.06.23 대우어패럴, 가리봉전자, 효성물산, 선일섬유 노조 동맹파업 결의
85.06.24~29 대우어패럴 파업
85.06.24~26 효성물산 파업
85.06.24~27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파업
85.6.25~26일 남성전기, 세진전자, 롬코리아 준법농
85.06.27~28 삼성제약 중식거부
85.06.28 부흥사 파업
85.06.29 대우어패럴 농성 강제해산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구속으로 촉발

‘구로동맹파업’의 결정적 계기는 대우어패럴 노조간부들에 대한 경찰의 구속조처였다. 1985년 6월 22일 오전 11시. 경찰이 대우어패럴 노조사무실로 찾아와 김준용 위원장, 강명자 사무국장, 추재숙 여성부장 등 3명을 연행했다. 경찰은 4월의 임금인상 투쟁 때 파업농성을 주도하며 노동쟁의조정법과 집회및시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이들을 구속했다. 조합간부 8명도 불구속 입건됐다.

‘구로동맹파업’의 결정적 계기인 대우어패럴 노조간부들에 대한 경찰의 구속조처였다. 전두환 정권이 노동운동을 다시 강력하게 탄압하려는 신호탄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함께 연대했던 노동조합들에게 ‘위기’ 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이미 대우어패럴 이외의 타 노조간부들에게도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6월 23일 조합간부 3명이 구속된 것에 항의하며 파업농성에 돌입한 대우어패럴 노동자들. 6월 26일 현재 물 한 모금, 음식 한 끼 못 먹고 농성을 벌였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위원장 연행 소식을 전해들은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작업을 중단하고 1백여명이 총무과로 몰려가 고발 취소를 요구하는 농성을 전개한다. 다음 날인 23일 대우어패럴 외에 가리봉전자, 효성물산, 선일섬유, 청계피복 등 노조간부 2백여명은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24일부터 동맹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한다.


▲ 6월 24일 오후 2시 효성물산 조합원 400여명은 2층 작업장에 모여 파업농성에 들어갔다. 이들 역시 창문에 ‘노동3권 보장하라’ ‘민주노조 탄압말라’는 벽보를 붙이고 플래카드를 내걸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24일 오전 8시 경 대우어패럴 노동자 350여명의 파업을 신호로 오후 2시 효성물산 노조원 4백여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같은 시간 가리봉전자 노조원 5백여명, 선일섬유 노조원 70여 명 등도 파업에 돌입한다. 이들은 ‘구속된 김준용 위원장 등 노조간부의 석방과 노조탄압 중지’를 요구하고 나아가 ‘노동악법 폐지하라’, ‘폭력경찰 물러가라’ 등을 주장했다.


▲ 대우어패럴 농성시위를 탄압한데 항의하며 노동자, 학생들이 6월 24일 여의도에서 기습 가두투쟁을 벌였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이러한 노동자의 투쟁에 대해 회사측은 단전과 단수 조처를 단행했으며 경찰은 이들 공장 일대를 철통같이 경계했다. 공단 일대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6월 25일 남성전기 조합원 3백여 명이 오후에 농성을 벌이고 세진전자 노조원 250여명, 롬코리아 1백여명이 지지 철야농성을 하는 등 연대투쟁은 7개 업체로 확산된다.


▲ 서울 중부지방노동사무소에서 농성을 벌였던 노동자들이 경찰에 의해 끌려나오고 있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에 학생 및 재야의 지지도 이어졌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등 22개 단체에서 지지 농성이 있었고, 26일 오후에는 서울대생 2명이 ‘구속노동자 석방’을 요구하며 대우어패럴 맞은 편 협동봉제 공장에 올라가 지지 구호를 외치는 등 학생들의 지지 시위가 있었다. 27일에는 효성물산 80여명과 청계 노조 조합원이 노동부 중부지방사무소에 몰려가 노동부장관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탈진, 실신…강제해산, 대규모 해고


▲ 창문에 걸터앉아 구호를 외치고 있는 대우어패럴 농성 노동자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경찰들의 공포 분위기 조성과 음식물 차단으로 인한 조합원들의 탈진과 실신 그리고 병원후송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대우어패럴 농성시위대는 1백여명으로 줄어든다. 효성물산과 선일섬유 노조는 26일 밤에 농성을 풀었고, 가리봉전자는 27일 관리직 남자 사원들에 의해 강제 해산 당했다. 6월 28일에는 부흥사노조원 120여명이 연대파업에 돌입했으나 쇠파이프와 몽둥이로 무장한 관리자와 남성사원들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해 80여명이 강제사직서를 쓰는 등의 탄압이 계속되었다.

대우어패럴에서는 노사간 협상이 6월 28일 있었으나 보복조치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달라는 노조의 요구를 회사가 거절함으로써 30분 만에 결렬된다. 마침내 6월 29일, 물도 끊기고 전기도 끊긴 상태에서 굶주리며 버티던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작업장 벽을 뚫고 진입한 관리자와 구사대들에 의해 강제해산당하면서 막을 내렸다.

동맹파업과 이를 지지하는 농성·시위 과정에서 모두 43명이 구속되고, 연인원 370명이 구류를 살았으며, 7백여명이 강제로 사표를 쓰거나 해고당했다.


▲ 6월 27일 노동부장관 면담을 요구하며 노동부 서울중부지방사무소에서 항의 농성하던 효성물산과 청계피복노동자들 중 한 명의 노동자가 허리를 다쳐 실신상태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김영미 효성물산 전 위원장은 “구속 후 1심서 풀려난 노동자들은 운동지도부가 궤멸되고 동지들이 흩어지면서 자연스레 운동을 이어갈 수 없었다”며 “결혼 전후로는 보수적인 남편과 집안에 노동운동 경험을 얘기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학생구속자가 없는 것과 관련 “공장에 8명의 학생들이 있었지만 노동자들이 보호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며 “경찰서에서도 배후조정 추궁이 있었지만 끝내 학생들이 앞장서 활동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학생들 가운데 ‘작은책’ 발행인이었던 강순옥씨 등이 있었다.


▲ 6월 28일 윤순녀, 이창복 등 민주, 민권운동단체들이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구로공단 노동자 연대 투쟁 탄압분쇄’ 연대농성 투쟁에 돌입했다.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부흥사의 안경환 전 조합원은 “심상정, 공계진, 문성현, 김영대 등 몇몇 당 활동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90년 이후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며 “바람직 한 것은 노동 등 각계에 층층이 쌓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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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비정규직 강의 자료

왜 우리는 비정규직, 파견법 개악 안 입법저지 투쟁에 나서야 하는가?

엮은이(삶이 보이는 창 기고자): 아래 글은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 진숙 지도위원의 강의를 발췌한 것입니다.
작년에 올라온 글이라서 때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 되서 옮겨봅니다.

지난 10월 26일은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조 광주지부장 고 이 용석 열사가 작년 종묘집회에서 분신한지 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날 저녁 건강보험공단 지하 강당에서는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 진숙 지도위원의 특강이 있었습니다.
김 위원은 지난 해 노동자 대회 때 고 김 주익 열사의 추도사를 하도 절절하게 해서 집회장을 눈물의 도가니로 만들었던 장본인 입니다.
민주노동당 서울시당과 전국 사회보험노조 주최로 열린 이 강연의 주제는 “왜 우리는 노동운동 진보정당 운동의 사활을 걸고 비정규직 파견법 개악 안 입법저지 투쟁에 나서야 하는 가”였습니다.
김 위원의 목청은 힘찼고 사용하는 말은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시원스럽게 넘어가는 이야기는 재미있으면서도 의미심장해서 청중을 웃겼다가 울렸다가 마침내는 각성과 결의를 이끌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신들린 강연이었습니다.
특강이 끝난 후 공덕시장에서 순대 국을 먹으면서도 가슴이 울렁이는 것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는 한참 비정규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습니다.
다음은 강연내용을 핵심만 살려서 요약 기록한 것입니다.
최대한 김 위원의 입맛을 살리려 노력했고 소제목은 내용에 따라 분류해 제가 임의로 정한 것입니다.

