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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문화 - 집회를 중심으로

 * 2003년 민주노총 조직담당자 수련회 교육자료 

노동조합 문화 - 집회를 중심으로

손동혁I인천노동문화연대


작년 한 해 민주노총에서 주최한 집회 횟수가 200회를 넘겼고, 쓴 돈도 9,000만원이 넘은 걸로 집계가 되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크고 작은 집회를 한 셈이니 '민주노총'을 가히 집회를 위한 조직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왜 이렇게 집회를 많이 하는가? 집회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 집회마다 애초에 기대했던 만큼 성과를 거둔 것인가? 혹시 별 효과도 없는데 타성에 젖어서, 별로 할 게 없으니까, '니들은 집회도 안 하냐'는 외부의 질책과 눈초리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집회를 때려 박지는 않았는가? - 박선봉



□ 집회 / 시위


집회(集會)[지푀/지퓊][명사][하다형 자동사] (공동 목적을 위하여) 많은 사람이 일정한 때에 일정한 자리에 모임, 또는 그 모임. 회합(會合).


데먼스트레이션[demonstration]

개요 - 특정한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다수인이 벌이는 집단행동.

본문 - 약칭하여 데모라고도 하며, 시위 ·시위운동 ·시위행동이라고 번역한다. 개인이나 조직의 위력을 보이는 모든 시위행동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지만 시위를 위한 행진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요구사항을 적은 플래카드를 들고 슬로건을 외치면서 공개적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위력을 지배자에게 과시하는 한편, 여론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행해진다. 요컨대, 데모는 집단의사의 형성과 표현 및 그것의 전달과 실현 등의 기능을 지닌다.

【종류】 ① 좁은 뜻으로는 데모행진 ·데모집회를 가리키나, 넓은 뜻으로는 지배자 ·피지배자 ·사회집단이 자기의 힘을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인원과 물량 등을 동원하여 상대에게 심리적 압력을 가하는 사회적 ·정치적 기술을 가리킨다. 예컨대, 무장한 경관 ·기동대 ·군대의 행진과 연습, 전차의 행진이나 항공기의 편대, 해군의 관함식(觀艦式) 등은 지배자측의 데모이다. ② 쇼(show)의 색채가 짙은 것은 간접적 데모이고, 국경 주변의 군사연습 등은 직접적 데모이다. ③ 자연발생적 데모와 정기적 데모의 구별도 있다. 정기적 데모로는 1889년 파리에서의 제2인터내셔널대회 이후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온 세계노동자들에 의한 메이데이(May Day:5월 1일)의 데모가 유명하다. ④ 이 밖에도 형태와 방법에 따라서 여러 유형으로 구별할 수 있는데, 항의(抗議)데모 ·진정데모 ·통근데모 ·공장데모 ·해상데모 등이 있다. 또 가두데모에도 지그재그데모, 도로 가득히 퍼져 행진하는 프랑스식 데모, 기동대원에게 둘러싸여 규제되는 데모 등도 있다. 노동자 ·학생 ·시민단체 등의 데모는 주로 데모행진 ·데모집회의 형식을 띠는데, 깃발 ·플래카드 ·머리띠 등을 두르고 구호를 외치며 가두행진 ·연좌 ·옥외집회를 행하는 평화적인 데모이나, 경관과 유혈충돌하는 혼란 속에 군중이 끼여들어 폭동을 일으키는 데모도 있다.

【규제】 데모는 민주국가에서 국민이 자기의 의사를 자주적으로 표시하는 귀중한 기본적 권리이다. 헌법은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21조 1항),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3조 1항에서도 누구든지 평화적인 집회나 시위를 방해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도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때에는 그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법률로 제한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헌법 37조 2항).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옥외집회와 시위는 48시간 전에 관할 경찰서장에게 신고하여야 하고(6조 1항), 일출 전과 일몰 후의 옥외집회나 시위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금지되어 있다(10조). 또한, 관할 경찰서장은 경우에 따라서는 집회나 시위의 금지를 사전에 통고할 수 있고(8조), 그 해산을 명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18조).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집회 풍경


우리는 집회를 보통 짧게는 한 시간 반에서 길게는 세 시간 정도 한다. 순서는 대략 다음과 같다. 대오정비, 문화공연, 개회 선언(*지도부 입장), 민중의례, 지도부 및 참가조직 소개, 대회사, 연대사, 초청 공연, 투쟁사 2-3개, 결의 연설 또는 결의문 낭독, 마무리 노래, 그리고 행진. - 박선봉


날씨가 춥든 말든, 주변 조건이 좋든 말든 정해진 순서에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지는 비슷비슷한 내용의 무미건조한 연설은 참가자들 관심을 떨어뜨리고, 오히려 인내력 시험에 들게 한다. 그러다 보니 수시로 자리를 뜨고, 졸기도 하며, 심지어는 집회를 하다가 대열 속에서 술을 마시는 일도 종종 있다. 물론 큰 집회 때 얘기다. 그 전에는 그래도 무대 쪽을 보고 조심스럽게 술을 마시더니, 이제는 아예 무대를 등지고 자기들끼리 둘러앉아 잡담을 해 가면서 마신다. 각 조직의 조직담당자들의 하소연이 이어진다. "술 마시는 것은 좋은데, 제발 무대 쪽으로 앉아서 드십시오 동지들." - 박선봉


그렇게 집회가 끝나면 위력적인 시위를 위해 행진을 한다. 먼저 경찰 쪽과 협상을 해서 어디까지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나서 폴리스라인을 따라 위풍당당하게(?) 행진을 한다. 현수막을 든 지도부가 앞장을 서고, 삑삑거리는 방송차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관심을 가져 보지만 우리가 시위하는 까닭을 제대로 설명하려는 뜻이 처음부터 없는 듯하다. 설령 그 뜻에 동의하여 동참을 하려해도 행진대열에 끼기가 쉽지 않다. 행진 분위기가 너무 근엄하고 복장부터가 다르다. 그래서 길가의 시민들이야 듣든 말든, 동참하든 말든 우리는 우리 길을 간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어찌 참새가 봉황의 뜻을 알랴.' - 박선봉



