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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과 당건설 문제에 대하여

당과 당 건설 문제에 대하여  

-로렌골드너, 사노신과의 인터뷰 중에서

 

 

 

골드너 :  로자 룩셈부르크는 수많은 나라들을 연구했고 모든 경우에 탈중앙집권화는 항상 반동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자유주의적 반중앙집권주의자로 표현하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만드는 것이다. 1910년 경 독일 사회민주당 내의 당 논쟁에서 그녀가 당규율을 위반했다고 생각하는 특정 인물들에 대해 그녀는 매우 강력하게 제명을 요구했다.


한편, 나는 불행하게도 로자 룩셈부르크가 너무 일찍 죽어서 공산주의 당에 대한 자신의 독자적인 관점을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동지들이 알다시피, 그녀가 죽던 해에, 그녀는 제3인터내셔널의 설립에 매우 회의적이었다. 왜냐하면 서유럽에서 독립적인 공산당의 발전에 앞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설립되면 불가피하게 러시아 공산당이 운동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많은 정통 레닌주의자들과 뜨로쯔끼주의자들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사회민주당으로부터 독자적인 그녀 자신의 당을 건설하기 위해 좀 더 일찍 행동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또한 제1차 세계대전 전에 판네쿡(Pannekoek), 호르터(Gorter), 롤란드 홀스트(Roland Holst) 등 네덜란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과 매우 친했는데 그들은 1908년에 네덜란드 사회민주당을 탈당하면서 로자에게 물었다. “왜 동지는 탈당하지 않는가? 독일 사민당이 개량주의에 굴복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자 로자는 “가장 나쁜 사회민주주의 대중정당이 현실성 없는 외각의 분파보다 낫다”라고 대답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정통 뜨로쯔끼주의자들이나 레닌주의자들과 토론할 때 로자나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 혁명정당을 제때 만들지 못해서 독일 혁명이 실패했다고 그들이 말하면 내가 항상 그들에게 묻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왜 혁명정당이 없었는가? 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의 답은 무엇인가?” 그러면 그들은 머뭇거리기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레닌의 말을 들었어야 한다”라는 답만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문제에 있어 강조해야 할 것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1910년에 카우츠키와 결별했으며 카우츠키가 제2인터내셔널에 소속된 독일 사회민주당의 보수적인 인자일뿐이라는 것을 그녀가 깨달았다는 점이다. 사실상, 로자 룩셈부르크는 레닌보다 앞서서 독일 사회민주당 중앙이 이미 썩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14년에 레닌이 사회민주당이 전쟁 공채에 찬성표를 던졌다는 성명을 실은 뉴스를 독일로부터 받았을 때, 그는 그것이 실제로는 악선동이며, 모두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레닌이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보다 더 많은 환상을 가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로자 룩셈부르크와 당 좌익이 왜 더 일찍 분리되어 나오지 못했는가에 대한 질문은 레닌주의와 뜨로쯔끼주의의 당물신주의 (당절대주의)로 거슬러 올라가는 다소 비역사적인 질문이다. 내 생각으로는 정당이 만들어지는 조건에 대한 레닌주의와 뜨로쯔끼주의 관점은 일종의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있다는 관점이다.

 

사노 신: 내 생각에는 로자가 좌익과 함께 당에서 분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되었다.

 

골드너 : 그렇다면 동지는 언제 그녀가 분리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사노 신: 적어도 1차 세계대전 동안에 그렇게 했어야 했다.

 

골드너 :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했다. 좌익은 1915년, 1916년에 독립사민당을 설립했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불충분했다. 그래서 공산주의 분파가 성장해서 거기에서 나왔다. 내가 생각하기에, 역사는 노동자 정당들, 혁명정당들이, 볼쉐비키 당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성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상황에서 성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새로운 정당의 건설이 가능해지는 것은 바로 파열이 일어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과거에도 독일사회민주당에 반대파가 있었다. 1891년, 당의 청년조직이 분리해 나가면서 당이 완전히 부르주아적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작은 분파에 불과했으며 곧 사라지고 말았다. 내 견해로는 사회민주당과 분리하여 독립 정당이 된 좌익의 실패는 사실상, 독일 노동계급내에 존재했던 개량주의의 무게와 1918년 이후에 보여지는 것처럼 소수만이 혁명을 지지하고 있던 상황의 반영이라고 본다.


