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임청각 1박

안동에는 눈이 오질 않고, 당연히 안동역에는 무릎까지 덮을만큼의 눈이 없다는 허무한 사실을 확인한 후,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임청각이었다. 임청각은 탑동파 이씨 고택 바로 옆이었다. 탑동파 이씨 고택의 규모를 본 직후여서인지는 몰라도 임청각의 규모가 주는 위세에 눌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임청각은 저 산골 어드메 초가삼간도 크다고 여기며 살았던 촌놈에게는 무지막지한 형세다. 원래 아흔 아홉칸으로 지었다는데 세월의 풍파를 거치면서 이제 예순 몇 칸(안내판에는 70여 칸이라고 되어 있다)이 남았다던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씨 고택 쪽에서 바라본 임청각의 전경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문은 생각보다 작은 편이었는데, 오른편에 "국무령 이상룡 생가"라는 현판이 잘 보이게 붙어 있다. 안동이라는 선입견이 있어서였는지 몰라도 한글로 된 간판이 이채롭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임청각에 대한 설명이 걸려 있다. 임청각 옆으로는 안동시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보이는 안내소가 설치되어 있고 해설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견학 등의 목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오는 편이라고 하는데, 도착한 그 시간에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임청각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임청각은 국가차원에서 관리되는 곳이었다. 임청각에 들린 석주 이상룡 선생의 자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전국에 관리해야 할 고택의 70%가 경북에 몰려 있고, 경북에 있는 관리해야 할 고택의 70%가 안동에 몰려 있는데, 그래서 경북도와 안동시차원에서 고택에 대한 관리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장한 일이다.

그런데 그 말을 전해듣는 순간 좀 짠한 느낌이 있었다. 말씀을 전해주신 석주 선생의 자손께서는 오히려 자신은 안주할 곳이 없어 지금도 떠돌이 신세라고 했기 때문이다. 임청각은 자손이 직접 관리하는 건 아니고 기거와 살림과 관리와 해설을 하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석주 이상룡 선생의 대형 브로마이드가 걸려 있다. 직계 방계를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에 나섰고, 동생, 아들, 조카, 손자, 손부, 당숙 등 일가 11명이 독립운동을 하여 국가의 기림을 받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임청각의 규모만으로 보더라도 내심 이정도면 독립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대대로 이처럼 명가의 가문을 유지하면서 상류계급의 신분을 누리던 집안이 자신들의 뿌리가 부정당하게 된 상태를 참을 수는 없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었다. 비록 가계는 왕국의 신민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렸더라도 독립운동은 민주공화제를 위한 것으로서 시민이라는 변화된 신분을 감수해야 했을 터. 그게 과연 쉬웠을지. 또한 가족과 재산과 삶의 터전을 다 버리고 이역만리를 전전하면서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삶이라는 게 보통의 용단으로 가능했을지. 더 나가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 전체가 그 간난신고를 겪어야 했음을 보면서 이를 감내하려면 어떤 결의가 필요했을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덕에, 그 자손은 의지처가 마땅치 않아 여기저기 전전한다는 것도 씁쓸하고. 시절의 인심이 박하여 사람은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하는데, 그나마 고택은 자리를 보존하면서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현충시설로 관리되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행랑채가 있다. 행랑채 안쪽에는 국무령의 행적에 관한 자료들을 전시한 공간이 나온다. 원래 우리가 1박을 하기로 한 곳은 그 전시공간 앞쪽에 있는 뒷방이었다. 그런데 관리하시는 분의 배려로 방을 안방 마루 건너편의 건넌방으로 옮기게 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안채 바로 옆에는 우물방이라고 하는 별채가 있다. 여기는 우물 남쪽인데 사랑채 역할을 한 곳으로 보인다. 우물을 중심으로 반바퀴 돌면...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루가 딸린 살림방이 나오는데, 여기를 우물방이라고 한다. 이곳 우물이 영함한 것인지 몰라도 이 살림채에서 정승판서와 영웅이 나온다고 하는데, 석주 선생을 비롯해 가문의 독립운동가들 다수가 이 방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물이 워낙 크다. 덮어놓은 것을 열어보지는 않았기에 아직 우물에서 용천이 솟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규모만으로 보더라도 이 집이 수용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궁금해질 정도다.

어릴 때 시골 집에도 우물이 있었다. 집집마다 우물이 있었지만 없는 집도 있어서 때때로 물 뜨러 오는 사람도 있었고. 어른들이 가끔 집집의 물맛도 평가를 하는데, 누구 집 우물은 바로 용천에서 나와 좋다는 둥, 누구집은 논물이 들어가는 듯 맛이 구리다는 둥 아무튼 그런 말들이었다.

