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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2] 인터넷과 미디어 : 지역간 협동 프로젝트 - 오이완 람

  

영문 발제문은 다음 싸이트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ahoi.pbwiki.com/internetmedia

 

[발제문 2]


인터넷과 미디어 - 지역간 협동 프로젝트1)


오이완 람 (Inmeda)


3관계가 없는 연결 : 기술의 비약적 발전과 네트워킹이라는 상투성을 넘어서


사람들을 국경과 사회적 구조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인터넷 세계의 비약적인 기술 발전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J.P. 바로우는 1996년에 사이버스페이스의 독립 선언을 제창했으며, 최근에는 이토 조이치가 새로운 민주주의로서 블로그의 네트워크 효과를 설명했다. 반면에 클레이 셔키는 웹블로그가 현실에 대한 변함없는 권력 원칙 - 세계인구의 20%가 전체 자원(인터넷 트래픽)의 80%를 소유한다는 확실한 불균형 -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미디어 프론티어’에서, 댄 길모어는 모든 개인이 “미디어”가 될 수 있는 풀뿌리 미디어에 대한 구상을 제안했다. 그렇지만, 개개인의 집합은 풀뿌리라는 “정체성”을 구성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와 같은 영웅들의 확장이고, “실제 인생”의 혁명은 실제를 통해 인간의 궁극적 확장이 될 것인가? 더욱 안 좋은 것은, 심지어 개개인의 해방조차 쉬워 보이지 않고, 네오의 해방은 개별적인 노동력을 실제 사회-정치 제도의 욕망 기관에 바치는 신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네오가 자기 자신은 해방되었다는 꿈을 꾸면서 생체-에너지 배터리에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 그가 진짜로 자유롭게 기계를 왔다갔다 하는 것인지 구분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맥루한은 텔레비전 시대의 등장 이후에 인간의 확장이 단절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일깨워 주었다 : 인간 시각의 확장으로서의 텔레비전이 인간 자신의 눈으로 본다는 능력을 제거했다. 인터넷 - 사람들 사이의 연결 / 관계의 확장으로서의 - 은 어떠한가?

인터넷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더 쉽게 네트워크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네트워크는 그 자체의 가치로부터 해방되어 순수한 형식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접속되어 있으나 연결은 없다.

예를 한번 보도록 하자 : 팜바죽 뉴스2)에 대해 들어본 이가 있는가? 팜바죽 뉴스는 아프리카의 사회적 정치적 정의에 대해 다루는 영문 웹사이트이다. 이것은 인터넷 세계에서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존재한다. 우리가 검색 엔진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검색해 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떠한 관계도 없거니와 관계를 만들어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와 아프리카 사이에는 많은 관계가 존재한다 : 굶주리고 죽어가는 아이들, 비탄에 빠진 여성의 이미지는 개발활동을 하는 NGO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 또는 우리가 여행하기를 꿈꾸는 아프리카에서의 야생 생활은 ‘내셔널 지오그래피’와 여행사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런 관계들은 결코 우리를 팜바죽 뉴스로 인도하지 않는다. 한국의 웹사이트인 ‘BASE21'3)은 먼지와도 같은 사이트이다.



세계적 제국 대 지역화된 운동


최근 들어 소련과 동구에서 공산주의 정권의 몰락 이후 특히 세계화에 대한 논의들이 많아졌다. 세계적 자본 흐름과 노동의 분할은 세계은행, IMF, WTO와 UN, 인권과 환경문제를 다루는 세계적 NGO 협의회, 그리고 NATO와 미군 같은 지구적 제도 내에 새로운 정부적 패러다임을 만들어 냈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이것을 “제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지난 몇 십년간, 더욱 더 많은 지역 NGO와 민중의 조직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운동은 실존하는 정치적 국경에 제한되었다. 우리의 현대사, 그중에서 60년대를 반추해 보면 중국의 문화혁명, 프랑스에서의 68혁명, 미국의 반베트남전 운동, 동구의 프라하의 봄 등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 이렇게 정치적인 감성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민중들은 세계의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정치적인 사건에서 자극을 받았다.(그 사건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현재는, 독일 고양이의 조류독감 감염 의혹 사건이 지난 몇주동안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집회라던가 혁명적 분위기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의 국제 운동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작년 12월 반WTO 운동의 평가 회의에서, 한국 측 참가자인 이대업은 왜 국제연대에 대한 강령이 없는가에 대한 질문을 했다. 홍콩민중연대(Hong Kong People's Alliance)라는 조정 주체가 있었지만, 조직들 사이에서 투쟁 전략을 위한 어떠한 조정이나 소통은 없었다. 질문은 굉장히 신랄했는데, 왜냐하면 홍콩에는 여러 다국적 기업, 거대 NGO들, 국제적이고 지역적인 NGO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국제운동에 대한 연대를 보여주곤 했었지만, 홍콩에서는 어떠한 국제연대운동도 없었다. 예를 들어, 홍콩보다 대만에서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이라크 반전 운동에 참여하였다 ; 그리고 필리핀에서의 최근의 정치적 표현은 아무리 홍콩 내 필리핀인이 많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 내에 어떠한 논의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 지역에서의 냉전 정치학과 관계가 있다. 홍콩은 NGO 운동에서 국제 (미국이나 유럽) 펀딩을 위한 전략적인 지점이었다. 많은 펀딩이 중국 본토와 관련되어있으며, NGO는 주로 인권, 노동 상황 등에 대한 보고서를 (영어로) 펀딩 기관에 정리하여 제출하는 일을 맡았다. 자신들의 도시는 그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일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2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많은 지역 조직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역 간 그리고 외국과 지역 운동을 연결하는 조직은 없다.