그러나 나는 1916년, 1917년, 1918년 이전엔 어느 때라도 소수파가 사실상 분파가 아니라 일관된 방식으로 분리해 나올 수 있었을 때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문제를 우리가 앞서서 토론한 문제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러시아와 함께 독일 사회민주당의 혁명적 성격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과대평가가 있었다고 보는데 그래서 내가 볼때는, 당에서 분리하여 독립적인 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어떠한 미성숙한 시도도 매우 커다란 부담감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다른 중요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제2 인터내셔널이나 사회민주당과 분리하기 위한 시도가 제1차 세계대전끝나기 전까지는 없었다는 것을 명심하자. 러시아 혁명이 승리하면서, 그리고 볼쉐비끼 모델이 일반적인 모델로 받아들여지면서, 이렇게 무에서 유가 만들어지는 것 같은 레닌주의적 정당에 대한 환상이 생겼다. 그리고 많은 나라에서 이러한 식의 당이 보다 일찍 만들어졌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는 당이 건설되는 방식에 대한 매우 비역사적인 관점을 만들어냈으며 오늘날까지 정통 뜨로쯔끼주의나 레닌주의로 계속 살아남아 있다. 예를 들어 현대 뜨로쯔끼주의 글들과는 다르게, 파리 꼬뮌에 관한 팸플릿에서, 맑스는 “당만 있었더라면…”하면서 글을 마치지는 않았다고 하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러한 전반적인 사고방식은 레닌과 레닌 이후의 레닌주의자들에 의해서 노동계급에 소개되었고 발전해왔던 것이다. 나는 맑스와 엥겔스에게는 계급이 당을 조직하는 것이지 당이 계급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해가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당은 계급을 조직한다. 그러나 그것은 계급의 산물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여러 나라들에서 당의 약화는 우선 계급의 약화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내 혁명정당에 대한 관점에 대해 보자면…그 답을 지금 이 주제와 함께 이야기해도 되겠는가?

 

사노 신 : 물론이다.

 