□ 문제의 장면들


대열이 길고 참가자가 많을수록 무대는 점점 높아만 간다. 앞에 있는 사람은 한참을 우러러 봐야 그나마 무대 위 연설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물론 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런 무대에는 아무나 올라 갈 수가 없다. 몇몇 은혜 받은 사람들만 올라갈 수 있다. 그야말로 무대에 올라가서 마이크 한번 잡아보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초대받지 않은 일반 조합원들이 올라가기에는 무대 문턱이 너무 높다. 현장의 소리, 조합원들의 쓴소리는 언제나 원천봉쇄 된다. 일방적인 지침만 무대 밑으로 내려올 뿐 집회는 더 이상 소통과 교류, 토론과 상호확인 및 공동결의의 장이 아니다. - 박선봉


왜 우리는 그렇게 획일적인 것을 좋아하는지 아마도 군대식 문화에 찌들어서 그럴 것이다  줄을 맞추어야 하고, 표정관리도 해야한다. - 박선봉


격식 따지기를 좋아하는 높으신 어른들은 당장에 써먹을 만한 화려한 문선에만 신경 쓰지 별로 표시도 나지 않고 얼른 성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일반 조합원들 문화에는 도대체 신경을 쓰지 않는다. 문선을 잘한다고 문화가 바뀌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 박선봉


노동조합 사무실을 가보라. 어디를 막론하고 조합원들하고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위원장실이 가장 안쪽에, 사방이 막힌 채, 삐까번쩍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조합원들이 들어가려면 뭔가 찝찝하고 위압감이 들게 돼 있는 그 위원장실의 문턱 높이 만큼 노조의 문화도 경직되고 위계화 되어 있다. 아직도 노조 행사 때 위원장이 입장하면 기립박수를 치는 노조가 있고, 조합원 게시판에 지도부를 비판하는 글이 올라오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지우는 일이 다반사며, 지도부를 어버이처럼 떠 받들어야하는 가부장적 문화가 팽배한 것이 노조문화의 현실이 아닌가? - 박선봉


중요한 집회의 사회자는 대체로 남성이 맡는다. 발언자도 남성이 많고, 단상 위에 올라 와서 이야기 하는 방식도 목소리 크고 욕 잘하면 일단은 잘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 김은주


이외에도 술문화, 뒷풀이문화, 노래, 율동 등 각종의 문화영역에서 남성성이 강조되고 남성중심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 - 김은주


그런데 노동조합의 의사결정구조에서 여성의 참여는 극히 저조하다. … 이와 같은 현상은 민주노총과 산별연맹 뿐만 아니라 단위노조까지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여성들은 논의 대상에서 소외되고 자연히 정보의 공유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 김은주


투쟁방식에서도 여성들의 참여를 가로막거나 소극적 자세를 취하게 하는 지점이 있다. 철야농성을 해야 할 때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고 있는 기혼여성들의 경우 참여가 쉽지 않다. 단식이나 삭발을 해야할 때에도 남편눈치, 시댁눈치 때문에 마음껏 투쟁도 못하는 여성들이 많다는 사실은 아마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 김은주


당시 광화문 집회에서 '소파 개정, 부시 사과'부터 시작해서 '미군 철수'까지 그동안 범대위가 주장해온 구호들을 네티즌들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들의 구호로 삼고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모인 그 대오를 보고 오히려 범대위는 어찌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이는 단지 범대위만의 문제는 아니다. 당시까지 모든 운동진영이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전 운동진영이 '대중들이 폭발적으로 일어나 몰려가는 이 사태'를 어찌할 줄 모르고 그저 관망하고 있었다. - 최세진


그 날은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여 비폭력 추모제를 하자는 것이 주된 흐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모인 네티즌들은 나중에 깃발을 들고 몰려온 운동단체들이 집회를 주도하려고 하면서 폭력적으로 진행하려 하자 거부감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티즌들은 깃발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데, 그것은 네티즌들 스스로에 의한 자발적 추모제가 깃발을 든 단체들이 소집한 집회처럼 되거나, 깃발을 든 단체들이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네티즌들은 운동단체의 참여자격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적인 집회운영을 요구한 것인데, 운동단체 구성원들은 '우리도 참가 자격이 있다. 당신들이 월드컵에 열광하고 있을 때 우리가 바로 맞아가면서 싸워왔는데, 왜 참가 자격이 없는가'하는 반론을 했다. 그리고 평소 하던 방식으로 운동단체들은 집회를 이끌고 나가려 했고, 집회 대오 내에서 무대와 대중이 따로 분리되고, 운동단체와 개별 참여자간에 반목하는 현상까지 발생했다. - 최세진



□ 가능성 찾기


일방적인 지침만 무대 밑으로 내려올 뿐 집회는 더 이상 소통과 교류, 토론과 상호확인 및 공동결의의 장이 아니다. - 박선봉


왜 모인 사람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참여가 무시되는가? 자신들 주장을 각양각색의 표현양식으로 다양하고 자유스럽게 하면 안 되는가? 그러면 우리 의식이 쁘띠비지화 되는가? 행진은 재미있으면 안 되는가? - 박선봉


다른 나라는 비록 문선은 보잘 것 없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집회와 행진을 봐라. 얼마나 다양하고 풍성하며 열려 있는가? 우리는 진정으로 그들의 문화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 박선봉


그러면 집회와 행진의 형식적인 몇 가지를 바꾼다고 우리의 집회, 행진 문화가 진정으로 바뀔 것인가? - 박선봉


이러한 문화 자체가 바뀌지 않고 집회 형식 몇 개를 바꾼다고 무슨 변화가 있을 것이며, 또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문화가 바뀌어야 진정으로 세상이 바뀐다는 진리를 결코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 박선봉


