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

홍세화 셈이 파리의 택시운전사 때려 치우고 한겨레에서 언론인 생활을 함시롱 세간에 널리 퍼뜨렸던 두 단어가 있으니, 하나는 똘레랑스고 하나는 공화국. 공화국이라는 단어는 그 함의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일반대중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던 말이었는데, 이번 촛불집회를 통해 한국 국민들은 자신들이 민주 "공화국"에서 살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홍쎔, 멋져부렁~!

 

그런데 이 "공화국"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약간은 걸쩍찌근한 뉘앙스가 문제로 비화할 듯 하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보니 묘한 기사가 하나 떴는데, "공화국"이라는 단어때문에 공안사건 하나 만들어질지도 모른단다.

 

기사에 따르면 한국진보연대 황 모 활동가의 수사 과정에서 "공화국은 참다운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이다"라는 문장이 적힌 문건이 발견되었고, 수사기관은 이 문건을 근거로 참고자료를 작성해서 구속영장신청과 함께 법원에 제출했단다.

 

한국진보연대에 대한 평가는 관두고, 게다가 기사에는 앞뒤 뚝 잘라먹고 "공화국은 참다운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이다"라는 말만 틱 던져놓은 터라 이 문장이 어떤 맥락에서 튀어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 우리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말이 선명하게 박혀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 공화국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았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인데, 우선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위력을 실감하고 있는 부도덕한 정권이 지들 스스로 꿇리는 것이 있어서 잘 쓰지 않았을 것이고, 수구반동세력 역시 마찬가지일 거고, 대중들도 공화국이라는 단어가 왠지 낯설기도 했겠지만, 뭐니뭐니 해도 "공화국 북반부"라는 이질적인 용례를 자주 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그렇다. 휴전선 이북에 있는 나라의 공식 국명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고 이들은 곧잘 "공화국 북반부"라는 말을 상용했더랬다. 남한에서 북한에 대해 다루는 드라마나 영화나 뭐 이딴 것에서는 자주 "공화국 북반부"라는 단어가 돌출하기도 했기 때문에 "공화국"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왠지 북조선스러운 단어라는 선입견이 작동했을 수도 있다.

 

기사에서 거두절미하고 따옴표 친 "공화국은 참다운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이다"라는 말은 그 자체로 빨갱이 색칠을 할 건덕지가 없다. 원래 공화국은 그래야 하는 거니까. 그러나 "공화국 북반부"의 악몽에 시달리는 공안기관의 뇌리 속에는 "공화국"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순간 이건 왠지 불그스레 하다는 인식이 작동한다. 파블로프의 개가 밥그릇에 반응하듯이.

 

진보연대의 확고한 입장이 "공화국 북반부"에 대한 문제제기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임은 분명하다. 과거 행인이 전에 있던 당에서 정통망법 관련 성명을 냈을 때, 이 성명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결국 내리게 만들었던 단체는 다름 아닌 진보연대였고, 그 실무를 맡았던 사람이 이번에 구속영장신청된 황 모씨다. 그 성향을 봤을 때, 수사기관이 주시하는 것처럼 이 문장에 사용된 "공화국"이라는 단어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즉 "공화국 북반부"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뭐 어쨌다고?

 

"공화국 북반부"던 "민주공화국"이던 간에 공화국은 인민의 인권이 제대로 보장될 수 있어야 공화국으로서의 진정성이 인정되는 거다. 그 인권보장 안에는 북조선을 파라다이스라고 생각하던 장군님을 예수랑 동급이라고 생각하던 그 생각 자체를 인정해 주는 것도 포함된다. 적어도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하며 시장의 자유를 지상과제로 생각하는 남조선의 권력집단은 "사상의 자유시장" 역시 보장할 줄 아는 미덕이 있어야 한다.

 

진보연대가 인공기 들고 나와 앞으로 다가올 815 행사를 단독정부 수립 60년이라는 이슈에 맞게 성대하게 치룬다고 해도 걍 놔둬도 된다. 어차피 광장에 촛불을 들고 나온 대다수 사람들이 그 꼴 보면 성조기 흔들며 미국산 쇠고기 먼저 먹겠다고 아우성 치는 일부 개신교 광신도들과 똑같이 생각할 거니까. 이번 촛불집회 와중에 치뤄졌던 615 기념일도 거의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지나가지 않았나?

 

수사기관이 "공화국"이라는 단어 하나를 가지고 공안사건을 기획할만큼 세상이 옛날같지는 않다. 다만 수사기관은 이런 헤프닝을 통해 "공화국"이라는 단어를 이질적인 존재로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건 수사기관의 의지라기 보다는 공화국의 이상을 짓밟으면서도 공화국의 정권을 잡고 있는 이명박과 한나라당 인사들의 심정일 것이고.

 

더 두고 봐야할 문제지만 "공화국"의 이념은 이제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 인식이 날로 발전하면 당연히 "공화국 북반부"의 문제가 뭔지는 일반 대중들이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수사기관이 설레발이 치면서 "공화국"이라는 단어 하나에 화들짝 놀라 걍 이거 죄다 빨갱이로 잡아 쳐 넣어야 하는 거 아닌가하고 수선을 피우는 건 지들 얼굴에 침뱉는 일일 뿐이다. 언제쯤이 되어야 이놈의 검경이 정권의 개가 아니라 공화국의 수호병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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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4 13:47 2008/07/04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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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두 그 기사 보고 신나게 웃었어요.
    공화국이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썼든 간에, 일단 그 문건만 놓고 보면 암 문제가 없는데 걔들 왜 그랬을까요 ㅋㅋㅋㅋ 사실 우리 제헌국회에도 빨갱이가 섞여 있었다는 얘길 하고 싶었던 겁니다 ㅋㅋㅋ

  2. 우리 공화국 들어간 문건 하나씩 들고가서.. 시청에 눕자. 한 천명만 모아서 눕자.

  3. 자폐/ 웃긴 기사 계속 시리즈로 이어집니다. 아주 요샌 경찰, 정부, 청와대, 국회가 국민을 웃겨주기 위해 경쟁적으로 뛰나봐요. ㅎㅎㅎ

    pang/ 됴티 됴아~!

  4. 구글타고와서 글 잘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