김 진숙 지도위원은 사회자의 소개말이 끝나자마자 성큼 강단으로 뛰어 올라가 청중을 향해 활짝 웃으며 “고생 많으시죠!”란 말로 인사를 건냈다.
그리고 나서 오랜 벗에게 이야기하듯 친근한 말투로 경상도의 보수성, 국가보안법 철폐이유, 계급성의 필요성, 비정규직 투쟁의 어려움, 연대의 의미 등에 대해 연설했다.
마치 폭포수처럼 격정적이면서도 현장성이 생생하게 담긴 말은 나태한 의식에 일침을 가하기에 충분했다.

- 누나, 이제 박대통령은 누가 해? -

선거가 끝나면 부산에 산다는 게 뒤지게 쪽팔립니다.
한 나라 당이 수도이전 반대하면 저들도 반대를 합니다.
국가보안법 폐지도 한 나라 당이 반대하니까 지들도 반대를 합니다.
저는 이번 총선에서 정동영하고 통 했던 게 6~70대는 투표하지 말라는 거였습니다.
더 나아가 박 정희가 나라를 살렸다고 믿고 군대를 다녀온 50대 이상의 경상도 남자들에겐 투표권 주면 안 된다고 봅니다.
아니면 자격시험을 보던가.........................!(웃음과 박수)

노 무현이 잠깐 대기발령 받고 있을 때는 부산 사람들하고 선거 얘기가 되더군요.
참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얘기의 결론은 저에게 이렇게 묻는 것으로 끝나더군요,
“아지 매 전라도 지예?”
그런데 박 근혜 이 여자가 나타나서 다 휘저어버렸는데, 박 근혜가 야당 지도자입니까?
바로 박 정희 딸 아닙니까?
초등학교 다니는 조카도 아는 사실입니다.
거 부산 사람들 보러 박 근혜가 왜 좋으냐고 했더니 시집을 안가서 좋디야?
시집은 나도 안 갔는데 하니까 넌 못 간 거지 합니다(웃음)
그야말로 말초적인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겁니다.
박 정희 정권이 청렴결백했다는 건 웃기는 개소리입니다.
워낙 틀어막고 해먹으니까 당시에 몰랐던 거 아닙니까?
정수장학회는 장물장학회입니다.
뭔 놈의 장학회가 방송사 지분을 그렇게 많이 갖고 있습니까?
박 근혜는 여기 출근도 하지 않으면서 1.100만원의 월급을 받습니다.
그런데 월급 100만 원도 못 받는 것들이 이걸 찍어준다니까요!
오직 경상도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구에서는 더 황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여든 먹은 영감이 박 근혜가 오니까 그 앞에 너부죽 엎드리며 한다는 말이 “오래 사십시오”(웃음) 이게 말이 됩니까?
제가 1960년 생 입니다.
박 정희가 18년 대통령 해먹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열아홉 살 될 때까지 글마가 대통령 해먹었습니다.
박 정희가 딱 죽고 나니까 우리 동생이 그러더라구요
“누나 이제 박대통령은 누가 해? 참 내~!(웃음과 박수)

박 정희가 그렇게 해 먹을 수 있었던 근거가 뭐겠습니까?
제가 한진 중공업 땜 쟁이었다는 건 다들 아시죠?
한진 중공업 입사해서 스물한 살 때 첫 휴가를 받아서 혼자 유달산에 놀러갔었습니다.
처음 가는 길이라 여기저기 무어보고 카메라로 동서남북을 찍고 있는데 짜바리(경찰) 둘이 오더니 연행해 갔습니다.
지금이야 인권이 어떻고 미란다원칙이 어쩌구 하지만 그때만 해도 짜바리 하고 눈만 잘못 맞으면 2박3일은 똥 밞은 시절 아니었습니까?
2박3일 동안 생사를 몰라요,
어디 대공 분실에 있는지, 남부경찰서에 있는 건지...............!
파출소에서 배낭을 막 뒤지면서 하는 말이 대공용의자를 잡았다는 겁니다.
저는 그 때 그 말이 뭔지도 모르고 있는데 아무리 뒤져도 난수표가 나오나 무전기가 나오나 뒤지던 끝에 지덜끼리 그러더군요.
자기가 김일성이라도 이런 걸 간첩으로 내려 보내진 않겠다고,
그 날 밤에 집에 갈 수가 없어서 숙직실에서 하루를 보내는데 벽에 표어가 죽 붙어있는 겁니다.
그걸 보고 내가 왜 붙잡혀 왔는지 알겠더군요.
“홀로 가는 저 등산객 간첩인가 다시보자” 이건 좀 낫습니다.
“사랑하는 내 애인 알고 보니 간첩”(웃음)

지금도 촌에 가면 농협 바람벽에 이런 거 붙어 있습니다.
기억 나십니까?
멸공방첩, 반공방첩 하고 그 밑에 적여 있는 간첩색출요령

1.산에서 낚시가방 메고 내려오는 자
2.농구화에 뻘 흙을 묻혀갔고 다니는 자
3.담배 값을 물어보는 자(웃음)
4.압권입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듣는 자(웃음과 박수)
이게 국가보안법입니다.
국가보안법이 어디 간첩만 불편합니까?

제가 팔 육년에 대공 분실을 세 번 갔었습니다.
거긴 뭐 물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팹니다.
옷 다 벗겨서 군복 갈아입히고 고무신 신겨 놓은 뒤에 줘 패기 시작하면서 누구 아냐? 누구 아냐?
하면서 100명의 이름을 갖다 댑니다.
정말 비슷한 이름이라도 나오면 대고 싶었습니다.
워낙 나오는 게 없으니까 그놈들이 상부에 뭐라고 보고했게요?
자생적 공산주의자!(웃음)
그게 국가보안법이고 그걸 움켜쥐고 있는 게 한 나라 당입니다.

진보에도 계급이 있습니다.
조선일보를 볼 순 없으니 한겨레신문을 보는데 이게 잘 나가다가 선거 때만 되면 민주당보 짓을 했다가 열린 우리당보 짓을 했다 합니다.
촛불시위를 할 때도 이거야 말로 평화시위의 모범이라고 했었습니다.
1980년대 집회 한번 하려면 다 전화 도청하고 그 자리에 먼저 경찰들이 가 있어요.
이럴 때 집회 자리를 만들려고 화염병 안 던질 수가 없었습니다.
쟤들이 먼저 최루탄으로 도발하니까 화염병 던져서 집회할 자리를 만드는 겁니다.
그 불 끄러 가는 동안 자리 만들어서 노래 부르고 쟤들이 그 불 다 끄고 우루루 또 몰려오면 다시 또 던지고.........그 때 그 시절에도 촛불 들었으면 아름다웠을까요?
아마 전국 양초제조공장 압수수색영장 떨어졌을 겁니다.
아마 촛불에 관한 특별법 만들어 졌을 걸요?(웃음과 박수)

그게 역사입니다.
그렇게 지나온 역사를 간과해서 안 되는 겁니다.
그렇게 촛불이 아름다우면 그럼 부안은 뭡니까?
이백일 넘게 촛불 켜들었던 부안은 뭐냔 말이죠?
그래서 계급성 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게 시대를 가르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서 진보에도 계급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서 가장 진보적이라 일컬어지는 작가 조 정래가 쓴 “한강”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한강”을 읽다보면 7권에 박태준이 이야기가 반이나 나옵니다.
박태준이야말로 포항제철의 주인이고 이 땅의 진정한 산업역군이라는 얘기가 반 권에 걸쳐 나옵니다.
그 말이 맞나 봅시다.
포철에는 시뻘건 철근만 하루에도 수백만 개가 뽑아져 나오고 그것으로 건물과 다리가 만들어집니다.
시뻘건 철근이 뽑아져 나오다가 하나가 불량이 나서 철근이 솟구치는데 옆에 있는 노동자를 꿰고 지나갔습니다.
철근이 항문으로 들어가서 머리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떨어졌습니다.
그 시신을 놓고 사람들이 위로했는데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아유 그나마 로에 안 빠진게 얼마나 다행이야” 그 옆에 용광로가 있었는데 거기 빠졌으면 가관일 뻔 했지요.
그야말로 꼬치에 튀겨지는 셈이니까, 살아있는 사람들이 시신을 놓고 뭘 고민 했는 줄 아십니까?
두고 간 새끼들을 걱정했게요?
아닙니다.
그 철근을 그대로 관에 넣을지 , 시신에서 철근을 빼고 관에 넣을지, 관 크기에 맞게 철근을 자를지.........그 고민을 했다는 겁니다.
저는 포항제철은 이런 노동자들이 만들었다고 봅니다.