골드너 : 좋다. 나는 분명히, 내가 말한 모든 것에서 레닌의 관점보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관점에 더 동조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또한 말한 것처럼, 로자가 1919년에 살해당했기 때문에, 그녀의 저작에는 일관된 당이론이 없으며 단지 실천과 그녀의 볼쉐비즘에 대한 비판에서 볼 수 있는 의견 정도뿐이다. 오늘날 필요로 하는 정말로 근본적인 것은 혁명적인 조직이 사회민주주의와 볼쉐비즘의 실패를 정말로 깊이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나는 또한 독일-네덜란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당자체에 대한 거부의 태도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1920년대초에는 독일-네덜란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 역시 혁명정당을 주장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1930년에 평의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느정도 견고해지면서, 당을 주장하는 요소들은 완전 사라져버렸다. 그러므로 오늘날 혁명조직이 사회민주주의와 볼쉐비즘의 실패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바는 정치조직보다 계급의 경험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전위란 전투적 노동자들과 의식적 혁명가들로 구성된 선진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적인 혁명가가 혁명과정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들은 보통 노동자들이나 심지어 전투적인 노동자들조차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투쟁에 개입하는 것은 공산주의자의 임무가 노동계급의 단결을 촉진하는 것이라는 맑스의 생각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존 사회에 대한 강령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투쟁을 이용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전형적인 전위 그룹이 하듯이, 조직의 새로운 멤버를 모집하는 수단으로 투쟁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혁명가들이 투쟁을,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투쟁 자체를 넘어선, 현존사회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의 대안을 소개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위란 계급의 선진적 부분에 확고히 응축되어 있는 역사의 경험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하며 그러한 것이 어떤 구체적 조직으로 체화되거나 결정화될 필요는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혁명적 조직은 혁명 몇 달 전에 대중조직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혁명의 시기 사이에, 혁명적 조직이 어디에 있는지, 노동계급이 사회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매우 명확한 지도를 그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역사적 경험은, 특히 1968년 이래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자본주의의 틀 내로 자신을 안주시키는 조직은 강력한 투쟁의 시기가 아닐 때는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0~40년 동안 전위그룹들이 추구한 대안이란 역사적 경험을 자신들의 조직안에서 구체화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내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폭발적인 투쟁의 순간에 생겨나는 선진적인 계급의식을 자신의 조직을 건설함으로써 구체화시키고 있다고 상상하는 그들의 관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계급의 운동과 분리된 인위적인 조직이 되면서 그 다음의 급진화 단계에 있어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예로 들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 토론해왔던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 그룹들이다. 그들은 노동조합 조직이나 사회당 혹은 공산당 조직에 침투한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한 전략이 성공을 거둔 것은 그들이 헌신적이 투사였기 때문이지 그들의 강령을 사람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이러한 종류의 인위성이 혁명조직의 발전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위험요소라고 생각한다. 매우 조심스러운 예를 들자면, 나는 지난 30년 동안 어떤 혁명적 전위조직에도 소속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참여할 수 있는 투쟁들에 참여하며 최대한 나의 전망을 도입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나는 글을 써서 그것을 나의 웹사이트에 올리고 또한 그 글들은 세계의 여러 잡지들에 실려서 읽혀지는데 사람들은 동의 하기도 하고 동의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내조직으로 끌여들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 자체에 어떠한 상실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운동전반에서 항시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당조직에 대한 관점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당이 운동에 공헌해야 하는 것이지 우위적 입장에서 운동을 지도한다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서구에서 일어난 폭발적인 투쟁들중 단 하나도 전위정당에 의해 시작된 것은 없었으며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레닌은 1905년과 그 전시기에 다음과 같은 똑 같은 말을 했다. “그렇다. 대중파업의 물결이 일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시점에선 정치조직이 중요해진다.” 그러나 내가 잊어버리고 얘기못한 것인데 1905년 이후에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틀렸다. 분명히 <무엇을 할 것인가?> 에서 내가 말했던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러시아에서의 소비에뜨, 노동자평의회 그리고 이중권력의 구성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당의 개입없이 노동조합 의식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의 문제점을 바로 잡기위해 ‘무엇을 하면 안되는가?’ 라고 불릴 팸플릿을 쓰지는 않았다. 현대 볼쉐비키-레닌주의 전통에는 1917년 이전 볼쉐비키당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많은 신화가 있다. 하지만1905년 이후에 또는 1905년 패배 이후에 볼쉐비끼는 커다란 침체에 빠졌고, 아마도 1912년까지는 국내조직력이 매우 약화되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레닌이 1917년 4월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 그는 스딸린과 지노비에프, 그리고 모든 주요 지도자들이 케렌스키 정부를 지지하고 있음을 알게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하다. 동지들이 알다시피, 뛰어난 정치전략가였던 레닌은 4월 테제와 그 다음에… 그러니가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레닌과 그 다음엔 뜨로쯔끼가 그 해 안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날수 있는 가능성을 얘기하기 전까지 당기구 자체는 상황에 대해서 완전히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는 것인데 당 기구는 보수적이었지만 이러한 예외적인 상황에서 이들 특별하게 뛰어난 개인들이 존재하여 상황을 바꿀수 있었던 것이다. 귀환 직후 4월 테제를 발표했을 때, 레닌의 태도에 대해 볼쉐비키 당의 대부분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레닌이 말했던 것은 다음과 같았다. “노동계급이 하고 있는 것을 보라. 노동계급이 당보다 백배나 더 급진적이다.” 레닌은 노동자들이 케렌스키 정권에 대립해서 나아가고 있는 러시아 상황의 급진화를 인식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컨데, 나는 동지들이CLR 제임스의 저작들을 읽어보기를 적극 권한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글을 썼는데 그는 러시아 혁명 이후의 혁명가들의 역할은 노동계급의 행동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혁명정당에 대한 레닌의 이론을 완전히 부정했던 것이다.