할당제 논의 과정에서 보여준 남성 동지들의 반민주성과 보수성은 여성활동가들에게 많은 상처를 안겨 주었고 조직내 양성평등의식을 근본적으로 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 김은주


따라서 외형적으로 여성의 참여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용적으로 진정한 참여가 보장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 김은주


여성들의 처지와 상황에 맞게 역할을 나누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배려를 귀찮게 생각하거나 여성들은 제대로 투쟁하지 않는다고 평가하지 말자는 얘기다. - 김은주


이런 문제들의 해결방안은 사실 문제점을 거꾸로 놓고 보면 이미 나와 있다.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남성동지들의 마음가짐이다. 양성평등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것은 진보적임을 자처하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 김은주


지난 토요일(2002년 11월30일, 12월7일, 14일, 21일) 우리는 유래 없었던 놀라운 집회를 보았다. 한 네티즌이 게시판에 '토요일 6시에 촛불을 가지고 모이자'라고 올린 제안 글을 시작으로 첫 주에는 1만여 명이 광화문에 집결했고, 두 번째 주에는 전국 36개 도시에서 같은 집회가 진행되었으며, 광화문에는 5만여 명이 집결했다. 조직된 대중이 아닌 무차별 개인들이 한 개인의 제안으로 이렇게 한날 한시에 모여서 같은 요구사항을 걸고 집회를 연 것은 세계 초유의 사건이었다. - 최세진


이 글을 보고 찬성한 네티즌들이 해당 글을 퍼다가 다른 동아리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제안이 나온 지 단 3일만에 광화문에 1만여 명이 집결했다. 거기는 책임 주체도, 조직도, 집회 내용에 대한 사전 합의도, 계획도 없었다. 다만, 제안과 동의만 있었을 뿐이다. 그 집회에 대해서는 범대위도 당일까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고, 언론도 입을 닫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그 선전, 조직은 순전한 네티즌들의 성과였다고 볼 수 있다. - 최세진


이렇게 조직된 집회이기에 집회 신고는 당연히 할 생각도 없었으며, 집회현장에서도 주도하는 조직이나 단체가 없었다. 덕분에 집회가 금지된 광화문과 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그것 때문에 처벌받았다거나 구속된 사람과 단체는 없었으며 오히려 전 사회적으로 급격히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 최세진


처음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주최하는 단체나 정해진 연설자 없이' 마이크를 주고받았다. 참가한 중학생부터 일반 시민들까지 자유롭게 무대에 올라와서 목소리를 높였으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해산도 자유롭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한번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이 집회는 당일 한 연사가 이 추모제를 계속 하자고 제안하고 집회 현장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자 거수로 매주, 매달, 매일 중 매주 모일 것이 '그 자리에서' 다수결로 결정되었다. 그 날 집회에서 대중은 동원의 대상도, 선전 선동의 대상도 아니었으며, 스스로 조직하고, 선전하고, 연설하고, 의결하고, 집행하는 주체였다. - 최세진


이에 대해 초기 제안자인 '앙마'는 <광화문에 더 많은 민주주의를>이라는 글에서 네티즌들에게는 '이기기 위해서는 "넓어져야"합니다. ... 언론이 미선이 효순이의 진실을 가리려 할 때 깃발 든 분들이 결국 진실을 지켜내셨습니다. ... 깃발은 그분들의 자존심입니다. ... 너그러워집시다. 깃발이 보이면 아, 저분들도 왔구나. 서로 칭찬합시다.'라며 달랬고, 운동단체들에게는 '광화문을 진짜민주주의가 살아 숨쉬는 곳으로 만듭시다. 여기 처음 오시는 시민들은 기존의 집회형식을 낯설어합니다. ... 거리감을 주는 표식을 떼어주십시오. 기존의 방식을 과감히 떨치십시오. ... 당신들은 10년 넘게 거리에서 대중들을 호출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그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 광화문에 모인 모두에게 집회의 주도권을 주십시오.' 라고 호소했다. - 최세진



참고자료

* 99년 노동미디어 워크샵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평조합원 전략” 중에서 ‘노동조합과 communication - 전달인가 소통인가?’(임인애 / 세기말현장보고서팀, LAN)



● 프롤로그


1. 노동조합 의사소통 딜레마


2. 그들은 너무 달랐다.


3. 집회와 커뮤니케이션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은 집회와 유인물을 통하여 결집되고 표현되었다. 이것은 앞으로도 당분간 지배적인 매체로서 가동될 것이다. 집회는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의사소통해왔던 대단히 역동적인 공간이었다. 집회와 가투로 몰아부친 87 대투쟁의 그림을 상상한다면 집회는 집결이고 폭발이고 서로를 느끼고 확인하는 소통과 연대, 투쟁의 성격과 정보가 순식간에 교감되는 독특하고 거대한 커뮤니케이션 공간이었다.


그것은 어떤 매체보다 직접적이고 동시적이었다. 발신과 수신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표현의 현장성, 그것은 커뮤니케이션 체감지수를 절대적으로 상승시키면서 명쾌한 전략과 기발한 전술들은 즉석에서 창출된다. 이렇게 투쟁은 재빨리 속살을 채우며 심화되고 확산된다.


이때 체험하고 소통하는 정보는 발언되어지는 것 이상이었다.

누가 발언하는가 누가 응답하는가에 대한 경계는 무너지고, 발언 내용과 응답 사이 말의 의미가 꼬리를 물고 증폭한다. 그 순간 소통된 정보의 질감은 단순한 말의 의미를 뛰어 넘는다. 언어라는 코드에 에너지가 팽창하면, 폭발 직전의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난다.

