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사회주의라

사건은 그렇게 일어난다. 퍽이나 늦으막히 철딱서니가 들어 친구들이 벌써 군 복무 마치고 졸업하고 직장을 잡을 때쯤 대학이란 곳에 들어갔다. 당연히 뭐든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지 뭐. 그 중에 하나가 PC였는데, 당시엔 워드 자판도 제대로 모를 때인지라 한글 연습하느라 꽤나 시간을 잡아먹기도 했다. 그래도 뭐든 신기했으니 이것 저것 막 해볼 밖에.

그러다가 그만 그걸 만나게 된 거였다. 바로 코에이 삼국지 III. 1학년 가을학기 기말고사기간 동안 나는 동기 동생녀석의 고시원 방구석에 처박혀 삼국통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내가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모니터 상단에서 바뀌고 있는, 삼국이 대치한 중원의 연도였을 뿐이다. 2세기 말에서 3세기 중엽에 이르는 그 기간이 나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삼국을 몇 번 통일하는 동안 기말고사는 끝나 있었고, 학점을 땜빵하는 시간은 오래 지속되었다.

난 지금도 가끔 그런 망상을 한다. 내가 만일 그 가을학기 기말고사 기간 동안 코에이 삼국지 III에 빠져 있지 않았었다면 어땠을까? 우수한 학점을 받고 장학금 받아가며 우등생으로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난 그렇게 컴퓨터와 친해졌고, 게임도 하게 되었고, 어찌하다보니 여기까지 흘러왔다. 고맙다, 동기 아우들아. 그러고 보니 나를 게임의 세계로 인도했던 녀석들은 지금 뭐하고 살고 있나 모르겠다. 리니지를 할라나, 와우를 할라나...

아, 갑자기 뜬금없는 추억을 꺼내게 된 건 며칠 전 노동절날 잘 밤에 페북에 포스팅 하려다가 중간에 맥없이 끊어버린 생각이 있어서였다.

페북에 걍 끼적거리다 말았던 그 글

프라이버시 보호운동 내지 정보인권운동은 이제는 거의 인권운동 분야에서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운동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진짜 2000년만 하더라도 이 운동은 그냥 듣보잡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물론 인권운동이나 사회운동을 하는 분들이 정보인권을 패대기치지는 않았는데, 따지고 보면 항상 후순위이거나 다른 운동의 보조, 예를 들면 노동운동의 하위 파트너 정도 대접을 받는 것으로 족했다.

그러나 아주 급속하게 초고도 정보통신사회는 현실이 되었고, 정보인권활동가들이 선도적으로 제기했던 문제는 매우 빠르게 실제 사건들이 되었다. 다른 인권운동, 예를 들면 자유권 운동이나 성평등 운동이나 소수자 운동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정보인권운동은 대중들에게 인정받는 운동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대중들은 더 빠른 속도로 자신들의 정보를 통신사들 및 그들과 연계된 기업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온라인에 띄우는 것에 거부감을 소거하기 시작했고, 그 반대급부로 각종 편익과 SNS에서의 ‘관심’을 향유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코로나 19 사태가 터졌다. 세계 각국의 경향에 대해서는 향후 더 시간을 두고 파악해봐야겠으나, 한국에서만큼은 그간 축적되고 발전된 정보통신기술이 소위 ‘K-방역’을 만들어낸 요체가 되었다. 한국은 이번에는 방역과정 일체를 최대한 투명하게 공개했고, 자발적 협조를 구하는 절차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노력했다. 이런 점에서는 분명히 높은 평가를 할 만하다. 그러나 ‘K-방역’의 ‘성공’에는 중국의 사이버 천라지망을 씹어먹을 정도의 수준을 갖춘 사이버 추적체계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난 정보인권운동에 상당한 관심과 시간을 보냈고, 지금도 그 분야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정보인권운동은 ‘자유권’ 차원의 운동으로 여겨져왔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정보인권운동이 자유에 관한 방향성만을 가진 운동이 아님은 물론이다. 하지만 대부분 다들 자유권 운동의 일환으로 보고 있기는 하다. 아무튼 그렇다보니, 대개 정보인권운동은 넷 상에서 벌어지는 정부 및 자본의 침입을 경계하고 이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승화되기 십상이다.