나는 제임스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는데 나의 웹사이트에 보면 제임스와 그의 관점에 대한 논문 2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제임스의 생각에는 중요한 통찰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그에게 있어 레닌의 전략적 탁월함이란 그가 노동계급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주목하면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존재로서의 당이 아니라 노동계급이 하고 있는 일에 반응하는 존재로서 당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제임스의 중요성은 노동계급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당정책의 가이드가 되며, 당의 역할은 계급투쟁의 역동성을 잘 표현해 내는 것이라고 한 레닌의 발견이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현대 레닌주의자와 뜨로쯔끼주의자들과는 다르게 레닌은 그의 전성기에 있어 당물신주의자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1917년 이후 우리가 거론했던 상황속에서 레닌주의적 당조직의 가장 부정적인 면들을 발생시킨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여러 해가 지난 1930년대에, 빅토르 세르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딸린주의의 바이러스가 레닌주의 안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레닌주의안에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많은 다른 바이러스들도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말이다. 다른 질문이 없다면 이문제는 여기서 끝내자.

 

사노신 : 질문이 더 있지만 일단 정리하기로 하고 다음문제로넘어가자. 동지는 볼쉐비끼 당 모델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당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동지는 당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골드너 : 다시 한번 말하건데 러시아 혁명가들과 인텔리겐차들은 매우 독특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비록 레닌과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이 1870~80년대 발전한 인민주의 전통을 거부하긴 했지만, 인텔리겐차의 문화는 여전히 인민주의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이들이 농민이 압도적인 사회에 존재하는 아주 소수집단이라는 사실은 인텔리겐차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은 러시아에서는 합법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던 서구 유럽의 대중적 노동운동 경험으로부터 나왔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자적인 당 이론을 발전시킬 기회가 없었는데 그녀는 1차 대전이 발생한 이후까지 독일 사민당에 머물렀으며1909년 독일 사민당과 결별하라고 호소하는 독일 네덜란드 극좌파의 권유를 거절했기때문이다. 내가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동의하는 것은 중앙집권주의(centeralism)에 대한 거부가 결코 아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현명한 중앙 위원회의 가장 훌륭한 지도보다 대중운동의 실수들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1919년 1월 암살당했기 때문에 독일 공산당의 발전에 영향을 끼칠 기회가 없었는데 그녀 자신이 매우 확고한 중앙집권주의자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는 독일 사민당안에서 규율을 깨는 사람들을 제명시킬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었고 민족문제에 대한 글들을 보면 로자는 레닌보다 훨씬 더 중앙집권적이다. 그녀는 짜르 제국 내의 폴란드, 핀란드, 그루지야 및 기타 다른 나라들에게 독립을 주는 것에 대해 레닌을 비판했다.


문제는 중앙집권주의 자체가 아니라 어떤 식의 중앙집권주의냐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독일-네덜란드의 좌파 공산주의자들, 즉 극좌파들도 혁명정당을 지지했다. 내 생각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하게 강조해야 할 것은 로자와 독일-네덜란드 극좌파, 그리고 보르디가가 러시아 모델의 보편성을 의문시했다는 점이다. 나는 러시아 모델이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특별한 역사와 농민이 압도적으로 많은 사회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볼쉐비즘이 서유럽에 적용될 수 있는 모델이 아니라는 초기 서유럽 사람들의 비판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알다시피 로자는 창설당시 제3 인터내셔널 건설을 반대했다. 로자는 그 때 창건하면 제 3 인터내셔널을 러시아가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옳았다.

 

사노신 : 그렇다면 동지가 생각하시는 당의 개념은 뭔가?

 

골드너 : 당에 대한 내 자신의 개념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오늘날 혁명정당은 사회민주주의와 볼쉐비즘의 실패에 대해 진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농민문제를 이야기할 때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두 당의 모델은 농민인구가 대다수이고 중요한 농업문제를 가진 사회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사노신 :과거의 실패에 대한 진지한 이해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골드너 : 볼쉐비즘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 중에 하나는 혁명을 당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당이 혁명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계급이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계급은 당을 필요로 한다. 나는 사회민주주의와 볼쉐비끼의 경험으로부터 생겨난 오류는 당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형식주의적 이해였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존재하고 있는, 여전히 레닌주의적 당개념을 가지고 있는 그룹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무엇보다 자기 당의 성장을 위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더 넓은 사회적 투쟁에 있어 혁명가들의 적극적인 개입이란 사람들을 자기조직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귀착된다.