이것을 사람들은 "가슴 벅찬..." 혹은 "온몸으로 느꼈다..." "집회 분위기 좋았다"는 말로 표현한다. 그래서 구체적 내용을 물으면, "내용이 중요해? 분위기지!" "그냥, 감동 그 자체였어...." 그리고... 보름이고 한달이고 다리 아픈 줄 모르고 도시를 가로질러 뛰면서 가두시위를 벌이고 가투를 치룬다. 우리의 노동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런 에너지 속에서 성장해 왔다.


그런데 말의 의미 문자적 코드 이상이 소통되던 공간, 내용 보다는 느낌이었던 집회에서 언제부터인가 느낌이 거세된다. 느낌이 거세되자 집회를 주도하는 사람들의 메시지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공간으로 경직된다. 화려한 연설적 수사가 용량 높은 앰프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지만 이제 모두 "집회가 전만 같지 않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집회가 내용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민주노조 운동 10년의 시간만큼 연단위의 수사적 테크닉은 분명 세련되어졌고 고물 앰프로 투박하게 선동할 때 보다 내용도 훨씬 명료하게 전달되는데 사람들은 '내용이 중요한게 아니라...'는 집회를 "내용이 없다.."는 말로서 평가한다. 그것은 곧 소통된 내용이 없었다는 표현이었다.


연단에 선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발언권을 독점할 수 밖에 없는 집회 형식 자체가 원활한 의사소통을 가로막는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의사소통이란 형식적 쌍방향성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일방성이냐 쌍방성이냐는 이분법적 개념에 몰두하다 보면 때로는 형식을 깨뜨리고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의 또다른 현실을 놓칠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 대신해서 어떤 이야기를 한다하더라도 느낌이 소통되는 공간이 있다. 그것이 집회이고 연단이 높고 마이크가 세팅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발언이 이루어지는 내내 열광적 환호나 지지의 함성 없이 침묵만이 흘렀다 할지라도 우리는 소통을 하고 있다는 경험을 종종 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누군가 꼭 찝어서 표현 할 때, 모두가 발언하지 않았지만, 굳이 일방적이라 평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통이란 표현의 형식이나 질량 관계, 누가 많이 발언하느냐... 그리고 매체의 속성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평조합원을 대신하여 '판단'한 지도부가 그 판단에 따라 '결정'하고, '결정'된 사항을 통보하고 지침을 전달하는 자리에는 비장한 침묵도 시선 맞추기도 울림도 사라진다. 함께 판단할 의사가 없는 공간, 질문을 받지도 응답도 묻지 않은 채, 한편에서는 말하고 한편에서는 들어야 한다. 연단위와 아래는 철저히 분리되고, 발언권을 독점하고 있는 지도부들의 원고는 천편일률적으로 흐른다. "그 소리가 그소리..."가 된다. 이쯤되면 커뮤니케이션 기능은 완전히 마비된다. 민감한 내용도 새로운 소식도 없이 "열심히 투쟁합시다!" "끝까지 투쟁합시다!"란 상투적 구호가 공허하게 반복될 뿐, 커뮤니케이션이 없는 그곳은 이미 폐허였다. 누가 거기 가고 싶어지겠는가? 평조합원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왠만한 지역 집회는 활동가들의 의무조항으로 당착된다.


더욱 이런 상황은 집회의 중앙집중을 강화시키고, 그렇게 잡힌 집회를 참석하기 위해 그들이 종종 전세 낸 관광버스 안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도 만만챦아 진다. 그들의 활동내역중 1/3은 집회참여로 채워진다. 또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역 집회에서는 동원에 대한 고민이 추가된다. "조합원들을 어떻게 집회에 데려갈 수 있을까...?" 이것이 중요 안건이 된다. 동원해야만 하는 집회... 이미 자발적인 의사소통이 증발해버린 공간이다. 90년대 중후반을 들어서면서 누구나 이런 체험을 했다.


4. "예"라고만 응답하시오!


그러나 96, 97 노개투 집회부터 상황이 반전되었다.

평소 천단위로 모이던 울산의 태화강 고수부지 집회에 1996년 12월 26일, 만단위 인파가 운집했다. 그날은 국회에서 노동법이 날치기 통과된 날이었다. 조합원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깃발이 도열하고 단위사업장의 위원장들이 연단위로 오르고 사회자는 정해진 식순대로 집회를 진행했다. 연단위의 인사들은 차례차례 나와서 비슷 비슷한 정세분석과 국면에 대한 설명을 반복했다. 여전히 연단위의 연설은 조합원의 상상력과 소통하기에는 너무 고정된 틀에 갇혀 있었다. 흐름이나 리듬, 집중도를 완전히 무시한 채 높은 톤으로만 일관하는 선동과 연설, 구호는 왜 싸워야 하는지는 알기 때문에 나온 조합원들의 판단과 상상력을 오히려 질식시킬 것만 같았다. 연단아래 앉아 있는 조합원들 또한 열심히 듣기를 포기하고, 의례적인 박수나 구호를 시간 맞추어 반복한다. 그래서인지 연사들은 발언 중간 중간에 "여러분 맞습니까?" 라는 문장을 반드시 구사하면서 청중들의 "예"라는 답을 확인한다. 맞습니까.../ 예..../ 그럴 수 있습니까.... /예 는 그날 집회기간 내내 반복되던 대화형식이었다. 예라고만 대답을 강요하는 연설 형식...그 공간에서 투쟁의 에너지는 규격화된다. 끝까지 투쟁할 수 있겠습니까 / 예... 지도부의 고민은 오로지 이 대오를 언제 까지 유지시킬 수 있느냐에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어떻게 싸울 것이냐를 웅변했던 내용을 다소 지루하더라도 옮겨 적어 본다.

사회자 : .... 예, 우리.... 우리의 승리로 이끌어 가기 위하여 다같이 결의 할 수 있겠습니까?

군중 : 예....

사회자 : 예, 믿겠습니다. 그러면 이어서 현총련 의장이면서 민주노총 부의장이신 .... 의장님 을 모시고 민주노총 투쟁 방침 발표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힘찬 박수로 맞이해 주 시기 바랍니다.

