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조의 기억

워낙 공부하고는 담을 이중 삼중으로 쌓고 살았던 행인. 성적표가 나올 때마다 우찌 이런 일이... 뭐 당연한 결과이긴 했으나... 어쨌든 받아든 성적표를 보고 이  성적표를 우예 엄부자모께 보여드릴 것인지를 걱정했더랬다. 해서 생각한 것이 부친의 사인 위조. 도장을 찍어가면 편한데, 부모님께 성적표를 보여드리지 않고 슬쩍 도장만 찍어 오던 학생들이 많은지라 학교에서는 사인을 요구했더랬다. 지장찍어오라고 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잔뇌활동이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던 행인, 결국 사인을 위조하게 되었다. 도둑질도 하다보면 느는 것이라고 나중에는 다른 넘들 성적표까지 위조사인을 만들어 해결해주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성적에 불안을 느낀 많은 학우들이 행인에게 친근감을 표시하며 사문서 위조를 집단으로 자행하게 되었던 거다.

 

제일 난처했던 것은 위조해줬던 딴 넘들은 걍 넘어갔는데, 정작 위조의 달인인 행인이 위조한 부친의 사인은 가짜임이 들통나 선생님께 엄청나게 쥐어터지는 일까지 발생했다는 거다. 아아... 위조가 힘든 사인을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의 무서움이여. ㄷㄷㄷ

 

마빡에 새똥도 벗겨지지 않았던 초딩이 사인을 위조할 생각을 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석차때문이었다. 시험 몇 점 맞았다는 점수표시는 하지 않고 수우미양가로 평가한 다음 석차 몇 등, 이렇게 해놓으니 보이는 것은 반에서 몇 등 했냐는 것밖에 없는 것. 얘가 학업성취도가 과거보다 오른 건지 떨어진 건지 이건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어차피 성적 나쁘다고 해서 뭐라고 하는 부모님도 아니었건만 왜 그렇게 겁이 났을까? 아무리 배짱을 튕겨도 '엄친아'들의 압박은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였더랬다.

 

등수가 보이기 시작하면 그 때부턴 경쟁이라는 것이 발생한다. "세상은 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카피가 있었던가? 그런 썩을 말이 어딨냐고 항의를 해봐도 성적표에 등수가 찍히면 그 때부터 1등 밑으로는 다 열등생이 된다. 대학도 마찬가지. 한국의 대학 중 1류 대학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그거 답하기 참 난처하다. 그러나 1등 대학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그건 답이 나와 있다. 수능 1등 대학교는 누가 뭐래도 눈에 보이니까.

 

등수에 짓눌린 애들은 자신감을 잃게 되고, 자식의 등수를 확인한 부모들은 경악하게 된다. 세상에 우리 애가 320등이라니... 황망하게 털썩 주저앉은 부모님들, 자신의 등골이 뽑혀 나가는 것은 생각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다음번 시험에서는 영어에서 단 한 문제도 틀리지 않을 수 있도록 아이를 다그친다. 뭐 다 그러는 것은 아닐 거다. 하지만 당장 돈이 없어 못해도 돈이 있으면 학원이라도 보낼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 맹모삼천지교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한국의 학부형이다.

 

평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평가를 하는 것은 이유가 있어서이다. 부족한 것이 뭔지를 확인하고 그 부족한 것을 채워주기 위해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평가다. 그렇다면 뭐가 부족한지를 확인할 수 있으면 평가의 역할은 끝나는 거다. 거기에 구태여 등수를 매겨 아이들에게 순위에 대한 압박을 심어줄 필요가 없다.

 

이제 아이들은 전산처리되어 발급되는 성적표가 부모의 이메일로 직접 전달될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 사문서를 위조하는 위법행위를 저지르지 않게 되었다. (이번 성적표가 이메일로 배달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므로 주의하시길) 그러나 한창 티없이 자라야 할 아이들이 등수에 얽매여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학원을 전전하게 된다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왜 꼭 그런 식으로 애들을 압박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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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1 17:55 2008/03/1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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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acked from
    • At 2008/03/14 15:07

    행인님의 [위조의 기억] 에 관련된 글. 워낙 천방지축으로 사는 행인. 일부에서는 "극단적 자유주의자"라는 비난까지도 일어날 정도이긴 하나, 뭐 그정도까진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만 쉬고 싶을 땐 쉴 수 있어야 한다는 신조를 좀 지키고 싶다고나 할까... 그러나 시대의 조류는 더욱 부지런해지는 것. 암에푸의 그 엄혹한 시기에 엉덩이로 보는 신문 조선찌라시는 그동안 뛴 것도 모자라 다시 뛰자고 난리를 쳤던 바 있는데, 이젠 뭐

  1. '왜 그렇게 압박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마음을 우회적으로 돌려 말한 적이 있더랬습니다. 돌아오는 말... 안키워본 사람은 모른다, 엄마의 마음은 다 그렇다. 다 아이의 미래를 위함이다...ㅡ.ㅡ;; (유아기에는 절대 그런 교육 안시킨다고 했던... 지금도 남들 하는 만큼만 시킨다고 생각하는)
    아동교육 코너에 '아이를 1%로 키우는 법'이라는 책을 보며 갑갑했어요..

  2. 존/ "엄마"의 마음이 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문제인 거죠. "엄마"의 마음이 일부만 그러면 까이꺼 성적표가 나가고 등수가 표시되도 일부 극성 "엄마"들의 문제로 끝나겠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렇지 않거든요. 자식이 기죽어 지내는 것을 바라는 부모는 한 분도 없기 때문에 저놈의 성적표가 끝내 대형사고를 치게 될 거에요. 그게 걱정입니다.

  3. 에... 좋은 부모가 되기도 어려울 것 같군요; (연애나 하고 그런 소릴 하자 ㅠ.ㅠ)

  4. 에밀리오/ 부모는 거의 99%가 좋은 부모입니다. 간혹 애 패고 해꼬지 하고 밖에서 망신당할 짓을 하는 부모도 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