내 견해로는 전위란 한편으로는 의식적인 혁명분자이지만 동시에 노동계급의 가장 전투적인 계층이기도 하다. 이 말은 당이 체현하고 있다고 하는 역사적 의식이란 실제로는 전체로서의 계급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의 예를 들면, 지난 6개월간 이랜드 투쟁의 경험은 이랜드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다른 사람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많은 노동자들이 이랜드 투쟁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투쟁이 승리하든 패배하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이해와 노동자들의 연대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는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으로 형식화될 필요는 없다. 역사는 혁명적 상황 밖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틀 내에서 형성된 조직은 그 사회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내 관점에서는 혁명 정당이란 기본적으로 혁명 전 마지막 시기에 대중 정당이 되는 정당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볼쉐비끼-레닌주의적 정당들은 내가 얘기한 것처럼 사람들을 자기 조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투쟁에 개입하고 존재한다. 혁명적 조직과 당의 역할은 주요목적을 자신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계급투쟁의 발전에 대한 이해를 일반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혁명적 상황이 아닌 시기에 있어 볼쉐비끼 레닌주의 정당들이 가지고 있는 당의 형식화된(formal) 성격에 대한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많은 소규모 전위조직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혁명이라고 주장하며 돌아다닌다. 그들은 혁명을 자기들이 성장할 때 성장하는 무언가로 이해한다. 하지만 실제로 역사는 혁명조직이란, 실제로는 조직으로서 형식화된 어떤 것이 아니라 혁명 전 마지막 순간에 노동자의 선진적 층으로부터 형성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또한 전위 정당의 그런 형식성을 지켜본 사람들이 그 경험으로부터 당 자체를 반대하거나 당은 필요없다고 하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 의견은 그렇지 않다. 나는 계급의식이 있는 인자들이라면 이랜드 투쟁 같은 상황에 개입하면서, 맑스가 <공산당 선언> 에서 말한 대로 공산주의자의 임무는 언제나 노동자 계급을 단결시키는 것이라는 방식으로 투쟁을 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맑스가 <공산당 선언> 에서 “노동계급을 공산당으로 단결시켜라”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상기하자. 오늘날의 전형적인 볼쉐비끼-레닌주의자나 뜨로쯔끼주의자들의 글을 보면 어떤 투쟁에 대해 얘기할 때 항상 끝을 이렇게 맺는다. “노동자들에게 혁명적인 전위 정당만 있었더라면, 투쟁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텐데…” 여기에서 말하는 혁명적인 전위 정당은 물론 자신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1848년이나 파리꼬뮌에 대해서 쓴 맑스나 엥겔스의 저작들을 보면 그런 식의 의견은 찾아볼 수 없다. 맑스나 엥겔스는 왜 그렇게 썼고, 나중에 20세기에 와서 볼쉐비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왜 내가 방금 말한 식으로 썼는지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당이란 의식적인 혁명적 인자들로서 투쟁에 개입하고 노동자 계급을 단결시키기 위해 투쟁을 확대하려 노력하며 진정한 계급의식은 계급의 가장 전투적인 부위의 경험 속에서 구체화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혁명적 조직이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적인 로드맵이다.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계급투쟁은 어디에 와 있는지, 그리고 계급투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이 어디에 존재하는지에 대해 아주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로드맵말이다. 로드맵이 없거나 틀리면 당이 곧 혁명의 구현이라거나 혁명 자체라는 관점을 더욱 부풀릴 것이기 때문이다.

 

사노신 :대중적 혁명투쟁 정세하에서만 당이 자라난다고 하는 점에 일반적으로 동의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인 시기에도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대중 속에 기반을 만드는 노력들은 항상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예를 들어 얼마 전에 우리가 만난 ICC 동지들 같은 경우에 사실상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어났을 때만 거기에 개입한다는 사고 자체가 상당히 수동적으로 보였다.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골드너 : 투쟁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수동적이지 않은 건지 먼저 묻고 싶다.