포철에도 노조가 있습니다.
조합원이 모두 열여덟 명입니다.
수만 명이 넘는 사업장에 20년 동안 그 수가 변함이 없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 명이 정년이 되어 나가면 또 한 명이 채워집니다.
그 포철에 노조를 만들었다가 노조간부가 부모 보는 앞에서 박 태준에게 따귀를 맞았습니다.
그게 박태준이 한 짓입니다.

- 노동자들의 투쟁을 외면하는 언론 -

1991년에 삼화고무에 김 경은 이라는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운동화는 가죽이 두꺼우니까 종종 미싱 바늘이 부러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부러진 미싱 바늘이 김 경은의 눈으로 들어갔습니다.
조장한테 가니까 “뭐 어디 그런 걸로 조퇴시켜 주는 데 봤냐?”
형광등 아래서 조장이 눈을 까뒤집어 보니 안 보이거든요, 그래서 다시 가서 일을 하라고 지시했고 그날 잔업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일하는 중에 그 바늘이 눈 뒤에까지 이어져서 시신경이 다 파괴돼 버렸습니다.
그 때 김 경은의 나이 열여덟이었습니다.
여러분, 프레스 노동자가 왜 지 손가락 지가 잘라먹는지 아십니까?
습관적인 동작 때문에 0.1초만 늦어도 그 안에 손가락이 들어가는걸 알면서도 기계를 밟는 겁니다.
이른바 주방의 명품 퀸센스를 만드는 사업장에서는 한 노동자의 손가락 네 개가 한꺼번에 잘라졌습니다.
그런데 봉합을 한다는 것이 손가락을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다 붙여 놓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어도 “본인 부주의”로 보고가 됩니다.
이런 노동자가 하루에도 수 십 명입니다.
그 노동자가 비정규직이고 노동조합이 없으면 제대로 보상도 못 받습니다.

화물연대 파업할 때 민주노총에서조차 무리한 파업 때문에 노무현 정권이 등을 돌렸다고 스스럼없이 예기했습니다.
3개월 사이에 화물연대 노동자가 여섯 명이나 자살했습니다.
개인사업자가 투쟁에 조직적으로 나서기까지 얼마나 힘든지 조직사업 해본 분들은 압니다.
화물연대 김해지부장 최 복남 동지가 톨게이트에서 유인물을 나눠 주다가 젊은 운전자와 시비가 붙었습니다.
젊은 운전자의 요지는 그거 였습니다.
왜 유인물을 나눠주며 교통을 마비시키고 물류를 중단시켜 사회를 불편하게 하냐는 거였습니다.
그는 배운 대로 한 것입니다.
최 복남 동지는 일단 유인물을 읽고 판단하라고 차에다가 꾸역꾸역 유인물을 넣어주려 했고 젊은 운전자는 최씨의 손이 들어온 상태에서 유리문을 올린 채 달렸습니다.
어떻게 됐겠습니까?
유리문에 몸이 낀 채 길바닥에 쓰러졌고 그 위를 몇 대의 차가 더 지나가 개구리처럼 납작해져서 죽었습니다.
그 젊은 운전자도 노동자였을 것입니다.
그 노동자가 대학을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교육을 10년, 20년 받아도 노동자들이 왜 투쟁하는지, 왜 자식이 셋인 아버지가 크레인에 올라가고 50이 넘은 노동자가 지 몸에 불을 붙이는지 알려주지 않는 학교, 언론이 더 큰 문제입니다.

- 노동자들의 신자유주의적 사고를 경계해야 -

대한민국은 자본가와 노동자가 10:90으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나라입니다.
90은 절대 10이 될 수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 환상을 믿습니다.
로또를 100번 당첨되고 잔업을 100대가리로 해보십시오,
90이 10이 될 수 있나.
그래봤자 과로사할 뿐입니다.
저는 90이 단결해서 10을 없애고 100을 만드는 것이 평등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자동차에서 지금 일부 대의원들을 중심으로 어떤 단협 안을 요구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애비가 정규직이고 아들이 비정규직인데 이 아버지가 내가 정년퇴직을 하게 되면 그 자리를 내 아들에게 줘서 정규직으로 해달라, 이걸 노동조합 집행부에다가 요구하고 있다니까요?
현실이 이렇게까지 되고 있는데 90이 10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게 자본주의입니다.
연속극이나 광고를 한번 보세요.
부동산을 광고하는 게 대한민국입니다.
고교등급제 문제가 뭐겠습니까?
10이 지 새끼들까지 10으로 만들려고 발악하는 거 아닙니까?
노동자들이 잔업 많이 해서 지 새끼들 학원 많이 보낸다고 10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봐야 정 몽헌이 종밖에 더 되겠습니까?
노동자들도 이 이율배반을 깨지 못하면 자본의 종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한진 중공업이 명예퇴직 투쟁을 2년 했습니다.
구조조정 싸움이 어려운 건 명단이 발표되기 전까지 모든 사람들이 자기는 아닐 거라고 믿고 있는 겁니다.
자기만은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자본을 순진하게 보는 겁니까!
50대 이상 아저씨들 600명이 명퇴 대상이 됐습니다.
정년이 얼마 안 남은 이 사람들을 정리해고 시키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바로 젊은 사람들과 분리시키려는 자본의 논리입니다.
어떤 사업장에서 남성 조합원들이 고용보장 받는 대가로 여성 노동자들을 정리해고 시키는데 동의했습니다.
이런 얘기는 이제 꽤 익숙해 졌습니다.
그 위원장에게 왜 그딴 식으로 했냐고 물었더니 뭐라는지 아십니까?

“아지매들은 어차피 반찬값 벌러 나온 것 아닙니꺼?”

아니 여자들 월급이 반찬값이면 남자들 월급은 안주 값인가요?
이런 자본의 논리가‘(상황이) 어렵다' 는 이유로 노동에도 침투해 있다는 게 신자유주의의 무서움입니다.
600명의 아저씨들이 싸우다가 300명은 더럽고 아니꼽다는 이유로 사표를 쓰고 나가고 2년 만에 이겨서 막걸리를 마시는데 아저씨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더군요.
조합의 사무국장은 2년 만에 처음으로 집에 들어갔습니다.
근데 사장이 합의한 사실을 회장이 번복하자 노동조합의 지회장이 할 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밤11시에 새끼가 셋인 애비가 혼자 크레인에 올라가서 129일을 햇빛과 비를 피할 데 없는 그 공간에서 짐승처럼 갇혀 살았습니다.
129일 동안 밥을 까만 비닐봉지에 담아 매달아서 올려 보냈는데 바람 때문에 크레인에 도착하면 저절로 비빔밥이 돼 있더랍니다.
작년 여름이 더웠다지만 한진 중공업 노동자들에겐 생애에서 가장 더웠을 겁니다.

하루는 냉면이 먹고 싶다고 크레인에서 전화가 왔답니다.
냉면을 올려 보낼 때마다 번번이 실패했답니다.
수십 미터짜리 크레인까지 국물을 안 흘리고 올려 보낼 수가 없었던거죠.
결국 내려와서 먹으라고 했는데 그 냉면이 사자 밥이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시신에 대해서도 압수수색영장을 내린 게 저놈들입니다.
그게 구조조정 싸움입니다.