우리의 운동은 더욱 더 자기중심적이 되어가고 있다. 양쪽 모두 희생자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농민의 이해는 한국 농민의 이해와 충돌하고 있다. 지역의 노동자들은 불법으로 외국에서 온 값싼 노동자들을 싫어하고 있다. 그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 관계가 끊겨 있으며, 운동 진영에서 더 넓은 맥락으로 상황을 이야기하는 노력은 아주 한정적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민중들이 가져야 할 타자와의 감정적 연결이나 연민, 이해력을 발전시킬 문학 작품이나 문화적 생산물들이 없다.

우리는 사실 (oxfam과 같은) 개발기관이나 문화 산업을 통해서 다른 나라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아프리카는 굶주린 아이들이나 동물들이 많은 곳이다. 우리는 그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기부금을 내거나 야생을 경험하기 위해 그곳으로 여행을 간다 ; 우리는 타이페이에서 가장 좋은 카페나 태국에서 가장 좋은 SPA가 어딘지를 안다 ; 마카오는 도박이나 매춘을 위한 도시이다 ; ‘대장금’을 통해 우리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배운다. 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오직 문화 산업을 통해서이다. 이런 지식은 정말로 왜곡되어 있지만, 우리에게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배우고자 하는 열망을 일깨워준다.

12월의 반 WTO 동원에서, 많은 홍콩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은 WTO와 미국에 대항하는 농민들에 대한 연민과 한국적인 의사표현방법에 대한 이해, 홍콩 정부와 주류 미디어에 대한 불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한 감정은 반 WTO 운동 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문화 산업에 의해 야기된 것이다. 아이러닉하게도 반 WTO 집회는 18일의 한국 지원 시위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유지되지 못했으며 실제 지역 운동의 자원으로 변화되지도 못했다.

우리의 운동이 다른 나라들의 민중운동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또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일깨우고 그런 지식을 지역운동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면 어떨까?

탈식민주의와 국제 뉴스


학계에서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체계화시킨, 이론과 연구 의제가 서구의 틀에 맞춰져 있으며 그러한 서구의 지식 체계에 동양이 내면화되어 있다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이런 효과는 국제 뉴스의 운영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주류 국제 뉴스는 로이터나 AP같은 서구 지향적인 통신사에게 지배되어 있다. 민중의 세계관은 국내 뉴스나 서구에 한정되어 있으며, 그들의 이웃 국가들은 무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 국제 통신사들이 서구 기준으로 타자들에 대한 기사를 쓸 때, 이 뉴스들은 지역의 이해관계로부터 완전히 탈맥락화(decontexualized)되거나 주류 국제 정치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

여기서, 나는 나를 interlocals.net 프로젝트로 이끈 몇가지 경험을 여러분들과 공유하고 싶다.

지난 10월, 가디언지 기자가 중국 남부의 (홍콩 근처) 타이시라 불리는 마을에서의 풀뿌리 민주주의 투쟁에 대한 기사를 썼다. 기사4)는 죽임을 당한 활동가의 죽은 모습을 상세히 기록했다 : 목이 돌아가고 눈알이 뽑힌 모습. 이 독점 기사는 24시간 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마을의 민주 투쟁은 몇 달간 계속되었다) 이틀동안, 이 활동가의 모습은 불의로 고생하는 다른 지역에 보여졌다. 기사는 우리가 영어권 세계에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데에 실패한 방법으로 분노를 일으켰다. 그리고 오직 영어 기사를 통해서만 세계의 나머지 사람들은 타이시 사건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중국에 대한 서구의 표현방식은 모두 중국의 위협, 탄압, 폭동, 환경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은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국제 뉴스의 주제는 국가의 상태이다. 우리는 그 나라 사람들의 진정한 삶을 알 수 없으며, 그들의 이해관계나 사회적 의제에 대한 언급도 없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각자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 없이는 어떠한 관계도 만들 수 없다.

개인 블로그인 EastSouthWestNorth5)는 중국 본토와 대만, 홍콩의 지역 뉴스와 블로거 의견을 영어로 번역하는 큰일을 하고 있다. 이 블로그는 국제 뉴스의 서구 저널리스트들에게 “중국 원주민”의 의견을 알려주는 대안적 뉴스 출처가 되었다. 대안적 뉴스 출처로서의 EastSouthWestNorth는 성공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블로거의 정치적 입장의 모호함으로 인해 - 아무리 그의 취향이 깨끗하다 할지라도 -  그렇게 대화적이지는 않다.