 

사노신 : 예를 들어 ICC가 얘기했던 것은 프랑스 CPE 투쟁처럼 아주 큰 투쟁들이 발생할 때그런 데에 확성기를 들고 가서 선전선동하고 신문 팔고 한다는데그것이 활동의 전부인 것 같다. 사실상 일상적으로 공장이라든가 작업장에서 일어나는 투쟁들도 있기 때문에 그런 투쟁들에 개입하는 것들이 필요하지 않은가. CPE같은 대규모의 투쟁이란 몇 년에 한 번씩만 일어나는 건데 그런 투쟁에만 개입한다는 것은 너무 수동적인 것 같다.

 

골드너 : 일단 ICC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면 ICC는 좋은 로드맵을 갖고 있지 않은 조직의 아주 적절한 예이다. 1980년대에 ICC는 혁명적인 계급투쟁의 주기가 오고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들은 1980년대 중반이 격렬한 계급투쟁의 시기라고, 적어도 서구 유럽과 미국에서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노동자급이 엄청난 패배를 겪은 시기였다. 이전에 ICC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얘기해주기를, 프랑스나 벨기에의 어느 도시에 신문을 잔뜩 들고 파견되어 현장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다시 한번 간단한 반대의 경우를 얘기하자면, 나는 약 30년 동안 어떤 혁명적인 조직에도 속해있지 않았다. 하지만 가능한 한 투쟁에 참여하고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글을 쓰며, 또한 동지들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하면서 한 개인으로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언가가 꼭 조직으로 형식화될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은 이미 운동 안에 있다.


물론 진지한 로드맵을 가지고 있는 조직에 가입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노동자들의 일상생활과 투쟁에 개입할 가능성이 있는 그러한 조직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참여는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큰 투쟁에 비해서 일상적인 상황은 아주 제한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는 가운데 이뤄져야한다. 비유를 하자면 오늘날 존재하는 많은 조직들은 마치 큰 파도가 밀려온 뒤 해변에 남은 나뭇가지들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많은 ‘형식화된 조직’들이 그 나뭇가지들이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이 가장 좋은 예라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80년 전에는 중요하고 대중적인 운동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쓰나미가 지나가고 난 후 떠밀려온 나뭇가지들과 같다. 마찬가지로 미래를 바라본다면 일상의 시기는 다음 쓰나미가 덮치기 전의 해변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생각들이 내가 로드맵, 그리고 상황에 맞게 조율해내는 능력을 말할 때 의미하는 것들이다. 최근 한국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황은 조용한 일상에서 갑자기 거대한 운동으로 변하기도 한다.

 

사노신 : 잘못된 로드맵을 갖고 있으면 다 헛탕이라는 건가.

 

골드너 : 일단은 그런 로드맵은 노동자계급과 실질적인 연관이 없는 투쟁에 자기 조직원들을 소모시킨다. 동시에 큰 투쟁이 있는 곳에 개입하는 것은 내가 봤을 때…그곳에서는 누구나 발언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잊어버리지 말아야할 것은 1918년 11월 독일 혁명이 일어났을 때 백만 명이 베를린 시내에 모였는데 광장의 한쪽 끝에서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독일 소비에트 연방을 만들자고 외치고 있었고 다른 쪽 끝에서 사회 민주주의자들이 독일 공화국의 설립을 주장하고 있었으며 광장 양쪽에서 모두에서 관중들은 열렬히 환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분위기는 너무 열광적이어서 일반 노동자들은 한쪽 끝에 있는 사회 민주주의자들과 다른 쪽 끝에 있는 공산주의자들 간의 차이를 구별하고 있지 않았다. CPE투쟁 당시 파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 집회에서 사람들이 ICC에게 갖는 관심은 다른 뜨로쯔끼주의 그룹에서 온 훌륭한 발언자에게 갖는 관심과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것이 나의 느낌이다.