- 비정규직 문제는 정규직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

한진 중공업도 하청노동자가 반이 넘습니다.
어떤 노조에 가니까 노조간부가 차를 하나 샀는데 억대의 차가 있더군요.
은근히 자랑까지 했습니다.
연봉이 6000만원이랍니다.
그 사업장 화장실에 갔더니 더운 여름날 청소용역 아줌마들이 화장실 앞에서 박스를 깔고 쉬고 있었습니다.
월급을 물었더니 11년 동안 하루에 아홉 시간 일해 왔는데 63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옆에 있는 회사보다는 나은 대우라고 하더군요.
다시 노조 사무실에 와서 그 간부에게 얼마나 일하느냐고 물었더니 하루 여덟 시간씩 9년 됐다고 했습니다.

전라도 익산에 원광 대 병원에서 작년에 청소용역 아줌마들이 파업을 시작했습니다.
부산에서 거기까지 가 봤는데 투쟁하고 있는 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정규직 노조에 가서 물어보니 거기에는 간호사나 병원직원들이 있는데, ‘우리가 왜 파업을 하느냐’면서 정색을 하며 안 가르쳐 주더군요,
이미 타결이 됐나?
그러면 미리 연락이라도 해주지, 욕이라도 해주고 가려고 아줌마들을 찾았는데 지하2층에 가서야 그들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은 아줌마들이 옷 갈아입고 휴식하는 공간인데 세상에, 그렇게 습기 차고 형편없는 곳을 어디에서도 못 봤습니다.
아줌마들은 월급이 40만원 이었는데 용역재계약시 38만원으로 깎이게 되어 투쟁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월급이 깎이니까 이 아줌마들도 자식이나 노동부에 물어봤겠지요.
그러다가 60평생에 우리나라에 최저임금법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무려 51만8,150원이라는 걸......@@@
임금뿐만 아니라 그런 곳을 휴식공간으로 내준 놈들이 사람처럼 생각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 여기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로비에 올라가서 하든지, 정문 앞에 천막을 치든지, 원장 집 앞으로 가든지 해야 될 거 아니냐고 했더니, 로비에 있다가 내려왔데요.
왜 내려온 거냐고 했더니 정규직 노조 지부장이 내려가 있으라고 했답니다.
‘아줌마들이 여기 이러고 있으면 환자가 떨어져서 협상하기 어려우니까 내려가 있으라’고 했데요
더 골 때리는 건 그 정규직 노조가 작년 자기들 임금 인상 시에는 가열차게 투쟁했던 곳이었습니다.
어용노조가 아니었습니다.
그 때 파업에 앞장섰던 노조 상집간부가 하는 말 ‘40만원 받던 아줌마들이 갑자기 51만원을 주장하면 병원경영은 어떻게 합니까?
아니 지가 무슨 원장입니까?
이 사람은 월급이 200만원이 넘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 사람의 200만원이 많아서 임금인상투쟁 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다.
중요한 건 어떤 놈은 200만원이 작고 어떤 년은 51만원이 많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런데 있습니다.

청소하는 아줌마들은 임금이 작아도 된다.
식당 아줌마들이 100만 원 받으면 많이 주는 거라는 생각, 이런 치사한 새끼들이 노조 간부라니까요.
그리고 밖에 나와서 시민들에게 비정규직 철폐하자고 유인물을 나눠줍니다.
이런 사람들은 시민은커녕 자기 조합원들도 설득시키지 못합니다.

- 비정규직 개악안 저지투쟁과 연대 -

나는 우리 운동이 진짜로 내려가야 한다고 봅니다.
17~18년 동안 민주노조운동 열심히 해왔긴 했으나 결국 정규직 임금인상을 위해 싸운 것 밖에는 안 됩니다.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여성노동자 다 놔두고........... 비정규직 보호입법이란 게 뭐겠습니까?
근로자 파견법 만들어서 몇 년 해 보니까 현대자동차, 금호타이어 같은 곳에서 불법파견이 문제 되니까 합법파견으로 만들겠다는 것 아닌가요?
WTO, FTA로 시끄러운데, 난 아무리 WTO란 말을 들어도 뭔 말인지 모르겠던데, 월드 테러리스트 올가니제이션이라 생각하니까 이해되더군요,
한일FTA가 체결이 되면 자동차 시장이 개방되는데 자동차만 해도 일자리가 2만개가 없어지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위해 노무현정부가 개악하려는 겁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연대란 말을 잘 씁니다.
이 연대란 말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을 재작년 경희의료원 구내식당 아줌마에게서 들었습니다.
경희의료원에서 구조 조정 시에 제일 먼저 식당부터 용역을 주겠다고 하니 20년 넘게 일해 온 아줌마들이 싸움을 시작한 것입니다.
로비를 점거해서 싸우고 있는데 하루는 깍두기(용역깡패)들 수십 명이 왔습니다.
공권력을 투입시키기에는 부담스러우니까 병원 측에서 용역깡패를 부른 것입니다.
이들과 대치해서 싸우는 중에 한 아줌마가 기절했습니다.
근데 웃기는 건 자기네 식당 아줌마가 쓰러졌는데도 병원 응급실에서 거부하더라는 겁니다.
어찌어찌해서 치료받기는 했는데 알고 봤더니 그 아줌마가 쓰러진 이유가 더 가관입니다.
어디 맞아서 기절한 게 아니라 그 용역 깡패들 속에서 자기 아들을 만나서 그랬다는 겁니다.
취직 했다 길래 축하해 주며 오늘 아침까지도 따뜻한 밥을 해먹인 자기 아들이 거기 나와 있는 겁니다.
이미 비정규직인 아들이 비정규직이 안 되려고 하는 어머니의 투쟁을 막기 위해 나와 있는 모습,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이 이렇게도 만납니다.
어쨌든 내가 부산에서 왔다니까 이 아줌마가 사람을 하나 찾아달랍니다.
울산에서 올라온 빨간 조끼를 입은 청년이라는데 그것만 가지고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 왜 찾느냐고 이유를 물었더니 그 청년에게 밥 한 끼 못 사준 게 마음에 걸린다는 겁니다.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 해고될 때 장대비 속에 한 노동자가 회기 역 부근에서 출근길에 유인물을 나눠 주면서 외쳤다는데, ‘경희의료원 노동자 여러분, 현대자동차에 정리해고가 도입되면 전국의 사업장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정리해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아줌마는 그 유인물을 받지 않았고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4년 후 자기가 그 처지가 되니까 그 생각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그 청년이 오죽 막막했으면 서울까지 와서 고함을 쳤을까?
그 심정이 이해되더랍니다.
그 때 그 청년 유인물 받지 않은 것, 고생한다고 밥 한 끼 못 사준 게 지금까지 미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현대자동차에서 정리 해고되는 것은 남의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노동자에겐 남의일이 없습니다.
비정규직이나 이주노동자가 불쌍해서 그들을 도와주는 게 아니고 그들의 차별을 없애지 않고 끌어올려 하나가 되지 않으면 내가 그 수렁에 내가 빠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김진숙 위원은 강연의 뒷부분에 자신이 노동현장에서 경험한 소외감을 덧붙이면서 “인간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없어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 노동조합 운동밖에 없다고 믿었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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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권, 문민정부 이래 최대 수의 양심수 낳아

"국민통합 원하면 양심수 전면 사면해야“

 

정부가 지난 1월 31일 ‘경제살리기’와 ‘국민 통합’을 위해 김우중, 박용성, 박지원 등 재벌 총수와 정치인들을 3월 1일 대거 사면할 계획이라고 밝힌 가운데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이 8일,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국민통합을 원한다면 비리 재벌 정치인들이 아니라 양심수를 먼저 석방하라”고 목소리 높였다.

 

구속노동자후원회, 민가협,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다산인권센터 등 14개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난파된 배 위에서 위태롭게 집권 말기를 항해하고 있는 노무현 정권이 또 다시 기만적인 사면령으로 국민들을 우롱하고 있다”라며 “거론되고 있는 김우중, 박용성, 최원석과 같은 재벌 총수들은 분식회계 문어발식 확장으로 이 나라 경제를 IMF 경제위기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다”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이어 이들은 “노무현 정권이 진정 경제살리기와 국민통합을 원한다면 파탄 난 노동자, 서민들의 삶부터 되살려 내야 한다”라며 현재 감옥 안에 있는 900여 명의 양심수를 전원 사면하고 조기 석방 시킬 것을 촉구했다.