의장 : 반갑습니다. 정부와 신한국당이 급기야 오늘 새벽 천인이 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습 니다.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한 것입니다. 이는 의회 민주주의를 정면으 로 부정하고 ..... 동지 여러분.... 강력한 총파업 투쟁으로 박살내야 합니다......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님의 투쟁 방침을 철저히 따릅시다. 좋습니까?

군중 : 예

의장 : 휴가 또는 직장폐쇄가 단행되더라도, 이를 거부하고 주야 공히 정시 출근 할 수 있 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낮 시간은 단위노조별 프로그램으로 진행하고 오후 4시 부 터는 거리로 나와서 국민과 함께 투쟁할 수 있겠습니까....

군중 : 예

의장 : 더 많은 국민의 지지를 모아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려면 폭력투쟁 가두투 쟁을 자제해야 합니다. 동지여러분 국민과 함께 비폭력 평화투쟁을 힘차게 벌려 나 갈 수 있겠습니까?

군중 : 예

의장 : 투쟁 지도부의 지침을 철저히 따릅시다. 그리고 우리의 지도부를 우리의 손으로 지 켜냅시다. 그럴수 있습니까?

군중 : 예....

의장 : 신정 휴가를 반납하고 힘차게 투쟁합시다. 그럴 수 있겠습니까? 있습니까....

군중 : 예....

의장 : 오늘밤부터 간부들은 철야 농성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군중 : 예

의장 : 그리하여 김 영삼 정권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힘차게 투쟁합시다. 동지 여러분 우리의 투쟁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지도부를 중심으로 똘똘 뭉칩시다. 승리에 대한 자신을 가지고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강력한 총파업 투쟁을 전개해 나갑시다. 투쟁합시다. 승리합시다.

군중 : 예...

의장 : 동지여러분 감사합니다.


"예..."라고만 대답하라 이미 투쟁 방침은 결정되었다. 지도부를 따르라....

이것이 발표하는 지침의 기본구도 였다. 전세계를 놀라게 했던 노개투,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울산 집회는 이렇게 시작되었고 비폭력 평화투쟁의 기조를 위하여 질서유지대가 조직되었고 한달을 넘기는 시가행진중, 가끔 나타나는 돌출적인 가투는 금방 통제되었다.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가 분명하게 구분되어 결정된 이상, 싸움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창조적인 움직임과 판단은 금지된다.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를 탄력적으로 넘나들던 지금까지 노동자 투쟁의 노하우는 폐기처분된 것이다. 평조합원들의 에너지는 거대한 행진 속에 고정되고, 의례적인 스펙타클의 한부분을 이룰 뿐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기발한 전술도 격렬한 표현도 아이디어도 창조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판은 이미 다 짜여져 있었고, 집회는 앉아서 구경하고 국면이 진행됨에 따라 나타나는 지역 인사들의 연설만 열심히 경청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집회는 일정이었고 이만큼 투쟁하고 있다는 물리적 증거였고, 지도부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전달했고 끝까지 투쟁하자고 당부하고 당부하면서,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오래된 연애 같이 .투쟁은 그렇게 거듭거듭 확인 절차속에 전개되고 있었다. 지도부들이 평조합원들에게 잠재하고 있던 미지의 열기는 지나쳐버리는 순간, 평조합원들의 수동적인 태도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화로웠다. 굳이 커뮤니케이션이 필요없는 공간이었다. 그들은 끝없이 끝없이 인도를 타고 줄지어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파업이 철회되었고 1년후 98년 1월 그들의 대표는 노사정위라는 틀속에서 정리해고 법제화에 합의 도장을 찍었다. 96년 12월 26일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권영길 위원장, 민주노총 , 지도부라는 단어를 거명하며 그들의 지침에 철저히 따르라는 발언을 했던 사람도 도장을 찍어주는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쯤 되면 평조합원들은 집회연단에서 나오는 발언은 이미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판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정치적 협상과 압박을 행사하기 위해 치루는 집회와 진짜 싸움을 위해 결집하는 집회를 구별할 줄 아는 통찰력 정도는 당연히 생긴다. 또다시 집회 동원력은 소강 상태에 접어든다. 소통은 없고 전달만 있는 집회.... 평조합원들의 정세 판단이 서기 전까지 당분간 소강국면으로 들어선다.


하나만 더 그날(1996년 12월 26일) 집회의 발언을 인용해보면....

16시 43분에 있었던 현대중공업 위원장의 연설이다.

"예, 반갑습니다. ... 현대중공업에서는요... 4000명이 오토바이 타고 나왔습니다. 오토바이 한 대에 2명씩 그러면 오토바이 몇대왓습니까? 예, 오토바이가 한 2000대 나왔습니다. 그런데 현대자동차 한 만명 왔죠? 예, 한 만명 왔습니다. 그런데 현대중공업 4000명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현대자동차는 가깝고 자동차는 3만 5천이고 현대중공업은 2만 2천 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현대자동차는 당연히 많이 와야 됩니다. 맞습니까? 그 못지 않게 작은 사업장에 있는 세종공업 효문 단지에서 동양나일론에서 모든 동지들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울산 노동형제 일어섰다 하면 전국이 흔들립니다. 맞습니까? 전국의 노동형제들은 울산을 예의주시 하고 뭔가를 믿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87에서 또다른 역사를 만들어나가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해낼 수 있습니까?"

"예"

"정말입니까?"

"예..."

