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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14
    조합주의와 '현장지배권력화'가 운동 망친다
    혁사무당파

조합주의와 '현장지배권력화'가 운동 망친다

[운동평론] 조합주의와 활동가들의 '현장지배권력화'가 운동 망친다

 

신자유주의가 유난히 극성을 부리는 대한민국, 오늘도 어딘가에는 생존권을 두고 벌이는 노동자민중들의 고된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민생의 처절한 현장에는 그들과 함께하는 열정적인 활동가들이 있어 애환 어린 투쟁을 신명나는 굿판으로 인도한다.

 

한편, 오랫동안 투쟁해온 한 중년 현장 활동가의 말은 요즘 운동을 아는 이들의 가슴을 시리게 한다.

 

“언제부터인지 투쟁현장에 가면 분위기가 좀.. 그래요. 썰렁해요. 바터제라고 있잖아요. ‘내가 너희한테 연대갔으니 너희도 우리한테 온 게 당연한 게 아닌가’.. 뭐랄까. 거래 비슷한 분위기가 있어요. 사무적이라고나 할까요. 세상을 바꾸자는 운동이 자본주의 시장처럼 소비되는 방식이면 안 되잖아요. 안타깝습니다. 운동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진정 ‘동지’라고 부를 수 있는 뜨거운 분위기가 살아나야 해요.”

 

활동가들 사이에는 철 지난 ‘87년 체제’처럼 화석화된 모습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연령과도 무관한 이들에게서 운동에 대한 열정과 지성을 찾아보기란 힘들다. 이 글은 운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활동가들 중에서 이른바 ‘조합주의’와 ‘관료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일부 활동가들의 행태를 성찰해보자는 취지로 쓰게 됐다.

 

이들 활동가들은 때로는 조직 내에서 현장지배권력과 중첩된다. 조직 내 권력이 된 이들에게 운동의 발전을 저해하는 원인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조합주의다.

 

여기서 조합주의는 대부분 조직의 단기적인 이익을 취하는 까닭에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도 될 수 있는 고무줄 같은 논리로, 이에 순응하는 것이 자신의 기득권에 도움 된다고 여기는 활동가들까지 가세해 상부상조하는 반/비운동적인 행태로 진행된다. 하지만 이들은 "운동판에서 조합주의로부터 자유로운 곳 있으면 나와 보라구"라며 외려 정당화에 급급하다.

 

또 생계형 활동가인 경우는 자리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증상도 있다. 몇몇 재력이 넉넉한 대기업 노조와 상급단체 외에는 그나마 최저생계비 수준이라도 활동비를 지급하는 운동단체가 희소하기 때문이다. 반면, 내 돈 써가며 진정성과 열정만으로 뛰는 자발적인 활동가들도 있어 큰 대조를 보이는데 이들은 늘 경계대상이 된다.

 

어쨌든 운동의 동력은 활동가들이 지닌 나름의 ‘신념’에서 나오며 따라서 매우 헌신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활동가들의 주변 환경은 상황이 투쟁 자체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아 학습한다는 건 어지간한 노력 없이는 어려운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신념’은 기본적으로 활동가 자신의 학습에서 비롯된다. 이는 또 자신이 속한 단체의 운동기조에서도 영향을 받는데, 기조가 불확실한 단체의 경우에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물론 기조가 있는 단체라 해도 특정 부문 등의 목적에 집착해 외연을 국한시킬 경우에는 운동 사이의 소통 가능한 연대의 문이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하물며 운동이 지닌 정치성을 외면하고 현장을 경제적 공간으로만 활용하려 한다면 그 활동가는 진정한 운동을 할 수 없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에 처한 활동가들의 공통점은 기능주의와 과거 지향성이다. 당장 투쟁현장에 필요한 건 인력이다 보니 ‘연대’를 필요로 하게 되는데, 실제로는 원칙 없는 ‘이용’이나 ‘이합집산’인 경우가 돼버려 운동성을 훼손하기도 한다.

 

또한 그가 지닌 정체성이 새로운 학습과 만나지 못하고 과거에 머무르는 까닭에 좀 더 진보적인 타 운동단체나 인사들에게 배타적인 경향을 띠기도 한다. 해서 말이 ‘연대’지, 필요하면 부르고 예민한 부분이 있으면 쏙 빼버리는 기회주의적 속성이 작동된다.

 

결과적으로 ‘쪽수’는 많을수록 좋고 ‘소통’은 적을수록 좋다는 분위기가 되니, 꼭 필요한 새로운 이슈가 생겨도 큰 부(?)가 없으면 논의 테이블이 만들어지긴 어렵다. 활동가들이 이해관계에 매인 자본 논리의 운동을 하게 된 것이다.

 

더 심한 악성일 때도 있다. 활동가가 자신의 신념과 소속 단체의 기조가 다름에도 생계가 해결된다는 이유 등으로 단체에 머무르는 경우다.

 

예컨대 자칭 정통(?)맑시스트가 비정규·비공식부문 노동단체에서 일한다거나, 예전 개념으로 PD계열 활동가가 NL진영에서 일하면서 더욱이 그 단체에서 현장지배권력이 돼 중추를 맡으면 활동가 자신의 정서적 혼란이 가중되기 쉽다. 이런 환경에서 활동가는 권위주의까지 생겨 투쟁 국면은 물론 평소에도 단체 구성원들을 이용 대상으로 여겨 내심 적대시하게 되고, 심지어는 지식 파시스트로 발전할 개연성도 없지 않다.

 

그 결과 활동가는 운동에서 벗어난 단순 관리자로 전락한다. 그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현장을 잘 모르는 이들을 상대로 한 환타지적 무용담이 고작이어서 대중운동의 힘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운동을 망치게 된다.

 

연전에 한 원로 여성활동가를 만난 적이 있다. 필자와 동년배인 그녀는 지금도 모 여성단체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필자가 “요즘 운동진영 분위기가 끼리끼리 어울리는 것 같다”면서 “인간미 넘치는 끈끈한 유대감 같은 걸 보기 힘들어진 것 같다.”고 하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사실, 여성인 저도 겁날 정도예요. 조직적이건 개인적이건 이 동네에선 말도 편하게 못합니다. 다들 조직이기주의에 갇힌 건 아닌지 걱정돼요. 게다가 긴장수치가 높아서인지, 고학벌화 되어서인지 몰라도 요즘은 선후배도 없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동지들 사이에서 소가 닭 보듯 하는 느낌 비슷한 걸 받아요. 예전엔 투쟁현장에서 만나면 성(性)을 넘어 손도 잡고 얼싸안고 동지애가 물씬 느껴졌잖아요. 요즘은 어설픈 스킨십 큰일 납니다. 정말 조심해야 해요.”

 

운동이 속히 조합주의와 관료화를 극복하고, ‘쪽수’보다 기탄없는 ‘소통’의 장으로 진일보했으면 좋겠다. 2011년 신묘년 새해에는 투쟁 현장의 곳곳에서 변증법적 역사와 철학이 숨 쉬는, 인간냄새 물씬 풍기는 신명나는 굿판을 보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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