 

노무현 정권, 4년 만에 구속 노동자 기록 돌파

 

이들 단체에 따르면 1월 30일 현재, 전국의 교도소, 구치소, 경찰서 등에 구속 수감되어 있는 양심수는 95명이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이유로 구속 되어 있는 양심수는 901명에 이른다. 또한 노무현 집권 4년 동안 구속된 노동자의 수는 문민정부 이래 최대였다. 김영삼 정권 때는 632명, 김대중 정권 당시 892명인 것에 비해 노무현 정권은 임기가 마무리되기도 전인 4년 동안 921명의 노동자를 구속시켰다. 특히 2006년에만 271명의 노동자가 구속되었는데 그 중 비정규직 노동자가 200명에 이른다.

 

이들 중 김성환 삼성일반노조위원장은 국제엠네스티에 의해 양심수로 판단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구속된 양심수들은 노무현 정권이 소수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앞세워 대다수 노동자, 서민들의 삶을 파탄내고 정치적, 시민적 자유마저 짓밟는 상황에서 구속되었다”라며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내져야 할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날뛰고 있고 민주주의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집회·시위의 자유가 압살 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군사 독재의 망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라고 분노하고 양심수들의 즉각 석방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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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파업손실액 ‘1276억’ vs ‘38억’…과연 진실은?

현대차 파업손실액 ‘1276억’ vs ‘38억’…과연 진실은?

[한겨레] 현대자동차는 성과급 문제로 불거진 최근 노조의 잔업(5일)·특근(3일) 거부로, 1276억원의 손실이 발생했다고 9일 밝혔다. 앞서 역시 현대차는 1987년 이후 지난해까지 20년 동안 노조의 각종 파업에 따른 손실액이 10조원을 넘었다고 발표한 바도 있다.

천문학적 규모의 파업손실액 발표는, 파업에 대한 여론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파업손실액이 일반 국민들에게는 ‘실질적인 피해액’으로 인식되는 탓이다. 과연 파업도 아닌 잔업 거부로 생긴 손실액 1276억원의 ‘진실’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물론, 현대차 쪽도 ‘실질적인 피해액’이 아닌 ‘생산차질액’이라고 말한다. 1276억원도 잔업과 특근이 평소처럼 이뤄졌을 경우 생산대수인 8284대에 차량 값을 단순히 곱해 나온 수치다.

지금까지 20년 동안 파업 등에 따른 현대차의 생산차질은 노사 갈등이 끝난 뒤 대부분 만회해왔다. 노동자들이 잔업·특근으로 목표 생산대수를 채우는 탓이다. 지난해 6월 파업 때도, 우리투자증권은 “파업으로 생산 차질을 빚지만 종료 후 특근 등으로 보충한다”며 “파업이 사실상 실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천문학적 규모의 손실액 발표에도, 주가는 별 반응이 없다.

또 생산을 만회하지 못하거나 판매시점을 놓쳐 끝내 8284대를 팔지 못한다고 가정하면, 실질적 피해액 추정은 가능하다. 현대차가 발표한 차량 한 대의 영업이익률(3.1%)을 적용하면 8284대를 생산·판매하지 못해 생기는 실질 피해액은 38억원이다. 부품업체들의 피해도 따져볼 수 있지만, 현대차조차 “1주일 가량의 파업으로는 부품업체에 영향이 거의 없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현대차는 왜 ‘생산차질액’을 ‘파업손실액’으로 발표할까. 현대차 홍보실 관계자는 “언론 등에서 피해액을 요구하는데 가장 단시간 안에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생산차질액밖에 없다”며 “실질적인 손실액은 추정도 힘들 뿐만 아니라, 연말이 돼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파업피해액’을 묻자 “지금까지 실질적인 피해액을 계산한 경우는 없다”고 답했다.

지지난해 7월 한 달 가까이 파업을 벌인 아시아나조종사노조 파업 때도 회사 쪽이 발표한 파업손실액도 논란거리였다. 아시아나는 2530억원의 매출손실을 입었다고 발표했으나, 증권사들은 “주로 수익이 낮거나 적자 노선 중심으로 결항돼 매출손실이 아닌 영업손익에는 긍정적 영향도 끼쳤다”고 분석했다. 실제 파업 당시, 아시아나의 주가는 되레 올랐다.

지난 2003년 10월, 서울지법은 한 발전회사가 노조 파업(38일)으로 31억원의 손해가 발생했다며 제기한 소송에서 “무노동 무임금 원칙에 따라 지급하지 않은 임금이 파업 때 대체인력비보다 훨씬 많은 등 파업기간 손해보다 실제 이익이 더 많았다”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강신준 동아대 교수(경제학)는 “생산차질액을 파업손실액으로 발표하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며 “기업의 여론몰이용”이라고 잘라 말했다. 조성재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원도 “데이터가 과장될 수밖에 없고 실질적 피해액은 일을 해결된 뒤 점검이 가능한 사안”이라며 “언론도 생산차질액을 손실액으로 무분별하게 보도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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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2%가 전세계 부의 절반 소유-<유엔 연구소>

상위 2%가 전세계 부의 절반 소유-<유엔 연구소>


전세계 인구 중 상위 2%가 전세계 부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5일 발표된 유엔대학 세계경제개발연구소의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 성인 인구 중 약 2%가 재정자산을 포함한 전세계 부의 50%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이같은 부의 편중 현상은 전세계 곳곳의 임금 불평등 현상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전세계 부의 대부분이 북미, 유럽과 일부 아시아태평양 고소득 국가에 편중돼 있으며 이들 국가의 국민들이 전세계 부의 약 90%를 소유하고 있다고 적시했다.

이같은 연구 결과와 관련, 연구소 책임자인 앤서니 소록스는 "상위 2%가 전세계 부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하위 50%의 인구가 소유하고 있는 부는 1%에 불과하다"며 이는 전세계 인구를 10명으로 봤을 때 이중 1명이 전체 부의 99%를 갖고 있고 나머지 9명이 남은 1%를 나눠쓰고 있는 것과 같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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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은 열사도 투사도 아니다”

“전태일은 열사도 투사도 아니다”
[인터뷰]36주기를 앞둔 어머니 이소선의 목소리
오도엽 기자 odol@jinbo.net
전태일열사가 불이 된지 서른여섯 해가 됐다. 고혈압과 당뇨, 며칠 전에는 방에서 넘어져 걸음마저도 절룩거리는 열사의 어머니께 11월 13일이 다가오니 마음이 어떠시냐고 물었다.

“요즘 잠을 잘 못자. 며칠 전에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라는 책을 봤지. 돌베게에서 나온 책이야. 나온 지 오래된 책인데 나는 책이 나온 지도 몰랐어. 밤새 읽으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988년 책이 나왔지만 누구도 어머니께 책이 나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책을 보면 어머니가 아파할 것을 안 주위의 사람들은 어머니 눈에 책이 띄지 않게 하였다.

“만호(현재 전태일기념사업회 황만호 사무국장)한테 그 책을 달라고 했더니, 지도 모른데. 그래서 내가 돌베개에 가서 사오겠다고 하니 갖다 주는 거야. 종득(전태일기념사업회 민종득 상임이사)이한테 전화해 왜 책 나온 거 말하지 않았냐고 하니까, 어머니 알면 아파하실까봐 그랬다는 거야.”

어머니는 열사에 대해서 인터뷰를 하든지 강연을 하고나면 사흘 밤은 꼬박 앓아누우신다고 한다. 책을 펴고 말을 하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커다란 돋보기로 밤을 새워 그 책을 읽은 어머니는 아직도 아프다.

책을 보신 아픔이 사라지기도 전, 다시 어머니께 열사에 대한 질문을 했다. 아마 11월 한 달은 꼬박 아파하셔야 할 것이다.

가시지 않은 아픔 위에

인터뷰를 시작하자 대뜸하시는 말이 “태일이는 열사도 투사도 아니야”다.