LO같은 그룹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면 그들은 40여년이상이나 소식지를 발간하는 공장 위원회를 조직하에 두어왔으며 최근에는 지역 위원회를 시도하고 있고 여름에는 이동 버스를 타고 이지역 저지역들을 돌며 선전활동을 하는등 여러가지를 시도하고 있다. 동지들은 어떤 활동들인지 감을 잡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활동은 물론 유용하겠지만 항상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자본주의 하에서 일상이 주는 중압감 때문에 그런 활동의 중요성이 과대평가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사노신 : 동지의 의견 중에서 ‘당의 역할이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키는 것이다’ 라는 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좀 이해가 안되는 게 당이 그렇다면 혁명적인 시기에만 필요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일상적인 시기에도 당이 필요하다는 것인지. 만약 일상적인 시기에도 필요하다면 그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형식인건지. 얼핏 들으면 혁명적 시기에만 당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들리는 면이 있다.

 

골드너 : 어쩌면 조직이 형성되는 초기에 ‘당’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소규모 그룹들은 좋은 로드맵을 가지고 있으면서 리그룹먼트(regroupment)나 프리파티포메이션(pre-party formation), 혹은 그와 비슷한 것으로 스스로를 칭하고 있다. 그들은 최근 몇 십 년, 그리고 현 시기 자신들의 역할은 때로는 개인적차원에서, 때로는 작은 그룹차원에서 토론을 하고 글을 쓰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는 일, 말하자면 자기의 조직을 설립하는 것보다 토론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가능한 곳에는 투쟁에 개입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사노신 : 한국 사회주의 그룹들의 전형적인 활동중에는 공장에 직접적으로 사람을 투입해서 현장에서 투쟁을 하고 선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이 포함되어있다. 그런데 ICC는 이런 활동에 대해서 대리주의(substitutionism)라고 얘기하면서 이해하지못하는 것 같은데 동지는 어떻게 생각는가.

 

골드너 : ICC가 그렇게 말했다니 반갑다. 왜냐하면 실제로 많은 경우에 그러한 대리주의로 되기 때문이다. 내가 잘 알고 있는 미국과 유럽에서의 경험이나 미흡하게나마 조금 알고 있는1980년대 남한의 “학출” 활동가들의 운동을 살펴보면 중산층 사람들이 공장에 들어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무척 중요한 일이지만 노동계급의 발달에 정말 기여할 가능성은 제한적이고 종종 그 성과가 없다. 내 생각에 공장 노동자들을 포함한 노동계급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혁명적 조직은, 말했다시피 자신의 진정한 위치, 역할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고 본다 . 그리고 이 문제는 사람들을 공장으로 보내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사노신 : 또 다른 질문은 직업적 혁명가에 대한 것인데 예를 들어 ICC 동지들은 자신들 모두가 노동자이므로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지않는다고 한다. 동지는 직업적 혁명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하는가?

 

골드너 : 전반적으로 건강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레닌과 그가 쓴 <무엇을 할 것인가?> 의 잔재 중 하나가 직업적 혁명가를 혁명을 체화하고 있는 혁명적 의식의 담지자라고 보는 것이다. ICC가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노신 : 그런데 직업적 혁명가라는 개념과 동지가 언급한 의식적 분자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골드너 : 의식적 분자란 우리 같은 사람들, 즉 혁명적인 진전을 위한 준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 가운데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적절한 로드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의식적 분자들은 개인으로든 소규모 그룹으로든 혁명적 상황에서 모아질 재편성(regroupment)의 과정에 관계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가장 잘 싸우는 전투적인 노동자들 역시 포함한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미국에 있는 헌신적인 투사들을 몇 명 아는데 그들은 볼쉐비끼-레닌주의의 성향의 아주 진지한 사람들이며, 언젠가 혁명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당과 계급의 관계에 대한 질문, 예를 들어 “레닌이 없었다면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까?”와 같은 질문을 그들에게 던지는 것은 흥미롭다. 왜냐하면 아까 말했다시피 그들의 글은 항상 상황이 나아지려면 혁명 정당이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당이 없는 것인지, 왜 역사는 당신들이 주장하는 식의 당이 필요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해왔는지 내가 질문을 하면 그들은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레닌이 없었다면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까?” 물어보면 그들은 “당연히 안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그건 좀 비참한 것 아닌가. 그 모든 게 한 사람에게 달려있다니 이 거대한 사회적 진보의 약점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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