"예,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 연설은 쇠소리 톤이 아닌 아주 소박한 말투로 구사되었고, 그 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솔직하게 집어내어 얘기를 풀어 나갔던 이유로 듣는 사람들 얼굴에 잔잔한 웃음까지 번지게 했고 줄곧 경직되던 분위기를 다소 이완시켜주었다. 당시 그 위원장의 느낌을 진심으로 표현하는 이 연설은 선동과 정치적 언어로 일관하는 수사력과는 다른 질감, 무엇인가 자기 생각을 말로 건네는 듯한 느낌을 그 공간에 불어넣은 것은 분명했다. 획일적인 말투와 내용에서 조금만 탈피해도 잠시 틈새는 생긴다. 경직된 분위기는 풀리고 사람들의 표정은 금새 생생해진다. 그들은 귀기울이고 싶어하는 것이 분명했다. 중간중간 "예"라는 답을 전제한 "....맞습니까?"에 대한 응수도 좀은 달랐다. 그러나 모처럼 자신을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한 연사의 발언 내용에는 집회 동원력에 대한 강박관념과 큰 사업장과 작은 사업장에 대한 구별짓기라는 무의식이 적나라하게 반영되었다. 또한 87의 기억, 울산의 이미지로 자신감과 결의를 고취시키는 수사학 속엔 투쟁경력과 울산 이라는 지역구도에 따른 기득권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수직적인 연대개념이 숨어 있었다. 집회는 경험유무에 상관없이 함께 투쟁하러 나온 자리이고 전국 노동자들의 투쟁 소식이 수평적으로 소통되는 곳이다. 그런데 큰 사업장 작은 사업장 동원능력을 출석체크 하는 곳도, 각 사업장의 상이한 조건들이 확인되는 자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누군가 이 덩치큰 집회를 예의주시하기 때문에 과거의 경력이나 등수를 상기해서라도 한 번 잘해보자는 식의 이야기는 우선 당사자들에게는 뿌듯함과 자신감을 줄지 모르나 노동자 내부 분할구도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투쟁은 보여주는 게 아니라 직접 싸우는 것이다. 집회는 그 싸움에 대한 풍부한 의사소통의 집단적 매체이고, 발언은 소통을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 표현은 최대한 진실해야하고 구체적이어야하고 솔직해야한다. 이견들은 최대한 첨예하게 부딪히고 토론되어야 하고 정보는 열려져야 하고 모두가 스스로 판단할 수있어야 한다. 표현이 형식적이면 소통도 형식적이다. 표현이 획일적이면 꼭 그만큼만의 소통이 이루어질 뿐이다. 그러나 집회의 규모로 투쟁에 대한 양적 수치를 확인하려는 순간 집회는 소통보다는 동원 그 자체가 최고의 목표가 되고, 집회 참석과 불참이라는 분할선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지도부들은 무수히 초조해진다. 모든 동력과 조직력은 그것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집회라는 매체를 통하지 않고는 조합원을 느낄 수 있는 지표가 무엇인지, 자발성과 잠재력을 무력화 시키는 동원전술에 대한 맹점은 어떻게 드러날지.... 제3의 전술도 무엇인지... 평조합원들의 생각이나 은밀한 표현은 어떻게 흐르는지.... 소통에 실패한 지도부들은 감각은 이 모든 물음을 비껴간다.


"그날 96년 12월 26일 새벽에 국회가 그렇게 된 그날... 활동가들이... 현장을 돌았지요. 그날 당일은 조합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나오는 순간 정문 앞에서 바로 집회를 하고 싸웠어야 했어요. 줄도 맞출 필요 없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서서 비좁으면 담벼락에도 올라서고 현장에 있는 엠프 가져다 쌓아놓고 바로 그기서 집회하고 싸웠어야 했어요.

열기가 막 느껴졌어요, 그 순간은.... 조합원들도 그걸 바랐던 것 같아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형식이 없어지는 순간, 차있는 열기를 뽑아내야 계속 충전될 것 같은 것... 끊임없는 완전 연소를 해야하는 순간..샘물도 고인 것은 퍼내야 새물이 솟아 나는거 아니까? 그런데 고수부지까지 인솔해 가고 형식적인 가두행진을 하고 그러면서 이상해졌어요. 달리는 순간 힘이 다 빠져버린 건지.. 판을 읽었는지... 취향에 안맞는 건지... 우리도 그때 이게 아니다라고는 느꼈지만, 그 다음 부터 조합원들이 도통 나오지 않더라는 겁니다. 우리 조합원들은 위기감을 못느낀다...관리자들의 통제가 너무 심하다.... 뭐, 말들은 많았지만, 싸울 만큼 싸워본 조합원들인데 동원하고 규격 맞추는 집회에는 더 이상 목매달지 않는 것 같아요. 막상 작정을 하고 덤볐는데 아무것도 안느껴진다 생각되면 안나와요. 관리자들 탄압 받아가며 나올 이유도 열정도 싹 식어버렸던 거지요. 뭔지 모르겠 지만 판을 읽는 것 같아요. 우리 조합원들 너무 안움직인다 이상하다... 밖에서 말은 많 지만, 거칠고 투박해도 조합원들은 민감하고 정확한거 같아요. 말은 안하고 있지만...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눈감아 버려요... 노개투 싸움에 대한 우리 몇몇 생각은 이래요. 이걸 우리가 못느끼는 것 같아요. 뭐...느낀다한들 별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이후로 울산에서 하는 지역 집회에서 현중위원장들은 종종... 우리 사업장 조합원들이 많이 참석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현장의 탄압이 워낙 강고해서 그렇습니다...라는 말을 인사처럼 덧붙이고 연설을 시작한다.


우리에게 대체로 노개투는 대중참여가 활발했던 적극적인 집회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엄격한 의사소통이란 잣대로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문제점은 심각했다. 구체적인 날짜와 지역에 한정하여 예를 들어 묘사한 탓에, 당시 전국의 집회 전부를 규정하기에 다소 무리는 따른다고 본다. 그러나 집회와 커뮤니케이션의 관계에서 접근한다면 일반적 현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느끼고 이야기한다.

"집회는 집회야. 딱딱하고 설렁하더라도... 집회는 집회로서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집회에서 더 이상 무얼... 집회는 집회야!"

이미 집회는 평조합원들의 의사소통 매체가 아니어도 무방하다는 말이다.