“쌍문동 이백팔번지에 살 때 풀밭에 천막을 치고 살았지. 보로꾸를 세면도 바르지 않고 쌓아두고 천막을 친 게 집이야. 세면을 바르면 철거반원이 와서 허물면 보로꾸가 깨지잖아. 태일이는 철거반원이 오면 미리 벽돌을 내려두거든. 철거반원한테 당신들이 허물고 가도 우리는 잠을 자려면 또 벽돌이 쌓아야 한다, 벽돌이 깨지면 돈을 주고 사야하니까 미리 벽돌을 치운다고 한 거야, 그 뒤론 태일이가 없어도 철거반원이 오면 조장이 그 집은 벽돌 깨지지 않게 조심히 내려놔 하는 거야. 그러면 태일이가 일을 마치고 와서 다시 쌓았지.”

열사가 일을 마치고 나면 집에 오면 밥도 먹지 않고 벽돌을 쌓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밥을 지어 밥 먹고 하라고 차려주고 물을 뜨러 나갔다 오면 밥은 먹지 않고 일을 하고 있더란다.

“밥 먹고 하라니까 하면 먹었다는 거야, 물 뜨러 간 사이에 밥을 다 먹을 수 없거든. 아랫집에 애들 둘이 사는데 벽돌을 쌓다보면 집들이 허물어져 아랫집이 훤히 보이는 거야. 아이들이 굶고 있거든, 그러니까 지 밥을 갖다 준 거야, 반이라도 먹고 주지 그러면, 저야 배고프면 어떻게라도 먹을 수 있지만 쟤들은 말도 못하고 굶어야 하잖아요 하는 거야. 태일이가 풀빵을 여공들에게 사줬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야.”

어머니는 아들이자 열사 전태일을 투사도 열사도 아닌 ‘사람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가 불이 되고, 청계천의 노동현실을 보고 일어선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한다.

“태일이가 그 날(11월 13일) 1시까지 청계천 육교로 오라는 거야. 머리도 깎고 작은아버지가 사준 신발을 신고, 바지도 다려 입고, 바바리도 입고 좋게 꾸몄지. 밥상에 앉아서는 여동생 둘한테는 엄마 말 잘 들어야 한다, 엄마 말 잘 들으면 부끄럽지 않게 산다 하는 거야 뭐할라고 지금 그 말 하냐 물으니, 시간 있을 때 할라꼬 그런다는 거야, 나한테는 정말 하루만 그 시간만 내줘, 꼭 와 줬으면 좋겠다 그런 거야, 자꾸 나 돌아보며 가더라구.”

36년 전 11월 13일에

어머니는 가지 않으셨다. 그 날 쌍문동에서 방송을 들으셨다. “쌍문동 이백팔번지에 사는 전태일이 기름을 붓고 몸에 불을 부쳤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야, 기어이 기름을 부었구나….”

조금 뒤 열사의 친구가 용케 잡히지 않고 빠져나와 어머니를 모시고 가려고 택시를 타고 왔더란다. 타고온 택시를 타고 가자고 했지만 어머니는 버스를 타고 가신다고 했단다.

“19번 버스가 평화시장까지 가거든, 내가 택시 타고 빨리가서 태일이를 보면 기절하고 쓰러질게 분명해, 그래서 버스 타고 가자고 한 거지, 너(전태일)는 갔지만 나는 어찌 할까를 생각해야 할 것 아닌가, 그걸 생각하려고 택시를 안 탔는데 태일이 친구는 그 걸 모르고….”

허연 가제로 칭칭 감겨 입하고 코만 보인 아들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전태일열사는 빨리 죽기 위에 옷 속에 스폰지를 넣고 기름을 부었다.

“엄마 나는 죽을 거야. 옷에 스펀지까지 넣었거든. 빨리 죽으려고. 어머니께 이 추한 모습 안 보여 주려고. 나 살리려고 다른 약 구한다 주사 놔준다 애쓰지 말고 내 말 꼭 들어 줘. 내 말 안 들어주면 나중에 천국에서 엄마 만나도 안 볼거야. 내 말 들어준다고 꼭 대답 해줘.”

그 말은 내 죽음을 헛되지 않게 어머니가 싸워 달라는 부탁이다. “엄마 들어주겠다고 더 크게 말해줘.”

말을 할 때마다 열사의 명치 부근이 부글부글 끓더란다. 그것을 본 의사가 열사의 목청 부분을 따니까, 말을 한 마디 할 때마다 피가 울컥 울컥 쏟아졌단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내 몸이 가루가 되도 끝까지 할 거다 하니, 더 크게 대답하라고 하는 거야, 말을 할 때마다 피가 폭 쏟아지고 크게 대하라고, 피가 푹 쏟아지고, 그걸 보고 탁 쓰러졌지.”

전태일은 열사도 투사도 아닌지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뒤로 투사가 되었다. “태일이가 말한 근로기준법 8가지 들어주지 않으면 장례식을 치루지 않는다고 했지, 시체를 동강동강 내서 내 치마 폭에 싸서 이 산에다 묻고, 저 산에 묻더라도.”

당시로 7천만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주겠다는 유혹도 있었다. “그 착한 아들의 뼈를 팔고 피를 팔아 좋은 집에 사고 따뜻한 밥 먹느니 죽어야지.” 중앙정보부에서 군법회의, 안기부로 어머니의 발걸음은 이천년대로 이어지고 있다.

36주기 추모식보다 앞서는 걱정이 있다. 분열되는 모습이 안타깝다. 쉽게 자신의 밥자리를 찾아가는 옛 식구들 때문에 안타깝다. 남편을 여읜 다음 해에 아들을 잃자 시어머니가 방에 담배를 밀어 넣어주더란다. 넋을 놓을지 모르니 담배라도 피우며 정신을 놓지 말라고. 일흔여덟, 어머니의 정신은 날이 서있다.

"한 번 이 소리하고 나면 사흘 동안 이 속에 들었던 것 까뒤집어 놔았꼬 견딜 수가 없어."

[시] 아들이 내준 숙제 / 오 도 엽
아들이 내준 숙제


나보고 근로기준법 배우라 하는 거야 내가 공장에 다니냐 그걸 배우게 난 그 때 보따리 장사 옷 장사였거든 쌍문동 이백팔번지 풀밭에 천막치고 사니 모기는 물어쌓지 무슨 공부야

부당해고가 뭐야 그 땐 노동자라고는 못했지 근로자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해고시킨 거지 유니온 숍은 큰 회사의 근로자가 전부 조합에 가입하는 거지 저녁에 아들이 와서 물으면 책을 보지 않고 대답해야 했지 그게 숙제야

육 개월 하다 말했지 내가 어디다 써먹을라꼬 그걸 배우겠냐고 픽 돌아누워 잠을 잤지 어머니 곧잘 배우다가 갑자기 안 배울라고 하는지 몰라 내 말 안 듣고 잠만 자려고 하는지 그 날이 오면 어쩌려고 통탄하겠다

일천구백칠십 년 여름 어머니와 아들의 공부 태일이가 말한 그 날은 멀지 않아 찾아왔다 아들이 내 준 숙제 일흔여덟에도 서른여섯 해를 꼬박 늙지 않고 대답을 한다 어머니 이소선은 통탄할 시간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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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양극화 현상 갈수록 심화

임금 양극화 현상 갈수록 심화
노동부 ‘2005년 임금구조 통계조사’…대·중소기업, 학력별 임금격차 더 벌어져
 
대기업-중소기업, 학력간 임금격차가 더 벌어지는 등 갈수록 임금 양극화 현상이 심각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부가 지난해 6월 기준 상용노동자 5인 이상 6,495개(약 49만명) 사업체를 표본으로 한 ‘2005년 임금구조 기본 통계조사’ 결과를 31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대기업일수록 높은 임금 수준이 지속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10~29인 규모 사업체를 100으로 놓고 볼 때 500인 이상 사업체는 지난해 127.8(1.3배)로 2004년의 127.8에 비해 높아졌다. 반면 5~9인 사업체는 지난해 87.7로 2004년의 91.8로 낮아졌다. 이는 그만큼 대-중소기업간 임금격차가 더 벌어진 것을 의미한다.<표2 참조>


