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 대한 지원이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
어쩌다가 하게 된 일이 인문학 지원/진흥 제도연구다. 더 정확히 하면, 인문사회분야 후속세대 지원 제도정비연구다. 작년 10월부터 일을 시작했으니 벌써 3개월이 되어 간다.
3개월 동안 좀 익힌 것도 있고 의아한 것도 있다. 우선, 제도정비는 손에 익은 일이니 어찌 보면 일종의 도구 제작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인문사회분야의 연구와 대중적 확산 등의 기반을 체계적으로 갖추는 일인지라 특히 인문학 분야에 대해서는 조금은 더 신경을 써야했다. 이런저런 경로를 거치면서 딱히 인문과 동떨어진 삶이나 학문을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공을 한 것이 아닌지라 나름 공부가 필요했다.
인문분야에 대해 더 들여다볼 기회를 가졌다는 건 매우 기쁜 일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파고들어보리라 생각하던 걸 이렇게 기회가 닿아서 손에 쥐게 된 건 행운이다. 그런데 더 깊이 들여다볼 수록 '인문'과 '인문학'의 괴리는 역시 해소되질 않는다. 마치 '인권'과 '인권법'의 괴리와 비슷하달까. 이 이야기는 다시 하기로 하고. 아무튼 인문쪽 공부는 앞으로도 계속 해야 할 일이니 서두르지는 않기로 한다.
다른 한 편으로 불과 3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연구사업의 체계에 대해서는 갈수록 혼란스럽다. 애초 연구과제에 결합할 때 부여받은 연구분야는 '인문학' 지원 및 진흥 제도정비방안 연구였다. 그래서 첫 한달 간 인문학 관련 법제를 찾아보고 어떻게 방향을 잡을지에 대해 연구를 수행했다. 그런데 한달이 채 못되어서 진행된 첫 전체회의에서 다른 오더가 나왔다.
인문학에 한정된 제도정비는 확장성이 없고, 법제화 과정에서 더 넓은 사회적 지지를 받으려면 사회과학분야를 포함해서 제도정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으로 범위가 넓어져 버렸다. 과제수행 내용을 다시 보니 사회과학이라는 용어가 들어 있으니 뭐 그러려니 했다. 그래서 인문사회분야에 대한 지원/진흥으로 방향을 잡고 다시 연구를 수행했다.
그러다가 11월에 교육부, 연구재단 등과 함께 TF Team이 꾸려졌다. 1차 회의를 했는데 느닷없이 법안초안을 작성해달라는 거다. 아직 제반 연구도 안 끝났는데 초안을 달라고 하니 좀 급한 게 아닌가 싶긴 했지만, 일단은 할 수 있는 모든 내용을 정리해 기본법안 형태의 초안을 작성해 2차 회의에 제출했다. 2차 회의에서는 보다 종잡을 수 없는 논의들이 오고갔다. 그러다 12월 중순 진행된 유관 주제의 국회포럼 주요 발표자들을 초빙해서 3차 회의를 진행했는데 이번엔 더 종잡을 수 없는 횡설수설이 오고갔다.
이야기가 정리될 기미가 안 보이자 연구책임을 맡은 교수께서 3차 회의에 초빙했던 교수들을 만나보자고 하여 서울대에 가서 자문회의를 진행했다. 그런데 이 분들이 하는 말이, 인문사회 뿐만이 아니라 기초과학, 문화예술 분야까지 포함해 학술진흥 전반을 규율하는 법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게다가 교육부장관의 개각이 곧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개각 전에 현 장관이 있을 때 법을 만들잔다.
일단 브레이크를 걸었다. 학술진흥법이 있는 상태에서 과학기술분야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학문분야를 포괄하는 기본법을 만든다는 건 법체계상 혼란이 있을 수 있다. 이 혼란을 해소할 방법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원래 연구과제의 과업 범위를 벗어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연구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 다른 문제는 법을 제정한다는 게 그냥 법안 만들어서 던져주면 바로 법이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정부입법을 하자면 정부발의하기 전까지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상당히 소요된다. 의원입법을 한다고 해도 그냥 번갯불에 콩 볶듯이 절차가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정부입법을 하자면 발의까지 아무리 못해더 3~6개월은 잡아야 하고, 의원입법을 한다손 치더라도 물 흐르듯이 본회의에서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한달 이상을 잡아야 하는데, 2월 중 발의를 한다고 하면 개각이 언제 있을 줄 알고 현 장관 재직 중에 법안을 통과시키겠는가?
어제는 교육부에서 보자고 해 세종시까지 가서 관계 공무원들과 미팅을 했는데, 일단 전화통화로도 충분한 이야기를 굳이 세종시까지 오라고 해서 미팅을 하는 것에 약간은 비위가 상했다. 이 코로나 시국에, 게다가 눈보라에 혹한이 몰아치는 시기에 겨우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 하려고 오라가라 하는 게 이거 갑질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런 저런 불만 다 누르고, 기왕에 같이 할 사람들이니 새해 인사하는 셈 치려고 했지만, 결국 요구하는 건 자신들의 입장에 맞는 법을 좀 만들어달라는 요청.
갑갑하다. 책임교수께서는 지난 20여 년을 인문사회분야 지원체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하시는데, 가만 보니 왜 지난 시간 동안 체계적인 법제정비가 이루어지지 못했는지 알만하다. 총체적 난국이다. 게다가 이 논의를 하는 사람들이 과연 당장 자기 대학의 인문사회 석박사 과정생들이 어떤 취급을 당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법 만들어놓으면 뭘하나? 결국 그 석박사 과정생들이나 현장에서 인문사회분야의 이론전파 등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뭔가가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인데 기껏 제도정비 해봐야 기관 하나 만들어서 교수들 용돈벌이할 구멍이나 만들어주는 거 아닐까 하는 회의도 들고.
향후 진행되는 과정이나 내용, 인문학과 관련된 생각 등을 계속 정리해봐야겠다. 좋은 기회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실패를 만들어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는 걸 다 해봐야지. 실패하더라도 멋지게 실패할 수 있으려면 잘 들여다보고 잘 정리해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