DJ정부에서 급속도로 추진되었던 IT 기반 경제부흥 과정에서 개인정보가 상품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정보인권운동의 성장이래, 주민등록번호 기반 전자주민증 사업이나 지문정보를 이용한 생체여권 사업, 현재는 중국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안면인식기술의 모체가 되는 CCTV 설치사업, 교육부의 NEIS 사업, 현재는 영리병원 원격진료사업에 이르기까지, 어찌 보면 전형적인 ‘프라이버시권’에 대한 개념이 여전히 온라인 상에서도 적용되는 범주에서 정보인권운동이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애초 정보인권운동이 내 의사에 반해서는 내 정보를 들여다보거나 가져가거나 쓰지 말라는 원칙적인 측면으로부터 정부와 자본이 내 정보를 어디까지 가져갈 수 있을 것이며, 그걸 어느 정도까지 쓰도록 허용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내 의사를 얼마나 반영할 수 있는지로 성격이 변화되었다. 어떤 목적에 의해서, 그 목적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간에, 개인의 판단에 따라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하여 국가나 자본에 제공하는 개인정보의 양과 질이 상당히 복잡다단해진 것이다.

이번 코로나 19 사태에서, 이런 경험을 계속하고 있다. 수시로 울리는 알람은 확진자의 발생상황과 동선을 알려준다. 귀찮을 정도지만 오히려 그 알람을 통해 안심한다. 또는 안전을 위한 나름의 방책을 세운다. 이 과정은 어디까지 용인되어야 하는가? 당사자의 승낙은 있었는가? 당사자의 인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는가? 하지만 우리는 일일이 세부적인 사항을 다 체크하지 못한다. 그럼 이제 정부를 믿을 것인가? 정부는 이 정보를 어디까지 활용할 것인가? 이후 문제가 생긴다면 어떻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그런데 이제 나는 한국의 사이버 추적체계가 정보인권을 어떻게 침해하고 있는지보다 이러한 시스템이 과연 국가=사회=자본=개인의 연결고리 속에서 사회체제의 전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입장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지에 더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기왕에 정보인권의 성격이 어느 정도는 주고 받는 수준의 원칙에 대한 쪽으로 갔다면, 이제는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는 어떤 계기를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다.

이 와중에 어떤 글이 ‘정보사회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현재 수준의 정보통신기술을 기반으로 사이버 정보공개 등을 통한 투명성의 확보와 국가와 기업을 감시하는 체제의 정립, 모든 주체의 연결과 소통을 통한 민주주의의 확대, 계급적 성적 평등의 추구와 생태적 전환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디지털 인프라는 실제적인 민주주의를 위한 인프라가 될 수 있는데, 이러한 발상은 사이버 공간에서는 뭐든지 다 알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뭐든 다 알 수 있다는 건 체계적인 계획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체계적인 계획이 가능하고 그 실현이 가능한 존재는 아마 신이 아닐까 싶다. 또는 계획경제의 가능성을 말할 수도 있겠다. 계획경제가 가능하다면? 경제적 평등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매우 기계적일 것이지만. 정보통신기술이 이걸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전제가 있을 때, 내가 봤던 그 글의 ‘정보사회주의’가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그게 과연 그럴지 모르겠다.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보자. 물론 그 당시에도 비관과 낙관은 충돌하고 있었지만, 불과 30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비관과 낙관의 근거는 상당히 달라졌다. 예를 들어 1996년 ‘사이버스페이스독립선언문’이 나돌아 다닐 때, 내용의 당위와는 별개로 그 주장 자체가 사이버스페이스의 생성과 확장과 고착의 과정이 이미 정부와 자본의 굵직한 계획 속에서 진행되었음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었다. 물질과 다른 차원에서 전개되는 해방의 논리가 가슴을 뜨겁게 만들기는 했지만, 실제로 물질을 벗어난 다른 차원이 있을 수 없다는 공리를 떠올리면 그 가슴이 차갑게 식어버렸고. 