또한 고학력화가 진행 중인 가운데 고학력일수록 높은 임금수준을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르면 전체노동자 중 대졸이상 노동자는 2000년 24.0% 2001년 25.2%, 2002년 28.3%, 2003년 28.7%, 2004년 28.9%, 2005년 31.7%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고졸 노동자 1인당 임금을 100으로 놓고 볼 때 대졸 노동자는 154.9(1.5배)로 2004년 152.3에 비해 다소 증가했다. 대졸자의 임금수준은 99년 151.7을 보인 이래 2002년을 제외하고 전반적으로 증가추세를 이루고 있는 것. 대졸이상 노동자의 월급여액을 고졸노동자와 비교할 때 2001년 152.3%를 제외하고는 99년 151.7%, 2000년 150.9%, 2002년 149.4%로 축소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중졸이하의 경우도 지난해 85.5로 전년도보다 다소 올랐으나 99년 88.9를 보인 이해 해마다 하향곡선을 긋고 있는 등 학력차에 따라 임금격차가 더 벌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표1 참조>


노동자의 고령화 현상은 더욱 심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르면 노동자 평균연령은 37.7세로 99년 99년 35.9세, 2000년 36.2세, 2001년과 2002년 36.5세, 2003년 37.1세, 2004년 37.5세에서 매년 높아져가고 있다.

연령별 임금수준은 남성노동자가 45~49세, 여성노동자가 30~34세에 임금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으로 노동부는 남녀 노동자가 임금 격차는 지속적으로 축소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남성노동자 대비 여성노동자 월급여액(상여금 및 성과급 제외)은 2002년(64.8%)을 제외하고 99년 63.8%, 2000년 64.8%, 2001년 65.1%, 2003년 65.2%, 2004년 65.7%, 2005년 66.2%로 매년 높아지고 있으나 60%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성별 임금격차는 여전히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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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전야’ kbs방영

‘KBS독립영화관’ 11월 특집…‘파업전야’ 등 4편 첫 방송

1990년 4월 7일, 서울 혜화동에 자리한 예술극장 '한마당', 영화가 상영중인 극장 안으로 한무리의 경찰이 진입합니다. 조명이 켜지고, 털털거리며 돌아가던 영사기가 이윽고 멈추더니 영사기와 플름에 대한 경찰의 압수작업이 시작됐습니다.

상영 시간을 채 다 못 채우고 멈춰선 영화의 제목은 '파업전야'. 한국공연윤리위원회 심의를 받지 않은데다, 파업을 선동하는 불온한 내용이라는 것이 압수의 이유였습니다.

그로부터 16년. 영화 '파업전야'가 지상파 TV를 통해 시청자들을 만납니다.

▶ [KBS독립영화관] "한국 독립영화의 전설" 예고편 미리보기

■ KBS독립영화관 11월 특집…독립영화 4편 첫 방송

KBS독립영화관(매주 금요일 밤 1시 10분, 1TV)이 오는 3일과 10일 2주에 걸쳐 '한국독립영화의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특집방송을 마련합니다.

11월 특집으로 마련된 이번 방송에서는 특히 1970~90년대 한국 독립영화사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난 작품들이 방영될 예정이어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첫주인 11월 3일에는 한국 독립영화 1세대로 분류되는 이익태 감독의 1970년 작 '아침과 저녁 사이', 한옥희 감독의 76년 작 '색동'과 함께, 1980년대 독립영화계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는 이정국 감독의 단편 '백일몽'(84년 작)이 방영됩니다.

11월 10일에는 1990년대 한국 독립영화의 상징, '파업전야'가 처음으로 방송 전파를 탑니다.

1990년 세계 노동절 101주년 기념으로 영화집단 장산곶매가 제작한 16mm 장편영화 '파업전야'는 바로 한 해 전 장산곶매가 5.18 광주를 소재로 만든 영화 '오! 꿈의 나라'와 함께 8,90년대 한국 독립영화의 지표가 됐던 작품입니다.

이번 특집을 기획한 KBS 송현주 PD는 "70~90년대 우리나라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통해 한국 독립영화 역사을 다시 보는 기회를 마련하고 싶었다"며 "독립영화의 현주소를 짚어보고, 관심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 압수·상영금지 속 전국 30만 관람

이번 특집에서는 특히 90년대 초반, 당국의 필름 압수와 상영금지 속에서 '비밀리'에 유통됐던 독립영화 '파업전야'가 처음으로 TV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어서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은, 장윤현 등 4명의 감독이 공동 연출한 '파업전야'는 80년대 말 노동현장의 현실을 담아내며 독립영화계에서 본격적인 사실주의 영화의 등장을 알린 작품.

2천만 원의 제작비로 3개월간 제작된 이 영화는 당시 부평에 있는 한 금속공장에서 촬영했고, 등장하는 배우들 중 상당수가 현장 노동자들이었던만큼 당시 노동현장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990년 4월 7일, 한마당 극장에서의 상영 이틀째 경찰의 압수조치가 시작되면서 사실상 공식 상영 경로가 막힌 '파업전야'는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상영을 계속했는데요, 당시 영화가 상영되는 대학 구내에서는 진입을 시도하는 경찰 병력과 이를 저지하는 학생들간의 몸싸움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이후 전국 11개 도시에서 30만 명 이상이 이 영화를 본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영사기와 필름이 압수되던 상황을 TV 방영이 가능하도록 만든 16년의 세월. 그 시간들은 '파업전야'를 공동 연출했던 주인공들에게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당시 함께 영화를 만들었던 4명의 연출자(이은, 이재구, 장동홍, 장윤현) 중 한 사람인 이은 씨는 제작자로 변신해 현재 MK픽처스 대표로 있고, 1997년 '접속'으로 공식 데뷔한 장윤현 감독은, 영화 '텔미 섬씽' 이후 영화 제작투자에 전력하다 현재 영화 '황진이' 연출에 한창입니다.

KBS독립영화관 '한국 독립영화의 전설'은 오는 3일 밤 1시 10분 시청자들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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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비정규직 차별 되레 조장 - 비정규직 통계자료

김유선 노사연 소장, 통계청 경활조사 부가조사 분석
“국가가 비정규직 차별 되레 조장”
교육훈련 격차 무려 7.2배…비정규직 절반 이상 ‘비자발적’ 취업
 
원자료(raw-data) 분석방법 차이에 따라 해석이 다르기도 하지만 비정규직 규모 증감추이나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격차가 이제 구조화(또는 고착화) 양상을 띤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통계청의 올 8월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 결과를 보자.

31일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의 분석결과에 따르면, 비정규직 규모는 2003년 784명에서 2006년 845만명으로 꾸준히 늘어나고 있지만 전체 임금노동자 가운데 비정규직 비율은 2003년부터 매년 55.4%, 55.9%, 56.1%, 55.0%로 55~56% 안팎에서 구조화되고 있다.

임금도 그렇다. 정규직을 100으로 할 때 비정규직 월 평균임금은 2003년 51.0, 2006년 51.3이고, 시간당 임금 역시 각각 53.1, 52.4였다. 해가 바뀌어도 그 수준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상위 10%와 하위 10% 간 임금격차를 나타내는 임금불평등도 마찬가지다. 시간당 임금을 기준으로 할 때 2003년 5.1배에서 2005년 5.4배로 증가한 뒤 2006년에도 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OECD 국가 중 임금불평등이 가장 심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2005년 4.5배)보다 더 심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없다.

그나마 올 8월 조사에서 눈에 띠는 대목은 정부부문인 공공행정에서 비정규직 규모가 늘었다는 점이다. 2003년 15만명(20.4%)에서 2006년 20만명(25.0%)으로 규모, 비율이 모두 늘었다. 정부가 공공부문에서부터 비정규 대책의 모범을 보이겠다고 했던 공언(公言)이 공언(空言)임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올해로 7회째인 부가조사에서 처음 실시된 취업의 자발성 여부와 교육훈련 수혜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들이다.