"도대체 무슨 상관이야... 적절한 시기 모인다는 것 자체로서 이미 집회의 기능이 있는데..."

국면이 조성되면 집회를 잡아야 하고, 앞으로 당분간 집회라는 형식 자체를 폐기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모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의 조건이 노동자 투쟁의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는 부분까지 동의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집회에서의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복원시켜야 할 것이다.


5.폐쇄회로-전달인가, 소통인가?


집회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노동자의 미디어에서 의사소통- 우리는 이것을 전통적 의사소통 형식이라 생각하는데 다음과 같은 기본단위로 구성된다. 한쪽에 발신자가 있고 한쪽에 수신자가 있고 메시지가 전달된다. 뼈대만 그린다면...


메세지(정보)

발신자----------------> 수신자


이런 경로 속에는 한편에서는 말하고 한편에서는 듣는다.

또한 발신자와 수신자는 인위적으로 고립되고 인위적으로 결합된다.

수신자 발신자 사이의 영향력과 상호적 관계는 메시지나 정보에 의해서만 결합된다.

그런데 정보나 메시지에 대한 발신자의 선택의 영역은 참으로 다양하고, 선택과정에는 주로 패권적 담론과 코드가 작용되면서 정보가 결정된다. 그러나 수신자는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거나 회피할 자유, 두 개의 선택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모델 속에서 일어나는 의사소통에서 수신자는 수동적인 액션속에 갇힐 수밖에 없다. 더욱 분쟁과 문제 일으키기는 자칫 노노분열로 해석될거라는 불문율 속에서, 그들은 종속과 침묵에 길들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신할 때는 물론, 회피할 때조차 발신자의 코드에 종속되어야 한다. 코드를 깨트리거나 위반할 수도 범주를 벗어날 수도 없다. 예를들면 집회 참석과 불참은 메시지의 수신과 거부로만 해독될 뿐이다. 그것이 발신자가 선택한 코드이다. 그러나 코드를 달리하면 그들의 침묵이나 집회 불참등은 단순히 수동적인 거부가 아니라 제 3의 행위나 또 다른 직관이나 표현일 것이다.

발신자의 해독능력 바깥 코드, 더 정확하게 말하면 통용되는 지배적인 코드 밖에서 일어나는 평조합원들의 다양한 코드나 의미들을 발신자는 결코 알아차리지 못한다. 소통불눙 어긋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평조합원과 지도부가 위 모델 속에서만 커뮤니케이션 할 때, 상황이 조금만 민감해지면 모든 것은 어긋나버린다.


아직까지 노동자 내부 의사소통에서 발신자의 위치는 주로 지도부들이다.

집회, 노조신문, 유인물, 영상 등은 주로 발신자들이 더 많은 정보를 수신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기획되고 가동된다. 정보가 일방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발신자들은 노동조합의 대소위원 조직체계를 통하여 가끔 수신자의 자리에 서기도 한다. 그러나 매개과정이 추가될수록 최초의 표현들이 굴절될 가능성이 큰데다, 그 수렴하는 형식이 대의원 대회나 간담회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질 때는 공식적인 언어의 형태를 강제 받는다. 더욱 대의원들의 전달력이나 취사선택이 가미된다면 이때 발신된 메시지의 생생함이나 코드의 민감함을 떨어뜨릴 위험조차 존재한다. 아주 건조한 메시지가 수신된다. 애초의 의도를 완전히 벗어나기도 하고 도저히 집중할 수 없는 소음처럼 들리기도 한다.


6.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위하여...


1998년 8월 21일 갑자기 만들어진 노조앞 집회에서 조합원들은 위원장에게

"우리 조합원들 발언을 제발 들어 주십시오, 위원장님..."

"위원장님, 바쁩니까? 회사하고 마라톤 협상도 하는데.... 아무리 바빠도 밤을 새더라도 우리 이야기를 좀 들어주십시오."

"제가 여러분 얘기 안듣겠다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대소위원 통해서 듣겠습니다.."

"대소위원 통해서 올라가야 말이지... 우리 얘기가 올라가지를 않습니다. 제발 직접 들어 주십시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대소위원들을 통해 올라간다 만다의 사실 여부보다 평조합원들은 자신들이 발신한 메시지가 대소위원들을 통하여 원활하게 지도부로 수신되지 못한다고 체감하는 현실 이다. 잘 소통되지 않는다고 느끼면 그들은 왠만해서는 발신을 멈추고 침묵하고 지켜본다. "뒤에서 따라주면 된다...."는 인터뷰 내용은 이런 경험을 표현하고 있다. ".....얼토당토 않는....." 순간이라고 판단되는 순간까지는 그들은 왠만하면 잠자코 있는 쪽을 택한다. 그런데 그날 굉장히 파격적인 소통을 제안한 것이다. 대소위원을 통한 의사소통 관행과 경로를 무력화 시키고 직접 발언에 나선 것이다. 연단위의 연사가 바뀐 것이다. 위원장과 집행부는 정말 오랜만에 집회 형식 속에서 수신자의 위치에서 들어야 하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3시간이 넘는 자유발언대가 불빛도 없이 진행되었고, 평조합원들의 단호한 어조 일상의 언어들은 거침없이 쏟아졌다. . 집회에서는 전혀 쓰여지지 않는 언어와 말투였다. 생소한 어감과 금기의 발언들이 주저없이 터져 나온 것이다. 참 이상한 집회였다. 앰프도 약했으며 문선대의 투쟁가도 연단도 조명도 없었지만 3시간 내내 긴장감은 한치도 떨어지지 않았다. 모두가 열심히 발언했고 열심히 집중했고 동의와 지지를 표현할 때는 밀도가 다른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언어와 비언어의 리듬이 딱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매개없는 직접 발신, 그렇지만 단지 수신만을 요구하는 발신자들이 아니었다. 이날 이 새로운 발신자들은 끊임없는 의문형 문장으로 발언을 채웠는데, 그것은 단순히 "예"를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주 복잡하고 상세한 서술을 요구하는 주관식 의문형을 끊임없이 펼쳐가며 어둠 속에서 길지 않은 분량으로 골고루 즉석에서 마이크를 돌려가며 팽팽하게 3시간 짜리 집회를 사회자 없이 진행한 것이었다.


