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하우스 - 스티븐 제이 굴드

개체의 대표값을 정하기 위해 평균값을 선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 최빈값, 중간값, 평균값을 구분해야 한다. 대칭적 분포에서는 세 값이 일치하지만 기울어진 곡선에서는 그렇지 않다. 또한 당연히 최대값은 개체를 대표할 수 없다.

 

개체의 분포에서 오른쪽 꼬리를 분리시켜 특정한 속성으로 규정해서는 안된다.

- 오른쪽 꼬리는 전체 분포 속에서 읽혀야 하고 그 속성은 전체에서 분리되어 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저자는 전체 분포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뜻에서 이 세계를 '풀하우스'라고 이름짓고 있다. 따라서 '진보'는 기존에 있던 개체에서 분리되는 과정이 아니라 전체 개체의 분포가 함께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화는 진보와 동의어가 아니다.

-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진보를 향한 내재적인 경향 같은 것은 없다고 결론 내릴 수 밖에 없다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 개체의 평균 복잡성은 전체적으로 증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분포가 왼쪽 벽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넓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왼쪽 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빼먹으면 오른쪽으로의 분포 확장이 어떤 경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최소복잡성의 왼쪽 벽 바로 옆에서 박테리아 형태로 시작된 생명은 지금도 같은 위치에 남아있다. 무작위적인 운동의 결과인 오른쪽 꼬리는 전체 개체를 추동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운동의 효과(굴드는 결과와 효과를 구분한다)이다.

그래서 굴드가 요약한 걸 옮기면,

1. 생명은 왼쪽 벽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2. 초기 박테리아 형태의 장기적인 안정성

3. 생명이 성공적으로 팽창해 감에 따라 분포 곡선은 계속해서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갈 수 밖에 없다.

4. 분포 전체의 꼬리에 불과한 최대값으로 분포 전체의 성질을 규정하려는 것은 근시안적인 경향이다.

5. 원인은 벽과 변이의 확장이다.

6. 한 시스템에 진보를 슬그머니 끌어들이는 방법도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경험상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7. 오른쪽 꼬리에만 주목하는 편협한 시도를 결해한다고 해도, 전반적인 진보에 대한 절망을 제거했으면 하는 심리적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다. 원하는 결론, 즉 인간처럼 의식을 가진 생물이 지배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진화의 결과라는 결온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문화에서의 진화와 다윈적 진화는 서로 다르다.

- 문화는 어떤 방향성을 축적할 수 있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다. 문화에는 계통의 융합과 라마르크적 유전이 작용한다. 문화의 진화와 다윈의 진화를 서로 섞어 쓰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인식을 심는다.

 

변이와 다양성을 그 자체로 존중하라.

 

정해진 중력의 법칠을 따라 이 행성이 끝없이 회전하는 동안, 아주 단순한 시작으로부터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경이로운 무한한 생물종들이 진화해 왔고, 진화하고 있고, 진화해 갈 것이다.

이러한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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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글에서

- 부분으로 전체를 규정하려는 시도에 대한 경계(하이젠베르크의 '분과 전체')

- 단속평형론

- 도킨스와 굴드의 논쟁 : 삼각소간spandl은 원형 돔을 설계할 때 아치가 만나는 부분에 생긴 삼각형 공간을 말하는데 보통 장식적인 구조물로 꾸며 메워진다. 따라서 삼각소간은 건축상의 부차적 산물이다. 현재 장식적 용도로 훌륭하게 쓰이고 있으나 처음부터 그런 용도로 생긴 것은 아니다. 굴드의 생각에 따르면 생물의 뇌도 삼각소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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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를 진보로 동일시하고, 인간을 진화의 목적지로 상정하는 태도는 사실 얼마나 같잖은가? 총개체수로 보나, 총량으로 보나, 역사로 보나, 영향으로 보나 인간은 박테리아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 굴드는 이런 목적론에 대항해 싸우는 것을 관념론과 투쟁하는 유물론자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알튀세르가 떠오른다. ㅋ 이 책과 함께 존 벨라미 포스터 등이 쓴 다윈주의와 지적설계론 논쟁을 읽고 있는데, 포스터는 결정론에 굴복하기 보다는 신의 간섭을 택하겠다고 까지 말한다. ㅎㅎ 목적도 기원도 없는 역사.

 

다윈 200주년이라는데, 진화론에 관심이 생겨 이런저런 책들을 들춰보고 있다.