더구나 사이버공간의 ‘자유’라는 건 결국 아주 손쉽게 검열에 대한 저항이라는 알리바이를 얻으면서 이윤을 획득하기 위한 착취를 마음껏 하는 것으로 변질되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면 10여 년 전의 ‘김본좌’ 사건과 2020년의 ‘N번방’ 사건처럼. 

거기에 자본은 개인보다 더 거대하게 이윤확보를 위한 체계를 사이버 공간에 확고하게 정착시켰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애플, 아마존 등 블랙홀처럼 사이버공간의 모든 정보를 빨아들이는 플랫폼이 그렇고, 이 플랫폼을 이용해 또다른 형태의 ‘플랫폼’을 구축하는 기업들, 예컨대 에어앤비나 우버같은 기업들이 그렇고, 소통을 빙자해 유저들의 개인정보를 알차게 빨아먹는 페이스북 같은 SNS들이 그렇다. 이들은 ‘경제적 자유’에 천착된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의 진수를 향유한다.

개인들은 이들 범죄적 개인이나 거대 기업들에게 자신들의 정보를 기꺼이 제공한다. 정보뿐만 아니라 돈도 제공한다. 물론 범죄행위는 처벌된다. 하지만 공룡 IT 기업들과 이루어지는 상거래는 역으로 정보제공자에게 경제적 이익을 안겨준다. 유튜브가 그렇다. 예를 들어 유튜브의 꺼지지 않는 “구독과 좋아요”의 저인망 컨텐츠인 food, cat, baby를 보면, 기실 이 컨텐츠들은 예전 같으면 제작자 개인의 민감한 개인정보들임에도 이젠 이 정보들을 가감 없이 꺼내 화면에 비춰준다. 제작자는 이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다. 오히려 더 깊은 개인정보를 더 오래도록 연재하면서 좋아요와 구독을 요청한다. 그건 돈이 된다.

정보의 제공과 이윤의 확보가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이 공간은 바로 시장이다. 이 시장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정보의 투명성을 바탕으로 원하는 대상의 모든 정보를 확보할 수 있다. 그 정보는 곧 자본이자 이윤이다. 예를 들자면 이따위 긴 글을 읽게 하려고 서두에 띄워놓은 나의 흑역사는 곧 내 민감한 개인정보다. 하지만 나는 이 개인정보를 밝힘으로써 가독성을 높이려 했고, 이 글이 띄워질 페이스북을 통해 어느 누군가는 나를 대상으로 온라인 게임에 대한 광고를 보낼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여기에 무슨 ‘정보사회주의’가 있는가?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가 주장했던 네트(Net)의 자유와 사이버스페이스독립선언문이 천명했던 사이버 공간의 해방은 자본이 그 모든 의지를 다 섭취하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거기에 개인의 해방이나 사회주의 따위 성립할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런데 불현듯 이제 사이버공간에서 “국가=사회=자본=개인”의 연결고리 중에 ‘자본’을 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코로나 19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한 정부의 대응과 이후 각종 정책의 생산과 집행의 과정에서 자본은 주체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이버공간에서 국가와 사회와 개인의 고리를 결속하는 망의 형성에 자본이 빠지는 경우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확진자 동선을 공개하는 등의 행위에서 국가의 역할이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지에 관한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 되어야 할 부분이긴 하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지금까지 일반적이었던 국가=사회=자본=개인의 관계망이 앞으로도 이래야 한다는 당위를 극복할 여지가 발생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도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가 자본의 자유를 위한 예언으로 전락한 것과는 다른, 사이버스페이스독립선언이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의 선언으로 국한된 것과는 다른 그런 뭔가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에서 신우익버전을 제거하는 수준에 불과한 ‘정보사회주의’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으로 국가=사회=개인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정보사회주의’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지 않을까?

뭔가 길게 주절거리긴 했는데, 썩 그럴싸한 답이 안 나온다. 코에이 삼국지 III랑 정보사회주의가 그닥 관련있는 것 같지도 않고.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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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5 13:32 2020/05/05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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