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가 무슨 4차산업혁명을 이야기하나
'주52시간제'라는 희안한 말이 일상용어처럼 굳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거야말로 뭔가 심상찮은 조짐이 아닌가 싶다. 정부차원에서 노동시간단축이라는 시대적 대세를 거스르고자 하는 조직적 음모가 진행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현행 근로기준법상 임노동자들의 기본 노동시간은 주 40시간이다. 이게 합법적으로 노동시간 연장이 가능한 시간을 몇 시간 더 주냐 마냐 가지고 논란을 벌이다가 12시간으로 정해졌다. 그러므로 '주52시간'이라는 건 연장가능시간 합쳐 주 최대 노동시간인 거지, 이걸 자꾸 법정 노동시간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고, 정식 용어로 하려면 '주 12시간 연장노동제도' 정도로 불러야 한다.
얼마전에 이름도 뭔 새마을운동에 버금가는 촌스러운 이름을 붙여놓은 '4차산업혁명위원회'의 위원장이라는 장병규라는 자가 언론과 인터뷰를 했는데, 중앙일보에서 뽑은 타이틀이 "내일 당장 망할지 모르는데 벤처가 어떻게 52시간 지키나"였다.
중앙일보: [김동호의 직격인터뷰] "내일 당장 망할지 모르는데 벤처가 어떻게 52시간 지키나"
난 원 ㅆㅂ 웃기지도 않아서, 아니 그럼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씨앙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그런데 이게 그냥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왠지 모르게 이 나라가 당장 4차 산업혁명에 부응하지 못한 채 도태될 위험에 처해 있고, 이 위험을 극복하려면 허리띠 다시 묶고 잠을 쪼개서 자며 4차 산업 앙앙가를 불러 제끼며 달려 나가야 할 것 같다. 장병규가 휘두르는 채찍질을 감내하지 않는 한 4차 산업혁명은 우리로부터 멀어지고, 우리는 이 변혁의 시기에 낙오자가 될 듯하다.
전형적인 공포마케팅의 한 예가 될 듯한 이런 발언은 실제로는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어떤 말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일 수도 있다. 장병규의 말을 비판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지적하는 것처럼, 장병규는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아니라 자신이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 이 요구를 하고 있다. 뭔 말이냐면,
장병규의 인터뷰 중에 "나는 20대 때 2년 동안 주 100시간씩 일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면서 "스타트업에 일하는 사람들은 그것조차도 싫어한다"라며 요즘 애들은 일하기를 싫어하는데 Latte is 말이야 시전하면서 지가 주당 100시간씩 일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문제는 그 때 100시간씩 일하던 장병규의 위치는 업주라는 거다. 임노동자가 아니라.
나도 왕년에 공장다닐 때 한달 노동시간 480시간 찍은 일이 있다. 한달 480시간 찍으려면 하루 몇 시간씩 일해야 하느냐, 하루 16시간 근무다. 저 노동시간 기록 찍을 때 일주일을 연근한 일이 있다. 말 그대로 24시간 근무를 일주일 한 거다. 그야말로 뒈지는 줄 알았다. 기계가 쉥쉥 돌아가는 현장에서 졸기가 일쑤였고, CCRoom의 의자에 앉기라도 할 냥이면 고개가 떨어져서 에러를 놓치기 십상이었다. 밥도 안 넘어가고 수시로 울리는 알람에 공장 계단을 위 아래로 오르락 내리락 할 때면 내가 왜 사나 싶기도 하고, 걸어서 불과 5분도 되지 않는 거리의 기숙사 내 방이 선명하게 눈 앞에 떠오르는 기적도 체험했다.
내가 그 그룹 회장이나 그 회사 사장이나 아니면 최소한 그 공장 공장장이었던가? 아오, 내가 회장이었으면 하루 16시간만 일했겠어? 1년이고 2년이고 낮이고 밤이고 일만할 수도 있겠지. 주인의식이라는 건 그런 거다. 그런데 임금 주고 노동계약 맺은 노동자들에게 지나 감내할 일을 떠맡기지 말라고 근로기준법이라는 게 만들어진 거고, 적정노동시간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도출하여 제도화하는 거다. 적어도 국가 지정 위원회의 장쯤 해먹으려면 이 정도는 좀 사고회로에 집어 넣어놓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임노동자에게 주인의식 요구하는 것만큼 도둑놈 심뽀가 없다.