그 순간 그들 행위는 수신자에서 발신자로의 단순한 위치이동 이상이었다. 전통적인 의사소통의 양극 구별은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전통적인 소통 모델을 벗어나는 자유로운 표현이 일어났던 것이다.

권력을 가지는 말투, 규범화된 단어가 사용되지 않는 발언, 전혀 새로운 어감, 형형색색의 다른 의견과 내용들을 독특한 화법으로 표현했고, 또한 귀기울여 들었던 것이다.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어도 되는 연설, 말의 구색과 테크닉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연설, 눈치도 검열도 없는 자리, 권력화된 언어가 사라지고 발언의 독점권이 무너진 자리에서 자유로운 표현과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색다른 경험, 초기 노동운동 시절의 기억, 집회 커뮤니케이션의 느낌을 되찾는 기분이었다 한다.

"누구나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던 옛날 집회할 때 그때 그 기분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싸움은 그날 우리 요구대로 안됐쟎아요? 그냥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게 곧바로 모든 해결책은 아닌 것 같아요."


그날 그들의 절실한 발언들은 진심이었지만 요구하는데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발신자 또한 메시지에 대한 피드백 정도로 감지했을 것이다. 정보내용 실행에 대한 결정권 또한 순전히 발신자의 권리였다. 그것은 엄청난 권력이다. 발신과 권력을 동시에 쥐고 있는 지도부와 그 반대편에 있는 평조합원들, 그들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새로운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갈지 아직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현실이다. 지도부에게 항의하고 요구하거나 수긍해주는 관계망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평조합원들의 정체성 또한 혼란스럽다. 다만 우리는 실패한 경험을 통하여 의사소통이란 단순히 정보의 발신과 수신이 아니며, 발신된 정보의 피드백 수치로 가늠할 수 있는 것도 아닌 미묘한 버전이라는 것을 확인할 따름이다. 정보 소통 경로를 바꾸는 문제, 회로의 일방성과 폐쇄성을 허무는 문제 정도로 밑그림이 잡힐 뿐이다.


그래서 98년 8월 21일은... 수정을 요구하는 수신자들의 항의에 불과했는지, 노조의 권력과 질서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운 의사소통 행위였는지... 정말 모호하다.

하지만 강도 높은 파열이었슴은 분명하다. 당시 집행권자들에겐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일이겠지만 우리 모두는 그날을 공개해야 한다. 그때 발언되어진 말들을 꼼꼼하게 뜯어보면서 평조합원들의 전략과 전술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되새겨봐야 한다. 연구자들이 수십편의 논문을 통해서 구축한 이론들 종류가 그날 그 자리에서 다 쏟아져 나왔던 것 같다. 그들은 경영참여에 대하여..../ 노동조합이 소수자를 보호해야 하는 원칙에 대하여... / 만약 정리해고가 불가피하다면 선정기준에 대하여... / 노자의 협상 본질에 대하여... / 협상의 전술에 대하여... / 선동의 상징성이 안고있는 거짓과 진실의 양면성에 대하여.... / 이미지전술에 대하여... / 협상팀의 구체적 행동지침에 대하여.... / 집회진행에 대하여... / 공권력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대하여.... / 그리고 그들 노동과 투쟁에 대하여... 그들은 전략 전술 그 자체였다.


더 이상 그들에게 "예"라는 응답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대신 그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들에게 사소한 결정까지 맡겨버려야 한다. 최대한 서로 다른 견해와 다양한 정보를 걸러지 말고 공개시키고 유통시키는 것, 소통하고 의논하고 서로 주고받아야 하는 수평적 관계를 실제적으로 복원시키는 것, 그들이 "가르치거나 이끌어 내거나 조직화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무의식적인 고정관념으로부터 확실히 벗어나는 것... 명령과 지침이란 말이 주저없이 통용되는 위계질서를 파괴하는 것...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토대는 여기서 시작한다.


다시한번 정리하자면,

정보를 던지고 그 정보를 받아 안는 것으로 커뮤니케이션은 완성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히 정보의 송신도 수신도 아니고, 정보의 피드백 과는 다른 특별한 교감이고 상호적인 심리작용이며, 끊임없는 질문과 응답, 다양한 표현, 자유로운 발언과 토론을 서로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다수결로 결정되는 합의제와 다르다.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끊임없는 긴장관계속에서 일어난다. 그런 의사소통 과정은 정보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행위의 선택 가능성을 여러 가지로 열어놓을 것이며, 어떻게 투쟁할 것이냐를 놓고 무궁무진한 전술과 전략을 창출 될 것이다. 평조합원들, 그들의 생생한 화법때문에 정보확산이나 전달력 또한 배가될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새로운 매체와 만날 것이다.

의사소통은 정보를 운반하는 미디어 조건이 중요하지만 결코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아무리 새로운 매체가 노동자의 손에 주어진다하더라도 그것이 곧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 폐쇄회로는 전복될 것인가...

인터넷이나 사이버, 그곳이 그들의 무궁무진한 잠재력과 표현력들로 넘치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공간이 될지, 통제된 정보, 획일화된 전달사항, 언제나 승리할 것이며 승리했다는 현실감을 상실한 투쟁소식으로 채워지는 또 다른 폐허가 될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상상력에 달려있다.

국가의 노동통제는 노조의 체제내 포섭으로 유연화 되고 있다. 끊임없이 제도화되는 노조의 사회적 권력이 자본의 파트너가 될것인가 평조합원들의 진정한 대표가 될 것인가 평조합원들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은 그것을 감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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