산 밑에 논배미 한 곳에 용천이 있었는데, 마을에서는 그 용천을 '옻샘'이라고 불렀더랬다. 옻이 올랐을 때 그 물을 먹고 그 물로 씻으면 낫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남의 집 우물을 보는데 왜 예전 생각들이 그렇게 나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물방 옆 담을 지나가면 격이 달라보이는 정자형 건축물이 있다. 군자정(君子亭)이다. ㄱ자형 건물인데 남북으로 길게 놓인 건물에는 온돌을 놓고 아궁이를 들여 불을 때게 만들었다. 동서로 붙어 있는 건물은 문이 있지만 마루방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군자정은 문이 따로 나있다. 출입문에서 올려다보면 그 풍채가 남다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계단도 위세가 당당하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건축양식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처지지만, 보면 볼수록 아름답다. 날 좋을 때 저 정자 문을 활짝 열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안동소주 한 잔 해도 좋겠다. 비오는 날이면 처마 밑에 소반 놓고 낙수소리 안주 삼아 막걸리를 들이켜도 좋겠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군자정 옆의 못(?)이 이게 또 묘하다. 이 못은 남북으로 약간 긴 직사각형의 모양인데, 못을 구획짓는 석벽의 높낮이와 방향이 교묘하게 만들어지면서 서쪽의 군자정과 동쪽의 사당 어느 쪽에서 보더라도 네모 반듯한 것처럼 왜곡되어 보이게 만들어져 있다. 일종의 착시인데, 이러한 착시를 유발함으로써 건물과 못의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건 여간한 센스가 아니리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당에서 내려다본 군자정. 참고로 이 사당은 사당인데도 모셔진 신위가 없단다. 석주 선생이 독립운동하려고 떠나면서 나라가 없는데 가문이 무슨 소용이냐며 조상 신주를 죄다 땅에 묻어버렸단다. 이정도 기개가 있었으니 그 풍파를 견뎠겠지.

사당 사진에 짝꿍이 죄다 찍혀서 다 생략. ㅋ 아, 그러고보니, 임청각을 관리하시는 두 부부와 아침상을 함께 하게 되었는데, 반찬들이 소박하면서도 여간 깔끔한 게 아니다. 차진 밥, 무채로 단 맛을 내고 콩가루로 버무린 냉이를 넣어 끓인 국, 살을 얇게 뜯어 보풀을 낸 북어보푸라기, 까나리 액젓으로 살짝 간을 내고 들깨가루를 죽처럼 만든 소스에 담근 오이절임, 생마를 얇게 저며 꿀에 묻힌 것, 달걀말이, 젓갈이 거의 사용되지 않은 김치, 그리고 입가심으로 사과와 찹쌀떡.

나름 요리에 실력 있는 짝꿍이 특히 오이절임의 맛이 좋다고 평가했다. 이건 김치도 아니고 무침도 아니고 절임이라고 봐야할지 어떨지 묘하다고 하자 찬을 준비한 분이 기분이 좋아서 레시피를 말해준다. 이 과정에서 찬을 준비해주신 분과 함께 사시는 부군께서 몇 마디 말을 거드는데, ... 음... 이건 생략. 이건 진짜 혼자보기로 올려야지. ㅎ 평소 울 짝꿍의 성격이었으면 밥상이 날아갔을 에피소든데. ㅎㅎ

아침 겸상은 일종의 체험프로그램인데 한 상에 5천원이다. 실제 밥상에 올라온 걸 시중 음식과 비교하자면 그냥 밖에 나가서 사 먹는 편이 훨씬 마음 편하고 좋다. 다만, 이게 양반네들 밥상을 경험해본다는 것에 방점이 있다면 한번쯤은 해볼만도 한 경험.

한옥인데다가 고택인지라 특히 날이 추울 때 방문한 사람들에게는 우풍이 곤란했던가보다. 관리하시는 분이 미리 전화로도 이야기했지만 어찌나 우풍 걱정을 하는지. 물론 그 덕에 방도 바꿔주는 등 편의를 봐주시긴 했는데 과도한 걱정을 하시는 듯 했다. 나만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고. 요즘에는 그런 것에 민감한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 그럴 수도 있고.

한 겨울에 등짝은 설설 끓지만 입에선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곳에서 살아봤던 사람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방의 조건이었다. 창호로 바른 문에 바람 들지 말라고 흰 이불호총을 걸어놓은 것을 보니 진짜 옛날엔 이랬는데 라는 추억도 한 자락 떠올릴 수 있었다. 둘이 누우면 꽉 차는 방에 이불을 놓으면서 임청각의 밤을 맞이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9/12/27 10:09 2019/12/27 10:09
Trackback Address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