현재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이러한 장병규의 발언에 빡이 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나마 내가 볼 때 한국의 노동자들은 의레껏 너무 점잖은지라 장병규 규탄대회 같은 건 하지 않고, 장병규가 뭐라 하든 쎄가 빠지게 일해주고 있다. 반박을 해도 아주 점잖게 하면서 저 저렴한 인식수준에 과분하게 조언을 하는 수준이고.
프레시안: 30년 전으로 가고 싶은 IT 산업 첨단의 기수에게
이러다보니 장병규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대충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감을 잡을만한 자료들을 수집했다.
BUSINESSPOST: [Who Is?] 장병규 4차 산업혁명위원회 위원장
!T Chosun: 장병규 4차산업위원장, 포브스 선정 2019 한국 부자순위 47위에 올라
아, 뉀장, 조선일보 기사는 될 수 있으면 걸지 않으려고 하는데 암튼 그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다. 어쨌거나 이렇게 검색을 하다보니 이 사람이 IT 관련하여 상당한 재부를 쌓은 사람임이 확인된다. 포브스 추산 자산이 1조대라고 한다.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 규모의 자산이다. 애초 현 정부에서 중소벤처기업부장관후보로 물망에 올랐는데 본인이 거부했단다. 주식 백지신탁 하기 싫다고. 청와대가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장으로 장병규를 선임하면서 내놓은 코멘트가 "국내 IT 업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스타트업 기업인들의 우상"이었다.
장병규 역시 사업가이고, 자신이 경험한 만큼의 범위에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지난 200년 동안 전개되어온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투쟁이라는 건 별 의미가 없는 이야기가 된다. 가족의 배경이 되었든 머리가 좋았든 간에 이런 저런 배경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해온 이력의 인물이 국정의 한 축에 서서 자신의 경험만을 가지고 세상을 재단하게 되면 여러 사람이 피를 보게 된다. 특히 가족의 배경도 없고 공부할 기회도 제대로 갖지 못해 결국 실패와 좌절의 연속을 경험하거나, 여기서 무너지면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항상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이 "내가 한 때는 주 100시간씩 일했던 사람이야"라는 채찍질로 감당이 될 수 없음을 장병규는 모른다.
링크한 비지니스포스트를 참조한다면, 장병규는 자기가 고용했던 노동자들에게는 꽤나 잘 해 주는 고용인이었던 것같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주52시간이 아니라 주100시간 일하면 또 뭔가 인센티브가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질 않다. IT 업종의 스타트업 기업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별종의 인간형도 아니고, 그 많은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다들 마음씨 좋은 키다리 아저씨도 아니다. 4차산업혁명의 선봉에서 이들 기업들이 떼돈을 벌어준다고 한들 국가가 그 기업들 안에서 주당 100시간씩 일했던 노동자들을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일해서 돈 벌면 되지 않느냐는 따위의 사고방식이 21세기에도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시대착오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인권이라는 거, 그 중에 노동자의 인권이라는 거, 이게 그냥 장병규같은 사람이 어느날 아이구 우리 회사 일하는 사람들 좀 편안하게 해줘야겠다고 대오각성해서 뜬금없이 보장된 게 아니다.
프레시안 기사에서 나온 대목 하나를 꼭 장병규가 봤으면 좋겠다. "당신이 스타트업을 하는데 야근과 휴일근로가 매일 반복되어야만 성공하는 사업이라면, 그런 사업은 벌이면 안 된다."
주40시간 노동도 길다. 버트란트 러셀이 하루 4시간 (임)노동을 이야기했고 케인즈 역시 그랬다. 이들이 장병규보다 생각이 짧고 삶이 팍팍해서 그랬다고 보진 않는다. 그들이 스타트업 창업자가 아니라서 그랬던 것도 아니라고 본다. 인간이 돈에 얽매여서 기계처럼 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았기에 그랬던 거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주40시간 노동도 길다. 이걸 자꾸 주52시간제도 어쩌구 하면서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행동은 저지되어야 한다. 여기 편승해서 "나 때는 주 100시간씩 일했어!"라고 떠드는 건 그냥 술집에서 할 이야기다.
꼰대들이나 할 이야기를 공식적 방침으로 제시하는 건 반동분자들이나 할 이야기다. 꼰대가 4차산업혁명을 이야기하면 혁명이 산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