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가 지배하는 사회

'슈퍼젖소'가 탄생했단다. 지난 10년간 이 소 한마리가 생산한 우유의 양이 200ml팩 기준으로 70만개 분량이란다. 계산에 따르면 이 젖소 한마리가 주인에게 안겨준 수익이 송아지 포함 1억원 이상이라고 한다. 젖소 주인이 감사해야할 일이다. 그런데, 기사에 따르면 이 젖소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이 젖소의 공식 명칭은 '연산5-137'호란다.

 

어릴적 시골 누렁이에겐 이름이 있었다. 곰곰히 기억해보면 그 이름이 항상 '누렁이'였다. 분명히 새끼들에게도 이름을 붙여준 것 같은데, 새끼들 이름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긴 이름 기억할 새도 없이 송아지들은 어느 틈엔가 팔려 나갔으니까. 일요일이나 방학 때면 이 귀여운 송아지가 얼마나 컸을까 궁금해서 달려가보지만 역시 '누렁이'만 있을 뿐 누렁이의 새끼는 보이지 않았다.

 

그 기억나지 않는 송아지의 이름을 찾아가며 송아지 어디갔냐고 채근하면 욕이나 얻어먹기 딱 좋았다. 그래도 그렇게 키우는 소에게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한 마리씩 외양간에 있던 소들은 이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대량사육을 시작한 이후 소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소들의 귀에는 금속으로된 작은 번호표가 붙어 있었을 뿐이다. '연산5-137'호 역시 마찬가지일 거고.

 

번호를 붙이는 것은 그것이 관리의 편리함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기계적 사고 속에서 굳이 인간적인 정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누렁이'가 팔려간 날에는 온 가족들이 말이 없었다. 방학 때 내려간 시골집 외양간이 썰렁하게 텅 비어있을 때는 기분이 묘했다. 하물며 매일 여물을 쑤어주고 꼴을 베러 나가고 밭일을 같이 하던 사람들에게 '누렁이'가 팔려가는 일은 무척 속이 상하는 일이었을 게다.

 

번호표가 붙어 있는 소가 팔려 나갈 때, '누렁이'를 팔 때와 마찬가지의 감정은 별로 들지 않는 것 같다. 공장에서 생산된 사료를 부어주고, 펌프로 물이 끊어지지 않도록 조절해주고, 가끔 축사나 치워주면 소와 주인과의 관계는 종료된다. 방목되는 소가 아닌 소규모 축사에서 지내는 소들은 그 좁은 공간이 그들의 생애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세계의 모든 것이다. 주인과 애정을 쌓을 기회도 시간도 없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주민등록번호라는 것도 거의 똑같은 효과가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관리차원에서 이 번호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라는 것은 또 떠들어봐야 칼로리 소모만 된다. 행정자치부 공무원의 말을 빌리자면 이 번호는 세계에 수출할만한 시스템이다. 그래서 그랬던가, 일본이 '주기넷번호'를 만들어 국민식별번호부여를 시작한 것이 2002년. 실적은 좋지 않단다. 주민들이 자신의 번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번호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이다.

 

한국에 살게 된 일본인이 주민등록번호에 대해 한 소리 했다. 외국인으로서 살아가는데 불편한 점 중의 하나로 주민등록번호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외국인은 주민등록번호를 '거대한 벽'이라고 표현했는데, 사실 한국사람 중에 주민등록번호를 '거대한 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는 잘 모르겠다. 주변을 살펴보면 주민등록번호를 '거대한 벽' 씩이나 생각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반면 주민등록번호가 '벽'을 허무는 열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진장 많다. 주민등록번호가 쓰기엔 왠지 찜찜하지만 그거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더 나가 주민등록번호를 더욱 광범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 군인들의 인식표에 군번 대신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하자고 요청하는 일이 있었다. 미국 군인들의 인식표에 사회보장번호가 들어가는 것을 비교하면서.

 

중국 네티즌들은 한국사람들의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해 온라인 게임을 즐긴다. 중국이 이정도인데, 미국은 어느 정도일까? 북한은 이 주민등록번호를 그냥 놔두고 있을까? 이 와중에 군인공제회는 장병들에게 '나라사랑카드'로 명명된 스마트카드 발급사업을 추진한다. 국방부와 수의계약으로 이루어지는 이 사업은 그 내막도 불분명하지만 군 정보의 대규모 유출이 우려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대로 추진된다.

 

번호로 사람을 관리하다보니 그 사람에 대한 인간적 연민이나 애정이 희박해지는 거다. 개인정보가 유출이 되던 말던, 그렇게 개인정보가 유출되어 그 사람이 피해를 입던 말던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해 행정적인 편의를 보장받은 입장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직원들이 괜히 남의 개인정보 들여다보면서 장난질 치는 것이 아니다. 인권위로부터 시정명령까지 받았다.

 

가만히 보면 '연산5-137'호나 13자리 주민등록번호로 관리되는 한국 주민들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쎄가 빠지게 송아지 낳고 젖 짜줘봐야 그 소는 '연산5-137'일 뿐이고 피터지게 일해서 돈 벌어봐야 '산업역군'인 주민들은 번호로만 관리될 뿐이다. 뭘까, 이게? 왜 이름이 아닌 번호가, 나의 정체성이 아닌 가상의 번호가 나를 규정하고 인증하나? 이게 왜 이렇게 되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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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7 10:21 2006/03/27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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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번호속에서 살다 죽겠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2. 13자리 숫자를 호칭으로 부르기는 좀 불편하죠. 그래서 출생신고할 때 대체로 2~4자짜리 '성명'이란 걸 기재하도록 하는거 아니것소. 이거는 가명 내지는 등록 번호고, 진짜 이름은 국가가 붙여주는 13자리 숫자... 학교갈 때, 취직할 때, 거래할 때, 이거할 때, 저거할 때 다 필요한 진짜 이름... 주민등록번호!

  3. 홍명보/ 헉... 등번호 20번 최고의 중앙 수비수... 여기 왕림하시다니... ㅎㅎ 감사합니다.

    말걸기/ 가끔은, 진짜 가끔은 내 원래 이름이 주민등록번호가 아닌가 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