더 교훈적인 경험은 지난 5월 중국 본토에서 반일 시위가 일어났을 때 있었다. 두 나라간의 감정은 국수주의적 주류 미디어에 의해서 조정되었다. 그러나 블로그 영역에서, 블로거 안드레아 륭은 중국 블로거 사이의 논의들을 그의 블로그에 번역해서 실었다. 그리고 다른 일본인 블로거 조이 이토는 번역된 논의들을 읽고 자신의 위치를 설명하는 글을 올린 후 두 나라의 사람들 사이의 더 많은 대화를 주문했다. 비록 블로거 써클 사이에서의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그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국경을 초월한 공간이었다. 이런 종류의 대화는 주류 미디어에서는 불가능하다.



지역 상호 프로젝트(inter-locals project)


블로거들의 개별 독창성과는 별도로, 글로벌 보이스 온라인6)과 같은 하나로 조직된 주체들이 있다. 이 사이트는 처음에는 중국과 아시아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웹사이트였으며, 주로 정보 위주로 다루었다. 그리고 이 정보의 출처는 주류 국제 뉴스와는 달랐다. 그렇지만 세계의 블로그 영역의 (영어로 쓰여진) 모든 것을 다루는 사이트로 확대되어 비영어권의 블로그 영역에서 벌어지는 논의들을 정리해주는 많은 자원봉사자 풀들이 가세한 이후에는, 자신들이 제기하는 아이템들이 보통 아주 제한된 컨텍스트화를 거치기 때문에 그 사이트는 자신들의 가치을 잃게 되었다. 이 사이트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 “세계는 이야기 한다. 우리는 듣고 있는가?” 물론, 세계는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목소리를 단지 목소리들의 집합이 아니라 정보나 소통, 그리고 대화로 바꾸어야할 필요가 있다.

사회 운동 부문에서, 우리는 또한 갖가지의 정보교환 그룹들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아시아-사회-운동의 인터넷 그룹7)들이 있다. (조동원씨가 나에게 소개해주었다.) 이 사이트는 굉장히 정보가 많은 사이트이지만 무엇이 운동에 관련되어 있고 무엇이 관련되어 있지 않은가하는 정의를 내리는 운동 단체에 의해 운영된다. 이 사이트는 보다 한정된 논의를 하는 활동가들의 메시지 게시판이 되었다. (에코 체임버 효과, echo chamber effect)

우리는 무엇이 운동에 관계되며 / 관계되어야 하는가를 정의할 수 있는가? 왜 운동 미디어는 대중화되지 못하는가? 이것은 위선적인 질문이 아니다. 2년 전에, 우리가 대안적인 인터넷 미디어 프로젝트를 공식화할 때, 입장 차이는 우리를 갈라놓았으며(친숙한 이해의 분열) 우리는 두 가지 다른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 글로벌네트워크8)와 인미디어홍콩,9)

나는 한국의 TV 드라마 ‘대장금’으로 돌아가고 싶다. ‘대장금’은 홍콩에서 가장 인기있는 드라마의 하나이며 많은 의미있는 논의점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중국-일본의 지역적인 역사를 읽기 시작했다 : 어떤 이는 대장금과 비슷한 지역의 대중 드라마를 비교하고 정치에 대해 논의했다 : 자유주의와 궁중 음모 등. 이는 하루의 6분의 1의 시간을 TV앞에서 보내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의식적인 과정이다.

“뮌헨”이나 “브로크백 마운틴”, “JSA”같은 영화들은 어떠한가? 그리고 학교와 사회에서의 청소년 정책은 어떠한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를 구축해야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이 무엇에 관계하고 있는가부터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가? 그리고 사회변혁의제와의 연결고리는? 성실한 사람들의 미디어는 그 믿음의 메아리(echo chamber)가 되지 않는다.

뉴스, TV, 영화 등과 같은 주류미디어와 문화 산업은 인간 존재 상태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TV를 보지 말라는 요청을 할 수 없다. 사실, 이런 모든 미디어는 현재 상태를 위해 사람들의 관심과 욕망을 왜곡하면서 그것들을 모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반WTO 시위대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에 대한 해석은 시위대를 “폭도”라고 꾸며냄으로써 야기된 공신력 위기로부터 주류 뉴스 산업과 정부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 전장으로부터 벗어나 우리들의 말만 메아리치는 자신 만의 방으로 들어갈 것인가?

물론 나는 에코 체임버 미디어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강한 운동의 주관성을 건설하는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국제적인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수준에서도 기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역 상호 웹사이트를 디자인하는 데에 있어서, 나는 관심 이상, 미디어의 한계의 강조, 국경을 넘는 대화적인 편지들, 번역과 대안적 미디어와 블로거들 간의 실제적 내용 교환 네트워크 등을 가지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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