2010/03/24 14:31 2010/03/24 14:31

김약국의 딸들

읽으려고 맘먹고 일은 건 아니고, 시험공부 하기 싫어서 딴 짓하다 텍스트 파일로 있는 걸 핸드폰에 받아서 읽었다. 하필이면 자기전에 농땡이 피울 궁리를 하다 붙잡고 읽은 거여서 새벽 4시가 넘어 잤더니 다음날까지 엉망진창이었다. -_-

 

특별한 갈등구도도 없고, 문체가 구수한 것도 아니고, 눈에 띄는 주제나 사건의 전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페이지를 계속 넘기게 한다. 무엇이 그렇게 궁금증을 만들어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람의 이야기여서 그런 것 같다.

 

'토지'에서처럼 '김약국의 딸들'도 소설의 시간적 배경의 폭이 매우 넓다. 하지만 숫자로 바꿔놓고 보면 100년이 채 안되는 시간이고 수백 수천년 쯤은 쉽사리 넘나드는 현대 소설에 비해 시간의 폭이 넓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폭이 넓게 느껴지는 것은 소설속 시간대 안에 갸늠할 수 있는 3대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아에 500년, 1000년이었다면 내가 동감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직접 경험할 수는 없지만 손에 잡히는 규모의 시간대를 한 이야기 안에 엮어놓는 데에서 그 시간대가 위압감 있게 다가온다. 역사 앞에 섰을 때 겸손해지는 것도 그 역사가 갸늠이 가능할 때이다. 그 역사 안에 살았을 사람들의 삶이 두리뭉실하나마 만져질 수 있을 것 같을 때.

 

이땅에는 예전에도,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간다.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자기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고. 그네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담아내면 그 사람수만큼 소설들이 나올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는 걸 평소에는 실감하지 못하고 살다가, 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으면 이전에 살았을 불가사의한 숫자의 생명들이 머리속에 펼쳐진다. 이럴 때 느끼는 어떤 감정은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기도 하고, 삶을 담담하게 대할 수 있게도 해준다.

 

박경리의 '토지'는 정작 토지에 발딛고 사는 사람들이 중심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정말 '토지'에 대해 쓰려했다면 시점이 달랐어야 했다고. 고등학교 다닐 때 들었던 이야기 같은데, 그 땐 '토지'를 그저 재밌게 읽기만 했던 터라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고, 대학교 와서는 '토지'를 다시 펼쳐볼 염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말은 기억만 해두던 터였다. 그런데 '김약국의 딸들'을 읽다 보니 좀 느껴지는 게 있다. '평범'이라고 상정되어진 모델에 맞게 살아간다 해도 그것이 결코 평범한 삶은 아니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도 덜중요할 건 없지만, 박경리의 촛점은 그렇게 무난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다. 무난해 보이는 이들의 삶이 결코 무난하지 않음을 얘기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중립적인 사람들의 삶에 대해 얘기하는 거다. 평균적인 아픔들. '모든 사람이 저 마다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요'라는 말 앞에서 아픔의 불균등함은 외발로 서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형태.

2009/11/28 21:49 2009/11/28 21:49

지나간다중원문화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중원문화 출판사에서 나오는 무협지를 읽은 기억이 난다. 녹정기도 중원문화에서 나왔을 거다. 그래서 무협지 출판사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대학와서 보니 중원문화에서 나오는 사회과학 서적들이 꽤나 많았다. 철학사전도 중원문화에서 나왔고, 프랑크프루트 학파에 관심이 있어 마르쿠제의 책을 샀었는데 '이성과 혁명'도 중원문화에서 나왔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도. 지금까지도 그 중원문화가 이 중원문화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있었는데, 여러 정황을 볼 때 같은 출파사가 맞는 것 같다. 모를 때는 무협지를 출판하던 출판사가 사회과학 출판으로 방향을 바꾼건가 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이성과 혁명'은 1984년엔가 출판된 책이다.

 

참 쉽게 연결되지 않는 조합이다. 최근에도 신조협려, 소오강호, 연성결 등 김용의 소설을 계속 출판하고 있는데, 한편 철학사전, 헤겔철학, 변증법적 유물론 등 소위 마르크스 철학 관련 도서도 역시 출판되고 있다. 책을 읽어본 게 아니어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제목이나 저자(러시아과학아카데미연구소) 등을 참고할 때 공식화된 소련 교과서 마르크스주의를 주로 옮겨오는 것 같다. 김용의 무협지와 일면 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도 같다. - 영웅들의 이야기

 

이 출판사에서 일하는 분들은 어떤 이들이기에 이런 책선정을 하는 걸까? 많이 궁금하다. 만나보고 싶기도 하고.. 어쩜 내가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의식적으로 벗어내려고 노력하지만, 무협지 세계에 푹 빠져본 경험이 있고, 토대에 의한 일원적인 결정을 상당히 신봉한다. 김용 무협지에 대한 선망이 무엇과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좀 경계심이 든다.

 

그래도 아직 중원문화에서 나온 책 중 사야할 게 있다. ㅋ

자본론에 대한 서한집

2009/10/31 00:24 2009/10/31 0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