교육훈련, 기업을 매개고리로 정규직에 편중

김유선 소장의 분석결과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교육훈련을 받은 경험이 있는 노동자는 정규직이 41.8%로 비정규직(16.7%)보다 2.5배 많다. 그리 새삼스런 결과는 아니다. 하지만 비용부담 주체별로 보면 국가가 오히려 교육훈련에서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먼저 본인부담 교육훈련은 정규직(2.5%)과 비정규직(2.6%)으로 거의 같았고, 회사부담 교육훈련은 정규직(27.0%)이 비정규직(12.2%)의 2.2배였다. 상식을 크게 벗어나는 격차는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가기관이 부담하는 교육훈련 격차가 7.2배에 달했다는 점이다. 정규직이 12.2%인 반면 비정규직은 1.7%에 그쳤다.

이를 두고 김유선 소장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교육훈련 격차는 상당부분 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실시(또는 지원)하는 교육훈련 프로그램이 노동자 개인의 수요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기업을 매개고리로 해 정규직에 편중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 소장은 특히 “국가기관부담 교육훈련에서 7배가 넘는 격차가 생긴 것은 국가기관이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더 조장하고 있음을 반증한다”고 비판했다.

‘목구멍이 포도청’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가사·육아와 노동을 병행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파트타임 같은 비정규직을 택하는 여성노동자가 많은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과 달리 우리나라엔 어쩔 수 없어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 조사에서 취업의 자발성 여부가 '수치'로 드러났다.

정규직은 현재 일자리에 자발적으로 취업한 경우가 93.0%였지만 비정규직은 48.1%에 그쳤다. 절반이 넘는 51.9%가 비자발적 취업자인 셈이다. 비자발적으로 취업한 사유는 ‘생활비 등 당장 수입이 필요해서’(34.0%), ‘원하는 일자리가 없어서’(8.8%) 순이었다. ‘안정된 일자리’(44.3%)와 ‘근로조건 만족’(42.0%)을 이유로 정규직으로 취업했다는 경우와 대별된다.

고용형태별로는 호출근로(91.7%)에서 비자발적 취업자가 가장 많았고, 가내근로(65.3%), 장기임시근로(55.5%), 용역근로(53.3%), 시간제근로(53.0%), 특수고용(48.5%), 기간제근로(48.2%), 파견근로(41.5%) 등의 순이었다. 

<상자기사①> 비정규직 별도 통계조사 2000년8월부터
비정규직에 대한 별도 통계조사를 실시한 것은 지난 2000년 8월의 일이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에서 비정규직(임시직 + 일용직) 규모가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51.7%나 된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이듬해부터 기존의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더해 부가조사를 실시했다. 비정규직 규모와 정규직과 비교한 비정규직의 근로실태를 알아보자는 차원이었다.

<상자기사②> 조직화 나섰다지만 조직률 더 떨어져
조합원인 비정규직 1년 새 0.4% 줄어…23만7천명, 조직률 2.8%
기금 모금, 조직활동가 양성 등 비정규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양대 노총 활동이 본격화되고 있지만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 비정규직 조직률은 지난해보다 더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이 31일 내놓은 올 8월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노조에 가입한 비정규직은 23만7천명으로 지난해(27만1천명)와 견줘볼 때 3만4천명이 줄었다. 전체 비정규직(845만명) 가운데 노조원인 비정규직 비율 역시 같은 기간 3.2%에서 2.8%로 0.4%포인트 떨어졌다.
전체 조합원에서 비정규직이 차지하는 비율도 15.4%에서 13.7%로 떨어졌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11.5% → 13.9% → 15.4% 등으로 증가하던 추세와는 사뭇 다르다.



고용형태별 조직률은 5.4%로 가장 높은 파견근로에 이어 용역근로(4.8%), 기간제근로(4.2%) 등의 순이었고, 장기임시근로(1.5%), 특수고용형태(0.8%), 시간제근로(0.4%)의 조직률은 미미했다.


하지만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가 모집단 내의 일부만을 조사해 전체를 추정하는 표본조사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오차범위가 넓다는 지적도 제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수고용형태의 경우, 2004년 5만4천명에 달하던 조합원 수가 2년 만에 10% 수준인 5천명으로 줄었는데, 그 이유가 명쾌히 해석되지 않는다. 또한 화물운송기사들로 조직된 화물연대 조합원 수(노조 자체집계, 2005년 12월말 현재)만도 9,704명이고, 레미콘운송기사와 덤프트럭기사들로 조직된 건설운송노조와 덤프연대 조합원이 각각 1,300명, 1만4,000명(노조 자체집계, 올 10월 현재)인 점에서 볼 때 조직률 통계를 곧이곧대로 이해하는 데는 다소 무리가 있다.


한편 분석결과, 올 8월 현재 전체 조합원 수는 173만명으로 지난해(176만명)보다 3만명 줄었고, 조직률 역시 11.8%에서 11.3%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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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건설…깨져도 받을 수없는 합의안이다

포항건설…깨져도 받을 수없는 합의안이다
포항건설 합의안 부결...또 다시 선택한 투쟁
오도엽 기자 odol@jinbo.net
아침부터 집을 지키고 있는 포항건설노동자 정 씨는 답답하다. 아들은 학교에 가고, 아내는 일터에 갔다. 마트에서 시간제로 일하는 아내의 벌이로는 생활비도 팍팍한 형편. 아들이 다니는 학원도 다음 달부터는 그만 둬야할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추석은 생각할 여유조차도 없다. 담배라도 끊어야 하는데, 파업 이후로 끊기는커녕 더욱 늘어가는 게 담배다.

 참세상자료사진

파업을 접고 일을 하고 싶다. 아니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도저히 이번에 나온 합의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 13일 조합원 임시총회에서 갈등을 거듭하다 반대에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의 투쟁이 아쉬워서도, 하중근 열사의 죽음을 이대로 끝낼 수 없어서도 아니다.

“합의안이 가결되었다고 현장에 돌아갈 수 있느냐하면 그게 아니야. 고용이 보장되지 않았는데 파업을 그만둔다고 돌아갈 일터가 있는 게 아니잖아. 죽고 머리통이 깨져가며, 집에서는 눈초리를 받아가며 싸운 대가가 이번 합의안은 아냐.”

2천여 명이 모여 합의안 찬반투표를 했는데, 찬성은 7백여 명, 반대는 1천3백여 명이었다. 투표가 끝나고 구속된 이지경 위원장을 대신한 최규만 직무대행은 책임을 통감하고 직무대행직을 사임하였다.

집행부의 한 간부는 한숨을 내쉰다. “합의안을 만들고, 가결되리라고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상이외로 반대가 많았다. 실제 투쟁에는 힘이 실리지 않으니, 교섭에서 우위를 점하기도 힘들고, 이대로 끌고 간다는 것도 부담이 된다. 조합원들의 뜻을 알았으니 비상대책위를 꾸려 투쟁의 힘을 다시 일궈가는 길 밖에 없다.”

이번 합의안은 기존 단체협약에서 보장되었던 인사원칙인 ‘조합원 우선채용’ 조항마저 포기한 ‘개악안’이라고 조합원들은 반발을 한다. 실제로 파업지도부는 전문건설업체가 제시한 기존보다 후퇴된 단협안을 수용하였다. “이대로 파업을 끌어가는 것은 조직력을 약화시키고, 노조가 깨지는 일마저 발생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되었다.

 참세상자료사진

“노조가 깨진다고 했는데, 합의안에 찬성을 하고, 파업을 멈춘다고 조직이 지켜질 것 같으냐. 개악된 단체협약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노조는 끝장이다”고 정 씨는 흥분을 한다.

“아예 잘 됐다. 다시 싸우는 길 밖에 없다. 가결되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도 됐다. 이번 찬반투표 결과는 그동안 평화적인 싸움만을 외쳤던 지도부에 대한 불신임도 포함된 것이다”며 주섬주섬 조끼를 입는다. 오후 3시에 있을 집회에 나가기 위해서다.

하지만 정 씨의 마음은 오락가락한다. 다시 힘을 내서 싸울 수 있을까, 아내의 눈초리는 더욱 날카로워질 텐데, 추석은 어찌하고, 아들 학원은 그만두게 해야 하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걱정거리는 이어가지만 조끼를 입고 머리띠를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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